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2권) (7/18)

야스 - 꿈을 먹는 괴물 2

07. 판도라의 문

'작가님. 불성실하시네요.' '작가님 연에하고 싶으세요? 이 밑도 끝도 없는 연애라인 뭐죠?' '망작의 기운이 느꺼진다.' '안 본 눈 삽니다.' '내가 왜 이걸 읽기 시작했지.' '뒷권은 언제 나와요?' '작가가 전작 망트리를 타고 있다.' '재미도 엄꼬. 감동도 엄꼬. 심지어 열의도 엄따.' '왜케 질질 끌어요? 차리리 완결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읽고 버리게.'

플랫폼의 댓글울 쭉 읽어보던 윤슬이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요즘 이래 저래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글에 소홀하긴 했다. 쓰는 것도 대충대충, 무슨 내용을 쓰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고. 완결을 남겨놓은 상태로 생뚱맞은 떡밥을 뿌리면서 분량만 늘려놓고 수습은 못하고. 정작 마무리권은 시작도 못한 상태이고.

어찌면 부수입으로 들어오는 돈이 짭짤해서 뒷전이었던 이유도 있었는지 모른다. 글을 쓰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거 겠지 . 저주라고 말하면서 잘도 이 능력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문득 우스워졌다.

정신 좀 차리고, 본업으로 돌아가야지. 

손으로 양 뺨을 찰싹찰싹 때린 윤슬이 자리를 잡고 컴퓨터 앞에 암았다. 그동안에도 글을 쓰겠다고 컴퓨터를 붙들고 있긴 했지만 매번 다른 생각을 하거나 딴짓을 했다. 겨우겨우 써서 저번에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넘기고 한시름 돌렸다며 그새 늘어져 있던 것이 독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려고 하자 이전에 썼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한참이나 썼던 글을 뒤적거리며 봐야 했다.

머리 다 굳었네.

십여 편 전부터의 내용과 시놈. 설정집을 뒤적거리며 겨우 다음에 쓸 내용을 떠울린 윤슬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때 드르륵. 하고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러니 글울 못 쓰지.”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린 윤슬이 휴대폰 액정 위에 뜬 번호를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독립을 하고 나서 걱정이 되셨는지 초반에는 연락이 자주 왔었는데, 바쁘다는 티를 내자 이제는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따로 연락을 하지 않는 뜸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내심 서운하신 모양이지 만, 용건도 없이 통화를 하기엔 할 말도 없고 어색해서 전화하는 것을 자꾸만 미루게 되었다.

얼마 전 생신 때 얼굴까지 봤었는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안부 전화일까. 

가만히 생각하던 윤슬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가 웬일로 일어나 있나.」

"아버지, 전화해서 대뜸 그렇게 말씀하시면 싸우자는 소리로 들려요. 가뜩이나 전화 통화 귀찮아하는 아들인데. 듣기 좋은 인사라도 하셔야지. 이러면 제가 기쁘게 전화를 받겠어요?"

「아이고, 그러십니까. 이 아비가 존귀한 아드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었습니까?」

"됐어요. 아무튼 꼭 기분좋게 통화하는 법이 없어." 

「인마, 누가 들으면 무슨 대통령이랑 통화하는 줄 알겠다. 높으신 분도 아니고 통화 한 번 하려고 내가 아둘 비위까지 맞춰야겠냐?」

"비위를 맞추라는 게 아니라요, 그냥 기분 좋게 통화하자는 거죠. 대뜸 일어나 있냐? 이러면 누가 좋다고 해요? 시비 거는 걸로 들리지."

「됐다. 나도 기분 별로다. 인마.」

"삐치시기는."

「안 삐쳤거든.」

"삐치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홀로 아들 둘을 키우면서 가끔 엄하게도 대하셨지만, 보통 때는 형제나 친구처럼 유쾌하고 친근한아버지셨다. 지금도 서운한 마음을 감추며 농담처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에 윤슬은 장단을 맞추듯 장난처럼 말했다.

"어휴, 우리 아버지. 나이만 드셨지 하나도 안 늙으셨어. 마음은 동심이네요. 어린에처럼." 

「나 정말 안 삐쳤다.」

"네, 네. 그런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내가 목 일이 있어야 아들한테 전화하냐?」

"그건 아닌데, 제 촉이 뭔가 일이 있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너 자리 펴야겠다.」

아버지가 대꾸하며 흐흐, 하고 웃음을 홀렸다.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고, 자랑하시려고 그러나. 복권이라도 맞으신 건가. 아니면 남들 명퇴 걱정 할 시기에 뒤늦게 숭진이라도 하시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말을 기다리 고 있던 윤슬이 아버지의 이어진 말에 잠시 침묵했다.

「네 형이 만나는 아가씨를 인사시킨다고 하더구나.」

「여보세요? 윤슬아, 못 들었냐? 왜 반응이 없어?」

"아뇨, ……조금 놀라서요."

「그렇지? 너도 놀랐지? 나도 재영이 그놈이 뒤늦게 만우절 농담을 하는 

윤슬은 입 안이 마르는 기분에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너한테는 무슨 말 없었어?」

"……네. 저는 돌은 게 없어요. 나중에 말하려고 했나 봐요. 나한테 말하기 부끄러웠나.”

자신에게 말하기가 싫었던 거겠지, 부끄러운 탓은 아니었을 거다.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님을 알면서도 윤슬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으로 둘러댔다. 윤슬의 말에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놈 무뚝뚝한 척하면서 은근히 부끄러움울 &ㅏ지.」

아버지의 목소리엔 플거움과 기쁨이 가득했다.

「어떤 아가씨냐고 물어도 직접 보라는 말만 하지 다론 말은 안 해줘서. 넌 혹시 알고 있나 해서 전화해봤더니, 너도 을랐던 모양이구나.」

"언제 인사 오겠대요?”

「다음 달쯤에 데려오겠다고 하는데, 아직 날은 안 정했어.」

"그럼 저한테는 날짜 정해진 뒤에 말하려고 했나 봐요."

윤슬의 대꾸에 아버지는 그런가, 하고 긍정하듯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생신날까지 만 해도 별말 없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그때 니들 연애도 못한다고 놀려서 이놈이 급하게 만들어 왔나?」

"인사 오는 거면…… 결혼하겠다는 듯이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 이제 두 농 중에 한 농 털어 내겠구나.」

하긴 술술 걱정되는 시기였을 테지. 정년퇴직하시기 전에 하나라도 결혼을 시켜놔야 할 텐데, 아들 둘 다 연애하는 꼴울 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선을 보겠다고 하지도 않고. 내색은 못 하시고 속으로 공공거리셨을 텐데, 그 와중에 만나는 여자를 데려온다고 하니 아버지도 기불 만하다고 윤슬은 생각했다.

「재영이 결혼하겠다고 하면, 너 집에 들어와야겠다.」

"왜요? 혼자 사시는 거 외로우셔서요?”

「것보다 네 형 집이라도 한 칸 해주려면 돈 탈탈 털어야지. 네 오피스텔에 들어간 보증금도 빼고, 적금도 깨고. 대출도 좀 받고.」

아버지의 말에 윤슬이 불을 부풀렸다. 

"요즘 세상에 결혼한다고 어느 집에서 부모 돈으로 집을 해줘요? 그런 시대 지났어요. 자기들이 모은 돈 합쳐서 분수에 맞는 집 마련하는 거지.” 

「얼씨구, 너 결혼할 때 보자. 집 해달라는 소리만 해봐라, 이놈.」

"저도 저 결혼할 때 볼 거예요. 아버지가 형 결혼할 때랑 저 결혼할 때랑 똑같이 해주는지. 큰아들은 기둥뿌리 뽑아서 결혼시키고, 나는 개털로 결 혼시켜봐. 그땐 형제끼리 쌈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 둘 있는 거 의 안 상하게 아버지가 잘하셔야 해요. 집 두 채 똑같은 거로 해즐 능력 없으시면, 아예 둘 다 안 해주는 게 맞아요.”

애초에 아버지 주머니 털어 받울 마음도 없지만, 자신이 받울 마음이 없 다고 해서 형 받는 꼴울 가만히 두고블생각도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버지한테 말해뒤야 한다며 윤슬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 아비 협박하냐?」

"아니죠. 이건 예고죠. 형 결혼할 때 들어가는 비용 동전 하나까지 제가 눈뜨고 지켜불 거예요."

「아이고, 무섭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연신 웃으셨다. 아직 결혼 얘기가 나온 것도 아니고, 그저 여자를 인사시 킨다는 것일 텐데도 저렇게 좋으실까.

「그래도 돈 한 푼 없이 보내는 건 좀 그렇지. 집은 못 사줘도. 전세금 정도는 마련해줘야지.」

"와, 요큼 전세가 매매랑 가격이 비슷하다는데. 집 사준다는 말보다 더 무섭네요.”

「넌 인마, 형이 결혼하는데 보태주겠다는 말은 못할망정 왜 그리 심통이야?」

"누가 심통 냈다고 그래요? 아버지가 기둥뿌리 뽑아먹을까 봐 걱정되어서 그렇지. 형 다 해주고 나중에 아버지 길거리에서 박스 깔고자면 어떻 게 해요?"

「너한테 나 건사해달라고 안 할테니 걱정 마라. 네 아비 아직 잘 나간다.

불통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말에 웃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아둔 돈 있으니까,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형 장가간다니까 기특한 소리도 할 풀 알고, 우리 막내도 다 컸네.」

"장가를 정말 갈지 안 갈지는 모르겠지 만.”

「야, 이놈아.」

아버지의 핀잔에 윤슬이 장난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당연히 저라도 가서 자리를 채워야죠, 라는 말이 나와야 할 텐데. 윤슬은 그 대답을 재영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애인을 인사시키겠다는 말도 자신에게는 하지 않았을 테고.

"잘 모르겠어요. ……그때 봐서요.”

「당연히 와야지, 무슨소리야?」

"그렇기야 하지만, 못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나중에 날짜 잡히면 말씀해주세요. 상황 봐서 갈게요."

「재영이가 서운하겠다.」

"상견례도 아닌데요, 뭐. 형한테는 저 온다 안 온다 말씀하지 마시고요."

자신의 이야기를 끼낸다면 재영이 아예 약속을 안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서운한 내색을 하셨지만. 오히려 아버지 를 위해 하는 말임을 모르셔서 저러시는 거다. 윤슬은 씀쓸하게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버지는 끊기 전에 마치 혼잣말처럼 물었다.

「재영이 그농이 이제까지 미루다가 데려온다니. 좋은 여자겠지?」 

좋온 여자였으면 하는 바람이 섞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윤슬도 나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궁금하네요. 어떤 여자일지."

진심으로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통화튤 마치고 윤슬은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한 한글프로그램이 유난히도 하말게 보였다. 멍하게 암아 있던 윤슬이 컴퓨터를 꺼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형의 결혼.

아직까지도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걸 절끄러워하고 꺼리는 형이 어떤 얼굴로 여자를 소개시킬지 내심 궁금했다. 상황을 봐서는 아버지에게만 인사 륟 시키고. 자신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러다가 상견례 때나 결혼식장에서 형수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차 피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안 만날 사이도 아닌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깽판을 치는 것도 아닌데. 형의 태도가 유난스럽다고 윤슬은 생각했다.

형을 생각하면 여전히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리고 밉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두려움이 깔린 것을 불 때마다 화가 났다. 마치 자신이 형에게 피해라도 입힌 것처럼. 피해를 입힐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시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형의 눈앞에는 자신의 동생인 홍윤슬이 아니라. 한 마리의 괴물이 있을 뿐이었다.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더라면. 차라리 무시하거나 화를 내는 거였으면 나았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윤슬은 아득했던 예전의 기억을 떠울렸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형도 아니고. 악몽에 몸서리치던 형도 아니고. 어머니가 둘아가셨을 때 자신을 끌어안고 울었던 형. 초등학교 방학 때 자신을 옆에 앉혀두고 방학 숙제를 도와줬던 형. 살가운 소리 한 번 안 하지만 무뚝뚝한 얼굴로 간식 사 먹으라고 없는 용돈울 쪼개서 나눠줬던 형.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 자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형을 떠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 확실히 기분이 나아졌다.

윤슬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통장의 잔액을 떠을리고 휴대폰을 돌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용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선생님."  

「윤슬 씨, 무슨 일입니까. 태준이가또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이제는 전화를 하면 권태준과 관련된 일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윤슬은 작게 옷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권태준 씨와 관련된 일은 아니고요.”

「아, 다행입니다. 나또 윤슬 씨에게 혼나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제가 언제 혼냈다고 그래요. 것보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떠". 

「괜찮습니다. 식사하러 나가는 길이었거든요.」

상담을 하고 있지 않냐는 을음이었는데. 다행히 식사시간이었나 보다. 시간울 확인하니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선생님."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렇게 듬을 들입 니까? 저 좀 긴장되네요.」

살짝 웃용기 머금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윤슬은 잠시 숨울 등이 마셨다 내별고는 말을 꺼 냈다.

"……저 돈 벌어야겠어요. 사람 좀 구해주세요."  

마주 오는 남자는 유난히도 마론 편이었다. 마론 장작개비처럼 비찍 말 라서 누가 한 대 특 치기만 해도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헬쑥한 얼굴에 입 슬은 하닿게 텄고, 모자로 반쯤 가려진 머리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잔뜩 웅크린 어깨는 가목이 나 왜소한 몸뚱이를 더 작게 보이게 했다.

상담실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윤슬과 마주친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복도 의 벽으로 몸울 붙였다. 그럼에도 성큼성큼 걷던 윤슬의 어깨에 남자의 어 깨가 부딪쳤고. 힘이 없는지 남자의 옴이 흔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손을 뻗어서 휘청거리는 남자의 몸을 잡아 지탱해주며 윤슬이 묻자. 남 자가 억늘린 신음을 내뱉으며 윤슬의 손을 뿌리 쳤다.

"괜찮아요. 만지지 마세요.”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 남자였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되었을까. 아무리 많게 봐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대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어 걸음 떨어진 남자가 더러운 것을 만진 사랑처럼 손을 덜덜 떨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윤슬을 쳐냈던 손을 닦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자, 남자가 도망치듯 복도를 걸어나갔다. 반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슬이 상담실 운윧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와요, 윤슬 씨.”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방금 나간 사랑.”

"그래서 윤슬 씨의 도움이 필요한 거죠."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라며 의자튤 가리킨 강호수는 묻지도 않고 차 한잔을 따라 윤슬의 앞으로 밀 어놓았다.

"윤슬 씨가 먼저 연락울 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난…… 태준이 일 때문에라도 윤슬 씨가 이 일을 그만두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거든 요. 아니. 그만두지는 않아도 태준이 녀석이 진정할 때까지 조금 시간이 필 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사람 사는 게 그렇잖아요? 돈이 필요하면 뭐든 하게 되는. 저도 똑같죠."

결국엔 돈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처옹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따위와 는 상관없이. 아니, 그때나 지금이나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명확히 정의 내리지 못한다는 것은 같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은 돈 때문 에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타인의 불행과 괴로움을 없애주기 위해서와 같은 거창한 이유가 있을까요. 난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도 아닌데요. 오히려 옹졸하고. 속 좁고, 이기 적인 쪽에 가까울걸요. 돈 안 준다고 하면 내가 굳이 이 짓을 하고 있겠어 요?"

"윤슬 씨야말로 내게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도 내가원하는 쪽으로 윤슬 씨를 이해하고 싶거든요.”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강호수는 윤슬을 보며 옷기만 했다.

"그래도…… 한때 상담의였던 정을 봐서, 왜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는지 말해플 수 있습니까."

"돈이야 항상 필요한 거죠."

"항상 필요한 거지만, 돈 때문에 했던 적은 없지 않습니까.”

강호수의 지적에 윤슬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말을 고르고 있자, 그런 윤슬을 보며 강호수가 흐용. 하고 낮은 신음을 별어 냈다.

"방어적인 태도를 츼하는군요. 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탐색하는 거 기분 나빠요. 전 환자가 아니라니까요.”

"보이는 걸 어떻게 합니까. 직업병이라고 이해해주세요. 그래서 말해플 마음은 없는 겁니까?

잠시 눈울 굴리던 윤슬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울 열었다.

"형이 만나는 여자를 데리고 을 거라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어요."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뒷말을 기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답변 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돈이 들어가잖아요. 집을 사든 전세를 얻든. 그래서 조금 이라도 보태고 싶었어요. 모은 돈 전부 주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여윳돈 조금이요. 그래서 형 결혼 전까지 좀 모아보려고요

"형님도 동의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강호수도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묻는 거겠지. 윤슬 은 솔직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형은 물라요. 그냥 저 혼자 생각한 거니까. 형한테……형한테는 인사하 러 온다는 말도 못 들었어요. 아버지가 알고 있냐고 전화를 하셔서 듣게  

이런 애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딴소리를 했던 거였다. 어깨를 축 놀어뜨리며 힘없이 옷자. 그런 윤슬울 보며 강호수가 마주 옷었다.

"그거 압니까? 윤슬 씨는 참 착해요."

"나는 잘 모르겠던데. 사실 돈울 보태주려는 것도 형 결혼을 축하하며 도 움이 되고 싶어서 돈울 보태겠다는 건지. 아니면 형 엿먹이려고 생각한 건 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돈울 보탠다고 하면 형이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하니까요. 어찌면 두 가지 전부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후자의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윤슬은 어깨률 으쓱이며 강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만 갈게요."

"어차피 한 시간은 예약이 없으니 좀 더 앉아 있다 가지 그럽니까. 제 말 상대도 해주고. 요즘 태준이 때문에 윤슬 씨와 멀어진 기분이 들거든요."

"원래 가깝지도 않았잖아요, 우리 사이. 게다가 그 권태준 씨 때문에 제 가 일을 못 해서, 이래저래 돈도 못 벌고 있어요. 쓰던 글도 묻히기 직전이 고, 출판사에는 눈치 보이고. 작가가 완결권 안 내고 잠수 탔다고 독자한테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어요." "왠지 죄책감이 느껴지는군요.”

떼, 죄책감 좀 느끼라고 한 말이었어요. 그럼 다용에 필게요.”

훌쩍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슬을 강호수는 붙잡지 않았다. 살펴 가라는 인사를 뒤로하고 윤슬은 상담실울 나섰다.

꿈이라는 게 항상 어두운 것만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타인의 악몽은 어 두운 경우가 많았다. 분위기가 어두운 것에 더해 눈으로 보이는 색 자체도 어두웠다. 악몽이 주는 공포감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꿈울 꾸는 당사자의 기분이 반영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윤슬은 어두운 공간에 서서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으욕……아, 아악……"

귓가에 울리는 끈적한 신욤과 고통에 젖은 비명. 유쾌하지 않은 소용에 윤슬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아파, 흐옥, 으……하, 하지 마.

시야가 어등에 적응된 것인지, 아니면 어등이 흐려진 것인지는 알수 없 지만 윤슬의 시야 속으로 희미했던 인영이 명확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섯의 남자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네 사람에게 둘러싸인 남자는 오늘 낮에 강호수의 병원에서 마주쳤던 청년이었다.

가흑한 폭행울 당하고 있나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잔인할 수 도 있는 행위. 같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폭행울 당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팔 울 붙잡고 있는 남자, 다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 청년의 위에 울라타 삽입 울 하고 있는 남자, 그리고 머리 위에서 그 모든 것을휴대폰으로 촬영하 고 있는 남자.

청 년은 연신 고통 어 린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엣된 얼 굴을 하고. 반쯤 벗겨진 옷은 얼핏 교복처럼 보이기도 했다.

청년의 하얀 엉덩이 위의 붉은 자국은 거칠게 엉덩이를 때리던 남자의 손자국인지 아니면 흘러나온 핏자국인지 알 수 없었다. 철썩철썩. 하체가 부딪치며 나는 살 소리는 외설적 이었으며 잔인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방조했던 죄책감에 짓늘린 사람의 악몽울 보기도 했었 고, 누군가를 죽게 만둘 정도로 괴롭게 했던 사람의 악몽을 보기도 했었으 며, 죽음의 직전에 이르기까지 폭행했던, 혹은 폭행당했던 이들의 꿈을 보 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성에게 가해지는 성적인 폭행은 종류가 다론 불쾌 감읗 유발했다. 윤슬은 본능적인 거부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듣끼리의 성행우". 거기에 더해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고통 스러웠던 강압적인 행위.

윤슬은 그제야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청년의 병적인 반응을 이해할수 있었다. 남성에 대한 두려움. 타인과의 접촉에 대한 거부감. 그 모든 것들 의 원인이 이 악몽 속에 숨어 있었다.

"공찍하죠.”

윤슬의 옆에 나타난 청년이 억놀린 신음을 밸어내며 말했다. 그의 목소 리는 희미했고, 굳어진 얼굴은 핏기없이 하닿게 질려있었다.

"매일, 나는 매일 저 새끼들한테 짓밟혀요. 눈을 감으면 항상 저 새끼돌 이 보여서. 잠을 안 자고 싶은데……잠울 안 자고 버틸 수가 없어요. 커피 를 마시고, 약울 먹어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버티질 못해요. 공찍해요. 하 루, 이틀, 한달. 일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히지 않아요. 상처는 시간 이 지나면 낫고. 기억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래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문 신처럼, 화상처럼 지워지질 않아. 차라리 문신이었다면 도려내기라도 했 을 텐데."

청년은 꽉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도, 큰 소리를 낸다면 저 멀리 자신을 유린하고 있는 남자들이 또 다른 자 신의 존재를 알아차릴까 두렵다는 것처럼. 그는 목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 하고 있었다.

"이게 꿈이라는 건 알죠?”

"알아요. 꿈인데. 기껏 꿈인데…… 왜 나는 꿈에서조차 저 새끼들한테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나고! 왜! 대체 왜……나는……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벗어나고 싶어서 이사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숨어 서 지내다시피 하는데……"그런데도 꿈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공찍해 요. 숨울 쉴 수가 없어요. 죽을 것 같아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청 년은 두 손으로 얼굴울 감싸며 흐느꼈다. 웅크리고 주저앉은 청년의 어깨가 너무나 작고 힘겨워 보여 윤슬은 씁쓸한 기분에 입술울 깨물었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당장 저 새끼돌이 내 눈앞에 나타날 것 같아서 너무 두려워요.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하루를 보내도 안도할 수가 없어요. 잠 들면 다시 저 새끼돌이 나를 괴롭히니까. 잊고 싶은데, 나도 똥 밟은 셈 치고 그냥 잊어버리고 싶은데, 저 새끼들의 면상을 안 보고 싶은데……왜 나 는 벗어 날 수가 없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모든 기억이 시간과 함께 희미해질 거라고. 윤슬은 그렇게 청년을 다독일 수 없었다. 그 증거가 지금의 악몽이었 으니까.

"아파, 아파. ……아악, 아, 하지 마, ……흐으으. 제발 하지 마."

저 멀리 울부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소리가 들릴때마다웅크린 청년의 어깨가크게 떨렸다.

"나는 위로 같은 거 못해요. 위로를 해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윤슬의 말에 청년이 손에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둘었다. 을기 젖은 얼굴이 애처로워, 윤슬은 젖은 눈동자를 을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알고 있죠? 내가 당신의 악몽을 없애주기 위해 왔다는 거.”

그 을음에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 없애즐까요?”

"네."

청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얼마나 간절하고. 또 얼마나 바라 왔는지를 알 것 같아 윤슬이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 라보던 청년이 손을 뻗어 윤슬의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윤슬은 이 청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차마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고통은 그것을 겪어보지 못한 타인이 감히 이 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른 이의 슬픔과 아품과 괴로움을 이해한 다는 그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상대를 기만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으니까.

청년울 바라보고 마주 선 윤슬이 청년의 눈울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입 술을 했다.

"그걸로 괜찮아요."

"무슨……"

"악몽, 없에는 걸로 만폭할 수 있어요?"

윤슬의 묻음에 청 년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입술만 벙긋거 렸다.

"현실에서 저 사람듈울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윤슬의 을음이 마치 현실이라도 된 것처럼, 남자의 얼굴색이 파리해졌 다. 진짜 저 새끼들을 눈앞에 마주한 것처럼 청년의 몸이 굳고, 얼굴이 굳 었다. 윤슬의 손을 붙잡고 있던 청년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공포로 몸을 떨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또다시 저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어찌나 걱정하고. 겨우 그 정도일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려요?”

"나는. 나는……." 

고.”

고저 없이 나직하게 홀러나오는 말에 청년이 윤슬을 응시했다. 가면으 로 가려진 윤슬의 표정을 살피는 것에 실패한 청년은 불안과 초조로손가 락윱 꼼지락거렸다. 주춤거리며 청년이 손을 빼내려 하자, 윤슬이 그손울 답삭 잡아 멈춰 세웠다.

"이건 꿈이에요ㅣ

"… …알아요.”

"악옹이지만, 아주 지독한 악몽이지만. 이것 역시 당신의 꿈에 지나지 않 아요."

청년은 윤슬에게 팔목이 잡힌 상태로 조용히 윤슬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나는 당신의 악몽을 없애줄 수 있어요. 거기에 더해, 당신이 원하는꿈 을 꾸게 해플 수도 있어요."

"월 원해요?” 

기껏 꿈이잖아. 누구의 꿈도 아닌 당신의 꿈이잖아. 내가 여기 있고. 당

신이 여기 있으니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윤슬은 그러한 뜻울 담아 청 년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네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라고.

ㅁ단지 이 악몽이 사라지기를 바라요? 아니면 다론 행복한 꿈을 꾸고 싶 어요? 더 이상 저 짐승 같은 놈들한테 당하고만 있지 않아도 좋아요. 원하 는 건 뭐든지 꿈꿀 수 있어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라도 꿈에서는 가능 하잖아요. 당신이 아무리 악몽울 꿔도 다론 사람이 당신을 도와줄 수 없어 요. 물론 나는 예외지만. 반대로 말하면, 당신이 어떤 꿈울 꿔도 다른누군 가는 그것을 알지도. 제재하지도 못한다는 거예요. 이건 당신의 꿈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잖아. 자 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며, 윤슬은 조용히 청년에게 답을 요구했다.

붙잡고 있는 팔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차마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청년의 눈동자에도 흔들림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작고 미세한 변화를 윤슬은 조용히 서서 인내했다.

기다림은 나브지 않았다. 그것은 기꺼운 쪽에 가까웠다.

청년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였다. 축 늘어졌던 입 매는 모종의 다짐을 담고 다물려 있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달달 떨고 있던 청 년의 팔뚝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을 때, 청 년은 윤슬을 향해 고개 룰 끄덕였다.

"죽여버리고 싶어요.”

"누구를요?"

찌 개자식들. 날 끊임없이 괴롭히는 저 개자식들을 죽이고 싶어요. 매 일 잠들 때마다 나룹 옭아매고 괴롭혀댔던 저 새끼들을 내가. 내 손으로 죽 이고 또 죽이고 싶어요. 내가 고통받았던 것만큼, 그보다 더, 아니, 평생 매 일 밤마다 죽이며 확인을 해야 편해질 것 같아요. 현실 어딘가에서는 사지 멀껑하게 돌아다니겠지만, 꿈에서라도 나를 괴롭히는 저것들을 나는 죽여 야겠어요.”

그 정도라면 기끼이.

윤슬은 청년의 팔을 놓아주고 빈손울 청년에게로 내일었다. 그 손바닥 위에 청년이 원하는 것이 마치 그림을 그려 넣은 것처럼 나타났다.

날이 바짝 선 칼을 움켜쥐고. 청년은 저 멀리 뭉쳐 있는 남자들에게로 시 선을 던졌다. 우울하게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가 독기를 풍고 번똑였다.

"가요.”

윤슬은 손가락을 곧게 펴 남자들을 가리 켰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윤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은 성큼성큼 걸어 남자을에게 향했다. 사람이라 말할 수 없는 농들에게 유린당하던 청년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 고 없었다.

청 년은 옹쳐 있는 사내들의 등을 찌르고, 사지를 찌르고. 목구멍을 찔렀 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 난장울 치면서도움직임을 멈추지 않았 다.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칼을 휘두르는 청년의 모습울 윤슬은 가만히 지 켜보았다.

사람의 내면은 어듭고 광기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윤슬은 또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는 듯 웃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윤슬이 낮게 속 삭이듯 말했다.

"내 선물에 만족했으면 좋겠네요. 언제라도 만족했다고 느끼면, 충분하 다고 느끼면 그만뒤도 좋아요. 악몽이 사라진 것처럼, 더 이상 필요하지 않 은 선물도 사라질 게니까.”

과연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언젠가 청년 이 충분하다고 느낄 때, 그때 청년의 상처도 조금은 퇴색되기를 바랄 뿐이 었다. 

벨 소리에 문을 여니 권태준이 서 있었다. 벽에 등울 기대고살짝 다리 끝을 꼬아 서서 옆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화보처럼 보였으나. 그래 봤자 배 경이 윤슬의 오피스텔 복도였다. 빤히 쳐다보던 윤슬이 조용히 문을 닫으 려 하자 권태준이 급하게 문름으로 손울 넣어 문울 당겼다.

"자다 일어났습니까가

기다 일어났울 시간은 아니죠.”

"내 모습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문울 닫았던 거 아니었습니까."

권태준은 진지하게 말을 하는데. 듣고 보면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없는 아무 말일 때가 많았다. 평소처럼 권태준의 말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자, 윤슬을 따라 들어온 권태준이 뭔가를 싱크대 위에 울려놓았다. 술찍 보기 에도 꽤나 묵직해서 윤슬이 소리 없는 질문울 던졌다.

"밖에 비 오는 거 압니까?"

"일어났을 때부터 오던데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얼큰한 걸 먹어줘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 니까 그건 어느 나라 법도인데.

침대에 걸터암아 침묵하는 윤슬을 뒤로하고. 권태준은 마치 제집처럼 찬 장과 싱크대 문울 열어 뒤적거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냄비를 꺼 낸 권태준이 을로 한 번 행궈 가스레인지 위에 을리고, 가지고 왔던 봉지에 서 꺼낸 무언가룰 냄비에 부었다.

"뭐예요."

"차려주면 식사할 생각 있습니까?”

"……네."

"감자탕 사왔습니다."

집에서 쉽게 먹을 만한 것은 아니라 자주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굳이 먹 으러 외출을 할 만큼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었지만, 사온 것을 거절할 만큼 싫어하는 용식도 아니었다.

"윤슬 씨." 떼."

"앞치마어디 있습니까."

"그런 거 없는데요."

고무장갑도 없는 집에 앞치마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앞치0ㅏ를 입을

만큼 거창한 요리를 하지도 않고. 자추ㅣ하는 남자 중에 앞치0ㅏ를 구비하고 323" 869 

"권태준 씨는 앞치마 입고 요리해요?”

애초에 사 온 음식을 냄비에 데우는 것이 앞치0ㅏ룰 필요로 하는 일인지 도 윤슬은 알 수 없었다.

"'앞치아를 입어야 요리하는 모양새가 나지 않습니까.”

"지금 그건 딱히 요리를 한다고 말하기도 어 렵지 않나요.”

"요즘은 요리하는 남자가 인기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가스레인지 앞 에 선 제 뒷모습이."

"……더워 보이네요."

아닌 게 아니라. 정장울 위아래로 완벽하게 차려입고 불 앞에 선 권태준 은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더워 보였다. 윤슬은 혀를 차며 권태준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장울 을려다보았다. 권태준이 상을 차려풀 때까지 무시하 고 있는 편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윤슬 씨도 요리하는 남자가 좋습니까?"

침대에 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몸이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배 위에 두 손울 모아 을리고 살짝 눈을 감았던 윤슬은 방금 전 권태준의 질문울 떠을렸다.

"얻어먹는 사람보다 요리해주는 사람이 좋긴 하죠. 저는 식사를 차리는 것보다 것가락 얹는 게 더 좋거든요.”

"그런 식으로 제가 좋다는 표현은 안 해도 됩 니다."

"그건 아니고요.”

권태준은 자주 헛소리를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마냥무시할수는 없었 다. 아니라고 말해도 저 좋울 대로 생각하는 권태준인데, 하을며 입을 다을 고 있으면 공정이라고 받아듈여서 나중이 고달파질 것 같았다. 대꾸할 가 치가 없는 헛소리라고 해도 즉시즉시 권태준의 말에 반박하는 것이 최선임 을 윤슬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안 협니까."

I차려주는 것까지 해주는 거 아니었어요?”

양심적으로 상은 협시다. 수저도 꺼내고."

귀찮다. 누가 상 차리고 수저까지 을려놔서 딱 대령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울 하며 윤슬이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접이식 상을 펴서 물티 슈로 닦고, 수저를 을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나오는 것  

으로 밥 먹을 준비를 마쳤다. 그사이에 권태준은 상 위로 감자탕이 담긴 냄 비와 밥을 을려놓고 있었다.

역시나 더웠는지 권태준의 이마와 앞머리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은 권태준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윤슬을 손짓해 불렀다.

"상 펴고 수저 을리라고 했다고 딱 그것만 했습니까.”

"그럼 뭘 더해야하는데요?”

I밑반찬도 좀 꺼내고, 물도 떠놓고. 집에서 상 한 번 안 차려본 사람처럼 이러 깁니까?"

"집에서 많이 해서, 혼자 살 때에는 하기 싫거든요. 그리고 저 반찬 안 먹 어요."

또박또박 대꾸하는 윤슬의 접시에 커다란 돼지 등뼈를 덜어주며 권태준 이한숨을 쉬었다.

"호수랑 형제입니까?’

"네?'

아닌 걸 알면서도 묻는 저의를 알 수 없어. 윤슬이 눈을 가늘게 뜨고 권 태준읕 바라보았다.

"하는 짓이 폭같아서 말입니다.”

"왠지 좋은 의미는 아닐 것 같네요."

'네,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개도 먹울 때는 안 건드린다는데, 왜 남의 집에 와서 밥 먹으면서 건드 려 ㅣ 윤슬이 불통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뼈를 잡아 벌렸다. 큼직한 살코 기가 야돌야들하게 익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요즘 무슨 일 있습니까."

권태준의 을음에 윤슬은 양 블이 볼록해질 정도로 밥과 고기를 넣고 씹 으며 눈울 둥그렇게 떴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공뼉거리자. 권 태준은 빈 그릇에 살을 발라내고 남은 뼈룯 모아 담으며 덧붙였다.

"장을 설친 얼굴입니다. 피곤해 보여요."

"아. 아아."

그런 뜻이었나. 윤슬은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하며 입에 있는 것을 오 물거 렸다.

"요큼 누가 귀찮게 하는 바랑에 일을 못 해서요. 버는 돈 없이 손가락만 빨기 전에. 한 글자라도 더 쓰려고 무리했나 봐요.”

잠을 설친 얼굴이라는 말에 조금 뜨공하기도 했다. 대충 둘러댔지만. 열 심히 일울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큰 거짓말도 아니었다.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 니까.

"어떤 새끼가귀찮게 합니까? 말해봐요. 나그런 거 처리 전문입니다."

엄지를 세워 자신의 가승을 묵 찌르며 자부심 있게 말하는 권태준울윤슬은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뗀데, 권태준이라면 정말 모 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 나를 그런 표정으로 봅니까."

"정말을라서 묻는 거예요?”

"감자 먹고 싶습니까?”

잘 익은 감자를 반으로 잘라 윤슬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권 태준이 생긋 웃었다.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는 국물을 잔똑 머금어 짭조 롬하니 맛이 있었다.

권태준은 융식을 어디서 사 오는 걸까. 보통 열에 다섯 번만 괜찮은 식당 울 찾아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권태준이 데려가는 식당이나 사 오는 음식은 전부 맛이 좋았다. 맛집 탐색이라도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윤슬이 잡생각으로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낮게 한탄을 내별었다.

" 그렇게 맛있습니까?"

아, 진심으로 이 새끼를 처리하고 싶어졌다.

밥울 먹은 뒤 상을 치우고도 권태준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상용으 로 구비해두었던 칫솔까지 요구해 양치를 끌낸 권태준은 벽에 기대어 앉 아 소설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라는 뜻을 담아쳐다보는윤슬의 시선도 곳곳이 무시하는 권태준의 뻔뻔함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 게 감탄이 나을 정도로 강력했다. 결국 이번에도 권태준을 이기지 못한 윤슬은 한숭을 내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왜 자신의 집인데도 불청객울 내쫓지 못하고 자신이 포기를 해야 하는 걸까. 집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그렇게 부당한 일인가.

매번 그러하듯.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모두 가질 그 의문은 권태준에게 닿지 못했다. 길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살아가면서 당연한 것이 통용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윤슬은 권태준을 보며 알게 되 었다. 

심각한 문제다. 권태준 같은 사람이 멀찡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 사 회 적으로도 큰 문제라고 윤슬은 생각했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론 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관 심울 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 윤슬에게 권태준의 공격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무엇이 걸 린 게임이었는지 그 목적은 희 미해졌고, 이제는 권태준이 귀찮으면서도 익 숙해지고 있었다. 그런 변화를 노렸던 거라면, 권태준은 지극히 지능적이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등 뒤에 있으면서도 딴생각을 하고 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권태준이 물었다.

"……에피소드를 생각하고 있어요. 심심하면 그만 가시죠? 저도 일해야 하는데."

"심심하진 않습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권태준이 뒤로 다가와 바짝 얼굴을 붙이고 모니 터를 쳐다보았다. 뺨 옆으로 느껴지는 권태준의 숨결에 윤슬이 놀라 머리 를 반대편으로 기울였다.

"어떤 글을 쓰는 겁니까?”

다행히도 한글 파일을 열어놨던 모양이다. 바탕화면만 덜렁 내보이고 있 었다면 민망했을 뻔했다. 윤슬은 손바닥으로 모니터를 가리며 권태준을 일 어 냈다.

"국가기밀이라도 됩니까?”

"원래 쓰는 도중에는 다론 사람 안 보여줘요."

"왜요? 야한 거라도 씁니까? 좀 봅시다.”

윤슬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권태준은 장난스럽게 모니터를 훌었다. 두 어 플 읽는다고 스토리를 알 수도 없을 텐데. 읽지 말라고 하니까 오히려 신나서 읽으려고 하는 건 권태준의 성격이 그만큼 돗됐다는 뜻이겠지.

꽉 잡은 손을 가슴 쪽으로 바짝 잡아당겨 윤슬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권 태준의 자세는 자못 윤슬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권태준에 게서 벗어나려는 윤슬의 버둥거림이 커지자, 잡고 있는 권태준도 팔에 힘 울 주었다.

"윤슬 씨, 참 무방비한 거압니까."

"여기가 비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권태준은 윤슬의 티셔츠 밖으로 보이는 됫목 언저리에 이 를 세었다. 뜨거운 숨결과 따공한 통증. 그리고 반사적으로 느껴지는 거부 감에 윤슬이 힘울 주어 권태준울 밀어냈다. 짧게나마 권태준의 혀와 이가 닿았던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윤슬이 화난 얼굴로 권태준을 노려보았다.

"뭐하는 거예요?”

"장난이었습니다. ……화났습니까?”

." 있는 사람에게는 장난이겠지만, 힘없이 당하는 사람에게는 폭력이 에요.”

"미안합니다."

윤슬의 지적에 권태준은 사과하며 깔공하게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청년의 악몽을 보고 난 후로 조금 예민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타 인의 악몽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충격을 받는다거나 트라우마가 생기 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조금씩 영향울 받는 부분이 있음울 인정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윤슬의 굳은 표정을 살핀 권태준이 멋찍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턱 을 긁적였다.

"이쯤에서 내가 퇴장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까부터 퇴장해달라고 계속 말했거든요."

드!럽시다. 질척거리는 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니까그

아니야. 질척이 문제가 아니야.

그런 생각울 감추며 윤슬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태 준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런 사소한 오해 정도는 얼0ㅏ든지 묻어둘 수 있었 다.

"진지하게 묻는 건데, 권태준 씨는 애인 없어요?”

"왜 그런 걸 묻습니까?"’

현관문 쪽으로 권태준의 등을 밀며 윤슬이 묻자, 권태준이 고개룯 갸웃 거리며 되물었다.

"요리하는 남자, 질척이지 않는 남자인 권태준 씨 정도면 인기도 많을 것 같아서요.”

"그런 걸 떠나서 얼굴부터 먹고 돌어가지 않습니까. 내가."

." 예. 얼굴부터 먹고 들어가는 권태준 씨가 굳이 여기서 시간낭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기가 많울 것 같아서 을어봤어요."

그 먹히는 얼굴울 다론 곳에서 써줬으면 싶은 0땀에 말한 거였는데, 권 태준은 윤슬에게로 둘아서 며 반짝 눈울 발냈다.

"있습니다.”

있으면서 여기서 뭐하는 건데, 라는 물음을 내별기도 전에 권태준이 턱, 하고 윤슬의 어깨에 손울 을렸다.

"여기 있지 않습니까.”

"…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말인데요."

손을 잡은 것이 호감이 있어서였다는 그 작은 핑계가 첫눈에 반했다에 서 서로 만나보기로 했다로, 그리고 이제는 애인으로 변해버린 그 과정을 윤슬은 동감할 수 없었다. 

벌레를 쫓듯 권태준의 손울 쳐낸 윤슬이 어서 가라는 뜻을 담아 손울 휘 휘 내저었다.

"그렇게 격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갈 겁니다.”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열며 권태준이 윤슬울 둘아보았다.

"푹 자요."

"일할 거거든요.”

악몽 꾸지 말고.”

윤슬의 대답울 듣지 못한 것처럼, 권태준은 계 할 말만 남기고 문을 나섰 다. 마치 윤슬의 사정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런 그의 말에 윤슬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앙앙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넌 정말 못된 애구나. 

못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니에요. 이거 용국이가 한 거예요.

잘못했다고는 안 하고, 동생 핑계를 대? 점점 못된 짓만 더 하네.

뭔가를 엎지론 것처럼 누런 자국이 남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가 두 손으로 얼굴울 가리고 핑핑 울고 있었다. 허리에 손울 깊고 고압적으 로 여자아이를 내려다보며 여자는 마구 화를 냈다. 여자의 목소리가 높아 질수록 아이의 울음 또한 커져 갔다.

~ 너, 잘못했다는 말은 안 하고 또 이렇게 우는구나누가 들으면 계모가 들어와서 널 구박한다고 하겠어. 너 그걸 노리는 거니? 어찜 어린 게 영악 해서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처럼 못된 애는본 적이 없어.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못된 거니. 여자는 아이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엄마.

아이는 다가울 상황을 아는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아두 손울 마주 비렸 다. 눈을로 젖은 눈동자에 공포감이 가득 차있었다. 그런 아이의 옷자락을 잡아 찔찔 끌어. 커다란 문 앞에 선 여자가 입꼬리를 을려 옷었다.

" 내가 아무리 너를 생각하고 혼을 내도 사람들은 계모가 심술울 부린다 고 손가락질을 하겠지. 내가 무서워서 매튤 들 수가 있겠니, 너를 혼낼 수 가 있겠니. 그렇다고 너를 그냥 두자니, 네가 엇나갈 것 같아서 걱정이 되 고. 이렇게라도 반성하는 시간울 갖게 해야지.

커다란 문을 열어 아이를 일어 넣은 여자가 광,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 다. 광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스러웠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 그것을 제외하면 그 어떤 소리도 둘리지 않았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다.

"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 엄마, 꺼내주세요. 여기 무서워요. 엄마, 엄 마.

광광광. 작은 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지만. 그에 대답해주 

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발작적으로 문을 두드려댔다. 누 군가는 이 문울 열어줄 거라 생각하며, 누군가는 이 문을 열어즐 거라 기대 하며. 그렇게 계속해서 문울 두드리고. 또 두드려댔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어등 속에서 한참 동안그것을 듣고 있던 윤슬이 쯧, 하고 작게 혀를 찼다.

"그만해요.”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만해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무서워요. 혼자인 건 무서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어론의 말투로 말을 하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꽤나 이질적이었지 만, 윤슬은 그것을 지 적 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에요. 나도 여기 있는데요. 밝은 빛을 생각해봐요. 그럼 내 가보일 거예요.”

"손, 손잡아줄래요?'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윤슬은 개의치 않고 손울 내밀었다. 따 뜻하거나 차가운 체온이 없는. 고무 인형을 만지는 것처럼 그저 말랑한 혹 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손에 쥐는 것과 동시에 희미하게나마 어둥이 물러 났다. 완전히 밝아진 것은 아니었고. 겨우 형체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 다.

"너무 어두워요. 괴을이 나울 것 같아요."

괴을이 원데요?”

"어둠 속에서 나를 잡아먹는 괴물이요.”

어렴픗하게 보이는 여자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여리 고 가날파 보였다. 한껏 어깨를 웅크리고 두려움에 떠는 여자를 보며 윤슬 은 고개를 내저었다.

I괴을은 없어요. 세상에 괴물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람이 유일할 거예 요 ”

당신이 두려워할 괴물은 어둠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을 어듭고 좁은 공간에 가뒀던 새엄마라고. 당신 앞에 서 있는 나 역시 도 그러한 괴물 중의 하나라고. 윤슬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쓴옷음과 함 께 삼켰다.

"어등 속에 있는 건 두려워요. 맘일 때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켜 놔요. 잠들 때에도 불을 끄지 못해요. 그런데 꿈에서는 언제나 어둠뿐이에요. 두 려워요. 잠울 자고 싶지 않아요."

윤슬은 어둥이 두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두려운 것은 사람이지, 형체가 없는 어둥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여자의 두려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그두려움이 헛된 망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에게는 죽음보다 어둥이 더 두렵게 느 껴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두려움과 공포는 다론 사람이 판단할 수 있 는 문제가 아니 니까.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여자의 두려움이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 라. 그녀의 악몽을 없애주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윤슬은 여자를 어둥으로 부터 안심시키기 위해 설득하거나위로하지 않았다.

"어 릴 때 잘돗을 할 때마다 엄마는 나쁜 아이라고 하면서 나를 창고에 가 뒀어요. 창문 하나 없는 공간이라 문을 닫으면 한 점의 빛도들어오지 않 는 아주 컴컴한 창고에. 그곳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알지 못하고 계속 갇 혀 있어야 했어요. 어듭고, 서늘했어요.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어둠 속에 서 무언가 목덜미를 건드리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밖에 없 는데, 내가 아닌 다른 것이 있는 기분이 들었어. 소름이 돋고, 무서워서 몽  

이 떨렸어요. 그런데도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어요.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잡 아먹힐 것 같아서. 울면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는 것밖에 할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것마저도 멈춘다면 정말 잡아먹힐 것 같았어. 내 목덜미를 을어뜯고, 내 몸뚱이를 뜯어먹을 것처럼 느껴져서……아, 무서워요. 무서 워.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내보내줘요, 엄마."

그리 말하는 여자의 몸뚱이가 덜덜 떨렸다. 마주 잡고 있는 손으로 그 떨 림이 전해지고 있었다. 윤슬은 여자의 손울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울지 말고 나를 봐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흐느끼는 여자는 도통 윤슬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뜻이라, 윤슬은 곤란한 마욤에 입술 을 깨을었다.

"다시 창고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내가 용서해줄게요."

붙잡고 있던 여자의 손등을 토닥이며 윤슬이 말했다.

"창고에 갇히지 않을 수 있어요. 이 악몽을 없애줄까요?'

3"" I 869

#……네. 착한 아이가 될 거예요. 창고에 갇히기 실어요. 어둠을 없애주 세요그

꽉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여자의 바람이 강하고 간절하 다는 것을 윤슬은 느낄 수 있었다.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질었던 어둥이 조금씩 희미해지며 주변 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 속에서 여자는 마치 유일한동아풀처럼 윤슬의 손에 매달려있었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좋은 생각윧 해봐요. 아주 기분 좋은 꿈을. 어떤 꿈

을 꾸고 싶어요?”

어둥울 걷어내기만 한다고 여자의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 않았다. 윤슬 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물었다.

"엄마가보고 싶어요. ……지금 엄마 말고요. 진짜우리 엄마요.”

몸뚱이는 성인 여성인데, 말투는 아까와 반대로 어린아이의 것과 비슷했 다. 그것을 들으며 윤슬은 상상해봐요, 하고 속삭였다.

밝아진 공간에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처음 악몽에서 보았던, 아이를 우악스럽게 혼내던 새엄마와 다른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쪽이 여자의 친엄 

그 여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윤슬의 손울 놓고 조심스럽게 걸음 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여자는 소녀로. 소녀는 이내 처음 악몽에 들어왔울 때 보았던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리 아기, 이제 잘 시간이네.

"엄마랑 같이 잘래."

~ 엄마랑 같이 자면, 숙녀가 못 되는데점마랑 같이 자면 계속 아가로 있 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아? 엄마랑 같이 잘 거야?

"난 계속……계속 엄마 아기 할거야.”

중년 여성의 얼굴을 을려다보며 아이가 팔을 쭉 뻗었다. 아이를 끌어안 아 침대에 눕힌 중년 여성이 침대가에 걸터앉아 토닥토닥 아이의 배를 도 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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