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

"권태준 씨. 그만해요. 형이에요."

"우리는 보통 그런 걸 형이라고……형입니까?*

"네, 형이에요.”

잔기침을 하던 윤슬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목 아래에 닿아 있는 칼에 재영이 양손을 허공으로 돌어 을리며 윤슬울 힐곳거렸다.

"이 칼 치워. 홍윤슬. 너 아는 사람이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개싸움울 하고 있기에 강도라도 둘었나 했더니. 정말 윤슬 씨 형입니까.

맞다고 대답을 했음에도 권태준은 자세를 플지 않았다. 재영이 불안한 지 목 아래를 힐곳거렸다. 남자다운 척 무게는 엄청 잡으면서, 겁은 어지간 히 많은 사람이다.

객지 말아요. 풀어줘요."

침대 위에 걸터암으며 윤슬이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윤슬을 빤히 

"아이고, 윤슬씨 형님이셨구나. 내가오해했습니다.”

엉거주충하게 서 있는 재영의 어깨를 탁탁 가볍게 두드리며 권태준이 웃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라고 말하듯 선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는 재영의 표정이 반대로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 너 뭐하는 새끼야. 어? 너 대체 뭐 하는……."

“형님, 말씀울 곱게 하셔야죠. 예쁜 말은 칭찬울 부르지만. 그런 상소리는 화를 부릅니다. 내가 괜히 형 님한테 존대를 해주고 있는 게 아니지 않습 니까. 내가 이 나이까지 상욕을 못 배운 것도 아니고. 안그럽니까, 이 좆같 은 새끼야.”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별는 말은 그리 상냥하지 않았다. 쑥 내민 권태준의 얼굴에 재영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됫걸음질을 쳤다.

다신 오지 마. 형이 진짜 죽는다고 목을 매도, 이제 신경 안쓸 거니까. 나 이제 형이랑 가족 안 할래."

“흥윤슬!” 

윤슬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다가오는 재영의 앞을 권태준이 막아섰다. 재영의 어깨에 손을 둘러 어깨동무를 한 태준이 방향을 획 돌려 현관 쪽으 로 재영을 끌고 갔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놔! 안 놔?”

"어허, 가만히 좀 있어요. 거참, 그 집 형제들은 목에 칼을 들이일어도 성격이 안 놀러지나봅니다. 그나마 한쪽은 귀여운데. 어째 나머지 한쪽은 귀여운 맛도 없습니까. 어디 가서 칼 맞기 딱 좋은 인상이시네."

재영을 현관 앞까지 끌고 간 권태준이 현관문을 열어 재영읕 던지듯 밖 으로 일어냈다. 특. 특. 신발을 운밖으로 걷어찬 권태준은 재영의 어깨에 손을 윱린 상태로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여기 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윤슬씨 형님. 정히 칼 맞아 웨지고 싶으면 계속 지랄을 해보시든가. 내가 또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앞으로 불 일이 없어야 좋지 않겠습니까, 그쪽 입장에서. 내가 다 그쪽 생각해서 해주는 말입니다. 자, 정신 차리고 신발 주워 신고 가 봐요. 괜히 여기 앞에 있지 말고. 맨발로 뭐하는 겁니까? 보기 흥합니다."

얼빠진 재영을 뒤로하고 운을 닫아버린 권태준이 몸을 돌려 윤슬을 바라 보았다. 침대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윤슬이 어색하게 입술을 움 직여 옷으려 했지만. 입 안쪽의 찢어진 곳에 이가 닿아 저도모르게 미간 울 찌푸렸다.

권태준이 욕실로 들어가 수건 하나를 빨아 왔다. 얼마나 꽉 쥐어짰는지 비틀어진 모양이 그대로 남은 수건을 움켜쥐고 권태준이 윤슬의 얼굴을 살 살 닦아냈다.

"아파요."

"아픈 거 알면서 그렇게 얻어터지고 있었습니까?”

"나도 많이 때렸는데.”

"그런 것 같기는 합디다. 난 윤슬 씨가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거, 날 침대 밀으로 가차 없이 일어서 떨어뜨릴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오늘 확 실하게 알았습니다."

뭐가 어째. 윤슬이 발로 권태준의 정강이를 찼다가 제 발가락이 되레 아픈 기분에 얼굴을 찌푸렸다. 입술 근처를 살살 문질러주던 권태준이 옷으 며 주름진 미간을 수건으로 쓱쓱 문질러 폈다.

"나보다 주먹질을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 배웠습니까?"

"배우긴 뭘 배워요? 그냥 욱해서 지랄한 거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런 개싸움을 대체 어디서 배워온 겁 니까."  

윤슬이 입술을 뒤틀며 눈앞에 쪼그리고 암아 있는 권태준을 밀었다. 쿵, 하고 엉 덩 방아를 월은 권태준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내가 히어로처럼 안 나타났으면. 윤슬 씨는 아직도 개처럼 얻어터지고 있었을 겁니다.”

“모르는 일이죠. 내가개처럼 형을 때리고 있었을지도."

얻어맞든 쥐어패든 개 같은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권태준이 윤슬의 옆으로 이동해 않아 윤슬의 어 깨를 끌어안았다.

"맞았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요. 다 그러면서 크는 겁니다. 다윰부터 싸울 때는 주변을 먼저 봐요. 돌멩이든 뭐든 단단한 거 있으면. 일단 그거 로 대가리를 후려치고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다 사람 죽어요!"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치는 겁니다. 어중간하게 패면 눈 돌아서 더 위험 합니다. 건드리면 죽일 거라는 각오를 보여줘요. 그래야 건드리지를 않습 니다.”

대체 뭘 가르치고 있는 건지. 그걸 듣고 있는 자신은 또 뭐고. 왠지 회의감이 느껴져 윤슬이 공,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잘했습니다. 맞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안심이 되네요.”

"이게 잘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주 잘했습니다.”

권태준이 칭찬을 하는 것처럼 윤슬의 정수리를쏙쏙쓰다등었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따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것에 윤슬이 눈을 감고 작게 웃었다.

“우리 윤슬씨 때릴 곳이 어딨다고. 형님은왜 때린 거랍니까?"

“개 같은 상황일수록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 윤슬 씨는 뭐예요."

"그럼 우리 윤슬 씨지. 남의 윤슬 씨입니까? 개 같은 상황일수록 확실하게 해야죠."

참나.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며 웃었지만권태준은 개의치 않았다. 저런 뻔뻔한 얼굴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닌지라 윤슬이 쯧, 하고 혀를 차며 권태준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동정을 받아야 할 것은 자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권태준은 본인 스스로 만족하며 살 고 있지. 그런 권태준의 꼴을 보고 있는 자신이 불쌍한 거였다. 이제껏 권태준울 불쌍하게 여겼는데. 정작 불쌍한 게 자신이었다는 깨달음에 윤슬 

"윤슬 씨. 왜 그럽니까? 어디 아파요? 역시 형님을 고이 보내지 말았어 야했나 봅니다."

남의 형 조질 생각하지 말고. 아. 그리고 그 형님 소리 종그만해요. 권태준 씨가 말하니까 왠지 업계 용어 같잖아요.”

"형님이 뭐 어때서 그럽니까? 윤슬 씨 형이면 나한테도 형님이지."

“우리 형이 권태준 씨보다 어 린데요?”

"……연식이종되어 보이던데, 어립니까?”

약간의 침묵 뒤로 묻는 권태준의 얼굴이 살짝굳어졌다. 윤슬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상하게도 그 주름마저 반 듯하니 참 잘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개새끼를 봤나. 꼬박꼬박 존대를 해줬더니 나이도 어린 새끼가 반 말울 지껄이고 가?"

왠지 모르게 분한 듯. 권태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결에 앉아 있는 터라 그것을 들은 윤슬이 권태준의 이 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형 욕하는 건 참아도 아버지 욕하는 건 안 참아요. 형이 개새끼면 우리  

"아니, 윤슬 씨는 그걸 뻔히 보고 있었으면서 왜 말을 안 해줬습니까?”

"뭘요? 형이 더 어린데 존대해준 거? 그거야 나는 권태준 씨 콘셉트인 풀 알았죠.”

“아무리 콘셉트라도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을 지절이는데 존대하게 생겼 습니까?"

"나한테도 존대하잖아요.”

"그거야 윤슬 씨는 귀여우니까 그러는 거고. 내가 그 호로새끼한테 안 귀 엽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납니까?”

"왜 나한테 화를 내요? 가뜩이 나 맞은 곳도 아픈데!”

"……아픕니까? 폼 누워요. 아니. 왜 아픈데 그러고 암아 있었습니까? 아프면 누워야지. 얼론 누웁시다."

언성을 높이던 권태준이 윤슬의 말에 태도를 바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슬울 침대로 일어 눕히고, 침대 아래로 늘어뜨렸던 발도 잡아 을 려 얌전히 침대 위에 놓아주었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윤슬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안 그럴 것 같은데. ……권태준 씨 은근히 상냥한 것도 같네요.” "상냥한 것 같은 게 아니라 상냥합니다. 다정하고, 달콤하고, 유머러스 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자기 자랑울 열심히 하던 권태준이 문득 윤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나 싶어 윤슬이 덩달아 긴장을 했다.

"왜요?”

"그냥……왜 이렇게 윤슬 씨를 괴롭히나 싶어서 말입니다.”

누워있는 윤슬이 머리를 쓸어주며 권태준이 못. 하고 혀를 갔다. 그 손길 이. 시선이 너무 부드럽고 다정해서 윤슬은 저도 모르게 권태준의 손에 뺨 을 문질렀다.

딱 보니 성격도 더럽게 까칠하고 고집스럽게 생겼습니다. 말도 예브게 안 하고. 사람 염장 질러놓고 큰소리칠 것 같고. 때리기까지 하는 겁니까? 몹쓸 농이네요."

"아니, 그건 그냥……어찌다보니 내가 먼저……."

"……잘했습니다. 역시 남자는 선빵이 중요한 겁니다."

왜 갑자기 태세 전환인 건데. 윤슬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웃 울 기분이 아닌데도, 권태준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어처구니가 없어 서 가공 이렇게 웃음이 나왔다. 미묘하게 옷긴 사람이었다.

“오놀은 왜 와서, 무슨 말로 윤슬 씨를 긁어놨습니까?"

윤슬의 터진 입술을 살피며 권태준이 을었다. 그에 잠시 생각울 하던 윤슬이 똥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예전에 형한테 잘못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던 거 기억 나요?”

"기억납니다. 그래서 형과 관계가틀어졌었다고."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게 맞다며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형이 악몸을 심하게 꿨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 지만, 어찌다보니 형의 악몽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악몸을 없애줬어요. 내 게 무슨 능력이 있는 건지 그때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죠. 형이 나를 괴묻처럼 보았거든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잘못에 대한 됫값이라고. 의도한 게 아니라지만 형의 동의 없이 형의 비 밀을 홈쳐본 거니까. 그때부터 십 년 가까이. 난 형에게 동생이 아니라 괴물이었어요. 그러다 결국 내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팡, 터져버려서……형 한테 악몸을 돌려줬어요. 난 그래도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그래, 어차피 욕먹는 거 형의 악몽 이라도 원래대로 돌려놓자. 다분히 나쁜 의도였다는 거 인정해요. 엿 먹으라고 그랬어요. 악몸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편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게 얼마나 과분한 거였는지 느껴보라고. 악몸을 다시 꿀 거라고 절대 예상하지 않 았울 거예요.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 조금은 잘해줬을까. 거짓으로라도. 잘 해주는 척이라도 했을까. 아무론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 맞은 형이 다시 악 몸을 없애달라고 요구하러 온 거예요. 내가 싫다고 해서 화를 낸 거고, 그러다 싸우게 된 거고.”

"거참, 성격 이상한사람이네. 그 사람은 사회생활도 안해봤답니까? 원 하는 게 있으면 수그릴 줄을 알아야지 . 뭐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와서 깽판 부리고 억지를 쓰고 갑니까? 깡패도 아니고. 사람울 이 지경으로 패놓고 끝까지 얼굴 빳빳하게 들고 가는 꼴을 봐요. 잘했습니다. 그런 놈하고는 상종하지를 말아야 합니 다."

왠지 권태준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권태준은 재영에 대한 험담을 하며 연신 잘했다고 윤슬을 칭찬했다.

“그렇게 억지 부리는 놈은 매가답입니다. 내가그런 놈 여럿 조져봐서 잘 압니다. 다을에 또 그러면 대가리부터 깨 놔요."

결국 대가리를 깨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권태준의 말에 윤슬이 한숨을 삼켰다. 언젠가는 한 번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영업 이사로 권태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제까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모론 척 넘겼지만, 이제 술 술 물어봐야 할 시기인 것도 같았다.

"권태준 씨가 저번에 진창울 구르는 바퀴가 된 것 같다고 했었죠. 이상해요. 사람들은 다 진창을 하나씩 가지고 있나. 지금 내가 그렇거든. 진창을 구르는 기분이에요. 내가 형이랑 머리채를 잡고 싸울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러고 있네. 발버둥을 치는데도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아요. 좋아지질 않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더라고요. 내 안에 진짜 괴물이 있는 것 같았어요.”

윤슬의 중얼거림에 권태준이 음, 하고 말을 골랐다. 턱울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던 권태준이 윤슬의 옆에 길게 드러누워 팔을 괴고 윤슬을 내려다보았다. 쭉 뻗은 손이 윤슬의 가슴을 작게 도닥거렸다.

"내가 보기에 윤슬 씨 안에는 괴물이 없습니다."

"내 안을 본적도 없잖아요."

“윤슬 씨는 윤슬 씨 안에 있는 괴물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묘하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이치에 맞는 말도 아니었다. 권태준은 가공 이렇게 사람 말문을 막히게 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형은 되도록 보지 말아요. 그러다 정말 그 사람이 윤슬 씨 안에 괴물을 키울지도 모르니까. 나는 원래부터 괴을인 사람도 없고, 결과적으로 괴을 이 아닌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다 괴물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고, 씨앗이 싹을 틔우듯 서서히 자란다고 생각해요. 윤슬 씨의 형은 본인으로도 모자라 윤슬 씨의 씨앗 마저도 키우려나 봅니다."

권태준의 말에 윤슬이 눈울 깜빡거렸다. 자신의 생각과 묘하게 비슷한 말이었다. 자신의 속에 있는 괴을이 자라고 있다고 가공 떠을리던 것과 흡사한 주장에 윤슬이 웃음을 흘리자, 권태준이 왜 그럽니까? 하고 을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요. 괴물은 점점 자라난다고. 그런데 내 안의 씨앗은 이미 싹을 퇴운 것 같아요. 괴물이 있어요. 아주 많이 커졌어요.”

눈을 내리깔며 침울하게 답하자 권태준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속에 는 조금의 못마땅함과 또 조금의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권태준이 윤슬의 머리를 쓰다등고는 조금 머못거리 더니 입을 열었다. 

"……뭘요."

"진짜 괴물을."

진짜 괴을을 보여주겠다니. 이해를 하지 못한 윤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권태준울 바라보았다. 조금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권태준은 윤슬과 시 선을 마주하며 말울 이었다.

"날 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날 겁내지 않을 거라고 약속한다면…… 내 안의 괴물을 보여주겠습니다. 윤슬 씨의 눈으로 보고, 비교해 봐요. 정말 윤슬 씨 안에 있는 게 괴을인지 ." 

또 하나의 괴물

"여태 자고 있었습니까?”

새벽까지 영화를 보다 잠들었으니 지금까지 자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닌 데. 대낮부터 남의 집에 쳐들어온 권태준이 당당하게 집주인을 타박했다. 왜 권태준은 회사도 안 가고 자신의 집에 있는 걸까. 멍하게 생각하던 윤슬은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토요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 회사원은 토요일에 회사를 안 가지? 그러고 보면 학생들도 토요일에 학교를 안 간다. 관공서도 토요일에는 일을 안 하고. 토요일에 모두 쉬는 데, 자신도 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멍청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자, 다가온 권태준이 윤슬의 팔 을 붙잡아 일으켰다.

"아직도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왜요. 나 내일도, 모레도 이러고 있을 건데."

"일어나서 씻고 나와요. 짐은 챙길 필요 없으니까, 속옷하고 잠옷만 내 가 챙겨두겠습니다. 뭐합니까, 얼른 안 씻고.” 윤슬울 욕실로 밀어 넣으며 권태준이 말했다. 멍하게 흐느적거리던 윤슬 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짐을 왜 챙겨요?”

“호엘 가야죠. 스위트름."

스위트롱이 이렇게나 위험한 단어였나. 권태준의 입에서 나오는 스위트 툼이 전혀 스위트하게 둘리지 않았다. 도리질을 치며 다시 침대로 향하는 윤슬의 앞을 가로막으며 권태준이 단호한 얼굴로 씻어요, 하고 말했다.

"대체 호텔은 왜 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매우 이상하고 위험하고 거부감 이 느껴지거든요!”

"전혀 이상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편하게 쉬려고 가는데 무슨 생 각을 하는 겁 니까."

그러니까 쉬어도 집에서 쉬겠다는데 부득부득 호텔로 끌고 가려는 이유 가 뭐냐고. 권태준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 눈만 대구루루 굴리고 있자 권태준이 소매를 접어 을리며 욕실로 묻어왔다.

"씻겨풀 때까지 그러고 있을 겁니까? 벗어요. 씻겨주겠습니다.” 

티셔츠를 잡아 벗기려는 손을 막아 밀어내며 윤슬이 짜증울 부렸다. 이 러다 정말 씻겨주겠다고 덤빌지도 모론다는 위기감이 돌었다. 권태준을 욕 실 밖으로 일어내고 윤슬이 문울 잠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권태준이 속옷이 돌어있는 서랍을 열어놓고 고민하 는 게 보였다. 남의 속옷을 대체 왜 저리 유심히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가가자, 권태준이 빨간색과 파란색 속옷을 양손 에 둘고 물었다.

"어떤 걸 챙겨갈까요. 발간색은 정열적으로 보이고, 파란색은 시원해 보 이고. 내가 고론다고 골랐는데, 난 두 개 다 마음에 돕니다."

"권태준 씨 아몸에 드는 속옷이 왜 필요한데요?"

권태준의 손에서 속옷울 낚아채 다시 서랍으로 일어 넣으며 윤슬이 따졌 다.

“고르는 사람 마음에 드는 것으로 손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게 싫으면 윤슬 씨가 챙겨야죠. 지금 보니 호피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윤슬 씨 속옷 패션이 화려하네요. 하얀색만 입을 것처럼 단정하게 생겨서 은근히 야합니다."

"내 속옷에 신경 끄시죠.”

검은색 드로즈를 꺼내 허리에 두론 수건 안으로 착용한 윤슬이 서랍을 닫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권태준이 다시 서랍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윤슬이 보란 듯이 서랍을 닫자, 권태준이 다시 서랍울 열었다.

"뭐해요?”

“속옷 꺼내요. 한두 장 정도. 잠옷도 챙기고. 이런 식이면 체크인 시간늦 어집니다. 폼 빨리 움직이죠.”

"나 안 간다니까.”

"아뇨, 갑니다. 나 못 믿습니까."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아예 믿음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 권태준이 저리 물으니 못 믿을 것처럼 느껴졌다. 윤슬이 반히 쳐다보자권태준이 헛기침을 했다.

"사람 막 믿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아무튼 갑시다."

사람 막 믿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자기는 믿어보라는 말이 나와야 하 는 거 아냐? 더 이상한데?

의심을 플지 못하는 윤슬의 등을 밀며 권태준이 채근했다. 내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속옷 두어 장울 꺼내고, 편한 옷도 한 벌 꺼냈다. 구시렁거리 며 가방에 넣기가 무섭게 권태준이 윤슬의 손목울 잡아끌었다.

"가스도 잠갔고, 보일러도 껐고, 콘센트도 냉장고 제외하고 다 뺐습니 다. 화장실 불도 껐고, 을도 잘 잠겼고. 체크할 건 내가 다 했으니 이제 문 만 잘 닫히는 거 확인하고 가면 됩 니다.”

왜 자꾸 이렇게 서두르지. 점점 더 이상한데. 손목을 붙잡고 있는 권태준 의 손을 털어내며, 윤슬이 허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벗었다.

"적당히 해요. 나 아직 옷도 안 입었어요.”

"빨리 입어요. 왜 호텔 가기도 전에 누드를 보여줍니까?”

집중해서 쳐다보는 주제에 왜 화는 내고 있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혀를 차자 권태준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빨리 옷을 입으라고 채근했 다. 그렇게 손가락 확 벌리고 볼 거면 그냥손을 치우든지. 저게 대체 뭐하 는 짓일까 고민하며, 윤슬이 블랙 팬츠에 자카드 셔츠를 걸쳐 입었다.

셔츠의 소매를 적당히 걷어 을리고 있자, 권태준이 윤슬의 가방을 대신 들고 현과 앞에서 대기를 했다. 마치 산책가자고 조르는 대형견과도 비슷 한 모습에 윤슬이 웃음을 흘렸다. 명치 생각 못 하고 공공거리는 모습이 정 말 홉사했다.

"나랑 호텔 가서 뭐하려고, 자꾸 호텔에 가자고 해요?”

"여행가는 건 싫다니까, 여행 온 것처럼 기분도 내고하루 폭 쉬다오자 는 겁니다.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누워서 현대 문명의 서비스를 느끼고 옵 시다.”

현대 문명의 서비스라니. 뭐 얼마나 서비스를 해준다고 저러는지. 기껏 해야 름서비스에 에어컨 팡팡 트는 정도인데, 그건 호텔 룸 빌리는 돈으로 집에서도 충분히 가농한 일이었다.

블랙 로퍼를 꺼내 신고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자, 권태준이 술그머니 다 가와 손울 잡았다. 앞뒤로 살짝살짝 흔들리는 손에 감추지 못한 플거움이 전해져왔다.

윤슬은 체크인을 하는 권태준에게서 조금 떨어져 무심하게 라운지를 내 다보았다. 5성급 호텔도. 으리으리한 건물도. 뭔가 돈을 처바론 것 같은 인 테리어도, 남자 둘이 토요일에 호텔을 찾아왔다는 현실 앞에서 감동을 주 지 옷했다. 권태준은 스위트룸이 어찌고 하며 체크인을 하겠지. 

확인이 끝났는지 권태준이 윤슬울 부르며 손짓했다. 아는 척하지 않았으 면 좋겠는데. 뭐에 휼렸었나. 여길 왜 따라왔울까. 윤슬은 자신의 섣부론 행동을 후회했다. 얼굴울 가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울 누르며, 윤슬은 최 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비즈니스 때문에 온 것처럼 행동하자. 남자 둘이 호텔에 오는 게 목 이상한 이유만 있지는 않울 테니까. 일 때운 에, 접대를 위해 온 것처럼 행동하면……접대라고 하니 또 이상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론 생각에 빠져있는 윤슬을 잡아끌고 권태준이 엘리 베이터를 탔다. 쭉 위로 솟구쳐 오르는 엘리베이터에서 권태준은 뭐가좋 은지 작게 휘파람울 불었다.

"준비되었습니까?"

"뭐가요?"

대체 뭘 준비해야 하는 건데?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져 윤슬이 꿀 꺽침을삼켰다.

"충분히 기대하고 있느난 말입니다."

"기대할 게 뭐가 있어요. 호텔 처음 와보는 것도 아닌……ㄱ 스위트룸이라고 해봤자 이그제큐티브는 특별한 것도 없다. 그저 벽 하 나 세워서 나뉜 공간에 소파가 있다뿐이지. 객실 문 앞에 당도하여 심드렁 하게 대꾸하던 윤슬은 권태준이 활짝 연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눈을 휘둥그레 딨다. 뭔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권태준은 한쪽으로 비켜서 윤슬이 안으로 돌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무슨. ……미쳤다.”

감탄울 내별으며 한 발 안으로 들어선 윤슬이 떨리는 시선으로 객실 안 을 살폈다. 무엇울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했던가. 플로어를 거쳐 리빙룸 과 다이닝룸. 서재와 침실을 둘러보던 윤슬이 저를 졸졸뒤따라오는권태준울 향해 돌아섰다.

"완전……돈지랄."

"거봐요. 후회 안 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권태준씨 미쳤어요? 이걸……여기서 하루 지내는데 가격이……."

하루 천만 원 이상 한다는 프레지덴설에 지금 와 있다고? 너무 어이가 없고 당황하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허.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윤슬 을 지나쳐 권태준이 팔을 쭉 뻗어 큰대자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가끔 이런 사치도 부리고, 또 가곰 헛돈도 써보고, 미친 짓도 해보고. 그 래야 사는 게 재미있지 않습니까.”

카드 긁울 때 재미보다손이 먼저 떨릴 것 같은데. 윤슬은 권태준울 버려 두고 천천히 스위트룸을 돌아보았다. 넓기도 넓고. 뷰도좋았다. 좋기는 하 지만 확실히 과분한 느낌. 둘이서 이렇게 넓은 공간울 빌릴 이유가 있을까.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에 들어와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 고 있자, 어느새 따라온 권태준이 겹치듯 서서 윤슬의 몸을 유리창으로 늘 렸다.

“욕실에서 이런 자세도 괜찮울 것 같기는 합니다.”

"뭐래. 좀 떨어지죠.”

짜부라질 것 같은 느낌에 권태준을 일어내자, 친근하게 윤슬의 어깨에 손을 두론 권태준이 눈을 살짝 찡긋거 렸다.

"뭐부터 하겠습니까. 식사? 목욕? 아니면 침대로?”

"당연히 식사죠."

뒤에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윤슬이 덧붙인 중얼거림에

권태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귓가로 입술을 바짝 붙인 권태준이 속삭였다.

"침대에 누워서 룸서비스 받아보겠습니까? 다론 서비스는 내가 해주겠 습니다.”

"개소리하지 마시죠.”

왠지 모르게 끈적거리는 뉘앙스가 섞인 권태준의 말을 윤슬이 단호하게 일축했다.

느지막이 푸짐한 점심을 먹고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책 몇 권울 꺼내 서 소파에 누워 읽는 시늉을 하다가 잠이 둘었다. 소파의 쿠션이 얼마나 좋 욘지 침대로 이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던 윤 슬이 귀를 때리는 어마어마한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몇 장 넘겨보지 못하고 가슴 위에 떨어져 있는 책울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윤슬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권태준울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아노 너머에서 보면 그럴듯한 연주자처럼 보이는데 귀로 들어 오는 선을은 소옹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귀를 테러하고 있는 권태준의 행 동에 윤슬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 폼 나지 않습니까.”

"막 테러해요."

"한번 쳐보고 싶었습니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멋있어 보이니까그 "제대로 쳐야 멋있죠.”

"배운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럼 치질 말았어야지. 윤슬이 귀를 막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권태준이 껄껄 웃었다. 더 크고 과격하게 건반울 누르는 것울 보면 플기는 것 같기도 했다. 권태준이 어마어마하게 가격이 나갈 것 같은 피아노를 부 수기 전에 막아야겠다며 윤슬이 일어나 권태준울 피아노에서 끌어 냈다.

"무슨 장울 그렇게 잡니까?”

"독서하다 잠깐 눈 감고 있었던 거 거든요.”

"코골던데요." "……잠깐 잠들었던 거예요."

"새벽에 안자고 뭐했습니까."

"새벽 감성을 누렸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화와 미국 드라아를 며칠째 주야장천 보았다는 말 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도 아닌데, 마치 혼나기가 두려워 거짓말을 하는 아등이 된 기분이었다. 

."윤슬 씨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뭔가 같이할수 있는 걸 합시다. 호텔까지 왔는데 자다가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같이할 게 뭐가 있어요?”

"몰라서 묻는 겁니까? 지금 당장 침대에서 할 수 있는 것만도수십 가지 인데."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정체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윤슬이 못 들은 척 무시하자, 권태준이 윤슬의 손목을 잡아 응접실로 이끌었다.

"아직 배고프지는 않죠?"

"움직이질 않았더니 별로요."

"그럼 영화나 한 편 같이 봅시다.”

다행히 침대에서 할 수 있는 수십 가지 중의 한 가지를 실행할 의도는 없 는 듯 보였다. 윤슬이 응접실의 소파에 냉큼 올라가 앉자, 권태준이 고심해 서 영화를 골랐다. 화면을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소파에 드러눕는 사이 권태준이 맥주를 가져왔다.

“뭐 골랐어요."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윤슬의 머리를 들어 그 자리에 앉은 권태준이 허벅지 위에 윤슬의 머리 를 올려놓았다. 건네주는 맥주캔을 따서 누운 상태로 비스등하게 마시자, 그런 윤슬울 권태준이 어이없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신기하게도 마십니다. 일어날 생각은 없습니까?"

"귀찮게 뭐하러. 나 누워서도 잘 마셔요. 아, 저거 공포영화네요."

“무서워서 못 봅니까."

그 질문울 하는데 어째서 눈을 반짝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뇨.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아요. 공포영화는 왠지 좀 유치해서 안 보는 편이거든요. 시청각적 효과로 사람 놀라게 하는 거 별 로기도 하고."

윤슬의 대꾸에 권태준은 눈에 띄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기대 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윤슬은 맥주를 홀짝이며 이제 막 시작한 영화에 집 중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다론 이유 중에는 잘 만들어진 수작이 흔치 않은 탓도 있었다. 이 영화도 분명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초 반에는 집중해서 보던 권태준도 중반이 지나자 윤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으로 비비 꼬며 딴짓을 했다. 찍, 하품을 하던 윤슬이 빈 캔울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다론 캔울 들었다.

“귀신 영화는 너무혼해요. 차라리 종비 영화률 만둘지."

“뭐가 다릅니까?”

"실체가 있는 것과 실체가 없는 건 다르죠. 전 오컬트는 안 좋아하지만, 고어나 술래셔는 가공 보거든요. 유치해도 보는 맛이 있어요.”

"무슨 차이인지 알 것 같습니다. 뤼향이 상당히 과격하네요."

“어차피 영화니까."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도 윤슬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아도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다. 그게 재미가 있든 없든. 시작 은 했는데 끝을 보지 않으면 왠지 화장실 갔다가 뒤 안 닦고 나온 것처럼 찜 찜한 기분이 들었다. 재미가 있다면 중간에 안봐도 나중에 집에서 혼자 다 시 보기라도 할 텐데, 이런 재미없는 영화는 그냥 한 번에 해치우는 것이 이로웠다. 나중에 다시 불 마음도 생기지 않는데 결말을 보지 않으면 찜찜 한 마음까지 남아서 이래저래 고통이니까. 이래서 뭐든 선택을 잘해야한 다는 건가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며 윤슬이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재미도 없는데 시간마저 긴 영화였다. 이런 영화가최악이지.

꾸역꾸역 봤더니 온몸이 결리는 기분이었다.

"두 시간 동안 노동을 한 것 같네요. 누워서 보기만 했는데도 지치네.”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알고 있으니 더 말하지는 않을게요.”

그나마 알고 있으니 다행이지. 지치지도 않는지 권태준은 또 다론 영화 룰 틀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액션 영화였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 딱 좋은 영화. 스토리는 없고, 화려함만 있는 영화. 윤슬이 흥미롭게 보는 와 중에 권태준은 서너 번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었는데, 시간 이 좀 지나서 둘아온 권태준이 윤슬울 일으켰다.

"왜요?"

이번에는 잘 보고 있는데 방해를 한다. 귀찮은 내색을 하는 윤슬을 권태준은 소리 없이 이끌었다.

"영화는 이쯤 봅시다."

“끝까지 봐야 하는데……"

“어차피 주인공이 이깁니다."

묻론 그렇기야 하겠지만. 어, 어. 하고 끌려가던 윤슬이 욕실에 당도하여 걸음을 명추었다. 동그란 원형 욕조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걸 하려 고 왔다 갔다 했구나. 입욕계까지 플었는지 물이 조금 탁한 색이었다.

“들어가서 옴종플어요."

윤슬의 어깨를 일며 권태준이 말했다. 자리를 비켜주려는 것인지 권태준이 욕실에서 나가고, 윤슬은 주변을 둘러보다 옷울 벗었다. 대리석 계단울 밟고 울라가면 커다란 원형 욕조가 움푹 돌어가 있는 구조였는데. 영화에 서 나 불법한 것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뜨거울까봐 천천히 발부터 일어 넣었는데 기분 좋울 정도로 적당히 따뜻한 온도였다.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등울 기대자, 권태준이 와인과 접시를 둘고 다시 욕실로 들어왔다.

어떻습니까?”

"좋네요. 역시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나 봐요."

“거봐요. 좋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는 별다론 문제가 없어서 권태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근처로 다가온 권태준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밀었다.

“냉장고에 있던 거?"  

"그건 삼페인이고, 와인은 따로 시켰습니다. 과일하고.”

먹기 좋게 잘린 과일 접시를 내려놓고. 권태준이 와인을 따서 윤슬이 들고 있는 잔에 따라주었다.

"호사를 누리네요.”

한 모금 머금은 와인 잔을 빙글 둘리며 윤슬이 낮게 웃었다. 권태준이 뭔가를 작동시켰는지 욕실 유리창을 가리고 있던 불라인드가울라갔다. 신 경 쓰지 않아 을랐는데, 어느새 해가 진 지 오래되었는지 창밖은 어두웠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아래로 거리의 조명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나봐요. 어듭네요."

창 쪽으로 몸을 기울여 창밖울 내다보며 말했다.

"아홉 시가 넘었습니다."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네."

윤슬의 대꾸에 권태준이 웃었다. 왜 웃냐며 윤슬이 고개를 젖혀 쳐다보자, 권태준이 탈의를 하고 옆에 있던 샤워부스로 들어갔다.

"왜 옷었어요?”

"끼니 챙겨 먹는사람처럼 말해서 옷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왠지 밥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랬지.”

"그래요. 씻고 나면 밥이라도 먹욥시다."

“설마 지금 여기 돌어오려고 벗은 건 아니죠?”

몸을 적신 권태준이 나체로 윤슬의 앞에 섰다. 의도치 않게 권태준의 물 건을 정 면에서 바라보게 된 윤슬이 창밖으로 고개를 둘렸다.

“난 사우나가뤼향이라서 말입니다."

"여기에 사우나가……있네요."

어디 있나고 을어보려 했는데, 권태준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둘리던 윤슬이 시선 끝에 닿은 사우나실에 말끝을 흐렸다. 뭐 저런 것까지 만들어 뒀대. 유리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간 권태준이 나무 의자에 앉아 윤슬을 향 해 살랑살랑 손울 혼들었다.

다리를 좀 오므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못 불 것은 보지 말자며. 윤슬이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했다.

아, 권태준 앞에서 나체로 활보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수십 명의 사람 둘이 알옴으로 둘아다니는 목욕탕울 떠을리면 호들갑 떠는 것도 새삼스러운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자니 권태준이 마음에 걸리고.

샤워를 하고 나온 윤슬울 향해 권태준이 들고 있던 가운을 활짝 벌렸다. 그것을 받아 입고 허리끈을 묶자, 권태준이 가볍게 어깨를 감싸 욕실 밖으로 이끌었다.

"마음은 좀 플어졌습니까?"

"좋네요. 평소에 욕조는 사용을 안 해서 목욕탕이나 찜질방 가는 거 아니면 이렇게 몸 담글 일이 없잖아요."

“나는 사우나 종좀 가는데, 윤슬 씨는 안 갑니까?”

"안 가는데요."

뭐지, 저 아저씨 같은 발언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슬을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끈 권태준이 윤슬을 침대에 앉혔다.

"왜, 왜요?"

“와인은 다 마셨습니까?"

"이미 한참 전에 다 마셨죠.”  

“윤슬 씨가 술꾼이라는 걸 잊었습니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한 병이 동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양주도 아니고 기껏해야 와인인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노곤하게 풀어져서 더 빠르게 마셨던 것도 같고.

"가볍게 한잔씩만 더할까요?"

한 잔이라고 말한 권태준의 손에는 와인 한 병이 둘려있었다. 뭔가를 또 시켜놨었는지 들고 온 접시 위에는 치즈와 과일과 빵이 푸짐했다. 접시를 침대 중앙에 내려놓은 태준이 와인을 따라 한 잔을 윤슬에게 건넸다. 접시 를 가운데 두고 윤슬과 마주 보는 자세로 침대에 누운 권태준이 와인울 몇 모금 삼켰다.

"사실 난와인 취향은 아님니다. 옹료수 마시는느낌이라서."

"그럼 양주 취향이에요?"

"아뇨, 소주 취향이죠."

"나는 맥주. 아, 맥주에 치킨 먹고 싶다"

와인을 끌꺽꿀꺽 삼킨 윤슬이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말하자. 권태준이 옷옹을 흘렸다.

“분위기 없이 스위트룸에서 치맥 생각이 납니까?”

"소주 이야기를 먼저 꺼 내신 분이 할 소리가 아니죠.”

"그건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돈울 벌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스테 이크에 와인보다 삼겹살에 소주가 더 좋습니다. 근본은 바뀌질 않는 모양 이죠. 고아새끼, 가난뱅이, 뒷골목 조폭.”

가만히 듣고 있던 윤슬은 권태준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움찔 몸울 굳혔 다. 역시 회사원이 그냥 회사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폭이었나. 조폭 졸 업하고 회사를 다니는 건가, 아니면 겸업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회사 원 같은 조폭인가. 데구루루 눈을 굴리던 윤슬이 음, 하고 말읕 끌었다.

"있죠, 이건 목 대답을 안 해줘도 괜찮은데……좀 궁금했던 게 있거든요.

"궁금하다는 건 좋은 겁니다. 관심이 있다는 말이니까."

"권태준 씨는……하는 일이 뭐예요? 평범한 회사원 같지는 않아서요."

윤슬의 물음에 권태준은 반쯤 남아있던 와인을 비우고, 빈 잔에 가득 술 을 따랐다. 넘칠 것처럼 찰랑거 리는 와인을 윤슬이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회사원입니다. 영업 이사."

"아, 예. 영업 이사."

권태준의 대꾸에 윤슬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권태준이 픽, 웃음을 휼렸다.

"회사원이기는 한데, 사원이 아니라 조폭 말단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때 가 한창 시끄러웠던 때였거든요. 조직도 들썩거리고. 이래저래 사건도 많 이 터지고, 사람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때 운 좋게 큰형님 눈에 둘어서 쭉 치고 올라갈 수 있었죠. 보통은 조폭돌이 구역 나눠 주먹질하면서 동네 술집 보호세나 병 뜬고 다니는 줄 아는데. 개중에 은근히 머리 잘굴리는 농들도 많아서 조직이 기업으로 탈바꿈하기도 합니다."

"……그럼 회사는."

“금방 묻히긴 했지만 한때 소문이 돌기도 했었는데, 못 들어봤습니까? 가 조폭이 만든 기업이라고.”

"들어보긴 했어요. 루머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소문 묻어버리는 건 일도아닙니다. 이미지 좋은 기업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고."

뭔가 심오하구나. 꾸벅꾸벅 흔들리는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윤슬이 치즈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손을 뻗은 권태준이 연이어 입에 넣어주는 치즈를 받아먹으며 윤슬이 힘겹게 혀를 움직였다.

"그럼 권태준 씨가 하는 일은? 그건 회사 일이에요, 아니면 조폭 일이에

요?"

"둘 다 합니다. 조폭이 회사 차렸다고 조폭이 아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쁘겠네요, 투잡 뛰느라.”

"그렇군요, 투잡.”

치즈가 녹아 끈적한 혀를 빨며 윤슬이 와인으로 입을 축였다. 바닥이 보이는 잔에 권태준이 재차 와인을 따랐다.

"위험한 일도 하고, ……무서운 일도 해요?”

"무서운 일은 뭡니까?”

"그러니까, ……나쁜 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뒤하지만 그렇고 그런, 무섭고 나쁜 짓. 윤슬이 내밷지 못한 말을 입 안에서 굴리고 있자, 권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운 잔 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짓.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짓, 잡히면 쇠고랑 찰 게 분명한 짓, 까닥하면 목숨 날아가는 짓."

접시마저 협탁 위로 올려놓은 권태준이 비워요. 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윤슬이 착한 아이처럼 잔을 비우자, 그 잔울 받아서 접시 옆에 내려놓고 권태준이 몸울 움직여 윤슬에게 바짝 다가왔다.

"입 벌려요."

왜요. 라는 말을 내별기도 전에, 약간의 틈을 두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방울토마토 하나가 일려 들어왔다. 혀로 매끈한 열매를 굴리다 이를 세우자, 약간 짭조름한 과육이 퍼졌다.

"할 준비는 되었습니까."

"……뭐……뭘 해요?”

말을 조금 더듬은 것도 같다. 윤슬이 본능적으로 방어하듯 가운의 앞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묻자, 권태준이 윤슬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처녀처럼 옷은 왜여밉니까."

"원지 묻라도 할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내가 보기엔 충분한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아니라니까요."  

"뭔 줄 알고 아니라고 합니까."

"뭐든.”

"나랑 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겁 니까?”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히며 말하는 것에 윤슬이 힐곰 권태준의 눈치를 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라기보다, 뭐랄까조금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상대가 권태준 씨라서 싫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할 마음이 없어서 그래요. 발정 난 것도 아닌데 가볍게 옴 섞는 것도 싫고, 가공 하고 싶은 마음이 둘어도 혼자 처리하는 게 편하고.”

"그럼 저번에 나랑 같이 딸 친거는."

꼭 표현을 해도. 말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데. 정작 듣는 사람이 머쑥해져 윤슬이 뺨울 긁적였다.

"그거야 어쩌다보니 분위기가 그랬지만, 그래도 끌까지 하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묻고 발고 좆 대신 흔들어주는 것은 괜찮고, 쑤시고 박는 건 안 된다? 이상한 논리입니다.”

듣는 귀가 괴로워지는 기분이다. 윤슬이 귀를 막으며 입마저 꾹 다묻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버티자, 귀를 막고 있는 윤슬의 손울 때어내며 권태준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살며시 마주하고 있는 입술 사이로 권태준의 옷을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웃어요?"

"윤슬 씨가귀여워서 옷습니다. 은근히 야한사람이네요.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습니까?"

"권태준 씨가 먼저 말했잖아요."

"섹스 애길 꺼낸 건 윤슬 씨입니다."

“할 준비되었나고을었잖아."

"누가 떡 치자고 했습니까? ……괴물을 볼 준비가 되었나고 을은 거였습니다."

"아…… 그거. 그럼 폭바로 울어봤어야지, 그렇게 을어보면 어떻게 해요? 누구든 오해했울 거라고."

"오해하라고 그런 겁 니다. 혹시라도 좋다는 말 나오면 그쪽으로 방향을 틀 예정이었거든요.”

이 새끼가. 윤슬이 힘을 주어 밀어내자, 반쯤 뒤로 밀려났던 권태준이 다시 다가와 윤슬의 몸을 붙잡았다. 팔베개를 하듯 윤슬의 목 아래로 팔을 넣 어 어깨를 끌어안고, 나란히 누운 권태준이 입을 열었다.

“사실 준비가 되었는지 모르겠는 건 나입니다. 내가윤슬씨에게 보여풀 준비가 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딱히 보여주지 않아도……"

"그래도 윤슬 씨에게 도움이 된다면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윤슬 씨는 계속 자기 자신을 괴을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내가 보기엔 새끼 괴물 축에도 못 끼는데 말입니다."

윤슬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듯 입술울 대고 중얼거리던 권태준이 윤슬 씨, 하고 불렀다. 권태준의 입술이 닿은 부분이 간질거렸다.

"네."

"난 평소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내일은 늦게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나와 마주치는 게 꺼려진다면 먼저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일 일어나서 키스해줘요. 아무것도……달라지지 않았다고."

"그렇게 걱정이 되면, 안봐도 상관없어요."

"남아일언중천금 아님니까. 사나이가 하겠다고 해놓고 발 빼는 것만큼 쪼잔한 것도 없습니다."

"참 사나이답네요."

권태준의 입술이 힘주어 관자놀이를 늘렀다. 윤슬이 고개를 돌려 권태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걱정이 되고, 이렇게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에게 치  

부를 보여주려고 하는 권태준은 어떤 마음일까. 살며시 권태준의 뺨을 감싼 윤슬이 고개를 들어 권태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때어냈다.

"목 기억해둘게요."

"보통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빈말은 못하는 성격이라서."

"좋은 성격이기는 한데 씁쓸하네요.”

적당하게 에어컨 온도를 맞춘 권태준이 이불울 배 위로 잡아당겼다. 푹신한 베개를 베고 나란히 누운 권태준이 윤슬의 손울 살며시 감싸 쥐었다.

"이제잘 시간입니다.”

"잘 자요."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으니, 좋은 꿈을 꾸라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그럼 그냥 입 다물어요."

“알겠습니다."

야경의 불빛이 창문으로 희미하게 반사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슬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권태준의 악몽 속에 들어을 때면 마치 일렁이는 어둥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고 메스꺼운 느낌이 나며 어지러 운 기분. 분명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손울 늘어뜨리고 무기 력하게 서 있던 윤슬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윤슬이 나타날 때마다 즉각적으로 모습울 드러내던 권태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악몽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

"권태준 씨."

권태준이 있음을 느껄 수 있었다. 어둥 속에서 숨죽여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권태준의 시선을 윤슬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권태준 씨 ! 빨리 나와요."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지만 권태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으로 찢은 종이처럼 악몸이 갈라지며, 마치 윤슬에게 다가오라는 듯 한 풀기의 길이 나타났다. 권태준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윤슬이 발아래에 닿아있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먹을 꽉 쥐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윤슬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권태준의 악몸이 펼쳐졌다. 깊은 동굴속으로 빨려 들어 가는 것처럼, 윤슬은 천천히 악몽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수많온 사람들이 피를 훑리고, 수많은 사람돌이 비명을 지르는 아비규환 속에서 수많은 권태준이 그들을 난도질했다. 고문이라고 느껴질 정도 로 방법은 다양했으나, 그것울 자행하는 권태준의 얼굴은 한결같이 무표정 했다. 즐거운 얼굴도. 괴로운 얼굴도, 술픈 얼굴도 아니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권태준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기꺼웠울까, 스스로가 싫었을까, 슬펐을까, 고통스러웠을까, 후회는 하고 있울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변명 하고 있울까. 권태준의 생각을, 권태준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윤슬은 수많은 권태준과 이름 모를 사람들을 지나쳐 길의 마지막에 당도했다.

"……어?"

눈앞에 나타난 형체를 이해하지 못한 윤슬이 당황하여 입을 벙긋거렸다. 권태준의 악몸이 아닌, 강호수의 악몸이었나 하는 착각이 드는 장면이었 다.

중년 남자에게서 맞고 있는 소년. 본래의 주인에게 뺏어온 악몽 속에서 매일같이 윤슬이 보았던 중년 남자와 어린 소년. 그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몸울 웅크린 상태로 매질을 감당하고 있는 어린 강호수. 그런 강호수를 때리고 있는 고아원 원장.

소리죽여 문이 열리고.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 졌다. 또 다른 소년이 머리통만 한 수석을 힘겹게 쥐고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중년 남자의 가슴에 올라탄 소년이 커다란 돌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돌덩이가 아래로 내리꽂힐 때마다 수박 으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죽어버려, 개새끼야. 죽어!

소년의 얼굴에 피가 튀고. 손으로 쥐고 있는 수석이, 그리고 그 수석을 쥐고 있는 소년의 손이 피로 젖었다. 피범벅이 된 얼굴로 소년은 눈을 희번 덕거렸다. 광기에 찬 미치광이처럼. 소년은 울부짖으며 죽은 남자의 머리통을 때리고 또 때렸다.

"나의 첫 살인이었습니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귓가에 권태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윤슬이 흠칫 놀랐다. 

“사람온 참 쉽게 죽는구나. 내가그때 느낀 겁니다.”

윤슬은 힐곳 고개를 둘려 피투성이가 된 소년을 바라보았다. 권태준의 어릴 적 모습. 권태준의 첫 살인. 권태준의 공찍한악몽의 시발점.

기람울 죽였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경악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은 둘지 않았습니다. 단지, 드디어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 어찌면 조금 기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후회하지 않아요. 다시 저 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 저 인간울죽일 겁니다."

"그러면서 왜 모습은 감추고 있는데요. 그렇게 당당하면서 왜 나타나지 않아요?”

“윤슬 씨가 두렵습니다. 날 바라불 윤슬 씨의 시선이 두렵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에 윤슬이 콧방귀를 뀌었다. 허공으로 손울 뻗어 움 켜쥐는 시늉을 하자,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윤슬의 손아 귀에 목이 잡힌 권태준의 모습이 드러 났다.

"겁쟁이."

"두렵다고 하는 사람을 안아주지는 못할망정, 독설을 날립 니까?"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겁쟁이를 겁쟁이라고 부른 것 가지고 무슨 독설?”

입술을 뒤를며 지적하자, 권태준이 목을 움켜쥐고 있는 윤슬의 손 위에 제 손울 겹쳐 감쌌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운 권태준의 얼굴에 작게 웃음기 가둘았다.

"내가 왜 윤슬 씨를 괴을의 새끼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까? 진짜 사람울 죽인 인간 같지도 않는 괴을 놈울 앞에 두고 "화가 나서 사람울 해코지하고 싶다는 나쁜 생각을 했어요."하고 회개하는 어린 양울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태준 씨가 얼마나 인간쓰레기에 나쁜 놈인지를 보고 위안을 얻으라는 거였어요? 권태준 씨에 비하면 나는 아직 괴을이라는 명함울 내 일 정도도 못 된다고?”

"내 명함 못 봤습니까? 나도 그런 명합은 없습니다. 그런 명함을 왜 팝니까?"

이게 지금 말장난 하자는 풀 아나. 윤슬이 손으로 잡고 있는 권태준의 목을 힘주어 당기며, 발로 권태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권태준이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정강이를 붙잡고 껑충 뛰었다. 

죄책감이라도 느껴요? 그래서 이런 악몸을 감당하고 있어요?"

"죄책감울 느끼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위선적이지 않습니까. 고통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닌데. 이미 벌어진 일에 내 가 후회하고 자책하고 반성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일이 아닙 니까. 둘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고통 받고 있잖아. 매일 이런 악몸을 꾸면서. 반성하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이렇게 혼자서 고통 받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데.

윤슬은 그 말울 내별는 대신 권태준의 앞자락울 움켜쥐었다. 힘이 둘어 간 윤슬의 손울 감싸며 권태준이 토닥거렸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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