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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4화 (4/195)

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4화

1. 동방의 향로(3)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는 청자 향로, 뚜껑에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역동적이고 표정이 익살맞았다. 제이든은 반가운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향로를 향한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은은한 청색 빛무리가 향로를 감싸며 피어올랐다가 차차 금빛으로 변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제이든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상자를 열고 향로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바람에 혹시나 했는데, 그가 그리워하는 곳에서 온 물건은 맞지만 그가 찾고 있는 힘을 가진 바로 그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애정을 담아 향로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넌 어떤 경로를 거쳐 여기까지 왔니? 내가 아직 물건의 내력을 볼 수 있는 단계가 되지 못한 게 아쉽구나. 1급 감정사가 되면 물건의 과거를 볼 수도 있다던데.’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고른 제이든이 이노시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봤습니다. 귀한 물건이네요. 증조할아버지께서 구하신 향로라고 들었는데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물건입니다. 청자사자유개향로 진품인데 아마 이만한 물건은 카이엔 대륙 전체를 뒤져도 몇 점 안 될 겁니다.”

제이든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이 향로, 보통은 그냥 동방 대륙에서 건너온 8세기 렌 왕조의 유물이라고 보겠습니다만 사실은 더 먼 곳에서 온 걸 아시는지요?”

“예.”

이노시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감정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알아보신 분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함부로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한번 보겠습니다.”

이노시카에게서 받아든 감정서를 펼쳐 본 제이든은 깜짝 놀라 휘파람을 불었다.

“세시온 다미에르가 감정했습니까?”

“예,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인연이 있어서 마스터 다미에르의 감정을 받을 기회가 있었어요.”

이노시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세시온 다미에르는 이전 세대에 전 대륙은 물론 바다 건너 동방 대륙에까지 이름을 알린 전설적인 감정사였다.

감정사 자격증은 원래 5급부터 1급까지 있었는데 세시온 다미에르의 등장으로 0급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0급은 아직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90세가 넘도록 현역으로 일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총기가 흐려지지 않았고 아무리 뛰어난 복제품도, 사람을 속이는 마법도 다미에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감정 관련 마법에 한해서는 마탑의 1급 마법사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했기에, 다미에르라면 전설 속의 마계나 이세계의 물건일지라도 존재하기만 한다면 감정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지만 아무도 그의 높은 기준을 맞추지 못했고 결국 공식 제자를 한 명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버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잘 봤습니다. 마스터 다미에르의 감정이 있는데 제가 감히 뭘 덧붙일 수 없으니 이 향로는 감정서를 쓰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이계의 물건을 감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 제이든이 감탄하며 상자의 뚜껑을 덮자 그렉의 발치에 조용히 엎드려 있던 아실리가 살그머니 일어나 제이든에게 다가오더니 다리에 몸을 부비면서 뭔가 원하는 듯 나지막이 울었다.

“그래 다 끝났어. 금방 갈 거야.”

손에 감정서를 든 채 제이든이 가볍게 고양이의 머리를 건드렸고 아실리는 제이든의 손에 있는 감정서에 살그머니 뺨을 가져다 대면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제이든은 미안한 듯 다른 손으로 아실리를 쓰다듬으며 감정서를 다시 상자 위에 올려서 이노시카에게 내밀었다.

“귀한 물건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해요. 그리고 이거…….”

이노시카는 자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제이든에게 내밀었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제법 나갔다.

“감정료는 향로를 보여주시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도 그럴 수가 있나요.”

이노시카는 생글 웃었다.

“원래 받으셔야 할 정도의 감정료는 아니지만 빈손으로 가시게 할 수야 없죠. 저희 가게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혹시 다음에도 의뢰할 일이 있게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미소에 제이든도 웃으면서 주머니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번창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제이든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저도 무리하게 부탁을 드려서 향로를 본 주제에 말씀드리기는 쑥스럽지만, 저 향로는 되도록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노시카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배웅하러 문간으로 나오던 그녀가 말했다.

“마스터 다미에르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게 아쉽네요. 제이든 님이라면 다미에르 님의 제자 시험을 통과하셨을 것도 같은데 말이죠. 어느 문하에서 수학하셨는지도 밝히지 않으시는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 압도적인 실력을 지니고 계시니…….”

잠깐 말을 멈추었던 그녀가 볼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제, 제가 보기에는 제이든 님도 마스터 다미에르 못지않은 천재이신 것 같아요. 마스터 다미에르는 서른 중반에 2급 감정사가 되셨다고 들었는데 제이든 님은 아직 서른도 안 되셨잖아요?”

“포르릉!”

발밑에서 갑자기 콧방귀 뀌는 소리가 들려와서 제이든과 이노시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실리가 조그맣게 코웃음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새침하게 외로 꼬았다.

“아, 아뇨,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감히 마스터 다미에르께 비교할 수가 있나요. 저야 운이 좋아서 나름대로 좋은 스승을 만났고……. 마스터 다미에르야말로 아직 체계가 없던 환경에 감정사의 길을 확실히 닦아놓아 주신 불세출의 천재이시죠. 그분 덕분에 감정사들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니까요. 그 시절이었다면 저는 3급도 어려웠을 겁니다.”

“굉장히 존경하시나 봐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쏟아내는 제이든을 보며 이노시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우리 같은 골동품상이나 감정사치고 마스터 다미에르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요.”

“스승……님이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하고 또 하고 하셨거든요.”

제이든이 가볍게 몸서리를 치자 이노시카가 웃었다.

“스승님이 쉬운 분은 아니셨나 봐요?”

“물론이죠, 쉽지 않았고말고요. 수련이 혹독하지 않았으면 제가 이 나이에 이만한 실력을 갖추게 됐겠습니까?”

“냐아옹!”

아실리가 그를 나무라는 듯 울면서 초록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고 제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수련으로 얻은 실력 외에도 특별한 능력이 더 있긴 하지만 그건 대외비니까.

“날이 저물었는데,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세요?”

“아, 숙소에 가서 먹을 겁니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으려고 여관을 잡아놨어요.”

“여관이라면 루이네 여관이겠지? 거기 음식이 좋아. 루이가 있으니 고양이를 꺼리지도 않을 테고.”

그렉이 불쑥 끼어들며 말을 보탰다.

“예 맞습니다. 고양이를 기르는 여관이라선지 우리 아실리도 반갑게 맞아주더군요.”

이노시카와 인사를 나누고, 아실리와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그렉과도 작별하고 톰슨 골동품상을 나왔을 때는 비가 그쳐 있었다.

“땅이 젖었으니까 안아줄까?”

“냐옹.”

아실리가 제이든의 품으로 사뿐 뛰어올라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숙소를 향해 걷는 동안 제이든과 아실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잠시 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

-…….

그만 웃음이 나온 제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괜찮아. 이번엔 기대를 좀 많이 했는데, 역시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나 봐.”

고양이는 솜뭉치 같은 앞발을 들어서 제이든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까 제이든 울 거 같았어.

“울긴, 좀 감동해서 그런 거야. 지난 2년 동안 본 물건들 중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거든.”

-제이든 고향의 물건이 맞아?

“확실해. 그렇지만 날 집에 보내 줄 매개체는 아니었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찾는 거, 어쩌면 카이엔 대륙엔 없을지도 몰라. 동방 대륙 쪽에 한번 가볼 수는 없을까?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폐쇄적이라서 일반인이 들어가기 쉽지 않대. 뱃길도 험하고 돈도 많이 들고, 여행 허가받는 것도 아주아주 어렵대.

“넌 고양이가 그런 말은 어디서 듣니?”

-다 듣는 데가 있어.

제이든이 시무룩해지자 아실리는 힘내라는 듯 야옹거렸다.

-그래도 아주 유명한 사람은 동방 대륙에서 큰 배를 보내서 모셔가기도 한대. 그러니까 쪼끔 더 유명해지게 일 열심히 하장.

잠시 더 걷던 제이든은 조심스럽게 아실리에게 물었다.

“넌 괜찮아?”

-나? 나야 괜찮지, 오랜만에 익숙한 냄새를 맡아서 좋았어.

아실리는 명랑하게 대답하면서 한쪽 앞발을 들어 눈을 비비더니 제이든의 어깨에 앞다리를 걸치고 동그란 머리를 제이든의 턱 아래에 파묻었다.

-배고파. 오늘은 뭐 맛있는 거 먹자.

“아까 톰슨 씨가 주는 과자 많이 먹더구만.”

-그건 밥 아니고 과자잖아. 그리고 맛도 그냥 평범했어. 그 아저씨 마음씨가 예뻐서 열심히 먹어준 거양.

“좋은 사람들이었어. 잘 되면 좋겠다.”

-주인 아가씨 나이는 어리지만 물건 보는 안목도 괜찮은 것 같고 열심히 하니까 잘 되겠지. 우리가 다녀갔으니 홍보도 될 테고. 사람 보는 안목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지만.

“사람 보는 게 왜?”

아실리는 새초롬하게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보고 세시온 못지않은 천재라고 하다니, 사람 보는 눈은 아직 멀었당.

아무렴요. 그러시겠죠.

제이든은 아실리 몰래 입을 삐죽이고는 여관 쪽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가을비가 온 뒤라 저녁 바람이 축축하고 쌀쌀한 느낌이었다. 그는 고양이의 따뜻하고 말랑한 몸을 더 바싹 끌어안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날씨엔 막걸리랑 파전이 딱인데!”

-마껄리? 마껄리가 뭐야?

“그런 게 있어.”

#작가의 말

본문 중의 향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60호 청자사자유개향로를 생각하며 썼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사진은 올리지 못하지만 검색하시면 사진을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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