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린 김중건이 미친 듯이 비명 을 질러댔다.

"함께해요."

반년 전 제 손으로 보낸 아내의 관 속이었다.

어둑한 길을 걷는 윤슬의 얼굴은 찌푸려진 상태였다. 입 안에 궁실거리 는 벌레가 가득 찬 느낌이 남아있었다. 떨은 얼굴로 입맛울 다시며 윤슬은 익숙한 길을 걷듯 휘적휘적 걸음울 옮겼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길의 양옆으로 수많은 어둠이 있었다. 눈 울 가늘게 뜨고 그 어둥 속울 살피면, 익숙한장면들이 펼쳐졌다. 마치 수 많은 방에 각기 다론 채널의 텔레비전을 틀어놓은 것과 비슷했다.

쇼핑을 하는 사람처럼. 흑은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처럼. 어둠 속읗 하나 하나 살피며 걷던 윤슬이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의 막바지에 이르러 걸음울 멈췄다.

실제로 만나본 적 없지만. 꿈속에서 수없이 반복하여 본 탓에 너무나도 익숙한 여자가 있었다. 누군가를 향해 울부짖으며 저주를 퍼붓는 여자. 그 상대를 대신하여 이제는 윤슬울 향해 분노를 뿜어대고 있는 여자.

윤슬은 조용히 그 여자의 앞에 섰다. 핏을이 흐르는 눈으로 윤슬을 바라 보며 여자는 울부짖었다.

"갈래요."

그리 물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윤슬은 알고 있었다. 대화를 

할 수도 없고, 다른 어떤 행동도 통하지 않았다. 윤슬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저 가만히 서서 그 악몽과 고통을 악몽의 주인 대신 감내하는 것뿐.

"둘아갈래요?”

여자는 대답 대신 피눈을을 쏟아내며 배 속에서 알 수 없는 장기를 끄집 어내 윤슬의 발밑으로 던졌다. 살아있는 것처럼 궁실궁실 움직이는 핏덩이 를 내려다보며 윤슬은 울음울 삼켰다.

"당신을 여기 두는 게……아무의미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형에게도, 나 에게도, 당신에게도. 아니, 당신은 그저 허상일 뿐이지만."

윤슬은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 며 여자가 몸을 뒤틀었다.

"알아주기룯 바랐던 건 아니야. 형의 악몽을 없애는 대신 내가 무엇을 짊 어져야 했는지 형은 몰랐읕 테고, 지금도 모를 거고, 앞으로도 모를 테지 만 "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는 강호수조차도 알지 못하는 비밀. 악몽을 없애는 대가로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 그것을 감  

내하면서도 윤슬은 단 한 번도 그것이 부당하다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누 군가 짐을 덜어낸다면. 다른 누군가는 덜어낸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이 당연 하다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형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면 안되는 거잖아. 형 이 나# 그런 식으로 쳐내면 안 되는 거잖아."

윤슬은 여자의 얼굴울 바라보았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원래의 상태 를 알아불 수 없읗 정도로 흉측했다. 십 년 가까이 봐 왔던, 그래서 이제는 누구의 악몽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여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응 시한 윤슬이 잡고 있던 여자의 손울 놓아주었다.

"돌아가요. ……원래의 자리로."

윤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미해지는 여자의 인영을 바라보며 윤슬이 낮게 속삭였다.

"호의에는 호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눈을 떴울 때, 침대말에 누군가 암아 있는 것을 보았다. 창문울 통해 어

스롬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있을 시간 같았다. 가만히 윤슬의 곁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윤슬이 깨어난 것을 봤으면서도 조용히 손울 뻗어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울 뿐이었다.

기면서 계속 울었습니 다.”

권태준의 손끝이 닿은 눈가가 아릿하게 통증울 호소했다. 권태준의 손 울 일어내고 눈가를 더듬자, 말라붙은 눈을 자국과 그 위로 흐르고 있는 눈 을이 손끝을 적셔왔다.

"많이 상처받고 왔습니까?"

"내가 위안을 얻을 만큼."

"권태준 씨가 충분히 위안울 얻을 만큼."

말장난과 비슷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누구 하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권태준은 창 너머 하늘을 을려다보았고, 윤슬은 그런 권태준의 턱 끝을 을려 다보았다.

."이 난장판이 되어있더군요. 내가 줬던 인형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까?

화플이를 엄청나게 한 것처럼 보이던데.”

"던지기에 딱 좋은 크기 더라고요."

'칼도 나와 있었습니다.”

"권태준 씨한테 배운 게 있어서요."

"학습효과가 좋아서 아주 홉족합니 다.”

그리 대답한 권태준이 희미하게 웃음울 홀렸다.

"표정이 이상하네요."

"자고 일어나서 그래요."

자고 일어난 얼굴이 이상하다는 뜻이 아님을 윤슬도 알고 있었다. 그럼 에도 삔히 보이는 변명을 내별으며, 윤슬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표정을 감 추었다.

"뭔가를 털어낸 얼굴인데, 죄책감도 보입니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권태준은 정확하게 지적했다. 얼굴을 덮고 있 는 손 위로 권태준의 손이 을라와 감쌌다. 뜨거운 체온이 손등 위로 전해지 는 것을 느끼며, 윤슬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우울하게 내리깔았던 눈꺼풀 을 들어 권태준을 을려 다보았다. 

"나쁜 짓을 했어요. 결국……괴물이 되어버렸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뺨이라도 때렸습니까?'

"받은 만큼 둘려주는 게 나쁜 겁니까? 나는 호의를 호의로 갚고. 악의를 악의로 둘려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 죄책감울 갖고 자책하지 말아요. 자기합리화를 하며 당당해지는 게 차라리 낫습니 다. 손해 보고 참는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착하다고 칭찬받아도 남 는 거 없는 세상입 니다. 호구 춰급이나 당하지."

권태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나본 짓을 했다고 하는데도 오히려 칭찬 윧 받는 기분이 둘었다. 작게 소리 죽여 웃자. 권태준이 윤슬의 어깨를 잡 아 침대에서 일으켜 암혔다.

"일어납시다. 어지론 거 치우고, 씻고, 외#해서 밥 먹으면 기분이 좀 플 II 겁니다."

"권태준 씨, 회사 안 가요."

"오늘 하루 병가 내면 됩니다."

"안 아프잖아요."

"축 처진 윤슬 씨 보는 내 0ㅏ음이 아픕니 다.” 아……" 윤슬은 짧게 신음을 훑렸다. 기분좋게 나누던 대화의 온도가급 격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멘트 어떻게 해. 개그를 노리고 한 거면 재 미가 없고. 진지하게 말을 한 거면 심각한수준이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아직 잠이 덜 깨서요.”

"아닌데요. 왠지 착잡하고꺼림칙한표정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건지. 아니면 타인의 속마음을 홈쳐보는 능력이라도 있 는 건지. 권태준이 지나가듯 정답에 가까운 말을 내별었다. 찔공한윤슬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침묵은 3니까?"

"씻어야겠네요.”

" 말 돌리는 겁니까?’

."……생각해보니 집에 어떻게 돌어왔어요? 문 열어준 기억도 없는데, 한 동안 안 그러더니 또 문 따고 들어왔어요?"

맞다. 말 돌리는 게 정답이었다. 겸사겸사 깊고 넘어갈 것은 확실하게 하 자며, 윤슬이 권태준에게 따지듯 물었다. 

"집에 왔울 시간인데 대답이 없어서 쓰러진 줄 알았습니다.”

'자고 있울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아니면 본가에서 자고 오느라 안 들 어왔을 수도 있죠.”

"윤슬 씨가 안에 있는데 안 열어주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그렇게 생각울 하면 포기하고 가거든요.”

."저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여러모로 평범하지 않지. 권태준이 의도했던 뜻과는 다를게 분 명한 이유를 떠울리며 윤슬은 조용히 공정했다. 

싱크대에 부딪혔는지, 벽에 부딪혔는지 휴대폰 액정이 회생 불가능할 정 도로 깨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몇 달 전에 약정이 끝난 터라 휴대폰을 바 꾸는 것이 아쉽지 않았지, 아니었으면 조금 술퍼질 뻔했다.

"내 번호 저장되어 있습니까?”

이전 휴대폰에서 새로 산 휴대폰으로 저장된 것울 옮기는데, 그것을 지 켜보던 권태준이 넌지시 물었다.

"……네."

"뭐라고 저장해뒀습니까."

"미……미남이요."'

"정직하게 적어놨네요."

윤슬의 대답에 권태준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윤슬 씨에게 전화를 자주 해야겠습니다.”

"왜냐고 안 을어봅니까?”

"왜요."

"평소에 미남에게 전화울 일이 많이 없울 거 아닙니까."

하하. 기분 좋게 옷고 있는 권태준울 보며 윤슬은 차마 "미남’이 아닌 "미 친농’으로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갈 겁니까?’

"술술 배고프기는 한데……정말 회사 안 가요?"

"윤슬 씨를 위해 병가를 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일요일입니다."

아, 일요일. 그걸 잊고 있었다. 권태준이 병가까지 내면서 자신을 따라오 는 게 아니라는 것에 안심이 되는 한편, 권태준을 쫓아낼 명분이 사라졌다 는 것에 조금 씁쓸해졌다.

데이터가 옮겨지기를 기다리며 윤슬이 안전벨트를 매자 권태준이 시동 을 걸었다. 필요 없다고 거절을 했는데도 오늘 하루 운전기사를 해주겠다 며 극구 주장한 탓이었다.

"뭐 먹고 싶습니까?"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서 먹죠.”

"아무거 나 먹자고 대답하면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바꿔 말한 겁 니까?”

그런 마용도 있고. 한편으로는 발리 밥을 먹고 헤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 어서였지만 권태준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기를 주겠습니다."

몸을 틈어 윤슬을 바라보며 권태준이 앙증맞게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첫 번째, 소고기. 두 번째, 회. 세 번째. 장어. 네 번째, 추어탕. 다섯 번 째, 한방오리탕. 비슷하게 인삼 먹은 삼계탕도 괜찮습니다. 여섯 번째, 보……"

"장깐만요."

한 가지씩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세우던 권태준이 다섯 손가락 을 모두 세우고 다론 한 손을 마저 들어 을렸을 때, 윤슬이 조용히 권태준 을 막아섰다.

"보기가 조금……"

"윤슬 씨가 피곤한 것 같아서 보신 되는 것으로 골라봤습니 다. 마음에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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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게 있습니까?"

"회는 잘 안 먹고, 탕 종류는 별로예요."

ㅁ그럼 소고기와 장어가 남는데, 어떤 게 좋습니까? 두 가지 중에 고르는 거니까 선택하기가 쉽겠네요."

점심시간인 데다 청소를 한다 휴대폰을 개통한다 해서 아침도 그냥 건너 뛰었는데, 목 그렇게 거창한 것울 먹울 필요가 있을까. 그냥 간단하게 근처 에서 행버거를 먹어도되는데. 아니면 분식점에 가서 김밥한플에 우동울 먹어도 괜찮고.

지금은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마융보다 대충 식사를 때우고 쉬고 싶은 마용이 컸다. 그런 윤슬에게 소고기나 장어는 확실히 번거로울 따름이었 다. 눈을 동그랄게 뜨고 윤슬의 대답을 기다리는 권태준을 향해 윤솔이 입 을 열었다.

"소고기로 하죠.”

"좋은 선택입니다. 갑시다, 횡성."

뭔가 잘못 들은 기분이었다. 윤슬이 멍한 시선으로 권태준을 바라보았 다.

" 지금어 딜가자고……"  

"한우 하면 횡성아닙니까.”

그럼 장어를 골랐으면……."

"장어 하면 또고창아닙니까.”

"회를 골랐으면 바다에 갔울 거예요?"

"을론입니다."

야, 인마. 윤슬이 조용히 미간을 짚었다. 왠지 모르게 피곤이 질어졌다.

블름을 낮춰 희미하게 흐르는 재즈의 선을 사이로 키보드 치는소리가 불규칙하게 터지고 있었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울 먹고 앉았지만게으름 을 피우던 가락이 있어 이어서 쓰기가 쉽지 않았는데, 쓰다 보니 어느새 집 중울 하고 있었다.

잡아놓은 시놉시스의 에피소드를 살피며 스토리를 이어 나가던 윤슬은 마르는 입술을 축이려 컵을 기울이다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니터에 서 시선을 거뒀다. 머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무의식적으로 휴대폰 을 살피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이름을 확인했다.

강호수에게서 두 번의 전화가 와 있었다. 방해받기 싫다는 핑계로 휴대 폰을 무음으로 돌려놓았는데 그사이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컵에 물 을 채워오며 강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슬 씨?」

"전화하셨더라고요. 무음으로 해뒤서 못 받았어요."

「일하고 계셨던 겁니까?」

"네. 발등에 불이 떨어졌거든요."

「아이고, 내가 방해한 겁니까?」

"아뇨, 잠깐울 마시려고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세요?"

책상에 물컵을 내려놓으며 윤슬이 스크롤을 을려 지금까지 쓴 내용을 가 볍게 훌었다.

「전화로 하기엔 좀 그런데, 내가 그쪽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집으로요?”

「불편하시면 근처 카페에서 만나도 괜찮습니다.」

"음, 집으로 오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언제 오실 건데요?”

「이제 병원 정리하고 나가려던 참입니다. 삼십 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강호수의 말에 시계를 보자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퇴 근하려던 타이밍에 맞춰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네, 괜찮아요.”

「그럼 조금 있다가 됩겠습니 다.」

강호수는 그리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서둘러 오려는 기미가 보여 윤슬 이 고개를 가옷거 렸다.

의자에 않아 키보드에 손을 을렸던 윤슬이 이내 고개를 내젓고파일을 저장했다. 강호수가 오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울 텐데. 그사이에 집이라 도 조금 치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컴퓨터를 끄고, 대충 침구를 정리한 뒤에 청소기를 둘렸다. 바닥울 닦는 것까지 하지 않아도, 어지론 물건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나뜨지 않을 묫 했다.

포트에 을을 끓여 커피 한잔울 타서 마시고 있자, 벌! 소리가 돌렸다. 통 화를 하고 정확히 사십 분이 지난 뒤였다.

강호수의 얼굴울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걸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있던 강호수가 윤슬울 향해 조금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합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한 감정이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강호수는 굳이 입을 통해 미안함을 전달했다.

"괜찮아요. 저도 조금 쉬려고 했거든요. 커피 드릴까요?"

"커피보다는 차가운 물이 좋겠습니다."

냉수를 따라 건네자, 목이 탔는지 강호수가 단번에 컵을 비웠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윤슬 씨에게 을울 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가 이야기를 꺼낼 것 같은 분위기에 윤슬이 강호수의 맞은편에 자리 를 잡고 앉았다.

"윤슬 씨."

떼. 선생님."

"그……"

뭔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손으로 미간을 꾹꾹문지르던 강호수가윤슬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통화했던 것에 대해서요. 나도 그렇고, 윤슬씨도 그렇고,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제야 강호수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린 윤슬이 고개를 끄덕 였다.

"사실 오놀 아침에 그분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이 말이 아니더군요. 마지 막으로 상담을 했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였습니 다.”

"그럼 저를 찾아오실 게 아니라, 병원에 가라고 충고를 해주셔야 했던 거 아녜요? 그 사랑의 상태는 제가 어떻게 해플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 은데요."

"그때, 계약 없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에……혹시 윤슬 씨가 뭔가를 했습니까?”

어렵사리 입을 열어 묻는 강호수률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슬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돌려 물으시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까 놓고 말씀하시지 . 제가 해코지라도 한 거냐고 묻는 거죠?"

I오늘 병원에 와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화를 내더군요. 잘못했다고 빌기 도 했습니다. 악몽 속에서 윤슬 씨를 만나고, 악몽이 사라졌었다고. 자신 이 거짓말을 했었다고. 그런데 악몽이 더 심해졌답니다. 이전보다 더 끔찍 한 악옹을 꾼다더군요.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가 마르는 기분이라 고, 제발 살려달라고 내게 빌었습니다.”

그래. 피가 마르는 기분이겠지. 정말 그가 죽였는지 단순한 죄책감인지 는 물라도.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아내와 합께 관에 묻히는 기분은 공 찍할게 분명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게 하려는 말이 뭔데요?”

"윤슬 씨, 흑시……"

강호수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무음울 풀어놔서 3" 나 요란한 벨 소리가 강호수와 윤슬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액정에 뜬 미친농이라는 글자에 윤슬이 한숨을 내별었다.

"잠시만요.”

강호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떼."

「미남의 전화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냥 정직하게 미친농이라고 말을 할걸. 권태준이 이렇게까지 뿌듯하게  

기뻐하며 매일 전화할 거라 예상했다면, 한 대 맞더라도 그냥 미친놈으로 저장되어 있다고 말해줬을 거라고 윤슬은 후회했다.

"하루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했고요, 오놀 하루가 다섯 시간도 안 남았네 요 ”

「괜찮습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하루가 시작되 니까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윤슬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 다. 어차피 말을 섞어도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 문이었다.

"왜 전화 하셨는데요."

「윤슬 씨. 피자 잘 먹습니까?」

"가공 시켜먹는 편이죠."

「알겠습니다.」

갑자기 전화해서 피자 애기는 왜 꺼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싫어하지 않 는다는 뜻을 담아 대꾸하자 그게 용건의 전부였는지 권태준이 전화를 끊었 다. 용건도 없고 의미도 없는 권태준과의 통화에 윤슬이 어이없는표정을 지었다가, 강호수가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무슨 얘기를 했었죠?”

별 내용도 없는 통화였는데, 그 통화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혼란스러워 진 기분이었다. 눈울 굴리며 이전 대화를 생각해내려는 윤슬울 향해 강호 수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랑에게 다시 악몽을 꾸게 한 겁니까? 그걸 물으려고 했습니다.” 떼. 그랬어요."

"그게……가능한 거였습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잖아요. 타인의 악몽에 들어가고, 그 악몽을 없에고, 새로운 꿈을 꾸게 해주기도 하는데. 원래의 악몽을 되돌려주는 것, 흑은 새 로운 악몽을 만둘어 내는 것. 상상 못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강호수는 낮게 침음을 홀렸다. 한층 어두워진 강호수의 표정을 바라보 며 윤슬이 입매를 늘어뜨렸다.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그 사람을 괴롭힌 거라고 생 각해요?"

"윤슬 씨."

"원래부터 그 사람의 악몽이었어요. 난 그걸 없애주기로 약속을 했고, 그

걸 지켰어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그 사람이에요. 계약은 깨졌고, 그럼 ""."869 

다시 악몽을 가져가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기옥 속에 있다 천국울 맛본 사람은……다시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 하게 됩니다. 한 번도 지옥을 보지 못했던 사람보다 더 두려워하죠."

"그럼 노력했어야지. 지옥에 가기 싫으면 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노 력했어야죠. 약속울 지키지 않고도 지옥에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게 이 기적인 거 아닌가요. 저 좋은 것만 삼키고, 쓴 것은 뱉겠다는 심보가 나쁜 거잖아요.”

드"렇긴합니다.”

윤슬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강호수는 뭔가 남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울 달싹거렸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울렸 다. 윤슬이 전화를 건 상대를 확인하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또 왜요;

「윤슬 씨, 치킨은 어떻습니까.」

"치킨이 치킨이지. 치킨이 어떻다고요.”

「아니, 치킨도 좋아합니까?」

좋아해요. 다 좋아하니까 그런 거 물어보려고 전화하지 마세요.”

권태준의 뒷말을 듣기도 전에 끊어버린 윤슬이 목이 타는 기분에 커피 를 한 모금 머금었다.

"혹시 그거 태준입니까?”

전화 상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윤슬이 손을 들어 보 였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지금 그 사람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내가 너무 매정하다고 말하려는 거잖아요. 계약이라고는 하지만, 대가물 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어5별 수 없는 거 아니냐고. 그 사람이 불쌍하지도 않냐 고. 어차피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은 일인데, 목 그렇게 매정하게 했어야 했냐고 말하려는 거예요?”

"아닙니다. 애초에 계약울 맺고 대가를 받자고 말을 꺼냈던 건 내가 아님 니까. 다만……서로 차분히 이야기를 플어나가도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합 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돈으로 목적이 전도된 것 같다는 생각도 운득 들었고요."

강호수의 말을 듣던 윤슬이 웃욤을 홀렸다. 그것은 마치 서러운 울음소 리와도 비슷해 강호수가 당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이 일이 내게 안좋은 영향을 끼치 지는 않냐고. 사람이 내별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뒤따르는 결과가 있 다고. 그건 타인에게,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고. 정말깨끗하게 악몽이 사라 지고 모두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누군가 이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울 때, 그 짐은 거기에 그냥 있울까요? 이고 있던 짐을 내려놓을 때 곁에서 받아주었던 사람이 그 짐을 대신 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으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능력으로 악몽을 없애는 게 윤슬 씨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끼친다는 겁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제 더 이상의 호의는 없 다는 거예요."

"중요합니다. 그냥 넘기려고 하지 말아요. 나는, 나는 괜찮울 거라고 생 각했습니다. 윤슬 씨에게 어떤 나쁜 영향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 어요. 괜찮다는 윤슬 씨의 말을 믿었습니다. ……상담의로서 실격이로군 요 ”

강호수는 어깨률 늘어뜨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했듯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무게를 지고 있든, 그건 자신의 선택이었고 강호 수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니까.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돈으로 목적이 전도된 것 같다고요? 아뇨, 내 시작은 좋은 의도도, 돈도 아니었어요. 난 그냥 궁금했거든요. 선 생님의 말씀처럼 내가 정말 구원자인지. 내 존재가 괴물이 아니라 누군가  

에게 도움이 되는 고마운 사람인지. 내 능력이 저주가 아니라축복인지. 인 정받고 싶었고, 확인받고 싶었어요. 그 목적이 선생님 말씀처럼 변질되어 서 돈이 되어버린 것일 수는 있지만. 한 번도 남 좋은 일을 해주자는 좋은 의도는 없었던 것 같네요."

"윤슬 씨."

"이제는 상관없어요. 알아버렸거든요. 사람들이 나룰 어떻게 보는지, 내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그만 둘래요."

어차피 강호수도 오늘 이후로 더 이상 이 계약을 이어나가지 않을 것 같 았다. 돈으로 변질된 목적이 꺼림칙할 수도 있고, 무언가윤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을 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찌면 의사로서 정작 윤슬 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호의에는 호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매 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공정한 건 없더라고요. 적어도 내가 상 처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나만 상처 받지는 않을 테니까."

"미안합니다. ……윤슬 씨를 탓하려고 온 건 아니었습니다. 뭔가어긋났 다면 대화로 플었으면 해서 온 거였습니다. 윤슬 씨가 마음이 상했다면 플 고, 그 사람도 잘못을 알고 있으니 상황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 다."

"선생님, 제발종……" 제발그렇게 사람좋은 말은 하지 마세요. 자꾸그 ""5."869

러면 제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요."

자조 섞인 웃음울 내벨으며 윤슬이 고개를 내저었다.

"잘돗울 알고 있다고? 잘못울 알고는 있겠죠. 처음부터 그게 잘못이라 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거짓말을 했죠. 왜? 아무 증거도 남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계약서라고 작성한 그 종이를 돌고 변호사를 찾 아가겠어요, 법원에 가겠어요? 신고를 할까요, 고소를 할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배짱을 부린 거죠.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던 가요? 정말 후회하고 있었어요? 그랬겠죠. 없어졌다고 생각한 악몽이 다 시 찾아왔으니까. 자기 앞에 위기가 찾아왔으니 어떻게든 그걸 해결하고 싶었겠죠. 다시 악몽을 없앨 수 있다면. 옆드려서 비는 것도 충분히 했을걸 요 ”

그러니까 그런 쓰레기를 외면한다고 냉정하다 말하지는 마. 돈 때운에 인정을 버렸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도 마. 잘돗했다느니 뉘우친다느니, 뻔 히 보이는 위선을 떨며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이제 그만 해요.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다 알게 되었으니까. 선생 님도 더는 저를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의 소중한 환자등이나 신경 쓰세요;" 

분명 의도한 것온 아닐 텐데. 강호수가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만 하면 방해가 들어왔다. 권태준의 전화가 그러더니 이번에는 현관 벨이 울렸다. 찾아을 사랑이라고는 손에 꼽울 정도였지 만, 가장 유력한 사람울 꼽자면 권 태준이었다. 문을 열었을 때 정 말 권태준이 서 있으면, 오늘 강호수의 최 대 방해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왔나보네요."

뭔가 이어질 것 같았던 강호수의 말을 무시하며.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 섰다. 외시경으로 확인하자 정말 짠 것처럼 권태준의 모습이 보였다.

이 타이밍에서 이 인간을 반겨야 하는 걸까, 내쳐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윤슬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전화해서 물어보려다 그냥 둘 다 사 왔습니다. 아직 저녁 안 먹은 거 맞 습니까?"

양손에 들고 있던 치킨과피자를 들어 보이며 권태준이 자랑스럽게 울었 다. 윤슬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권태준이 현관 너머로 보이는 신 발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ㅁ누구 왔습니까?”

"들어오세요. 곧 가실 손님이니까요

윤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태준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치킨을 윤 솔에게 안겨준 권태준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흐음. 하는 신음울 홀렸다.

"의외네¬-네가 윤슬 씨 집에 드나드는 게 더 의외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호수가 핀잔했다. 힐곳. 권태준의 눈치를 보며 강 호수가 현관 앞에 서 있는 윤슬에게로 다가왔다.

" 가려고?”

"그래. 윤슬 씨 요증 일한다니까. 너도 너무 윤슬 씨 방해하지 말고."

"밥안 먹었을 텐데, 먹고 가지?'

"됐다. 피자는 내 취향 아니야. 윤슬 씨, 다용에 마저 얘기하죠."

"아뇨. 이제 불일 없을 거예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연락 안 하셨 으면 좋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명확하

게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강호수의 얼굴에 그놀이 졌다.

이래야겠습니까?”

떼."

I……가보겠습니다."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답한 강호수가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그 모 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윤슬이 문울 닫고 들어왔다. 마치 제집처럼 익숙 하게 상울 꺼내 피자 박스를 열어놓은 권태준이 윤슬을 을려다보았다.

"뭐합니까? 치킨 안 가져오고."

그제야 제 풍에 치킨 상자가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윤슬이 상 위에 치 킨을 내려놓았다. 코끝으로 진한 기름 냄새가 스였지만, 이상하게도 식욕 이 돌지 않았다.

"일단 먹읍시다.”

피자 한 조각을 윤슬의 손에 쥐여주고 권태준은 먹으라고 권했다. 뺜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한 입 베어 물자 치즈 토핑과 소스의 짭조름 한 맛이 입에 가득 찼다. 윤슬이 오물거리며 한 조각을 해치우자. 이번에 는 큼지막한 닭 다리를 손에 쥐여주었다.

피자와 치킨을 한 조각씩 먹었을 분인데도 속이 더부룩했다. 더 이상 손 이 가지 않아 를라만 골깍꼴학 마시고 있자. 권태준이 먹던 피자를 내려놓 았다.

"강호수와는 드디어 끝낸 겁니까?"

"뭐가요?'

"그동안 윤슬 씨가 호수와 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 같아서 찜 찜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네요."

I그렇습니까? 하긴 나틀 두고 양다리를 걸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긴 했습 니다."

언제나 당당하던 권태준은 오늘도 역시나 당당했다. 그 당당함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였다. 윤솔은 욕설과 함께 를라를 목 으로 넘겼다.

"호수와 싸웠습니까?"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절교라도 한 겁니까." "권태준 씨."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예민한 거 압니까. 윤슬 씨?”

"사람 짜증 나게 하면서 예민하네 어찌네 듣는 사람 이상하게 모는 건 그 만두시죠.”

."잘못했습니다.”

권태준은 선선하게 사과를 내별고 내려놓았던 피자를 둘어 꾸역꾸역 먹 기 시작했다. 말없이 피자 반 판울 혼자 해치우고, 치킨을 먹고 있는 모습 울 윤슬이 조금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쉬지도 않고 저 음식을 계속 먹 을 수 있는 건가. 먹기 대회에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의무적으로 먹 어야 하는 용식도 아닌데, 배가 부르지도 않는지 꾸준한 속도로 먹는 모습 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술 마시러 나가겠습니까."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를라로 입가심을 한 권태준이 불쑥 을었다.

"아뇨"

"일해야 해서 그럽니까? 취하지 않게 와인 같은 거 가법게 마시고 옵시 다."

"씻고 옷 갈아입기 귀찮아요. 그리고 나가서 술 마시면 인형 뽑기 할 거  

잖아요. 기계 주인이 쫓아을까봐 겁나요.”

"하라고 놔둔 기계인데.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쫓아옵니까?"

"권태준 씨가 인형을 쓸어오잖아요."

ㅁ내가 종잘하긴 잘합니다.”

칭찬하는 게 아니야. 윤슬이 눈욷 홀겼지만 권태준은 기분 좋게 옷기만 했다.

"그럼 나가서 사을 테니 집에서 마십시다.”

"일해야 하는데요."

"조금만 마십시다, 조금만. 이런 날에는 술도 마셔주고 해야합니다."

이런 날이 무슨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가서 사 온다고 하니 굳이 거절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윤슬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태준이 편의점을 다 녀온다고 나갔고. 그사이에 윤슬은 남은 피자와 치킨을 한곳에 모아 상 위 를 정리했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침대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기다리자, 양손에 커다 란 봉지를 들고 권태준이 나타났다.

."가법게 마시자면서요."

"이 정도는 가벼운 축에도 못 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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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누구 기준인데. 마시기도 전에 질린 얼굴을 하며 윤슬이 바닥으로 내려와 앙았다. 커다란 비 닐봉지 안에서 소주와 맥주가 줄줄 쏟아졌다.

"소주는 왜 사왔어요?”

"내가 또 폭탄주를 기가 막히게 맙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못하는 게 없네 요, 나는. 이런 걸 팔방미인이라고 합니까?"

아니, 그건 그냥 자기 자랑. 윤슬은 두 다리를 세워 무릎에 얼굴울 기대 고 권태준이 폭탄주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손이 유 리 컵에 맥주와 소주를 따르고 를라를 섞었다.

"마셔요."

윤슬에게 컵을 건네주고 쭉 마시라는 시늉을 했다. 윤슬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울 머금었다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에 두어 모금을 더 마셨다. 뭔가 묵직하게 을라오는 느껑이 있는데. 를라 때문인지 단맛이 느껴져 역 하지 않았다.

"후아."단번에 한 컵을 비운 윤슬이 크게 숨을 내별었다. 마치 어린 동생에게 술 을 알려주는 큰형처럼 옷으며 윤슬을 지켜보던 권태준이 빈 컵을 받고그 사이에 따라놓은 술잔을 건넸다.

"이거 몇 잔 마시면 흑 가겠는데요."

"그러라고 마시는 겁니다."

"그러라고 먹이는 거겠죠."

"잘 아네요. 그럼 내가 그렇게 먹여서 뭘 할 건지도 압니까."

"……월 할 건데요?”

그렇게 말을 하니 괜한 의심을 생겨났다. 윤슬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 보자, 권태준이 어깨틀 으쓱였다.

"하긴 뭘 합니까? 그냥 기분 꿀꿀한 것 같으니, 같이 술 마셔주는 겁니 다."

맥주와 섞지도 않고 소주만 활활 따론 잔울 보란 듯이 비운 권태준이 됐 습니까? 하고 묻었다. 뭐가 됐는지는 모르겠고. 권태준이 말아주는 폭탄주 가 꽤나 맛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권태준 씨."  

"왜 갑자기 무게 잡고 부릅니까. 무섭게.”

"아까 본 것처럼, 나 이제 강 선생님하고 인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려고 요. 연락할 일도 없을 거고, 만날 일도 없을 거예요.”

"이제 나한테 집중하겠다는 말입니까?”

"나는……이제 권태준 씨도 안 봤으면 좋겠어요."

장난스럽게 옷으며 말하는 권태준울 향해 윤슬은 조용히 마지 막울 요구 했다. 이렇게 마주 암아서 술을 마시는 것도 어찌면 이 이야기를 쉽게 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거 흑시 그겁니까?”

"뭐가요."

애인이랑 헤어지고, 애인과 함께 알던 친구돌까지도 다 정리하고 연락 안 하는 거 말입니다.”

"아, 진짜.”

끝까지 농담이다. 도통 진지해질 풀을 모르는 권태준에게 던질 것이 없 나 둘러보던 윤슬이 들고 있던 술 컵을 힘주어 잡았다.

I내가 호수에게 소개받아서 윤슬 씨를 알게 된 것도 아니고, 난 내 힘으 로 윤슬 씨와 알고 지낸 겁니다. 윤슬 씨가 호수와 연락을 하든 하지 않든.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죠. 권태준씨 !)으로, 강 선생님 병원을 털어서.”

"과거를 굳이 꺼낼 필요가 있습니까.”

죽어도 강호수의 병원을 털어먹었다는 건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투명 한 술잔 너머를 을끄러미 돌여다보던 윤슬이 그 너머에 일그러져 보이는 권태준울 바라보았다.

"말해풀까요."

"월 말입니까."

"권태준 씨가 내게 원했던 답. 말해주면 나를 모르던 그 과거로 돌아갈래 요?”

"졌다고 승복하는 겁니까?”

어떻게 보면 숭부였을 수도 있겠지. 누가 오래 버티는가였으니까. 그 승 부에서 패배튤 선언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윤슬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 였다.

"종 지친 것 같아서요. 권태준 씨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내가 이 제까지 뭘 한 건지도 모르겠고."  

홈. 하고 침음을 흘린 권태준은 윤슬이 들고 있던 술잔울 받아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왔다. 윤슬의 어깨률 잡아 저를 보게 만든 권태준이 빤히 얼굴 울 마주했다.

기실을 하나 말해졸까요?”

"무슨 사실이요."

"사실, 나도 내가 윤슬 씨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문독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 사람읕 찾아가고, 내 가 왜 이 사람에게 연락울 하고 있는 걸까. 처음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 을 텐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냥 윤슬 씨를 찾아오고 만나서 이야 기를 하고 함께 밥을 먹고 그런 것들이 다론 이유 없이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더군요. 서비스로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난 이런 것들이 나브지 않습니 다."

권태준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게 있 다면 권태준이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저를 응시하 는눈동자는혼들림이 없었고, 그저 말갛기만했다.

"많이 지쳤습니까."  

권태준의 물음에 윤슬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렇게 윤슬 씨를 지치게 만들었습니까.”

"……사람둘이요. 피해망상일 수도 있고, 열등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만……그걸 견디기가 힘들어요. 날 배척하는 게 힘들고. 날 인정하지 않는 게 견디기 어렵고, 그냥. ……그냥 힘돌어요."

"아직 어리네요

권태준은 윤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등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살살 쓸어 어루만지는 권태준의 손길에 윤슬이 작게 고개를 혼들었다.

"괜찮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데 좋은 사람만 만날 수 없고. 누가 나한테 종같이 굴어도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충고도 안 하겠습니 다. 뭐 어떻습니까. 세상 한 번 살면 끝인데. 나 좋아해주는 사람들만 만나 서, 그 좋은 감정 되돌려주기에도 바쁜 세상인데요. 누가 좆같이 굴면 같 이 좆같이 대해줍시다. 누가 배척한다면 같이 배척하고, 누가 날 인정하지 않는다면 같이 무시해버려요. 지치고 피곤해하면서 어울릴 필요 없습니다. 힘들면 피하고, 앞에 벽이 있으면 돌아가도 됩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권태준 씨가 나한테 좆같이 굴어도 피할수가 없던데요. 무시해도 안 먹히잖아요.” 

"그만합시다, 이제. 연극, 거짓말 게임. 그런 거."

하고 있긴 했었나. 그저 침묵하고 외면했던 것뿐이지. 생각해보면 참 이 상한 관계였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그 뒤로는 번거로웠고, 지금은 위로받 고 있었다. 서로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연기를 하고, 참고. 인내하고, 버 터보자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저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가공 일상을 합께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요. 나도 묻거나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이렇게 지내보도록 합시다. 가공 통화를 하고. 또 가공 같이 밥을 먹 고, 가공 만나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윤슬 씨가 내게 이야기해줄 날이 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내 이야기를 돌어풀 사람이 윤슬 씨가 될 수도 있고."

"권태준 씨 이야기는 원데요."

베밀은 윤슬 씨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닙 니다."

콩, 하고 윤슬의 정수리를 아프지 않게 주먹으로 쥐어박는 시늉을 한 권 태준이 윤슬을 놓아주었다. 빈 병을 한쪽으로 치우고, 새 술을 끌어와 상 

위에 울렸다. 왜 마신 것 같은데도. 아직 절반 넘게 남아있었다.

"오놀은 일단 아무 생각하지 말고 마십시다. 강호수와의 결별을 축하하 며.”

"사실 강 선생님과 안 친한 거 아네요?”

"나와 호수는 친합니다. 그런데 윤슬 씨가 나보다 강호수랑 더 친한 건 별로라서 말입니다."

"지금 방금 연극 그만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남의 진심도 모르다니, 윤슬 씨 참 무심합니다."

그 말처럼 무심하게 권태준을 무시하며 윤슬이 다시 술잔을 둘었다.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술병은 대학교 새내기를 졸업하며 같 이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고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것을 안다면 아 버지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요란한 휴대폰 별 소리 는 윤슬의 두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끄옹,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난 윤슬이 손을 더듬어 휴대폰윧 집어 들었 다. 상대룯 확인하려 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부어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골이 연상되어 혀를 차다가. 끊어졌던 별 소리가 다  

시 울리는 것에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목이 과할 정도로 낮게 잠겨 있었다. 상대도 이상하게 느꼈는지 잠깐의 침묵과 함께 확인하듯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전화를 건 상대가 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아?”

「너……무슨 짓을 한 거야.」

다짜고짜 묻는 재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당혹, 공포. 분 노. 이 모든 감정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재영의 목소리는그만큼무겁게 들려왔다.

"갑자기 전화해서 뭐하자는 거야?"

「꿈이. 악몽이……0

아, 아아. 그래서 연락을 했던 거구나. 그제야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버렸구나 싶으면서도, 자신에게 전화를 걸 만큼 참을 수가 없었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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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싶기도 했다.

"전화한 용건이나 말해. 나 더 잘 거야."

「악몽이 ! 악몽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고. 이거 네 짓이지? 홍윤슬. 대체 뭘 한 거야.」

머릿속에 딱따구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비둘기, 아니. 참새라도. 묵묵 쑤시는 통증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꾸욱 누르며 윤슬이 신음울 삼켰 다.

"형."

「네 짓이야? 그래? 네가 그런 거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너한테 뭘 얼마나 잘옷했다고 나를 괴롭혀.」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원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윤슬울 덮쳤 다. 앞이 깜깜해진 기분이 들어 멍하게 암아 재영의 책망을 듣던 윤슬이 희 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형,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뭐?」

"형이 악몽을 꿨다고 나한테 전화해서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지나가는 사람울 붙잡고 물어봐. 악몽을 꿨다고 남에게 원망울쏟아내 는 게 이해가 되는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 건데. 자신을 좀 둘아보라며 윤슬이 지적했다.

「네가, 네가 그때……내 악몽울 없했잖아. 분명히 없했어. 그런데 악몽 이 다시 둘아왔다. 그걸 너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래, 내가 악몽울 없했고, 형은 나를 괴물 보듯이 피했지. 십 년 가까 이 나는 형의 그런 시선을 참아왔어.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야. 어 라, 형이 왜 나를 피하는 거지? 나는 형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도 움을 준 게 아니었나? 그럼 다시 형에게 악몽을 둘려줘야겠다. 처음으로 다시……둘아가야겠다.”

윤슬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흡, 하고 급하게 숨 둘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비명이든 고합이든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참기 위해 애쓰 고 있을 테지. 윤슬은 소리죽여 웃욤윱 삼켰다. 플거운 일이 아닌데도,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웠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형도 형의 악몽을 없앴던 나를 싫어했잖아. 괴물처

럼 여겼고 계속해서 피해왔잖아. 나도 이제는 힘들더라. 내가왜 그런 대우

를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형에게 그런 칙급을 당해야 하는지. 그건 너무 "33" 869 

부당하잖아. 나 좋자고 했던 일도 아닌데. 득을 본 건 형이지 내가 아닌데. 그래서 그랬어. 내가……형의 악몽을 되돌려놨어.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 로 될 수는 없겠지만, 이미 형에게 나는 괴을이겠지만……사람 마음은어 쩔 수 없는 거 니까. 그냥 상황이라도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었거든."

뼉벽했던 시야가 조금씩 둘아오고 있었다. 눈을 깜박거리자 시큰하게 눈 가가 울리며 눈물이 주룩 홀러내렸다.

"앞으로 꿈에 대한 것은 모두 잊자. 서로 말하지 말고. 언급하지도 말고. 나도 이제 형의 악몽울 없애주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관 심 갖지도 않을 테니까. 내가 계속 두렵고 괴물처럼 생각된다면, 앞으로 안 봐도 좋아. 세상에 사이좋은 형제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형은 형의 악 몽울 갖고 처움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유, 윤슬아……0

말을 더듬으며 재영이 윤슬을 불렀다. 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들어있는지는 윤슬도 선뜻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재영은 후회하고 있을까, 간사하게 손을 뒤집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말 을 할까, 이 것으로 좋다고 생각하려 나. 아니 면 다시는 동생을 보지 않겠다 고 다짐하려나.

"어차피 형의 악몽이었잖아. 악몽이 없던 십 년 동안. 조금은 마음이 편 했어? 누군가 그랬는데, 지옥에 있다 천국을 맛본 사람은 다시 지옥에 가 는 것을 두려워한대. 처음 지옥에 있었을 때보다 더 두려워진대. 형도 그럴 까? 어땠어? 십 년 전과 똑같은 악몽인데, 그때처럼 무서웠어? 아니면 그 때보다 더 무서웠어?”

「……빌어먹울새끼.」

재영의 욕설에 윤슬이 낮게 옷었다. 그래, 자신을 무시하는 것보다 이렇 게 욕을 내별는 것이 차라리 더 좋았다. 혼자만 점잖은 척, 혼자만옳은 척, 자신을 무시하는 것보다 8씬 정직한 반용이 아닌가.

."0" 이럴 때 하는 말이 생각났다. 해도 지랄, 안해도 지랄.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추라고 지랄이야."

「홍윤슬. 너 이 새끼.」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네. 어리광 그만 부려. 형. 징징거리는 거 보기 싫으니까. 어론이면 어론답게 굴어. 남 한테 책임 전가하지 말고."

「너, 너……니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전화를 끊어버린 윤슬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 다. 뭔가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원래대로 되돌 린 것뿐인데 왜 자신이 점점 더 괴물처럼 느껴지는지 알수 없었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윤슬의 손목을 감쌌다. 화들짝 놀란윤슬이 옆을 보자, 언제부터였는지 옆에 바짝 붙어 누운 권태준이 보였다.

"뭐, 뭐야?’

옆에 있었어? 어찐지 침대가 조금 좁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중요 한 게 아니라.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지? 언제부터 깨어서 통화를 듣고 있었던 걸까.

재영과 주고받았던 대화를 빠르게 되새기며 생각하는 윤슬의 손목울 권 태준이 힘주어 끌어당겼다. 어, 어, 하고 버티던 윤슬의 옴이 뒤로 눕혀졌 다.

"머리 그만 굴리고 마저 잡시다. 슬 마시고 새벽부터 웃고 울고 소리 지 르고. 젊어서 그런가, 기운도 참 좋습니다."

"권태준 씨가 왜여기 있어요?"

"기억 안 납니까? 이거 큰일날 사랑이네. 어제 우리 꼭지 돌 때까지 마시 고 같이 잔 거 정말 모롭니까?"

"그런데 왜 침대에서 자고 있냐고요."

"침대가 하나뿐인 걸 어떻게 합니까? 누가 이렇게 좁은 침대를 놔두라 고 했습니까?" 

윤슬이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권태준의 몸을 밀었다. 힘겹게 일린 권태 준이 균형을 잃고 침대 밀으로 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억, 하는 신용에 윤슬이 빼꼼 침대 밑을 내려다보았다.

"와, 이게 윤슬 씨의 손님 대접입니까?”

"침대에 을라와서 자도 좋다는 말한 적 없거든요."

"누가 손님을 이불도 없이 맨바닥에서 재웁니까?" "그게 서러웠으면 집에 가서 5어야죠."

"인간적으로……베개는 좀 즙시다.”

침대 밑에서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권태준을 향해 윤슬이 베개를 집어 던 졌다. 

빨리 마지막 권을 쓰고 원고를 털어내야겠다는 생각울 하자 마음이 조 금 급해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신선한 글을 쓰고 싶기도 했고, 지긋지긋하 게 질질 끌어오던 글과 이별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처욤에는 호기롭게 계 약했던 글인데, 지금 와서는 이런 글울 잘도 계약했구나 싶기도 했다. 다음 에 계약할 때는 적어도 삼 분의 이 이상은 써놓고 계약을 해야겠다는 이루 지 돗할 다짐도 했다.

출판사에서는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써서 원고를 보내라고 했지 만, 빨 리 써서 한 번이라도 더 퇴고률 하는 게 좋울 것 같았다. 잘 마무리 지어서 조금이라도 욕을 덜 먹어야 차기작 계약하기도 쉬울 테고.

마감에 돌입하자, 으레 그러하듯이 게으르고 지저분해졌다. 씻는 것도 미루고, 집 청소도 미뤘다. 끼니도 미루다 배가 고프다 돗해 아플 지경이 되면 간단한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고, 그마저도 먹은 것을 치우지도 않고 상 위에 널브러뜨려 집 안은 엉망이었다.

통화가 되지 않아 쳐들어온 권태준이 윤슬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시 선은 윤슬을 위아래로 훌어보고, 윤슬의 뒤로 보이는 집 안을 훑었다가 다 시 윤슬에게로 돌아왔다. 감지 않아 기름진 머 리를 슬쩍 긁자, 권태준이 불

"씻고 나와서 얘기합시다."

씻을 때가아닌데요."

"한두 시간쓰면 다끝납니까?"

한두 시간에 끝낼 수 있다면 하놀을 향해 절이라도 하겠다. 고개를 절레 절레 내젓는 윤슬에게 권태준은 다시 욕실을 손가락질했다.

"씻고 나와요."

"……네."

느릿느릿 욕실로 들어가 양치도 하고, 머리도 감고. 샤워도하고, 새 옷 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쓰레기를 모아 치우고 있는 권태준의 뒷모습이 보 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힐곳 뒤룯 둘아 윤슬을 쳐다보았다.

"글 쓰는 사람들은 다 이 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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