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전화.”
"스피커폰으로 받아봐."
한쪽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이 울려 윤슬이 힐공 발신자를 확인했다. 엄마 의 말에 통화 버른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돌리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 다.
「당신 어디 나갔어? 집에 없네?」
"이 시간에 집에 왜 왔어요?”
「외근 나왔다가 잠깐 들렀지. 어디야?」
"윤슬이 학교. 애 태우고 지금 집에 가는 길이에요."
「학교? 학교는 왜?」
"당신 0품이 싸우다 코피가 났답니다.”
"싸운 거 아냐. 맞은 거야. 짝꿍이 나 때려서 코피 났어, 아빠."
부모님의 대화에 끼어들어 윤슬이 불통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코피를 내야지, 코피가 났어? 어느 집 자식이 창피하게 맞고 다녀?」
"코피가 나서 다행이지. 괜히 남의 집 귀한 따님 코에서 코피 냈어봐. 맞 은 것보다 더 큰일이야."
「여자 짝꿍이야? 여자애한테 맞아서 코피 난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 아버지가 헛웃음울 홀리며 을었다. 본인이 들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기사도 정신 발휘했다고 생각해요. 맞아도 남자애가 맞는 게 낫지. 여자 애가 맞았다고 하면 학교 뒤집어진다니까. 오늘은 당당하게 다녀오기라도 했지, 때렸으면 두 손이 달도록 빌어야 했을걸.”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한테 맞아서 코피가 난 건 너무했지.」
"애한테 괜한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 아들, 오늘 피도 봤으니 저녁엔 고기 먹여야겠어.」
"치킨, 치킨!"
코피가 났던 것도 잊고 윤슬이 신이 나서 엉명이를 들썩였다. 양념치킨. 하고 소리를 지르듯 답하자 엄마가 손을 뻗어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정계도 좋다. 고기 자주 먹으면 혈관 막혀.”
「그럼 회나 한 접시 떠갈까?」
“그건 당신이 좋아하는 거잖아.”
핀잔울 하면서도 엄0유는 웃고 있었다. 삼겹살을 먹자. 치킨을 먹자, 회 를 먹자. 한참이나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가 회사에 들어가봐야겠다 며 전화를 끊었다. 일찍 퇴근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울 하며 윤슬이 못노 래를 불렀다.
0코는 안 아파?"
"옹. 이 거 빼도 돼?" "피 안 나?"
"안 나."
코에 뭉쳐 넣었던 약송은 스몄던 피가 굳어 딱딱했다. 약송울 빼자 봉. 하고 콧구멍이 뚫리며 왠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병원 가봐야 하나."
"안 가도 돼 . 안 아파."
"병원 가기 싫어서 안 아프다고 하는 거 아냐? 너 코뼈 부러진 거면 큰일 나."
"정말 안 아프다니까.” 창문을 내리고 피 묻은 송을 밖으로 던지며 윤슬이 고개물 내저었다.
"창문 밖으로쓰레기 막 버리면 안돼. 경찰아저씨한테 혼나.”
"이미 버렸어."
아이고, 하고 한숨울 내쉬며 엄마가 혀를 찼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틈을 타서 엄마가 윤슬의 얼굴을 잡아 코를 살폈다. 술찍 코를 누르며 안 아파? 하고 확인하듯 묻는 말에 윤슬이 고개를 작게 혼돌었다.
"그렇게 누르면 다 아파「
"뼈가 아프냐고."
"뼈가 아픈 게 어떻게 아픈 건데?"
윤슬의 을음에 엄0ㅏ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뼈가 아픈 건 그냥 아 픈 거랑 뭐가 다론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껑껑거 리는 윤슬의 시야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저 앞에서부터 쭉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트럭. 저거 좀 이상한데. 라는 생 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급하게 고개를 돌린 엄마가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그냥 가만히 있기만했는데. 졸음운전을 한 것도 아니고, 신호위 반을 한 것도 아니고, 끼어들기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신호에 걸려 장
시 멈춘 것뿐이었는데도, 사고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쿵, 하고 자동차가 충격으로 떨렸다. 몸이 크게 들썩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가 고막울 때렸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어지러 웠고, 팔다리가 따로 노는 것처럼 제멋대로 뒤틀려 움직였다. 핑 하고 터 진 에어백과 가숨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가 요동치는 몸을 꽉 조여 숨울 쉴 수가 없었다.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시야가 빙글빙글 돌며 하닿게 변 했다.
"윤슬아!”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윤슬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윤슬아. 윤슬아. 괜찮아?”
"어. 엄……마?"
"괜찮아? 엄마 봐. 정신 차리고 엄마 봐."
"엄마. 엄마."
윤슬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왈칵 겁이 난 탓이었다. 뚝뚝 눈물을 떨구며 우는 윤슬의 몸을 엄마 가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다친 곳 없어? 어디 아파?"
"아파. 다 아파.”
"벨트 푸르고 내려. 어서 !”
안전벨트의 버른을 누르는 엄마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턱을 타 고 흐르는 핏방울이 엄마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어, 엄마. 피……."
"괜찮아. 괜찮으니까 차 문 열고 어서 내려. 이러고 있으면 위험하니까 어서.”
울음울 꾹 참고 있는 것처럼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공거리며 차 문 을 열고 내려서 엄아를 바라보았다. 벨트를 플고 차 문을 열려고 애를 쓰 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돌어왔다.
"엄마.”
"왜, 왜 안 열려. 왜."
차 문을 두드리며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차의 보닛이 우그러질 정도로 거세게 부딪쳐 멈춰선 트럭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금방이라도 자동차를 덮 칠 것처 럼 위태롭고 거대해 보여 윤슬이 재차 엄 아를 불렀다.
"기다려. 엄마 곧 내리니까. 윤슬아. 조금만 더 떨어져 있어. 위험하니까 뒤로 가.”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방향을 바꿔 보조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운이 열리지 않아 반대편으로 넘어오려고 시도를 하던 엄마가 낭패스러운 표정울 지었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본 엄마가금방이라도울것처럼 얼굴 울 일그러뜨렸다.
"엄마."
한 걸음 다가가며 부르는 윤슬울 향해 엄마가 눈읗 돌렸다.
"오지 마. 오지 말고 저기 인도 위로 올라가. 도로에 있지 말고, 위험하니까."
"엄마는? 엄마도 빨리 내려."
"엄마 금방 내릴 거니까 어서."
엄마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서! 하는 외침에 윤슬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사고가 난 지점을 크게 둘러 쌩 하고 지나가는 차에. 근처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달려와 윤슬의 몸을 잡아채 인도로 이끌었다. 낯선 사람의 풍에 안겨 멀어지는 엄마의 얼굴울 보며 윤슬이 큰 소리로 울었다.
"윤슬아, 119에 전화해. 119 알지 ? 사고 났다고 전화해."
"엄마. 엄마아."
주변으로 하나둘씩 물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낯선 이둘의 수군거림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하늘이 유난히도 맑았고. 저를쳐다보며 손을 뻗어 외치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마치 각인처럼 눈동자에 담겼다.
빠아아아앙-.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사고가 난 차 뒤에서 길게 울렸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윤슬 씨의 악몸을 똑바로 마주해봐요."
윤슬은 어렸던 자신의 옆에 서서 차 속에 갇힌 엄아률 바라보았다. 윤슬 을 향해 손을 뻗으며 울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때는 물랐지만, 엄마는 다리가 껴서 차 밖으로 나을 수 없었다. 운전 석 쪽이 심하게 우그러져서 다리가 낀 것은 물론이거니와그때 이미 엄마 의 다리는 거의 절단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사고가 난 직후에는 충격으로 정신이 없어 물랐겠지만, 보조석으로 넘어오려고 시도했을 때 움 직이지 않는 다리를 보고 엄마도 예감했었을 거다. 차 밖으로 나오지 못하 리라는 것을.
그때 만약 이차 추돌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엄0유는 살 수 있었을까. 빠 르게 사고 현장이 정리되어,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사고가 났음을 알아차 리고 비켜갔다면.
나이가 들고, 엄마의 죽음을 되새기며 항상 예상해보곤 했다. 그때 뒤에 서 차가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트럭이 다른 쪽으로 미끌어졌었더 라면. 그때 그 신호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때……엄마가 자신을 데리러 학교에 오지 않았더라면.
부질없는 가정이었지만. 그 수많은 가정 속에서 엄마는 항상 살아있었 다. 귀결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데리러 학교에 왔 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 속에서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등으로 눈을을 닦으 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마 역시 울고 있었다. 울면서도 웃고 있었 다.
"윤슬아. 엄 마 괜찮아.
멀리 떨어져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엄마 괜찮아. 울지 마, 엄마 괜찮아. 겁에 질린 아들이 경기라도 일으킬까봐, 걱정시키지 않으려 엄마 는 고통을 참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에서는 눈 물이 흐르는데도 허을어지는 입매를 애써 끌어을리며 엄0ㅏ는 그렇게 옷었 다.
우리 아들, 용감하지? 울지 말고 엄마 봐.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두려워서, 술퍼서, 미안해서, 항상 이 자리에 서서 엄아률 바라보며 울기만 했다. 시 간이 지나 훌찍 나이를 먹었용에도. 그때의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얼굴울 보며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술픔이나 죄책감에 빠져들지 말고, 어머님의 모습을 보도록 해요."
윤슬은 서 있던 곳에서 한 걸옹, 또 한 걸옹 앞으로 내디더 사고가 난 차 로 다가갔다. 차 속에 갇힌 엄아는 여전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어린 윤슬 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눈을 팔면 아들이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 렇게 애타게 남겨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용, 알아.
찌그러진 차의 운울 열고 보조석에 오론 윤슬이 피가 흐르는 엄마의 얼 굴을 응시했다.
"형한테도 엄마가 사람한다고 말해줘.
그때는 듣지 못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명확하게 윤슬의 고막울 때렸다. 희미하게 웃고 있던 엄마의 입매가허을어지며 작게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 우리 남편 보고 싶다- -엄마. 엄마."
윤슬이 손을 뻗어 엄마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옆에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데도 엄마는 윤슬을 바라보지 않았다. 너무나도 오래전에 엄춘 시간 속에서 엄마의 눈에는 어린 윤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 윤슬이. 저녁에 치킨 시켜춰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힘없이 옷는 엄마의 얼굴에는 조금의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걱정. 아들이 다치지는 않았울까. 놀라지는 않았울까, 무서워 하지는 않울까. 온통 아들에 대한 걱정뿐.
"우리 엄마.”
윤슬이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피가 흐르는 얼굴에 뺨을 문지르고, 이제는 폭삭 안기기에는 너무나도 작아진 몸뚱이를 풍으로 당겨 안았다. 빠아아아앙-.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날카로운 를랙슨 소리가 사고가 난 차 뒤에서 길 게 울렸다.
커피를 앞에 두고 윤슬은 침묵했다. 그런 윤슬울 재촉하지 않고, 권태준 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커피를 홀짝였다.
"내가……강 선생님하고 절교한 거 알죠?”
“언제는 친구였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냥 의사가둘팔이라 더 이상 그 병 원에 안 간다고 말해요."
"그 돌팔이가 권태준 씨 친구거든요.”
자기 친구면서, 친구한테 돌팔이가 뭐야. 윤슬이 미간울 찌푸리며 지적 했지만, 권태준은 어깨를 으쓱일 뿐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더 이상 강 선생님한테 상담 받기도 껄끄럽고. 서당개 삼 년이 면 풍월도 옮는다고 하는데, 강 선생님 옆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이니 권태준 씨도 상담해주는 시늉은 낼 수 있을 거 아녜요."
료법 위반입니다."
"언제는 법 지키며 살았던 것처럼 말하시네.”
호로록, 다 식은 커피를 호호 불어 마시는 권태준의 기행을 윤슬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모론 척했다.
"아무래도 형이 마음에 걸려요.”
윤슬이 내별은 말에 권태준이 머그를 테이불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야근하느라 며칠 만에 겨우 본 애인 앉혀놓고 하는 소리가 그농 애기입니까? 강호수 이름 나을 때부터 찜찜하더라니, 이계는 형이라는 농까지. 보통 이런 때는 "보고 싶었어요.’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떼, 보고 싶었어요."
선선한 대꾸에 권태준이 눈을 동그닿게 떴다. "보고 싶었어요’부터 시작 하라며, 그렇게 요구를 한 당사자가 왜 그런 얼굴을 해. 윤슬이 웃음을 터 뜨리자 권태준이 손을 내일었다. 커다란 손의 끝 부분울 살짝 잡자, 권태준 이 윤슬의 손을 확 움켜잡아 끌어당겼다. 품으로 끌려 들어간 윤슬의 몸을 마치 고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태준이 꽉 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습니다." 힘을 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윤슬의 뒷머리와 목덜미를 덮은 커다란 손으로 느릿느릿 쓸어 문지르며. 윤슬의 얼굴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권태준이 입술을 문질러댔다.
"아니, 이 나이에 야근이 말이 됩니까?"
"회사 다니는 사람은 일주일에 다섯 번은 야근하고 주말 특근까지 한대요. 그거 생각하면 권태준 씨는 양호한 거죠. 평소에는 맘대로 퇴근하잖아.
"며칠 만에 본 애인한테 그게 할 소리입니까? 위로를 해주지는 못할망정."
"월급 받자고 하는 짓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월급 남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통장으로 꼬박꼬박 들어을 텐데."
그러면서도 윤슬이 권태준의 품에 얼굴을 비렀다. 풍에 안긴 윤슬의 어깨에 턱을 기댄 권태준이 하아. 하고 큰 한숨울 내별었다.
"이렇게 에교 없이 맞는 말만 골라 해서야.”
뭔가 묵직한 한탄이었다. 윤슬이 웃음을 삼키며 권태준을 타박했다.
"자꾸 딴소리하지 말아요. 형 문제로 돌아와서, 그냥 이렇게 모른 척하며 시간을 보내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해결되 는 것도 없고,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이제 형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안 하겠다고 했지만, 정작 내가 개운치가 않아요.”
"그래서, 결국 그농이 원하는 대로 악몸을 없애주겠다는 겁니까? 주먹다짐하던 그 박력은 어따 내팽개치고.”
"두 번은 못할 짓이더라고.”
박력은 둘째 치고, 개처럼 맞는 것도 개처럼 때리는 것도 결국 개 같은 상황이니까. 아버지가 속상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론사람들이 보 면 혀를 찰 일이었다.
"착한 사람이 결국손해 보는 겁니다. 못되게 살아요."
여기서 얼마나 더 못되게 살라는 건지 모르겠다. 법보다 불법에, 선의보 다 악의에 더 가깝게 살아온 권태준울 눈앞에 두고 윤슬은 씁쓰름한 감정 울 삼켰다.
"권태준 씨가 말했잖아요. 마주 보라고. 엄마의 꿈을 꾸면서 슬픔이나 죄 책감에만 빠지지 말고 마주 보라고."
“봤습니까?"
"원망하시던가요."
"사람한대요. 엄마가…… 사람한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게 진짜 기억인지, 아니면 그렇게 기억하고 싶은 내 무의식인지 모르겠지만…… 사람한다고 말하는 엄마 얼굴에 내가 걱정하는 감정은 하나도 없었어 ."
"다행이네요."
"……형 한테도 사람한다고 전해달래요.”
윤슬의 말에 권태준은 답이 없었다. 미간울 한껏 찌푸리고 있을 것이 분명 했다. 슬찍 고개를 둘어 위를 보자. 예상처럼 권태준이 인상을 쓰고 있었 다.
"그냥, 저렇게 성격 이상하게 변한 게 내 탓은 아니지만……그래도 이렇게 두면 죄책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요. 엄마 마지막 말도 전해주고 싶고.”
"이래저래 쓸데없이 죄책감 가질 일도 많은 사람입니다, 윤슬씨는."
"형한테 말고. 엄마한테 미안할 것 같다고요. 그리고 지금 상태로는 왠지 똥 싸고 안 닦은 것처럼 껍찝하기도 하거든요. 이번 일만 끝나면 신경 안 쓰려고. 이후로 형이 어떻게 살든 나랑 상관도 없고."
"손해 보는 착한 사람은 정말 하등의 이득도 없는데. 왜 하필 윤슬 씨가 그렇게 살려고 합니까."
쯧쯧. 혀를 차며 권태준이 윤슬의 정수리 위에 턱 하고 손을 올려 비비적거렸다.
"그거, 없에는 게 아니라면서요. 윤슬 씨가 대신 악몸을 꾸는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남의 악몸이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악몸이야. 반복해서 보다보면 영화보다 더 지루해요. ……강 선생님 소개로 여 러 번 돈 받고 없애준 일도 있어서, 어차피 형의 악몸이 아니어도 끌 악몽 은 많고. 특별할 것도 없어요. 그냥 내가 형 싫으니까 뻗대고 있는 거였어."
"강호수가 문제입니다. 강호수가."
강호수도 이런 부작용이 있는 즐은 물랐으니. 서로 좋은 일울 하자며 소개시켜준 것이지만. 돈 받았다는 것을 말했는데도 권태준은 강호수를 탓했 다.
"아무른, 그래서 내가 상담하고 싶은 건……형의 악몸을 없애춰도 괜찮을까 하는 거였어요."
"답을 정해놨으면서 그게 무슨 상담입 니까."
"내 결정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잘한 일이라는 말은 듣고 싶으니까."
"윤슬 씨가 하는 일 중에 나쁜 일은 없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플 알고가
"다 같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면서. 나라면 시달린 만큼, 아니, 두 배 세 배로 갚아플 테지만. 윤슬 씨는 형이 신경 쓰여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윤슬 씨는 미련한 사람이지 만 나쁜 사람은 아님니다."
결국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미련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좋은 말은 아니었다. 윤슬이 뺨을 부풀리며 불통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더 이상 신경 쓰는 일은 없는 겁니다. 이후로 뭔 개소리 들어도 무시 한다고 약속합시다."
"약속해요."
"무시해도 계속 개소리를 하면 참지 말아요.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 라고, 그러다 병 걸립니다. 면상에 대고 욕을 해주든지. 아니면 나불거리지 못하게 대가리를 깨든지. 둘 중에 하나는 꼭 하기로 약속하고."
"그건 종……"
"약속하라니까."
"그냥 무시할게요."
윤슬에 대답에 권태준이 마땅찮은 듯 홈, 하고 목을 울렸지만 윤슬은 모
"아, 천천히 얘기하려고 했는데 윤슬 씨가 괜한 놈 애기를 꺼내서는 잊어 버렸습니다. 나 일주일 정도 지방 내려가야 합니다."
그 괜한 농은 형을 말하는 거겠지. 악감정이 담긴 호칭에 옷던 윤슬이 미 간을 모았다. 묘하게 이런 말울 들은 기억이 났다. 언제였더라.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방에는 왜요?”
"왜긴 왜겠습니까. 회사 일이지. 아니면 윤슬 씨 놓고 내가 일주일이나 지방에 왜 내려갑니까."
"아, 그러니까 저번처럼?”
"저번처럼."
"저번처럼 촐장이라는 명옥하에 구역 정리?"
권태준은 침묵했다. 아니라는 말을 안 하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답인 듯 보였다.
"구역 정리 좀 하시다 칼침도 맞으시고, 용급실도 가셨다가 몇 바늘 꿰매 기도 하시고, 거기에 알코올로 목구멍 소독도 총 하시고. 뒤 이런저런 일주일을 보내시겠다?”
"그건 잠깐 방심해서 그런 거고. 이제 그럴 일 없습니다.”
“저번엔 그럴 일 있어서 그랬고?"
제발 평범하게 살았으면 싶었다. 자신의 존재도, 권태준의 존재도 그리 평범하지 않다는 게 최대 문제이긴 하지만.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자 권태준이 배시시 옷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을었다.
“지금나 걱정하는 겁니까?"
"걱정은 개불."
“윤슬 씨가 걱정해주니 참 좋네. 내일 점심에 출발하면 되는데, 나여기 서 자고 가도 됩니까.”
"안됩니다."
"될 것 같은데. 되지 않겠습니까."
질운 같지 않은 질문이었다. 이미 권태준의 손이 윤슬의 티셔츠 안으로 술금술금 기어들고 있었다. 커피 잔이 놓인 상이 저만치 밀려났다.
타인의 악몽 속에 들어오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론 람울 만날 일이 그렇게도 없었나 싶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정말 은둔자처럼 생활을 하기도 했다. 배달 음식을 시켜먹거나 식재료와 생필품을 배달 시키거나 권태준울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타인을 만나는 일이 없었다. 문득 자신의 생활을 둘아본 윤슬이 진지하게 반성울 했다.
“불일 없다며. 날 비옷으려고 왔냐.”
얼굴빛이 하앞게 질린 재영이 나타나 윤슬에게 따지듯 을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울리고 있었다. 산발이 되어 비명처럼 울부 짖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던 윤슬이 몸을 틀어 재영을 바라보았다.
"형을 보면 무슨 생각울 하는지 알아? 사람이 이렇게 비를어질 수도 있나, 그런 의문이 둘어."
"지금 날 비웃어?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러게. 형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굴까."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딱히 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재영이 생각하는 원인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고, 그 원인이 정답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악몽에 시달려서 사람이 비를린 걸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 정말 궁금하더라.”
"홍윤슬!”
"나 있지, ……언젠가부터 항상 엄마 꿈을 꿨어 . 사고가 났던 그날, 엄마가 죽던 그때, 그 장면을 매번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이 상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말을 꺼내는 윤슬울 재영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꺼낼지 올라 바짝 긴장한 모양새가 마치 겁 먹은 아이처 럼 보였다.
“형이 저번에 그랬잖아. 엄마가 죽은 건 내 탓이라고. 그때 화를 냈지만, 은연중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아니, 사실 쭉 그렇게 생각해왔어 .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엄마가 날 데리러 학교에 오지 않았더라 면 죽지 않았울 거라고. 그래서 항상 미안했어. 죄책감이 돌었어."
"너……지금 내 악몽에 들어와서 고해성사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아니면, 엄마가 죽은 게 네 탓이 아니라고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 거야."
“누가 그러더라고. 슬픔과 죄책감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만 말고. 마주하라고. 엄아를 보라고. 엄마의 얼굴에. 엄마의 눈에 나에 대한 원망이 있 는지. 그래서 봤어. 항상 꿈을 꾸면 울기 만 했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그때 처럼 멍하니 서서 울기만 했는데…… 엄아를 보니까 알겠더라. 내가 이제 까지 보지 못했던 게 원지. 엄마가 마지막까지 걱정했던 게 원지."
"죄책감을 없애려는 네 알량한 변명이 아니라?”
흥, 하고 못방귀를 뀌며 개영이 이죽거렸다. 살이 내려 비찍 마론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닿기만했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이 윤슬울 노려 보고 있었다.
"정말 말이 안 통하네.”
어깨를 축 놀어뜨린 윤슬이 후우. 하고 한숨울 내쉬었다. 대충 손을 까닥이자, 방금 전까지 울부짖던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앞에서 무능력하게 주저앉아 있던 꿈속 재영의 모습도 사라졌다. 하얀 배경에 남은 것이라 고는 오로지 윤슬과 재영뿐이었다.
주변읕 두리번거리던 재영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귀를 아프게 하던 비명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재영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그러면 서도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금방이라도 꼬투리를 잡을 것처럼 윤슬을 경 계하고 있었다.
“사람한다고 전해달래."
"엄마가 형한테 사람한다고 전해달래. 늦긴 했지만 그래도 말해춰야 할 것 같았어."
발 앞부리를 쿡쿡 ."으며 서 있던 윤슬이 고개를 둘어 재영을 바라보았다.
“형한테는 이제 미안한 감정 없어. 형한테 미안해서 악몽 없애준 것도 아냐. 엄마한테 미안해서 없애준 거야. 그래도 나중에 엄마 만났을때 내가 해플 수 있는 건 해줬다고 말하고 싶어서.”
재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미안했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그 외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윤슬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형을 보면 사람이 왜 이러고 사나 싶어. 어릴 때는 참좋아했는데. 자랑스러웠는데. 이제는……한심하고, 이해도 안 가고, 그러면서도 인간 대 인간으로 불쌍하고. 측은하고, 안쓰러워. 악몽은 내가 가져갈 테니까, 이제 정말 안 봤으면 좋겠어. 우리 사이에 남은 거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남 처럼 살자. 제발 부탁할 테니까 나한테 신경 끄고 형도 형 인생을 살아. 아버지한테 내 험담. 내 주변 사람 험담하면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뭔가 할 말이라도 있을까 힐곳 쳐다보았지만 재영은 말이 없었다. 더 이상하고 싶온 말도 없어서 윤슬이 등을 돌렸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재영의 시선 속에서 윤슬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내일 올라와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까?」
“뭐래. 일주일 더 있다와도 상관없거든요.”
「내일 올라갑니다.」
윤슬의 불통한 대꾸에 절절 옷으며 태준이 답했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권태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다.
"칼 맞았어요?”
「윤슬 씨. 그런 얘기를 너무 가볍게 하는 거 아닙니까?」
역시 농담으로라도 할 소리는 아니었지. 윤슬이 볼을 긁적이며 미안해요, 라고 멋찍게 사과했다.
「내가 칼 맞을군번입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쪽팔립니다. 나 정도 되면 칼이 알아서 피해갑니다.」
이 새끼가. 사람 오해하게 무안 주)놓고 자기가 농담을 하고 있네. 끊어버 릴까, 왜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고 있어야하지. 권태준과의 통화가 문득 무가치하게 느껴 졌다.
「악몽은……어떻게 됐습니까? 형이라는 놈은 만나봤어요?」
"만날 게 있나. 그냥 악몽만 없애주면 되는 건데.”
「벌써 없애줬습니까?」
"뜸 들일 것도 없잖아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그냥 획.”
「내가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습니까.」
"권태준 씨 울라오면 뭐가 달라져요?”
「윤슬 씨가 악몽 꿀 때 옆에 있어플 수는 있지 않습니까.」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누구보다 윤슬의 상황을 알고 이해하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권태준의 말에 가숨이 간질거렸다.
"돼, 됐거든요."
「튕기기는.」
"아님니다."
「맞는데?」
말꼬리를 잡아 농담울 하고 있다. 묘하게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라 별다른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딱히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그래도 문옥 다행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은 다 끝났어요?"
「방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래서 그 밤에 뭘 시작하려고요."
「나단속하는 겁니까?」
“말장난은 그만하시죠."
이런 쓸모없는 농담이 좋은지, 권태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윤슬이 약간의 경고를 담아 지적하자 권태준이 흥흥, 하고 헛기침을 했 다.
「몇 군데 더 둘러불 곳이 있습니다. 오늘 마무리해놔야 내일 아침에 정리하고 올라가죠.」
때체 마무리할 일이 원지 알기가두렵네요.”
"윤슬 씨는 몰라도 좋을 일입니다.」
"그렇겠네.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네."
「내일 점심때 지나서 도착할 것 같은데. 저녁 같이 먹읍시다.」
"뭐 먹을 건데요?”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고기."
「좋습니다. 오랜만에 소 한 마리 먹고 방에 힘 좀 씁시다.」
"네, 소 먹어요."
마지막 말을 깔공하게 무시하며 답하자, 휴대폰 너머로 못마땅한 숨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 사람 지금 혼자 있는 거 맞나. 문득 그런 생각이 둘었다. 주변에 사람들도 있는데 저딴 소리를 농담이라고 지절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고개를 내것다가 권태준이라면 그럴 수도 있울 것 같아 두려워졌다. 주변에 누가 있냐고 을으려는 찰나, 벨 소리가 들렸다.
「누구 왔습니까?」
귀도 밝네. 윤슬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권태준이 물었다.
"택배라도 왔나보죠."
「이 방에 무슨 택배입니까? 사실대로 말해요. 누구 왔습니까.」
"누군지 아직 보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물량 밀리면 아홉 시, 열 시 넘어
「택배 을 게 뭡니까? 없는데 대충 둘러대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가 저번에 주신 간장게장이 괜찮아서 주문 좀 했어요. 아니, 내가 대체 왜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었다. 뭐 시켰는지, 무슨 택배가 오는지까지 권태준에게 말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따지듯 폭한 목소리로 말하자 권태준이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집에 아무나 돌이는 거 아닙니다. 문밖에 두고 가라고 해요. 나중에 사람 없울 때 문 열어서 가지고 들어오고.」
"진짜 경계해야 하는 사람은 문 따고 돌어오니, 딱히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생각해보니 진짜 그렇네. 도둑이나 강도를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 들은 운 따고 들어오잖아. 권태준만 봐도 쉽게 쉽게 문 따고 들어오기도 했 고.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지 않나. 미간을 모으며 윤슬이 주거 보안의 취약성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벨이 울렸다. 침 대에서 일어선 윤슬이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권태준 씨, 전화 끊어야겠어요."
"알았으니까 끊어요. 저번처럼 방심하다가 사고 나지 말고. 조심해서 올라오고."
「걱정해주니 좋네. 알았습니다. 내일 밤에 고마움울 담아 최대한 힘쓰겠 습니다.」
"그건 됐고. 아무론 끊어요.”
별스러운 소리를 다 한다. 좋은 소리 해줬다가 개소리를 돌었구나. 통화 종료버튼을 누론 윤슬이 귀를 후렸다.
문을 열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보였다. 약간의 고민과 망설임이 담긴 얼굴을 보며 윤슬이 왜? 하고 을었다. 윤슬의 상체만 보일 정도로 약간의 틈만 두고 열린 문에 방문자가 인상울 찌푸렸다.
"애기 좀 하자."
"할 얘기 없다고 했었는데, 나는."
"시간 좀내."
문득 집에 아무나 들이지 말라던 권태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 졌다. 웃음움 삼킨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피스텔 나가면 맞은편 건물 이 층에 카페 있어.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잠깐이면 돼."
"할 애기 있다며. 나는 이제 내 집에 형 둘이고 싶지 않아. 이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명백한 거부에 재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서서 뭔가를 생각하던 재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울 둘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울 주문해 기다렸다가 받아온 윤슬이 재영의 맞은편 의자에 않았다. 수척해진 건지, 아니면 수척해졌다가 그나마 나아진 건지. 오 늘따라 재영의 얼굴이 낯설다는 생각을 했다.
찬바람이 서서히 부는 계절이 왔지만, 가숨속은 여전히 뜨거워 꼴깍꼴깍 아이스커피를 물처 럼 삼켰다.
"생각해보면 처음이네. 이렇게 둘이 마주암아서 커피를 다 마시고."
이 자리가 새삼스러워 윤슬이 헛웃음을 내별었다. 재영의 악몸을 없애줬던 이후로 단둘이 만나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도 함께 있는 시간이 드물었 는데. 이렇게 밖에서 따로 만날 일이 있었을까. 항상 없는 사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말을 섞는 일이 생겨도 그때뿐이었고. 항상 자신을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탓하거나, 괴을 보듯이 했지.
“바볼 텐데 왜 왔어?”
"……고맙다.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았어."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자신도, 재영도. 변하기는 하는구나. 그런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플거운 웃음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슬프고 씁쓸한 감정이 었다.
"형한테 그런 소리를 둘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고맙다는 인사 들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 알겠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바빠서 그래? 누구 올 사람이라도 있어?”
"택배 아저씨. 됐고. 그냥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좋게 마주앉아서 커피 마시던 사이였나 싶어서. 불편해. 할 에기 있으면 발리하고 가."
재영과의 사이가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랐던 때가 있었다. 자신을 보는 형의 시선이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랐던 때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형의 목소리가……
그래. 그걸 바랐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기 엔 너무 늦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지금은 아니야. 이제는 너무 지쳐서,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서로에게 신경 쓰지 말고. 걱정이라는 명목하에 서로에게 그 어떤 관심이나 지적도 하지 말고.
자신이 재영에게 얼마나 신경을 썼었는지, 악몸을 없애준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걸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어 고맙다고 해도 전혀 기브 지 않았다. 악어의 눈을처럼 그저 가소로워 보일 뿐이었다.
"저번에……엄마 죽옹이 네 탓이라고 했던 건,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다. 미안해."
"괜찮아. 어차피 이제는 형이 무슨 생각울 하든 신경 안쓰니까. 내가 엄마룰 죽였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나 신경 안써. 내가 괴물이라고손가락질 울 해도 이제 신경 안써. 형이 형 마음대로 생각하겠다는데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이제 알겠더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형과 나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윤슬아."
"지금은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란 놈이 두렵고 꺼려지고 이상하겠지. 형은 그냥 쭉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나는 앞으로 쭉 형을 쓰레기라고 생각할 테니까.”
윤슬의 말에 재영이 얼굴을 붉혔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닌 분노였다. 아무리 사과를 하러 왔다고는 해도 면전에서 욕을 먹으면 화가 나긴 하겠지. 윤슬이 코웃음을 흘리며 남은 아메리카노를 홀짝거 렸다.
"나는 이제 형한테 기대도 없고, 화도 안 나. 걱정도 안 되고 신경도 안 쓰여 .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편해졌어. 형도 그럴 거야. 날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대체 왜 화를 내나 싶을걸. 지나가는 사람한테 화가 나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이지."
"홍윤슬."
"어차피 형도 나 싫어하잖아. 서로 싫어하는 사람끼리 뭐하러 감정싸움을 해. 그냥 안 보고 평생 모르는 사람처럼 신경 안 쓰고 살면 마음 편하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앞에서 내색만하지 말자. 그래 봤자한 달 에 한 번도 안 보겠네. 그 정도면 형네 병원 환자보다 못한 사이겠다."
그러네. 의사와 환자보다 더 못한 사이. 병원 청소하는 직원보다도 얼굴 마주하는 일이 더 적을 거고. 병원 내 식당 직원보다도 못한관계일 수도 있겠다. 그런 거라면 피 섞인 형제도 참 별것 없네. 윤슬은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악몽 없애준 건 고맙고. 엄마 관련해서 했던 에기는 미안하고. 더 할 얘 기 남았어?”
"……아니."
자존심이 상했는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재영이 통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간아, 언제 철들래. 쯧. 하고 혀를 찬 윤슬이 아메리카노를 마 지막 한 모금까지 비웠다.
"나도 용건 없으니까 그만 일어날게. 자존심인지 자격지심인지 피해망 상인지, 난 심리상담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른 뭔가 운제가 있 다 싶으면 병원에 가.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 악몽 때문에 예민했던 거면 이제 괜찮을 거고,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었으면 그건 ……답이 없긴 하겠 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말에 반박울하고싶은 건지 모르겠지 만. 입술을 벙긋거리는 재영을 모론척하며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참 더러웠다. 우리 관계. 흥재영과 흥윤슬. 형제라는 끈으로 묶인 사이 가 참 더럽게 힘들었네.
"앞으로 좋은 꿈만 꾸길 바탈게."
재영을 남겨두고 카페를 나서는 윤슬의 마음은 홀가분했지만, 한편으로 는 힘이 쭉 빠지는 것도 같았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더는 남은 것이 없구나. 그런 생각울 하자 달력감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걸음울 옮겨 오피스텔로 향하며 윤슬은 운득 권태준이 보고 싶어 졌다. 참울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어졌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노력하던 남자가, 자신을 묵묵히 지켜봐주던 남자가.
"택배 왔으려나."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습니까?"
윤슬이 꿈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나타난 남자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꿈 인데 참 현실 같다. 남자의 얼굴을 반히 쳐다보던 윤슬이 손을 뻗어 남자 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넓은 풍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 쉬는 시늉을 하자, 동 뒤로 올라온 손이 부드럽 게 토닥거 렸다.
"이렇게나 보고 싶었습니까?"
권태준의 악몽은 여전히 공찍했지만. 마치 두 사람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동떨어진 괴리감이 느껴졌다. 악몸을 등진 상태로 윤슬이 권태준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형이 왔었어요."
"집에 아무 남자나 들이는 거 아닙니다."
“택배 아저씨는 들여도 형은 안 돌여. 카페 나가서 애기하고 왔어요.”
"앞으로는 택배 아저씨도 문 열어주지 말아요."
그럼 택배는 어떻게 받으라고. 윤슬이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이마로 권태준의 가슴울 꾹꾹 늘렸다.
"또 뭐라고 헛소리하고 갔습니까?”
"아니. ……고맙대요. 엄마가 죽은 게 내 탓이라고 했던 말도 미안하대.”
“그래도 양심은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근데 난 그게 진심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 형이 참 꼬였구나 했는데, 나도 못지않게 꼬였나봐요. 처음 악몸을 없애줬을 때는 괴을이라고 십 년 가까이 손가락질을 하더니, 조금 고생했다고 이제 와서 안면 바꾸고 고맙 다는 말이 나을까. 참 간사하고 가소롭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권태준은 말없이 윤슬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쓸어주기만 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와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안정감울 주었다.
ㅁ나 진짜 못됐죠."
"못됐기는 뭐가 못됐습니까. 손해만 보고 사는 사람이. 영악하게 좀 굴어야지. 이건 호구도 아니고. 결국엔 형 좋은 일만 해준 꼴 아닙니까. 절을 받 아도 모자란데, 못됐긴. 윤슬 씨가 못됐으면 세상에 착한 사람 하나도 없습 니다.”
"그러네. 나 참호구네.”
호구처럼 십 년 가까이 미련을못 버리고 형한테 매달려 왔구나. 한 번이라도 자신을 돌아봐주기를,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한 번이라도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그렇게 바라고 바라왔는데……
"형 면전에 대고 쓰레기라고. 인간답게 살라고 욕했어요. 헤플 거 해줬으니까 다시는 보지 말자고 그랬어. 그렇게 말하니까 속은 좀 시원하더라고 요 ”
"잘했습니다. 오늘 애기한 것 중에 유일하게 잘한 일이네."
"근데 생각해보니까 형이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 건. 어찌면 화해하자는 의미였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내가 싫다고 해버렸잖아. 형이 어렵게 손 을 내밀었는데, 그걸 내가 내쳤으니까……이제 완전히 끝인 거겠죠."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었습니까?" 권태준이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며 윤슬의 정수리를 커다란손으로 꽉 잡아 늘렸다.
"미련하다 미 련하다 했지만 이렇게까지 미 련할 줄이야."
“말 그대로 그냥 미련일 뿐이에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의 끝에 뭐가 있었울까 하는 궁금증 같은 거. 후회하지는 않아요. 내 선택이 결국은 형하 고 내게 좋울 것 같기도 하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얼굴 보면 뭐해. 형제간의 우애가 어쩌고저찌고 그래도, 우애 찾기 전에 병 걸려서 죽을 거야."
뽀로통한 목소리에 권태준이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권태준의 얼굴을 울려다보다 윤슬이 입을 열었다.
윤슬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일까지 못 기다리고 내 꿈에 들어온 겁니까?"
"그만하시죠."
비행기 태워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정작 당사자가 뼌뻔하게 저런 말을 하니까 좋은 소리도 해주고 싶지가 않다. 윤슬의 경고에도 권태준은 옷기 만 했다. 어찌면 자신의 마음을 플어주기 위해 하는 농담인지도 모르겠다. 떠울려보면 항상 이렇게 가벼운 농담으로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곤 했다. 불통거 리며 불만을 내뺄지 만 결국엔 기분이 플렸었다.
"……왜 내가 좋아요?”
문득 궁금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의 어떤 면이 좋은지. 자신은 권태준의 어떤 면을 마주하고 보고 싶어 했던 건지.
"우리, 참 많이 닮았고 참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사람은 다 비슷하기도 하고, 다 다르기도 해요.” 특별히 권태준과 홍윤슬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권태준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세상 모든 사람울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윤슬 씨에 대해서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윤슬 씨 말처럼 특별 할 것 없는 인연에 특별한 것도 없는 사람인데……언젠가부터 윤슬 씨가 특별해졌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윤슬 씨에 대해 많이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알아가다보 면 언젠가 윤슬 씨를 이해할 수 있는 날도 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윤슬 씨가 나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 수 있는 날도 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전에 강 선생님처럼 인연이 끊길 수도 있지. 대체 어디서 나오는자 신감인데요?
"얼굴."
앞으로 권태준에게 자신감의 근원은 절대 묻지 말아야겠다. 그런 질운 을 하는 상황은 다를지라도 왠지 나오는 답변은 똑같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딱히 털 것도 없어요.”
기분 나쁜 생각은 하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합시다. 내일 고기 먹고 방에 얼마나 힘쓸지, 이런 거.”
힘을 쓰기는 무슨 힘을 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네. 윤슐이 못 들은 척. 권태준의 품에 바짝 안겨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보면 이거 참좋은 능력입니다."
"뭐가요?"
"원격 데이트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으로?”
이 사람도 은근히 긍정적이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악몽 속의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그 악몽의 주체가 권태준 본인 이라는 것은 망각할 수 없는 일일 뗀데도, 이렇게 멀찡하게 웃으며 헛소리 를 지낄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움은 절대 없었다. 윤슬이 딱 잘라 부정의 답을 내별자. 권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과거를 대하는 태도로는 상당히 불순하기는 합니다. "알면 됐어요. 그것도 모르면 권태준 씨도 정상은 아니죠." "나처럼 정상인 사람도 없울 겁니다.”
"원래 정상 아닌 사람이 본인은 정상이라고 한대요."
"진짜정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요, 일단은."
이런 헛소리로 시간울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윤슬이 입을 다을고권태준의 풍에 몸울 기댔다. 편한 자세률 찾아 늘어지듯 기대오는 윤슬의 몸울 끌어안으며 권태준이 윤슬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꿈에서 이렇게 윤슬 씨를 보는 건 참 좋네요. 마치 악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누구보다. 권태준 씨가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내게는 과분한 일입니다."
"악몸을 지우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항상 나쁜 꿈만꾸니까 가공은 좋은 꿈도 꿔도 되잖아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 악몽 속에서도 희망을 꿈 끌 수는 있잖아."
회망. 기봉, 좋은 꿈. 그런 것들을 권태준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함께 꾸고 싶기도 했다. 윤슬이 권태준의 등울 힘주어 끌어안았다.
내게 희망이 있다면.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윤슬 씨일 겁니다."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며 권태준이 점잖게 거절을 표했다. 그건 스스 로에 대한 질책이었고, 반성이었으며, 책임이었다.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질 러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려는 이 남자가 유난 히도 아프게 마음에 담겼다.
"우리, 참 많이 닮았고 참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권태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말을 되새겼다.
그건 아마도 지금 이곳에 서 있기까지의 과정이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서 있는 마음가짐이 비슷하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권태준과 자신 은 괴물이었고. 괴물인 서로를 동정했으며. ……결국 악몽 속의 괴묻로 남 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그럼 내가 이렇게 권태준 씨의 악몽 속에 을게요. 나는 꿈속의 괴물이었 지만. 권태준 씨에게만큼은 회망이 되어 풀게요. ……악몽 속에 같이 회망
도망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언제고 악몽 속의 희망으로 남0품 테니까.
권태준의 악몽 속에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심고 또 심다보면, 언젠가 이 악몽도 좋은 꿈이 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자신이 권태준 이라는 남자를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날도 오지 않울까.
윤슬의 말에 권태준이 소리 죽여 웃었다. 나직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윤슬이 한없이 크고. 또 한없이 작은 남자의 몸을 끌어 안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