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나직하게 울리는 부드러운 자장가에 아이가 작은 웃용소리를 훌렸다.
"엄마도 누워. 같이 자."
언제까지 엄마랑 같이 자려고.
작은 침대에 을라간 중년 여성은 다리를 구부리고 누워 아이를 풍으로 당겨 안았다. 그 아늑한 풍에 얼굴을 묻고 아이는 나른하게 옷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꿈이에요?”
"……네, 제가 원하는 꿈이에요."
그리 답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정말로 행복하게 돌렸다. 어디에도 어둥 을 두려워하던 아이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윤슬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모녀가 누워있는 침대를 중심으로 벽이 세 워지고, 방이 만들어졌다.
"그거 알아요?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수많은 해악이 튀 어 나왔대요. 그 후로 인간의 삶은 괴로워졌다고 하죠. 급하게 닫은 상자 속 에 남은 것은 희망. 그래서 인간은 희망을 풍고 사는 거래요."
윤슬의 손끝이 닿은 곳에 갈색의 나무문이 생겨났다.
"그건 그냥 신화일 뿐이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아닌 게, 삶은언제나그 렇 더 라고요. 항상 괴롭고 고통스럽고 잔인하고. 내가 남을 괴롭게 하거나,
아니면 남이 나를 괴롭게 하거나. 사람이라는 건 여러모로상대방에게 좋 온 영향보다는 나쁜 영향을 많이 끼치는 존재 같아요.”
꿈의 주인은 더 이상 윤슬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장가 소리가 윤슬의 말에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윤슬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현실이 그렇게 지랄 맞으니, 꿈에서라도 희망을 찾는 게 나는읊다 고 봐요. 내 잘돗으로 인한 악몽은 됫값이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으로 인해 서까지 악몽울 꾸며 괴로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내가 변덕을 부 리며 선을을 남기는 이유고요.”
윤슬은 손끝에 닿은 문을 한 번, 그리고 침대에 누워 행복하게 옷고 있 는 모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계속 행복한 꿈을 꿔요. 판도라의 문윱 열지 말고. 문을 열게 되면 남은 희 망도 날아갈 테니까."
0요 날뛰는 괴물
"요큼 부지런하네요."
칭찬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윤슬의 얼굴을 살피는 강호수는 조금 걱 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윤슬 씨,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울 게 있나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그래요 밥 잘 챙겨 먹고 잠 묵 잔 얼굴이 아니에 요 ”
그게 드러날 정도로 얼굴이 안 좋아 보이나. 윤슬은 손으로 뺨을 문지르 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권태준도 얼굴이 안돼 보인다고 했었지. 확실히 피부도 거칠어진 게 손에 느껴졌다.
"글 쓰는 것도 신경 쓰고 있거든요. 이래서야 본업이 원지룯 모르겠더라 고요. 백수 되지 않으려면 본업에도 신경을 써야죠.”
"글 쓰는 것 말고. 이 일 때문에 힘든 점은 없습니까?'
애써 둘러댔지만 강호수는 쉽사리 의심을 놓지 옷하고 있었다. 살피듯 훌는 시선에 윤슬은 어깨를 으쓱였다.
"겨우 하룻밤 남의 악몽을 보는 수준인데요. 어차피 남의 개꿈이나 내 개 꿈이나, 개꿈 꾸는 건 똑같죠. 매일 그 짓울 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 리가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이것 때문이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걱정이 되네요."
타인의 악몽에 들어가 그 악몽울 없애준다. 그것이 강호수가 알고 있는 전부였기에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이야기였다. 윤슬은 쓴웃음을 삼키며. 걱정하지 말라는 뜻읗 담아 손울 내저었다.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이지 않습니까. 정말무리하는 건 아니겠죠?."
"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하루에 한 번도 가능하다니까요.”
"이렇게 돈 벌면 금방부자되겠네요.”
"하루에 천만 원씩 벌기 전에는 어림없죠.”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눈 끝을 접어 웃으며, 서랍에서 돈 봉투룯 꺼내 내
"의욕적인 건 좋지만. 아쉽게도 천만원씩 턱턱 내일 사람이 많지 않습니 다. 물건 파는 것도 아닌데 박리다매를 뤼할 수도 없고. 지금도 좀 무리하 는 감이 있다는 건 알고 있죠?”
떼."
."필요한 정도로 모았다 싶으면, 다시 예전 텀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선생님 손에 달렸죠."
어차피 강호수가 사람을 울어다 주지 않으면 불가농한 일이니까. 강호수 에게 받은 두톱한 봉투를 가방 안으로 일어 넣는 윤슬울 강호수가 빤히 바 라보았다.
"왜요? 뭐할 말있어요?”
"그냥요. 윤슬 씨의 모습이 한결같은 게 문득 새삼스러워서 말입니다."
"평소와 다룯 게 있나요."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고를 당해 몸이 다친 것도 아니고.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이 바뀔 일도 없는데. 평소와 같은 모습이 이상한 것 은 아니지 않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런 윤슬을보며 강
"악몽을 꿨던 사람들이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면 윤슬 씨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인지 절절하게 느끼거든요. 금방이라 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던 사람돌이, 내일이라도 당장 죽지 못해 사는 사 람둘이, 하릇밤 사이에 달라지는 건 마법과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무엇 이 어떻게 변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표정과 목소 리가 밝은 빛을 품고 있어요. 그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경이를 느낍니다."
"종교를 믿어보지 그러세요. 저보다 신을 찬양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데."
경이로울 것까지야. 을랐던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경이로움울 찾는 강 호수를 윤슬이 질색한 눈으로 쳐 다보았다.
"악용이 아니라 좋은 꿈을 꾼다더군요. 모두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 만. 어떤 이유에서 몇몇 사람들이 좋은 꿈윧 꾸는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옥하게 쳐다보는 강호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윤슬은 본 능적으로 의자를 한 염 정도 뒤로 물러앉았다.
"그건 윤슬 씨의 선택이었습니까? 제게……사과를 선을했던 것처럼?"
"그냥 변덕이었을 뿐이에요."
"윤슬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마치 열렬한 신봉자를 눈앞에 둔 기분이 둘어 떨떠름해졌다. 윤슬은 어 색하게 입 끝울 을려 옷는 시늉을 했다.
"저 지금 닭살 돋으려고 하는데.”
"윤슬 씨는 좋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칭찬 받는 건 부끄러워하네
요 ”
"막 오그라들려고도하는데……"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강호수는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뭔가 사랑스럽 고 몽글몽글한 것을 보는 듯한 부드러운 시선에 진짜 닭살이 돋으려고 했 다.
선풍기를 켜놔도 더운 날씨인지라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전화가 와 있었 다. 급한 용건도 없을 텐데 그 &은 시간 동안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는 것을 보고 윤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용건인지 대충 짐작이 된 탓 이었다. 전화를 걸려고 하는 찰나에 다시 전화가 울려 윤슬은 통화 버튼을 놀렸다.
"여보세요.”
「아드님이랑 전화하기 참 어렵네.」
"씻고 나왔어요. 누가 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플 알겠네. 전화했다가 안 받으면, 나중에 확인하고 전화 을 때까지 좀 기다리시지.”
「급하니까 그렇지.」
"딱히 급할 것도 없는 내용일 것 같은데요.”
윤슬의 대꾸에 아버지가 매정한 놈이라며 쯧쯧. 혀를 찼다.
「이번 주 토요일에 온단다. 말은 들었지?」
"누가와요?”
「네 형이랑 사귀는 아가씨 말이야.」
그럼 그렇지. 형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던 터라, 윤슬은 크게 놀 라지 않았다.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형수님 될지도 모르는 아가씨가 온다는데 얼 35"869
굴도 안 비쳐?」
"형이 그래요?”
「바빠서 못 온다고 했다더만. 아니야?」
을 거냐는 질문울 듣기는커녕, 전화조차 오지 않았었다. 아버지에게 형 이 적당히 대꾸를 해 놓은 모양이지. 그런 형의 마음울 이해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서운했다. 아무리 자신을 보고 싶지 않더라도, 가족 대소사에는 불 러야 하지 않나. 그것울 형의 마음대로 결정했다는 것에 온갖 부정적인 감 정이 일려돌었다.
"내가 그랬나. 그냥 상황 봐서 가겠다고 했던 것 같긴 하네요."
「그럼 을 거나? 아무리 바브더라도 얼굴은 비쳐야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쏭하시니 가야죠. 미래 형수님한테 밉보이면 안되 잖아요.
윤슬의 대꾸가 마용에 들었는지 그래, 그래. 하고 아버지가 맞장구률 치 셨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형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배척 한다고 생각하니 반드시 가야겠다는 마용이 들었다. 자신도 어지간히 0누음 이 꼬인 모양이라며 윤슬은 자조 섞인 웃음을 내별었다.
"밖에서 만나요?"
「집으로 오라고 했다. 오랜만에 내가 음식 송씨 좀 발휘해야겠어. 너도 와서 거돌래?」
아버지의 대꾸에 무슨 소리를 둘은 것인가, 하며 윤슬이 눈울 공뼉였다.
"제가 무슨 요리를 해요? 먹고 배탈 나게 만둘 일 있어요? 그리고 왜 집 으로 불러요? 밖에 좋은 음식점 많은데. 남자들만 사는 집에서 냄새난다 고 싫어하면 어쩌려고요.”
자신은 나와서 산다지만, 자신을 제외하고서도 남자만둘이서 생활하는 집이었다. 특별히 더럽게 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어지르지 않는다뿐이지 깔공하게 청소를 하는 남자들도 아니었다. 주말마다 환기를 시키며 청소 를 하는 집도 아니고. 그런 집에 여자를 부론다고? 생각만으로도 아이고, 하고 곡소리 가 홀러 나왔다.
「인사를 온다는 건 상대방 집이 어떤지, 어떻게 생활을 하는지 보려는 것
도 있는 거다. 우리의 생활방식이 어떤지, 생활수준은 또 어떤지, 인사하
러 오면서 그런 것들을 가능해 보는 거지. 만나는 곳이 집이면, 아무리 조
심한다고 해도 은연중에 평소 생활하던 모습이 나을 테니까. 여자도 그렇 353."869
고, 남자도 그렇고, 결혼 얘기 나오기 전에 상대방 집에 인사 가서 다 그렇 게 살펴보는 거다.」
"에이, 설마요.”
「아직 홈각인 농이 뭘 알겠냐.」
설마 그런 깊은 뜻이 있을까 싶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농이라 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정말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의도로 인사 를 오는 건 아니겠지. 그냥 상대방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안면을 트려고 오 는게 아니었나.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진짜면……더 큰일 아니에요?"
「뭐가 큰일인데?」
"와서 홀아비 냄새난다고 도망가면 어떻게 해요.
「뭐, 인마?」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짜인데. 항상 맡고 사는 남자들은 을라도, 여자는 그런 냄새에 면역이 없어서 예민하게 알아차릴 거라고. 솔직히 말하는 거 지만. 자신도 본가에 갈 때마다 환기부터 시키는데.
"그건 형이 해야죠.”
「인마. 네 형은 아가씨 데리러 가야 할 거 아나.」
떼리러 가기 전까지는 청소해야죠.”
「청소하고 땀 벌뻘 흘리면서 데리러 가나? 허른소리 하지 말고 와서 청 소해. 아니면요리를 하든가.」
"청소는 아버지가 하시고, 요리는 배달시키죠.”
현명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한테 혼이 났다. 꽤나 긴 잔소리 를 둘으며 윤슬은 혀를 삐죽거렸다. 자신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가는 것도 아닌데. 왜 청소가 자신의 몫이 되어야 하는 걸까. 불합리한 일이었다.
「알았지? 일찍 와서 청소해라. 아비는 시장 봐와서 요리해야 하니까.」
"그냥 시켜먹는 게 그분한테도 좋을 텐데……."
「시끄러워. 아비가 요리를 해야. 시아버지 밥상 차릴 일은 없겠구나하 고 아가씨가 안심을 하지. 가똑이나 시아버지 혼자인 것도 마음에 걸릴 텐 데, 이런 걸로 시아버지한테 신경 쓸 일은 없을 거라고 안심을 시켜줘야 하 지 않겠냐ㅢ
"그런 걸로 안심이 될까요? 그냥 각서 써주시지. 결혼을 하면 절대 시부 모 모실 일 없이 독립을 시켜주겠다, 하고. 요즘 세상에 각서만큼 확실한 게 없잖아요."
「시끄럽다. 이농아0
윤슬의 농담에 아버지가 혀를 찼다. 몇 번이나 토요일에 오겠다는 답변 을 둘은 아버지는 일찍 오라는 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으셨다.
휴대폰울 내려놓은 윤슬은 웃음울 지우고 멍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아버 지와는 농담을 건네며 대화를 했지만, 막상 전화를 끊으니 형 생각이 난 탓 이었다.
자신에게 아예 이야기를 꺼 내지도 않았던 형은 무슨 생각이었울까. 아버 지가 연락을 해서 이야기를 전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형의 생각울 알아차리고 알아서 참석하지 말라고 은연중에 의도를 내비친 것일 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영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윤슬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괜한 짓을 한 걸까. 자신이 참석하는 것을 재영이 내켜 하지 않 음은 확실한데, 굳이 가겠다고 억지를 쓴 것일까. 아버지에게 바브다는 거 짓말을 하고, 아버지를 서운하게까지 하면서 형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던 걸까.
윤슬은 갑갑한 마음에 카디건을 걸치고 지갑을 찾아을었다. 술이라도 한 잔했으면 싶었는데,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아 집에 사다 둔 것이 없었던 탓이었다. 술리퍼를 질질 끌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근처 커다란편의점으 로 들어간 윤슬은 맥주 한 팩을 사서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의자에 앉았 다.
갑갑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홀로 술을 마시면 기분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파란 플라스틱 의자가 시원해 보인 탓도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더운 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맥주 캔을 손바 닥으로 감쌌다. 캔울 따서 한 모금울 머금자 탄산과 함께 쓴맛의 액체가 느 껴 졌다. 입에 머금고 있던 액체가 밍밍해질 때쯤 목으로 넘기자 껍찌름한 맛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스름한 저녁, 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묘하게 축 놀어진 것처럼 보였다. 녹음 진 가로수, 지나가는 차. 홀로 훅은 두셋으로 뭉쳐 걸어가는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텔레비전 화면 속의 모습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훌로 동떨어져 구경하는 기분을 느끼며. 윤슬은 천천히 맥주를 비웠다. 맥주의 맛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캔울 하나씩 비워 일렬로 나란히 세우자 그 풀을 길게 만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멍하게 암아 꾸역꾸역 맥주를 마 시고 있을 때. 윤슬의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벌써 뤼했나. 아니면 졸음이 일려오나.
눈을 공뼉거리다 고개튤 젖혀 위를 바라본 윤솔은 자신의 뒤에 서서 내 려다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윤슬 씨, 여기서 뭐합니까?”
"술 마시는데요."
"혼자 마시는 겁니까?"
"누구 또 있는 것처럼 보여요?" 술을 마시는 것도. 혼자 있는 것도,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굳이 묻는 저의를 모르겠다.
""번한 질문은 왜 하는 거예요?"
"글씨!요. ……관심 받고 싶어서?”
미간울 모으고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권태준이 내놓은 답변울 윤슬 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윤슬 씨와 나 사이에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 물랐습니까."
대꾸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 말에 윤슬은 현명하게 침묵했다. 그런 윤슬 의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내리고 앉은 권태준이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캔을 등어 혼돌어 보였다.
"남은 거 없습니까?" "글쎄요. 없어요?"
"다 마신 것뿐인데. 윤슬 씨 혼자 마셨습니까?"
"더 마실 생각입니까?"
"아마도요."
윤슬의 애매한 대꾸에 권태준이 웃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장시 뒤에 커다란 봉지를 들고나온 그는 테이블 위에 맥주와 몇 가지 안주를 꺼 내 놓았다.
"안주도 없이 마시고 있었습니까? 완전히 주당이네요."
"그러게요. 나도 내가 이렇게 술울 잘 마실 거라고 생각 못 했어요."
"인간적으로 안주도 먹으면서 마십시다. 그러다 한순간픽 갑니다."
윤슬의 손에 길쭉한 오징어포를 쥐여 주며 권태준이 지적했다. 질검질 겅 오징어룹 씹으며 빈손울 뻗자, 그 손에 턱하니 맥주도 건네주었다. 금 방 사 온 맥주는 차가웠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는 건 안 좋은 버릇입니다.”
"나중에 권태준 씨가 그러면 지적해풀게요.”
딱히 시비를 걸 의도는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마응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권태준은 그저 옷기 만 했다.
"형이 결혼할 여자를 데려오려나봐요."
"축하할 일아닙니까.”
"축하할 일이죠. 축하할 일인데. ……형이랑 사이가 안좋아요. 축하해 주고 싶은데, 형은 나한테 축하받고 싶은 마욤이 없나 봐요."
꿀꺽끌꺽 맥주를 연거푸 마시자, 권태준이 손을 뻗어 윤슬의 입에서 맥 주 캔울 떼어냈다. 후아, 하고 크게 숨을 내쉰 윤슬이 턱을 괴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릴 때 형한테 잘못한 일이 있는데, 그 뒤로 형은 나를 괴물처럼 봐요. 나를 미워하고 화내는 게 아니라, 나를 두려워해요. 그게 표정에 보여요."
"어디 봅시다. 윤슬씨가괴을처럼 생겼는지."
권태준은 의자를 끌어당겨 윤슬의 결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윤슬의 어 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리며, 권태준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마주했다, 무방 비하게 앉아 있던 윤슬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 탓에 반사 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면 귀여운데 말입 니다."
"귀여우면 귀여운 거지, 이 정도라는 말을 왜 집어넣어요? 내가 뭐 어때 서. 나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말 안 듣거든요."
"사람들이 보통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은 안 하죠.”
우리 아버지도 나한테 못생겼다는 말 안 했거든요."
"부모야 자식이 어떻게 생겼든 다 잘나 보입니다."
"친구돌도 나 못생겼다고 안 했어요."
"윤슬 씨, 친구도 있었습니까? 의외네요."
권태준의 대꾸에 윤슬이 주먹을 쥐었다. 꽉 쥔 주먹을 발견한 권태준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욤울 내밸었다.
"귀엽습니다. 귀여워요."
"댁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거든.”
"정말입 니다. 보고 있으면 제법 볼만한 얼굴이고, 안 보고 있으면 가공 생각나는 얼굴입 니다."
미묘한 의미였다.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고, 화를 내기에도 애매한 표 현이었다. 주름이 질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며 공공 고민을 하자. 권태준이 윤슬의 양 뺨에 손을 을려 꾹늘렀다. 뺨이 늘리며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 다.
"요큼 내가고민이 많습니다."
"뭐가요?”
팽권처럼 표폭 튀어나온 입술을 오물거리며 윤슬이 을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내벨을 때마다 권태준이 장난스럽게 뺨을 꾹꾹 늘러댔다.
"왠지 윤슬 씨에게 정이 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인내심에 한계가 을 때, 윤솔 씨에게 나쁜 짓을 못 할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그건 자신을 파묻어야 할 때가 왔을 때 양심에 가책울 느낄 것 같아서 곤 란하다는 뜻일까. 그런 생각울 떠을린 윤슬의 눈가가파르르 떨렸다. 윤슬 의 얼굴을 놓아준 권태준이 맥주 캔울 돌어 홀짝거렸다.
"형 때문에 우울했습니까? 윤슬 씨에게 오지 말라고 해서요?"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축하받기 싫은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한테 아예 말을 안 했어요. 아버지한테 전해 들은 거거든요. 난 바빠
서 못 을 거라고 형이 아버지한테 말했대요. 오지 말라는 소리겠죠." 윤슬의 푸념에 권태준이 흐음. 하고 신음을 훑렸다.
"안 갈 생각입니까?”
권태준의 물음에 윤슬은 손에 턱을 관 상태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왠지 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나도 착한 성 격은 아닌가 봐요. 아니, 엄청 못된 것 같아요.”
"고분고분한 성격은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게 진짜. 아까부터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있다. 윤슬이 눈을 홀기자, 권 태준이 껄낄 웃음을 흘렸다.
"그 성격 참 매력적입니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윤슬씨 성격 마움에 든다고.”
"하나도 안 고맙거든요""
"순하고 고분고분한 거, 나는 안 좋아합니다. 요즘 세상은 가만히 있으 면 만만하게 보고, 병신인 풀 압니다. 가만히 있으면 뺨 맞는 세상인데, 굳 이 남한테 맞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까.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릴 각오로 살 아야, 적어도 손해는 안 보고 삽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말처럼 선빵 이 중요한 거긴 합니다만, 윤슬 씨에게 거기까지 바라는 건 무리일 것 같
고. 호의에는 호의로, 악의에는 악의로. 이 정도만으로도 속은편할 겁니 다."
그 말을 들으며, 권태준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운득 궁금해 졌다. 처음 칼 들고 찾아왔던 모습을 떠을리면. 절대 평범한 삶울 살았으리 라 생각되지는 않지만. 궁금한 마음과는 다르게 선듯 그것을 을울 수도 없 어, 윤슬은 입술만 벙긋거리다 이내 입울 다을었다.
"나는 어릴 때,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버린 부모, 나를 학 대했던 고아원 원장, 내게 무관심했던 사람들. 그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 지 않았고, 나를 돌봐주지도 않았습니다. 어릴 때에도,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서도 나는 언제나 내 II으로 버터야 했습니다. 세상의 가장 큰 피해자 는 나인 것 같았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합이 없지만, 세상에 나 말고도 상처 입은 사람돌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것으로 조금은 위안을 얻 게되더군요."
왠지 제정신으로 지껄이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윤슬은 식겁한 마 음울 감추며 애써 찜그린 얼굴을 만들어냈다.
"지금 나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글쎄요. 윤슬 씨는 내가 위안을 얻을 만큼, 상처 입은 사람입니까?'
테이블 위에 놓인 윤슬의 손울 겹쳐 잡은 권태준이 손끝으로 느리게 윤슬의 손목을 운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울 하곤 합니다. 내가 받았 던 고통을 똑같이 느껄 수는 없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다들 느꼈으 면 좋겠다고. 인생울 살면서 누구는 고통 받고. 누구는 행복한 게 참 불공 평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내게 보인 악의만큼. 나 또한 세상에게 악의를 돌 려주고 싶은 일종의 피해의식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느리게 흘러 나오는 권태준의 목소리가 성독했다. 당장에라도 윤슬의 뒷 덜미를 잡아 불행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을 것 같이 어둡게 가라암은 목소 리였다.
"……다 같이 행복해지 면 되잖아요.”
"그러게요.”
어렵사리 입을 열어 내별은 말에 권태준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다 같이 행복해지면 될 일인데, 나는 다같이 불행하기를꿈꿉니다. 그
건 내가 썩을 만큼 썩은 농이라는 뜻이고, 아직까지 윤슬 씨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그러니 형님이 윤슬 씨를 괴물처럼 보든, 두려워하든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괴을이 뭔지, 형님은 아마보지 못했울 겁니다.”
잡고 있던 손울 거두며. 권태준이 생긋 웃었다. 경직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슬은 그제야 권태준이 자신을 위로해주었음윧 깨달았다. 어깨 를 축 늘어뜨린 윤슬이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울 이완시켰다.
"맥주 더 0ㅏ실 겁니까?"
권태준이 빈 캔을 정 리하며 물었다. 한 팩을 더 사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언제인지 모르게 다 비운 모양이었다.
"아뇨, 그만 마실래요. 배부르네요."
"그렇게 마시고 안 추)했습니까?”
"이야기하면서 마셨더니 술기운이 가셨나봐요.”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잘 마시는 모양입니다.”
"소주도 아니고, 맥주잖아요.”
권태준의 손에서 빈 캔윧 가져와 편의점 분리수거통에 넣으며, 윤슬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취하지 않은 척을 했지만. 살짝 취기가 돌 고 있었다. 여기서 더 마시면 한순간 픽 가서 쓰러질 것 같기도 했다. 편의 점 테이블을 정리하고 오피스텔로 향하려던 윤슬을 권태준이 잡아 세웠다.
"왜요?”
"이거 하고 갑시다."
권태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편의점 옆에 서 있는 인형 뽑기 기계였다. 그래, 술버릇이 인형 뽑기였다는 말을 돌었던 것도 같다.
"해본 적 없는데요."
"그럼 이번 기회에 해보는 것도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그런 경험은 필요 없는데. 윤슬이 대꾸하기도 전에 권태준이 지갑에서 천 원짜리를 꺼내 기계에 집어넣었다.
"이리 와요."
윤슬의 팔을 잡아당겨 기계 앞에 세우고, 어서 해보라며 채근을 했다. 멀 뚱하게 서서 권태준과 뽑기 기계를 보던 윤슬이 내키지 않는 움직임으로 기계 손잡이를 잡아 움직였다. 대충 이리저리 잡아당기자 흔들거리던 기 계 손이 쭉 내려가 헛손질을 하고 을라왔다.
아예 잡지도 못합니까."
"못한다고 했잖아요."
"노력을 하는 성의도 없지 않습니까. 잘 좀 합시다.”
"이런 거에 노력해서 뭐해.”
짜증을 내면서도 윤슬이 다시 한 번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에는 제법 집 중울 해서 조작울 했는데도, 여전히 헛손질이었다. 기계 손 사이로 인형이 잡혔다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윤슬이 아, 하고 탄식을 내별었다.
"어려운 겁니다.”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윤슬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기다려요.”
윤슬울 기계 앞에 세워둔 권태준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나온 권태준의 손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두둑하게 들려 있었다.
"……그거 뭐예요?" "많아 보여도 금방 씁니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아플래. 누군가의 0."둘, 누군가의 남편이 었다면 등짝울 엄청나게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권태준은 기계 안으로 지폐를 일어 넣고. 익숙하게 자세를 잡아 손잡이 룰 조작했다. 유연하게 움직이던 기계 손이 아래로 쑤욱 내려갔다가솟구 쳤다.
"봤습니까? 이게 그냥 게임 같지만, 나름 스킬이 필요합니다.”
보란 듯이 손목을 휘휘 돌리며 말한 권태준은 기계 안에서 작은 인형울 꺼내 윤슬의 손 위에 을려놓았다. 찜크색의 공처럼 둥근 인형이 마치 윤슬 을 놀리듯 웃고 있었다.
|내가 손기술 좋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문도 잘 따고, 기술적으로 사 람 조지는 것도 잘합니다.”
"아, ……네에.”
윤슬이 말을 길게 늘이며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권태준은 집중해서 인형 을 뽑고 있었다. 돈을 넣고 손잡이를 조작하고 기계 손이 내려갔다 을라을 때마다 어김없이 인형이 들려 을라왔다. 권태준의 손에 있는 지폐가 풀어 들수특. 윤슬의 풍으로 들어오는 인형의 개수가 늘어났다.
"이제 그만하는게……."
."떨어뜨리지 말고 여기 넣읍시다."
권태준은 비닐봉지에 윤슬이 안고 있던 인형을 꾹꾹 일어 담았다. 봉지 를 가독 채우고도 남은 인형을 손에 쥐고 윤슬이 그만 가자고 채근했다. 이 것만으로도 인형 뽑기 기계의 주인은 오늘 장사 적자였다.
"아직 천 원짜리 몇 장 남았습니다.”
이 사람은 뭐든 끝장울 봐야 하는 성격이었나 보다. 권태준의 손에서 천 원짜리륟 뺏듯이 가져온 윤슬이 편의점에 돌어가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 들고나왔다.
" 자요. 이제 천 원짜리 없죠?"
윤슬이 내민 아이스크림을 받아 입에 물며 권태준은 웃기만 했다.
"이게 뭐야. 인형 장사해도 되겠네."
"원한다면 윤슬 씨 방을 인형으로 가득 채워주겠습니 다.”
공찍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인형이 가독 담긴 봉지와 미처 봉지에 집어넣 지 못한 인형을 어렵사리 품에 안고 윤슬은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았다. 천 천히 오피스텔로 걸어가는 윤슬의 곁으로 권태준이 보폭을 맞춰 걸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습니까.”
"네, 뭐, 덕분에요."
"다용에 술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시지 말고 나 불러요. 혼자 마시다 사 고 당합니다."
" 무슨 사고를 당해요?"
"세상이 험악해서 안 좋은 농들이 많습니다. 시비 걸고 돈 뺏고사람 치 는 농들."
권태준보다 더 안 좋은 농들이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을 가 슴 속에 꾹 늘러 담으며 윤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연락 안 해도 잘 찾아오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윤슬 씨와 통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난이제 들어가서 잘건데……."
눈앞으로 다가온 오피스텔 건을을 을려다보며 윤슬이 권태준의 말을 끊 었다. 권태준의 속에 있는 뭔가의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같이 을라가자고 권하는 겁 니까?"
"설마요. 여기서 그만 헤어지자는 거죠.”
"그럽시다. 단번에 진도 빼는 것도 너무 쉬워 보이니까. 나그렇게 쉬운 남자아님니다."
이제는 대꾸할 의욕도 생기지 않아. 윤슬은 대충 귀를 후비적거 렸다.
"그래서 집에는 언제 갑니까? 형님 결혼하실 분 데려온다는 날."
"이번 주토요일이요."
"잘 다녀와요. 상처받지 말고."
"남들이 상처 받았으면 좋겠다면서요."
ㅁ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윤슬 씨가 상처받는 게 싫을 것 같기도 합니 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선 권태준은 선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가공씩 보이는 진지하고 섬뜩한 얼굴이 아니라. 나쁜 생각이 조금도 없는 순수한 얼굴이라 그 차이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권태준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윤슬이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런 생각울 했다면. ……권태준 씨도 아직까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그렇습니까?”
떼."
"사람이라……ㅁ 좋네요."
권태준의 미소가 조금 더 질어졌다. 그 얼굴을 용시하던 윤슬이 꾸벅 고 개인사를 하고 오피스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장울 잘 수 있을 것 같은 밤이었다.
재영이 데려온 여자는 특별히 모난 구석 없이 괜찮은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남자의 가족돌과 어색할 법도 한데, 그런 내색 없이 편하게 웃 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만남에서 굳이 문제를 꼽아보자면 여자가 아닌 흥재영이었다.
여자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집에 와 있는 윤슬을 본 뒤부터 재영은 쭉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도, 정신을 반 쯤 빼놓은 상태로 뒤늦게 대꾸를 하곤 했다. 그런 재영을 아버지와 여자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는 반쯤 제정신이 아
닌 것 같았다.
"오늘 고생하셨던 거 아니에요? 남자을만 있는 집이라. 홀아비 냄새 엄 청 났울 텐데."
"괜찮아요. 저 남학교라 익숙하거든요."
윤슬의 농담에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제가 교실 수업울 안 해요."
"중학교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무슨 과목인데 교실 수업울 안 해요? 미 술? 음악?’
"어, 못 들으셨어요? 저 체육 교사인데"
활달하고 건강한 에너지가 가르치는 과목의 영향울 받은 것인지. 아니 면 그런 에너지로 체육 과목울 고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여자와 패 어울린 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하다면 소심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재영의 답답한 성격을 많이 완화시켜풀 것 같기도 하고.
윤슬은 여자가 0ㅏ음에 돌었다. 형수가 된다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것 도 같았다. 같이 있으면 공정적인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 누는 사람도 플거워지는 부류였다.
"아버님 음식 송씨가좋으셔서 깜짝놀랐어요."
"어렸을 때부터 식사는 아버지 담당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저희는잘 모르겠던데.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는끝까지 배달시키자고주 장했거든요."
"와, 그러면 아버님 음식 송씨도 모르고 갈 뻔했네요. 오늘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아버님.”
여자는 아버지에게 연신 아버님, 아버님 하며 친근하게 굴었고, 아버지 도 그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집안에 활기가 둘고 있어, 윤슬 도 조금 느슨하게 마용이 풀어졌다.
"재영 씨, 지금 나 옆에 두고 다론 생각 해요?”
"어? 아냐. 그냥 잠깐. 아까 환자 생각이 나서."
내내 얼이 빠져있는 모습이 거슬렸는지, 여자가 재치 있게 재영의 옆구 리를 콕목 찌르며 핀잔을 했다. 아버지가 여자 모르게 재영을 향해 눈을 부 릅뜨는 것을 보며 윤슬이 작게 웃음을 홀렸다.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윤슬에게로 시선을 둘렸다.
예가 재영 씨 환자였거든요.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갔을 때 만났어요. "허,……공사구분은 어떻게 된 거야, 형.”
윤슬의 장난스러운 질책에 재영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것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뜻이 아닌, 윤슬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 임울 알아차리고 윤슬의 얼굴에서도 웃옹이 걷혔다.
"오늘 정말즐거웠어요. 아버님, 맛있는 식사 정말 감사히 먹고 갑니다."
"그래요. 난 재영이 저농이 숙맥이라고 생각해서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좋은 아가씨를 데려와서 참 기브네. 앞으로 재영이랑 잘 만나서 좋은 소식 들고 왔으면 좋겠어. 내 말 알죠?”
"네. 그럼요."
아버지가 여자의 손윧 잡으며 간절함을 담아 말하자. 여자가 잡힌 손에 힘을 주어 가볍게 흔들며 대꾸했다. 웃으며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참 예쁜 사랑이었다.
"호칭이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일단은 윤슬이라고 불러주시고, 다음 에 필 때는 도련님으로 불러주시죠. 형수님.”
"어찜 재영 씨랑은 다르게 센스가 있어. 재영 씨보다 먼저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 형이 저렇게 남자다운 척 무게 잡아도 은근히 잘 삐치거든요. 그 런 말씀은 나중에 저한테만 술찍 하세요."
윤슬이 눈울 찜긋거리며 말을 하자. 여자가 까르르 옷으며 손울 내일었 다. 헤어지며 악수를 나누자는 뜻이었을 텐데, 윤슬이 그 손울붙잡기도 전 에 재영이 여자의 손을 잡아당겼다. 허공에 홀로 남겨진 손울 내려다보던 윤슬이 재영을 을려다보았다.
"재영씨?"
여자가 어 리둥절한 얼굴로 재영을 돌아보았다.
"……형이……질투하나 봐요. 그것 보세요. 방금 하신 말 때문에 형 지 금 긴장했잖아요."
"정말이에요, 재영 씨? 어휴, 참. 나는 재영 씨가 제일 좋거든요.”
."0" 커플 실다. 그런 건 둘이 있을 때 하시죠."
농담처럼 넘겼지만 윤슬은 알수 있었다. 재영의 눈 속에 담긴 두려움을. 윤슬의 손이 닿기 직전에 여자의 손을 채가는 재영의 시선 속에 담긴 것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접촉. 꿈에 닿을 여지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당신의 사람이라는 거지. 당신의 사랑울 나란 괴물에게서 보호하겠다는 무의식의 표현인 거지.
윤슬은 떨리는 손끝울 등 뒤로 감추었다. 자꾸만 얼굴이 굳어지려고 해 서. 윤슬은 허을어지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해야 했다. 힘겹게 입 끝을 을 려 옷으며 여자를 향해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튤 으쪽거렸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용에 또 찾아될게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배웅은 재영이한테 맡기고, 우리는 안 나갈게 요 ”
떼, 아버님."
"조심해서 가세요, 형수님."
"네, 윤슬 씨도 다용에 만나요.”
살랑살랑 웃으며 인사를 나눈 여자를 재영이 데리고 나갔다. 끝까지 플 지 옷하고 굳은 표정의 재영을 보며 윤슬이 쓰게 웃었다.
"뭐가요.”
식탁을 치우며 윤슬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버지가 무엇을 묻는 지 알고 있고, 그 대답 또한 알고 있지만 윤슬은 모론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 사람 데려와서 정작 자기가 넋울 놓고 있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형 말처럼 마음에 걸리는 환자가 있었나보죠. 병원에서 일하면 종종그 런 일이 있잖아요. 자꾸 신경 쓰이는 환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오늘 같은 자리에서."'
흐움. 하고 옷마땅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으 로 들어가셨다. 빈 그릇울 챙겨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윤슬이 수세미룯 집 어 드는 아버 지를 잡아당겼다.
"종 쉬세요. 설거지는 제가할게요."
"설거지만 한다고 끝인가. 청소도 해야지. 너 청소하기 귀찮아서 그러 지?"
"청소할 것도 없더만. 암아 계세요. 제가 청소까지 해놓고 갈게요.”
기려고?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자고 가지.”
"오늘 큰일 치렀는데 아버지도 편히 쉬시고. 형도쉬어야죠. 저도제 집 에 가서 쉬는 게 편해요."
아버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셨지만, 가타부타 말없이 거실로 나가셨 다. 조용히 입을 다울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수세미를 9 윤슬의 손에 힘 이 들어갔다.
어깨를 축 놀어뜨리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윤슬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 듯 누웠다. 저녁 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잘 마셔 놓고, 속이 진탕이 된 기분 이었다. 속에서 뭔가 커다란 덩어리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갑갑했다. 주먹 으로 가승을 때리고 문질러보았지만 도통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여자와 합께 들어오다 자신을 보고 얼어붙었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자의 손을 다급하게 거두며 쳐다보던 형의 시선 속에 담긴 두 려움도 떠을랐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뭐가 그렇게……내가 뭘 했다고. 내가 얼마 나 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하는 건데.”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때리며 윤슬이 억울한 옥소리로 내별었다. 억울했다. 화가 났다. 더 이상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예전으로 둘아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엎드려있던 윤슬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울 꺼냈 다. 아버지일까. 혹시라도 형일까 하는 기대에 액정을 살폈지만. 떠 있는 번호는 다론 사랑의 것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선생님."
「윤슬 씨, 자는데 깨운 겁니까?」
"아뇨, ……누워있어서 목이 좀 잠겼어요. 무슨 일이세요."
윤슬의 을음에 강호수는 조금 미안한듯 저기. 하고 말을 끌었다.
「지난주에 부탁했던 일……혹시 잊으셨나해서 말입니다.」
"지난주 일이라면. 그날 바로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장시 기억을 떠을렸던 윤슬이 답하자. 강호수가 역시. 하고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전해지는 곤란함의 정체를 윤슬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연락을 해봤더니,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서 말입니다. 내가 한창정신 이 없어서 이번에는 윤슬 씨에게 확인을 못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윤슬 씨도 잊고 있었나 했습니다.」
그래요?”
윤슬은 엎드린 상태로 실없이 웃음을 홀렸다.
"'윤슬 씨?」
"그냥, ……문득 웃겨서요.”
「윤슬 씨, 화났습니까?」
웃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호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뇨, 생각해봤는데 이제까지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게 신기해서요. 뭔가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잖아요. 그만큼 절실 했던 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동안 운이 좋게도 양심이 남 아있던 사람을을 만났었던 건지도 모르죠."
「내가 다시 연락을 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뇨, 하지 마세요.”
강호수의 말을 자르며 윤슬이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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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약온 없었던 것으로 치죠. 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해주세요. 돈은 받지 않을 거고, 계약도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악몽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면, 그렇게 대해줘야지. 얼굴도 보지 못한 사 이에 신뢰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약속울 했다면 지켜야 하는게 맞는 건데. 꿈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론 이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손바 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것은 윤슬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문득 윤슬의 눈앞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형의 눈빛이 떠울랐다.
"저 폼 쉬어야겠어요.”
「윤슬 씨, 너무 화내지 말아요. 내가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뇨, 주겠다고 해도 그 돈 안 받아요. 난 확실하게 말했어요. 이 계약 은 엎어졌다고. 그걸 선택한 건 그 사람이에요.”
날이 선 대꾸에 강호수는 침음을 홀렸다. 윤슬 씨, 하고 불렀지만그는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강호수도 조금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겠습니다. 윤슬 씨,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날 찾아요. 내가 항상 윤슬 씨를 기다리고 있는 거 잊지 않았죠?」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강호수의 속삭임에 윤슬은 작게 옷었다.
"네, 끊을게요.”
강호수의 대답을 듣지 않고 윤슬은 통화를 종료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 으켜 우두커 니 암아 있던 윤슬이 이내 들고 있던 휴대폰울 힘껏 던졌다. 싱 크대까지 날아간 휴대폰이 날카로운 파열음울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왜 다들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아. 괴로워했잖아. 괴로워해서 악몽 을 없애준 거잖아. 그런데 왜 나를 외면해. 왜 나를 부정해. 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윤슬은 침대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인형을 집 어 던졌다. 멋대로 날아간 인형이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모니터를 떨어뜨리 고, 주방 싱크대 위에 포개두었던 접시를 떨어뜨리고, 정리하지 못하고 한 껏 쌓아두었던 책 무더기를 허물어뜨렸다.
그러고도 분이 플리지 않은 윤슬은 손에 잡히는 온갖 것들을 집어 던졌 다. 요란하게 부서지고 떨어지는 것을 보며 윤슬이 욕설을 내별었다.
분했다. 분하고 억울했다. 화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면 서러웠던 건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 어서. 자신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윤슬의 비명을 듣고 쫓아온 누군가가 한참이나 벨울 누르고 광광 문울 두드렸다. 재차 울리는 벨 소리에 윤슬이 꺼지라며 소리를 지르자, 화풀이 를 하듯 광, 하고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둘렸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윤슬이 싱크대로 가 식칼을 찾아 손 에 쥐었다. 황광, 울리는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윤슬이 벌컥 문을 열었 다.
옆집 남자가 열린 문름 사이로 화난 얼굴을 들이일고 무언가 말울 하려 다 윤슬의 모습울 보고 멈칫했다.
방"|?’
"아니. 그……종 시끄러운 거 아닙니까? 밤인데 이웃울 생각해서라도 종조용히……."
"댁도 부부 싸움한 적 있잖아. 나는 그때 입 다을고 참고 넘겼는데, 왜 댁 은 내가 하루 시끄럽게 했다고 쫓아와서 지랄인데. 왜 나는 시끄럽게 하면 안 되고. 너는 지랄발광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싸움질을 해도 괜찮은 건 데? 내가 언제 너 시끄럽다고 쫓아가서 지랄한 적 있어?."
"아. 그게……." 식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윤슬이 쏘아붙이듯 말을 하자, 남자가 질겁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물러나며 잡고 있던 문을 놓자. 윤슬이 광, 하고 문을 잡아당겼다. 닫히는 문 사이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이 사라 졌다.
어깨튤 놀어뜨리고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온 윤슬이 둘고 있던 식칼울 싱 크대 안으로 던져 넣었다. 쨍. 하고 쇳소리가 흘러 나왔다.
엉망이었다. 건 안도 엉망이고, 윤슬의 머릿속도엉맘이고. 이리저리 날 뛰는 가송도 엉망이었다. 비척거리며 침대로 걸어간 윤슬이 비스듬히 침대 에 걸치듯 쓰러져 누웠다.
어듭다. 어듭고 축축하다.
기분 나쁜 공기가 발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을라온몸을 휘감았다. 순간 적으로 느껴진 싸늘함에 김중건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좋지 않은 기분으 로 잠에서 깬 김중건이 침실 스탠드의 스위치를 찾기 위해 더등더등 손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탁 소리가 나며 은은한 빛이 나 타났다.
베란다 문이라도 열린 것일까. 상체를 일으켜 앉은 김중건이 고개를 돌 려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지만 베란다 운은 꽉 닫혀있었고 커튼까지 쳐져 있었다. 기분 탓일까. 한숨울 쉬며 다시 자리에 누우려다무의식적으로 옆 자리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다, 당신!"
김중건의 눈이 놀라 크게 뜨였다. 경악으로 부롭뜬 그의 눈동자에 방싯 옷는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이이는? 꿈이라도 꾼 거예요? 자다 일어나서 왜 그래요?"
본능적으로 물러나던 김중건이 쿵 침대 일으로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김중건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여보?”
"당신은……죽었잖아!’
" 여보, 왜 그래요? 무슨 꿈이라도 꿨어요?”
"넌 죽었어 . 년 죽었다고!"
ㅁ그래요, 죽었죠. 기억 안 나요? 당신이 죽였잖아요.”
"거짓말이야. 꿈이야. 꿈이라고!”
"거짓말이면 어떻고. 꿈이면 어때요. 어차피 죽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 겠어요."
김중건을 향해 여자가 한 걸욤을 내디뎠다.
"다가오지 마!'
김중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스탠드를 움켜쥐었다.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어.”
여자를 향해 위협적으로 스탠드를 휘들렀다.
"그걸로 저를 때려죽이기라도 하려고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또죽이려고요?’
여자가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 388."869
'여보, 날 또 죽일 건가요?”
여자의 입에서 주룩 피가 훌렀다.
"맏해봐요. 날 또 죽일 건가요?"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여자의 아름답고 매끄러운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 이 졌다. 자고 일어난 사랑답지 않게 낭랑했던 목소리에 책엑 쇳소리가섞 여 나왔다. 김중건을 향해 다가가는 여자의 옴이 힘없이 비틀거렸다.
으어억. 김중건이 의미 없는 비명을 지르며 여자를 향해 스탠드를 휘둘 렀다. 뼉 소리가 나며 여자의 머리가 반 바퀴 둘아갔다. 옴은 앞울 향해 있 고, 머리는 등 쪽을 향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오지 마, 오지 마!'
김중건이 휘두르던 스탠드가 날아가 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던 빛이 사라지고 한순간 어둠이 찾아들었다.
"여보." 흐느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들려왔다. 뒷걸음질을 치던 김중건이 벽 에 가로막혀 파들파들 떨어댔다. 차가운 무엇인가가 김중건의 손목울 휘감 았다.
"으아아아악."
김중건이 기겁울 하며 잡힌 팔을 휘둘렸다. 기우뚱, 균형을 잃은 김중건 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뒤종수가 얼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는옴 이 부자연스럽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 뭐야? 뭐야. 이거?”
앞뒤, 양옆 모두 움직임이 여의찮다.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것처럼 속박 된 느껑에 김중건이 몸을 뒤를었다. 무엇인가 앞뒤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틈이 좁은 골목에 옴이 낀 것 같은 느껑에 김중건은 앞을 가로막 고 있는 벽을 손으로 두드렸다. 텅텅, 나무 소리가 났다. 자신의 침실에 이 런 나무판자가 있을 리 없다.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김중건은 힘껏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 벽을 쳐댔다.
때보, 저를 두고 가시려고요?'
한순간 희미한 빛이 생겨났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겨난 빛인가생각할
겨를도 없이 김중건이 비명을 내질렀다. 코앞에 나타난 여자의 얼굴은 반 쯤 썩어 구더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자가 입을 열 때마다 여자의 입 속에 서 궁실궁실 하말고 통통한 벌레돌이 쏟아져 내렸다.
"항께하기로 했잖아요."
뼈가 드러나 보이는 여자의 손이 김중건을 향해 다가왔다. 시체 썩는 악 춰가 코를 쩔러댔다. 김중건이 눈을 부롭뜨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두엇이 포개어 간신히 누울 크기의 공간. 코앞에 보이는 여자의 썩어가는 시체. 사 방울 둘러싸고 있는 나무 벽 .
"함께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