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감정사를 키운다 2화
1. 동방의 향로(1)
“삼촌, 저 위쪽 먼지 좀 털어주세요. 빨리요.”
그렉 톰슨은 먼지떨이를 들고 폴짝폴짝 뛰는 조카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왜 이리 야단법석이냐? 무슨 귀족 나리가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감정사가 골동품 감정하러 오는 거잖아.”
“고작 감정사라니, 고작 감정사라니요! 무려 제이든 로스가 온다고요. 제이든 로스!”
이노시카 톰슨은 흥분해서 볼이 발개진 얼굴을 삼촌 앞에 들이밀었다.
“마스터 다미에르 이후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감정사라고요. 3급에서 2급 감정사가 되는 데 일 년밖에 안 걸렸대요. 공개 장소에 나오는 일도 거의 없고 내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다는 신비의 감정사! 작년에 로드포드 백작가에서 왕관의 복제품을 가려낸 이후 감정료도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지금은 한다하는 귀족들도 제이든 로스한테 의뢰 한번 넣어보려고 줄을 선다는데요.”
“그래 알았으니 숨이나 좀 쉬고 말해라.”
그렉은 카운터 위의 물병에서 물을 한 잔 따라서 조카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감정사가 어쩌다 이렇게 작은 골동품상에 찾아온다는 거냐?”
“그러게요…….”
이노시카는 다소 풀죽은 얼굴이 되면서 흩어진 금발을 뒤로 넘겼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가짜인 줄 알았다니까요. 편지의 인장이 진짜인지 보려고 델리움 시 감정소까지 나가서 인장 확인을 해봤는데 진짜랬어요.”
“그 뭐냐, 동방의 향로를 보고 싶다고 했다고?”
“네.”
“혹시 아버지가 일반에 공개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놓은 그거?”
“맞아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유품이고 황궁 전시회에 출품할 때 외에는 공개하지 않는 거니까 내년 전시회를 기다려 달라고 서신을 보냈더니 향로를 보여주면 제가 원하는 물건 세 가지를 무료로 감정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
그렉의 마뜩잖은 낯빛을 알아챘는지 이노시카는 변명하듯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도 있고 우리처럼 작은 가게에서 다룰 만한 상품도 아니어서 여태까진 개인에게 공개한 적이 없지만…….”
“…….”
“그치만 제이든 로스가 우리 물건 감정을 해준다잖아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우리로선 불러 볼 수도 없는 고급 감정사라고요.”
이노시카는 다시 기운을 차린 듯 벌떡 일어서서 작은 주먹을 공중에 흔들었다.
“무료 감정은 둘째치고, 제이든 로스가 다녀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게 홍보가 되는데요! 톰슨 골동품상이 다시 일어설 계기가 될지도 몰라요!”
“…….”
“삼촌, 저 안에 들어가서 감정받을 물건도 챙기고 일 좀 볼 테니까 가게 좀 봐 주세요. 로스 감정사는 여덟 시쯤 온다고 했으니 아직 세 시간쯤 남았어요. 혹시 손님 오면 저 부르시고요.”
그렉은 가게 안쪽으로 다람쥐처럼 사라지는 조카의 뒷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노시카는 아직 스물두 살밖에 안 되었는데……. 소녀티도 채 벗지 못한 조카가 가업을 맡아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골동품상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가업이고 규모는 작아도 내실이 탄탄한 가게로 평판이 좋았는데, 자신은 그쪽으로 관심도 재주도 없어서 일찌감치 밖으로 나돌았고 형이 가업을 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외동딸 이노시카가 골동품 일에 재능이 있다고 기뻐하던 형은 작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용병단에 섞여 북부 산악 지대에 가 있던 그렉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장례를 치른 지도 두 달이 넘어 있었다.
조카는 씩씩하게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업종 특성상 어린 처녀가 물려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신뢰도가 흔들리면서 운영이 어려워지는 중이었다.
경험 있는 사람에게 가게를 넘기라는 압박부터 가격을 후려치거나 감정을 불신하고 재감정을 요구하고…….
심지어 이노시카와 결혼해서 가게를 맡겠다고 들이대는 어중이떠중이까지 온갖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는 끈기 있게 버텨냈다.
아마 그래서겠지, 황궁과 마탑 주최의 전시회 외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대로 깊이 보관해온 향로를 개인에게 보여줄 생각을 한 것도.
어떻게든 가게를 일으켜 보려는 이노시카의 노력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 그렉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두툼한 가슴을 문질렀다.
나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골동품상 아들 주제에 골동품이라곤 수박 겉 핥기 정도밖에 모르니……. 그래도 이노시카는 삼촌이 돌아와서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다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하긴, 내가 돌아와서 가게를 탐내고 이노시카 주변을 맴돌던 놈들 몇 명을 혼쭐내 놓은 후로는 그런 얼간이들이 싹 사라지긴 했지. 그렉은 떡 벌어진 어깨를 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뾰로로롱
종 대신 출입구에 달아놓은 놋쇠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묵직한 나무 문이 열렸다.
두건이 달린 짧은 망토를 입고 허리춤에 전대를 찬 호리호리한 남자 하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서 몸을 한 번 털었다. 밖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손님이신가?”
상념에 빠져 있던 그렉이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걸자 매트에 부츠 바닥을 닦으며 가게를 둘러보던 남자가 그렉 쪽을 향했다.
“아뇨, 오늘 찾아뵙기로 한 제이든 로스입니다. 좀 일찍 도착했네요.”
“아하, 감정사 양반이었군. 난 그렉 톰슨이요.”
그렉이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자 남자가 두건을 벗으며 마주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그렉이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무 어린데?
“당신이 제이든 로스라고?”
“예.”
“진짜야? 너무 어려 보이는데?”
청년이 언짢은 듯이 미간을 찌푸리자 그렉은 무심코 입 밖으로 나와 버린 진심에 조금 머쓱했지만 아무래도 미덥지 않아서 청년을 다시 뜯어보았다.
이십 년 가까이 골동품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다 보니 업계 소식에 어둡기는 하지만 명색이 골동품집 아들이었다. 2급 감정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렉도 안다.
애당초 이 대륙에서 감정사 자격시험은 어렵기도 하고 각종 조건이 무척 섬세하고 까다로워서 이삼 년 공부해서 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수습 취급을 받는 5급 감정사를 벗어나 일반 감정사로 인정받는 4급을 지나 3급이 되는 데만도 보통 칠팔 년은 걸린다고 했고 감정에 마법을 쓸 수 있는 2급이 되려면 재능과 경험이 함께 필요해서 평생 2급에 오르지 못하는 감정사도 적지 않았다.
그렉이 이름을 들어 본 2급 감정사 중 나이 마흔이 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마스터 칭호를 얻은 세시온 다미에르 단 한 명만이 서른 중반에 2급이 되었고 마흔이 되기 전에 1급을 달았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밤알처럼 윤이 나는 더벅머리에 초롱초롱한 검은 눈, 주근깨가 살짝 흩어진 콧등과 매끈한 얼굴이 잘 봐줘도 스물 두엇쯤이나 되었을까 싶게 앳된 얼굴이었다.
약속 시간이 세 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 온 것도 미심쩍었다.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는 청년의 얼굴을 보며 그렉은 심중에 짚이는 게 있었다. 제이든 로스가 온다고 이노시카가 아침부터 가게를 청소하고 다과를 사 오는 등 소란을 피우더니만 벌레가 꼬였나 보네.
그렉은 피식 웃으며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사기꾼들이 더러 돌아다닌다더니…… 꼬마야, 너도 감정사 흉내를 내면서 돈푼이라도 챙겨 보려는 모양인데 그러다 큰코다친다. 로스가 오늘 우리 가게 온다고 어디서 주워듣고 미리 왔나 본데, 날도 찬데 얼른 집에 가서 우유나 따끈하게 데워 마셔라.”
“아휴!”
청년이 뭔가 꺼내려는 듯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손을 빼서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렉의 턱 밑에 얼굴을 바짝 들이댈 듯 다가섰다.
“아저씨!”
“?”
“아저씨 여기 주인 아니죠?”
그렉은 자칭 제이든 로스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자 어안이 벙벙해서 한 발짝 물러섰다.
워낙 덩치가 크고 인상이 우락부락하다 보니 어지간한 장정도 그를 보면 겁을 먹는 편인데, 호리호리하고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청년은 겁을 먹기는커녕 짜증스럽게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 가게 꽤 괜찮은데 직원을 잘못 뒀네.”
“뭐? 이 꼬맹이가…….”
청년은 카운터에 놓여 있던 구리 종을 살짝 건드렸다.
“아저씨, 이거 ‘테렌스의 종’이지? 백이십 년 전의 명인 테렌스 유레인트가 만든 종인데 깨지지 않고 녹지 않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지. 진품이 제국에 열두 개나 있으니 아주 희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야. 정교한 복제품이 꽤 많이 돌아다니는 편인데 내구성 마법은 복제할 수 있어도 종소리에 담겨 있는 파사(破邪)의 힘은 복제할 수 없다는데 구별이 쉽지 않지. 여기 있는 건 진품이네.”
청년은 손을 들더니 그렉의 뒤쪽 벽을 가리켰다.
“저 벽에 걸린 방패는 수수해 보이지만 옛 대륙전쟁 때 화염의 기사단이 썼던 거네. 구하기 쉬운 무구(武具)가 아니고 알아보기는 더 어려운 거지.”
청년은 가게 내부를 다시 한번 둘러보더니 그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게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물건 정리해 놓은 걸로 보면 주인장 안목이 상당한 거 같은데…… 인상으로 보나 말투로 보나 아저씨는 절대 주인은 아닌 거 같고 이 정도 가게에서 일할 깜냥이 되려나 모르겠네?”
그렉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면서 팔에 힘을 주었는데 청년이 가볍게 그 팔을 두드리며 샐쭉 웃었다.
“이야, 아저씨 근육은 진품이네, 포션 같은 거로 부풀린 게 아니고 직접 단련하셨네. 그것도 한두 해 쇠 좀 들었다 하는 몸이 아닌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