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
대뜽 내뱉는 말에 윤슬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긍
정은 아니었고, 그레~|? 하는 뉘앙스의 대꾸인지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2““.”869
권태준이 살짝 미간울 찌푸리며 윤슬울 바라보았다.
“그게 답니까?”
“뭐가요?”
떼. 저도 플거웠어요. 뭐 이런 대답이 나와야하는 거 아닙니까?”
“딱히 안 플거웠는데, 플거웠다고 말을 하면 거짓말이잖아요.”
.”언제부터 솔직했다고, 거짓말 참말을 따집니까. 어차피 지금 상황이 전 부 거짓인데. 차라리 듣기 좋게 거5!말이라도 합시다.”
“아, 네. 저도 플거웠습니다. 정말 플거워서 좋았습니다. 기쁘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이 정도면 됐어요?”
“됐습니다. 윤슬 씨는 표정이 솔직하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거울울 보지 않아도 한껏 구겨져 있을 제 표정을 떠을리며 윤슬이 불을 부풀렸다.
“나브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운전을 하던 권태준이 또다시 불쑥 말을 꺼냈다. 해가 떨어졌음 에도 여전히 밝은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윤슬이 권태준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본 것도, 카페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셨던 것도. 꽤 나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긴장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 일상적인 생활 을 하는 게 참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 말하며 권태준은 작게 옷었다. 우스워서 옷는다기보다 조소에 가까 운 웃옹이었다.
“영주가 있었을 때는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쇼핑도 하고. 외식도 하고 그랬는데 말입니다.”
“……누군데요.”
윤슬 씨는 모르겠군요. 여동생입니다. 저번에 말했었죠, 못생긴 주 제에 울보라고. 그 녀석 이름이 영주입니다. 최영주.”
권태준의 대꾸에 윤슬은 강호수의 꿈에서 보았던 소녀를 떠을렸다. 강호수보다 두세 살 어린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그녀도 서론을 넘기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호수에게 들었습니까?”
“뭘요?”
“우리가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거.”
“……네. 들었어요.”
들었다고 하면 강호수와 가까운 사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자니 저 짐승 같은 감을 지닌 권태준에게 강호수에 대해 모르 는 척하는 것을 돌켜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 같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던 윤슬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호수와는 같은 나이라서 그런지 쉽게 친해졌습니다. 처음부터 형제였 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주는……종 나중에 들어왔죠. 서론 넘으면 다 같이 농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지 만. 어릴 때는 한두 살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겨우 두 살 어렸을 분인데도 왜 그렇게 작고 어리게 느껴졌던 건지. 아니, 확실히 어린 나이이긴 했습니다. 영주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강호수가 이런 말을 지껄였다면. 알고 싶지 않다고 단번에 말을 잘랐을 텐데. 타인의 과거나 심정. 처지 같은 것을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그냥 계약만 이행하면 되는 거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권태준의 말을 자르기는 어려웠다. 왠지 그럴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닌 것 같고.
윤슬은 조용히 권태준의 말을 홀려들었다.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지도 않고.
“업어 키운 것도 아닌데. 그 녀석 어릴 때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고생도 많이 한 녀석이라서 더 안쓰러웠습니다. 그래서 고아 원 나을 때 함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권태준은 양전히 앉아 있던 윤슬을 돌아보았다.
“윤슬 씨는 형제가 어떻게 됩니까.”
“형이 하나 있다고 차트에 적혀있지 않던가요.”
드“것까지는 진료 차트에 없더군요. 다론 방법으로 알아내긴 했지만. 그래도 윤슬 씨 입으로 듣는 것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권태준의 당당한 태도는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뒷조사 했다고 참으로 당당하고 뼌번하게도 말을 하는구나. 이제는 아주 거침이 없구나. 윤슬이 지끈거 리는 머리를 손끝으로 꾹 놀렀다.
“형이랑 사이가 좋습니까.”
“……어릴 때는 좋았죠. 어느 순간 완전히 틀어져서 이제는 대화도 잘 안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흔한 일이죠.”
“흔한 일입니까? 형제끼리 자주 싸운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싸우고 플어
일반적으로 다문 거라면 말이지. 이제는 누구의 잘못이라고 원인을 찾 기 어려울 만큼. 자신과 형의 멀어진 관계를 떠을리며 윤슬은 쓰게 옷었다.
“초록 불이에요. 남의 가정사 신경 쓰지 마시고, 운전이나 하세요.”
“를어지기 전까지 관계가 좋았다면, 어릴 때는좋은추억이 많았겠군요.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어릴 때도 성격이 별로였거든요.”
“윤슬 씨 성격이 종 까칠하고 매력적이긴 합니다.”
말고 형이요.”
은근술찍 흥을 보고 있다. 윤슬이 권태준을 노려보며 입술을 뒤를어 불만을 표했다.
“제 성격은 어릴 때만 해도 아주좋았어요. 순둥이였거든요.”
“그렇습니까? 상상이 안 가지만, 저는 윤슬 씨의 지금 성격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댁한테 그런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은 듣고 싶지 않거든. 불끈 2 주먹을 무릎 위에 힘겹게 을리며 윤슬이 속으로 씨근덕거렸다. 문득. 권태준과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묘하게 가정사를 파헤치는 것처럼 느껴져 불쾌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럴 거면 권태준의 과거 나 파헤치자며 윤슬이 말을 둘렸다.
“예전에는 영화도 보고 외식도 했다면서, 그럼 지금은 여동생하고 자주 안 만나요? 다 각자 사는 거예요?”
권태준과 강호수가 따로 살기로 했을 때 여동생도 같이 독립을 했다거나. 아니면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거나. 궁금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서 권태준의 이야기로 말을 둘리기엔 바로 전에 나눴던 대 화가 훌릉한 소재였다.
별다를 것 없는 윤슬에 을음에 권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남의 가정사를 물었던 주제에 자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혼자서는 잘도 나불거 리더니 어째서. 딱히 대답을 기다렸던 것도 아닌지라, 곧 질문에 흥미를 잃 고 딴생각에 빠진 윤슬의 귓가로 뒤늦은 대꾸가 들려왔다.
“죽었습니다. 사 년 전에.”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은 돌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을 원하고 노크 를 했던 것은 아니어서. 태준은 기다리지 않고 문울 열었다. 상담실 안쪽에 남아 뭔가를 하고 있던 호수가 힐곳 고개를 돌어 태준울 확인하고 손울 흔들었다.
“좀 앉아 있어. 오 분이면 끝나니까.”
할 일이 남은 모양인지, 호수가 다시 모니터를 확인하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태준이 호수의 책상 반대쪽에 있는 소파 에 몸을 내렸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날짜가 되면 조심스러워졌다. 평상시의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꽤나 좋지 못한 일이었고, 강호수가 감 정적으로 무너질지도 모론다는 염려 또한 태준을 신경 쓰이게 만물었다. 여러모로 복잡하고 껄끄러우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날이 오늘이었다.
“됐어. 다 끝났으면 일어나자.”
“서두를 것 없잖아. 항상 거기서 기다리는 녀석인데. 차 한잔 마실 시간도 못 기다려주겠어?”
답지 않은 농담을 하는 호수를 태준은 을끄러 미 바라보았다. 오늘 강호수의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속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지만, 뭔가 꾸며낸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나가자.”
컴퓨터를 끄고 벗어두었던 걸옷을 손에 든 호수가 운으로 향하며 손짓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태준이 그런 호수의 뒤를 따랐다. 상담실의 불을 끄 고, 퇴근 준비를 끝낸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병원 을 한 바퀴 둘러보며 뒷정리를 마친 호수가 병원 운을 닫았다.
“나오기 전까지 진료 본거냐.”
“뭐, 그렇지. 예약올 받아버려서, 예약 미루고 병원 운 닫는 게 더 번거로울 것 같더라고.”
첫해에 호수는 병원 문을 열지도 못했었다. 그날 하루는 둘 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었지. 그다움 해 역시 병원에 나가지 않았었다. 울고불고하지
는 않았지만. 방구석에 처박혀 나오질 않았었다. 그리고 작넌에는 묘하게 안정된 모습으로 오전 진료를 끝내고 차분하게 자신을 기다렸었다. 올해의 오늘은……
시간이 지날수록 술픔이 중화되어 간다는 것을 반박할 생각은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강호수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변했고, 태 준은 그 이유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너도 회사 있다가 오는 길일 거 아나.”
“그래.”
“참, 네 형님은 잘 계셔? 그 양반도 칼침 안 맞고오래 버티시네그
“형님까지 가기엔 순번이 길지.”
“하긴 네 형님 밑으로 칼받이가졸풀이 있지. 그 양반한테 가기 전에 너부터 위험할 거고. 그 양반이 없어야 네가 손 털고 나을 기회라도 생길 텐 데. 너 별일 없으려면 그 양반이 무사하기를 빌어야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엘리베이터에 을라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호수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요즘 위험한 일은 없지?”
“그농의 말뿐인 영업 이사. 니들 조폭이라는 거 알 만한 사랑은 다 알아요
“알 만한 사람만 알지. 대부분은 을라.”
“괜히 덤터기 써서 별 달지 말고. 너도 이제 서른이 넘었어.”
“그래. 서론 넘어 웬만한 일로는 큰집 들어갈 일 없으니 걱정 마라.”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린 호수가 태준울 훑겨보았다. 못마땅함과 걱정스러움이 담긴 시선임울 태준은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소리하지 말고 타.”
“꽃 사러 가자. 미리 연락해서 주문해뒀어.”
보조석에 오르며 호수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매년 가던 꽃집을 찾아 가자. 꽃집 주인이 국화 한 다발과 생전에 여동생이 좋아했던 프리지아 한 다발을 내일었다.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을 뒷좌석에 내려놓고, 태준과 호수는 다시 차에 올라 납골당으로 향했다.
“점심안 먹었지.”
“아직.”
“밥 먹고 술이나 한잔하자. 평일에 오후 진료 안 하니까 땡땡이치는 기분
예전의 강호수였다면 저런 농담은커녕 밥 애기도 꺼내지 못했을 텐데. 식음을 전폐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강호수를 끌어내 밥 한술 뜨게 만 드는 것도 힘들었었다. 그런 강호수가 이제는 밥을 먹고 술을 마시자고 먼저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시간이 흐론 것일까.
호수가 느끼는 사 년과 자신이 느끼는 사 년의 흐름이 다른 속도로 지나 친 것인지, 태준은 문득 의아해졌다.
매넌 들르는 곳이었지만 결코 익숙하지 않은 납골당 건물 안으로 둘어 가, 영주의 자리를 찾았다. 사 넌의 시간이 흘렀지만 언제나 같은 얼굴로 옷고 있는 영주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도 많이 없었고, 그중에서 웃고 있는 사진은 더욱 드을어 고르는데 꽤나 애를 먹었던 사진이었다.
“영주야.”
태준과 나란히 선 호수가 나직이 영주의 이름을 불렀다.
“오빠 왔어. 일넌 동안 잘지냈지?”
유곧함과 사진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창을 훑는 호수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 떨림은 나타났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고, 호수는 마치 어제 만났
“자주 찾아와야 하는데. 오빠들이 게을러서 미안하다. 만날 바쁘다. 바쁘다 핑계나 대고. 너 있을 때도 그러더니, 너 없어도 정신 못 차리고 이러 고 있네.”
그리 말하는 강호수는 작게 옷고 있었다. 태준은 호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주 보러 와서 내 얼굴은 왜 봐? 영주 봐. 영주가 서운해하겠네요
태준의 시선을 알아차린 호수가 핀잔울 했다.
“거기 있으니 마음은 종 편해? 오빠들이 신경 많이 돗써줘서 미안해. 이제는 종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겸사겸사 시간 나면 태준이 녀석도 신 경 써주고. 오빠가 태준이 놈 칼침 맞고 다닐까봐 걱정이 크다. 너도 걱정 되지? 태준이 농만 정신 차리면 좋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 속을썩여요. 이러니 태준이 농 두고 이 오빠가 연애를 하겠니, 결혼을 하겠니. 태준이 안 다치고, 빨리 손 털고 나올 수 있게 네가하늘에서 태준이 종 잘봐줘.”
그렇게 제 할 말을 늘어놓은 호수가 태준을 돌아보았다.
노가도 영주한테 인사하고 말도 좀 해.”
“속으로 했어.”
“속으로 하긴. 부끄러워서 그러면 자리 피해 주고.”
“됐다.”
“아무튼 혼자 무게 잡고. 분위기 잡아요. 우리가 이해해야지 어찌겠어. 그렇지, 영주야? 우리 영주는 일 넌이 지나도 여전히 예쁘네. 내넌에도폭 같이 예브겠지. 오빠들은 매넌 늙어가고 있는데, 혼자 젊어서 좋아? 너 좋 아하는 꽃 사 왔어. 그래도 우리 영주가 프리지아보다 뭘씬 더 예쁜 거 알지?”
봉안단 아래에 꽃다발을 내려놓은 호수가 허리를 펴며 으앗차. 하고 의미 모를 신음을 내밸었다.
“오빠는 잘 지내고 있어. 너도 거기서 잘 지내고, 태준이도 별일 없이 무사하게 지내면 오빠는 걱정이 없다. 그러니까 내넌에도 우리 아무 일 없이 이렇게 웃으면서 보자. 오빤 먼저 나가 있을게, 태준이 농이랑 얘기해.”
유리창읕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린 호수가 태준을 향해 돌아섰다.
“나가있으려고? 그냥여 기 있어.”
“너도 영주랑 얘기 폼 하고 그래. 오랜만에 와서 뻘품하게 얼굴만 보고 가려고 그러나. 매정하게. 차에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와.”
태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준 호수가 술렁술렁 걸음을 옮겨 멀어지는 것을 보던 태준이 고개를 둘려 영주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근심 도 없는 얼굴로 옷고 있는 영주의 사진을 빤히 바라보다 꽉 다을고 있던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도 호수 이상하지?”
아무리 술픔이 희석된다 할지라도. 저렇게 홀가분한 얼굴은 할수 없는 거였다. 이제껏 느꼈던 죄책감과 책임감을 한순간 털어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식읕 떠나보낸 어미처럼. 영주를 제 가숨에 묻었던 녀석이었다. 피를 토할 것처럼 울고, 금방이라도 따라 죽을 것처럼 또 울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어떻게 영주의 사진을 마주하고 잘 지내니? 라고 인사하며 웃올 수 있는걸까.
사 년의 시간은 짧지 않지만그렇다고 길지도 않았다.
을해, 아니. 작넌의 강호수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녀석이 변해버린 것일까. 이제 영주를 놓아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추억을 붙잡고 울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훑러서, 아니면 우리가 옷어야 영주도 하놀에 서 편히 지낼 거라고 생각해서, 그도 아니라면……강호수에게 어떤 변화가 생겨서.
“네가 돌봐플 건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호수 같다.”
생각해보면 시무룩해하고 울고 있을 때가 많던 영주였는데. 드을게 옷 고 있는 사진 한 장을 찾아내 이렇게 세워두니 이제는 정말 옷고 있을 것 같 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그래, 아주 이상한 일이 생긴 것 같거든. 네가 둘었으 면 농담하지 말라고 한 소리 했울 정도로 아주 이상한 일이. 그런데, 영주야. 난 왠지 그게 내 착각은 아닌 것 같다. 그게 분명 호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그리고 나한테도 손을 뻗으려고 하는 것 같아.”
오빠 농담은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진담 같은데 농담이래. 정작 진담이라고 하는 소리는 농담 같고. 듣는 사람이 알아등을 수 있는 수준의 농담을해.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영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태준은 작게 웃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야, 인마. 변명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상해.”
태준은 뺨을 긁적이며 확답을 받는 것처럼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상해.
뭔가를 생각하는 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 작넌 이날에는 그냥 헤어졌었나.”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집으로 바로 갔지.”
태준의 을음에 잠시 생각을 떠을리던 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와 함께 온 곳은 예전에 종종 영주를 데리고 저녁에 들르곤 했던 곱창집 이었다. 곱창은 징그러워서 싫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영주를 두고, 호수와 소주 한 병을 가볍게 나눠 마시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영주는 아이 입맛이라 곱창은 죽어도 싫다고 했었지. 치킨 먹울래. 피자 먹울래. 칭얼거리는 영주의 손에 치킨을 사서 들려주고, 셋이 나란히 걸어 집으로 가는 길은 즐거웠었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릿수도, 테이블 위로 내려앉은 분위기도, 태준의 기분도 달랐지만.
지글지글 구워지는 곱창을 앞에 두고, 그것을 안주 삼아 태준은 호수와 합께 소주를 두어 병 비웠다. 술이 달지 않은 날인데도, 을을 들이붓는 것 처럼 꿀꺽끌꺽 잘도 넘어갔다.
“기분은.”
“기분이 뭐.”
“영주 기일에는 항상 침울해져 있었잖아.”
“아아, 내 기분. 그냥 그래. 좋을 것도 없고. 나불 것도 없지. 처음엔 애가 혼자 얼마나 힘들어서 그런 선택울 했울까. 내가 왜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그러고도 오빠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을까. 나는 바쁘다는 핑 계로 영주를 방치했던 건 아닐까. 막연한 술픔과 자책 때문에 힘돌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영주는 그 선택으로 행복해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전처럼 죽울 것같이 아프지도 않 고.”
“그걸……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태준은 목구멍읕 꽉 막고 있던 무언가를 삼키며 힘겹게 말을 내별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 아니고. 어찌면 그냥 도피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하니까. 영주의 아음을 어떻게 알고. 지금 영주가 어떤 생각일지 또 어떻게 알겠어. 그냥 지금의 영주가 그 선택으로 더 편해졌을 거라고……날 위로하고, 속이고. 기만하고. 그러면서 내가 편해지려는
그리 말하는 호수는 정말 편한 얼굴이었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에. 자괴감에 일그러진 얼굴이었다면 오늘 영주의 앞에서 보였던 모습울 만둘기 위해 노력했구나 생각이라도 했울 텐데. 너무나 솔직한 답변과 표정에 태준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태준이 꽉 쥐고 있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호수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영주가 더는 없다는 걸.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가슴을 치면서 자책을 해도 그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영주의 죽음에 그 어떤 이유나 감정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거 아나? 남도 아니고, 동생인데. 그 아이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자책하고 그리워하고 애달파하고.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곱창움 소금에 찍어 입에 넣고 질검이며 호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감정도 없는 건 당연히 이상한 거지. 나도 여전히 슬퍼. 영주가 그 립고 보고 싶고, 그 애의 빈자리가 허전하고. 하지만 그 감정에 얽매여서 정작 내 자신과 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건 과한 거지.”
그것이 마치 영주의 죽음 뒤에 보였던 호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태준은 입을 다을었다.
“우린 언제나 영주를 그리워할 거야. 그건 매넌 기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항시 그럴 테지. 영주 생일에, 흑은 우리 생일에 셋이 모여 함께 축 하했던 기억이 떠오를 거고. 명절에도 영주의 빈자리를 느낄 거고.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문득 자고 일어나서. 흑은 양치를할때, 아니면 밥을 먹을 때, 잠들기 직전에 영주의 빈자리를 떠을리겠지.”
조곤조곤 말을 하며 호수는 거푸 술을 들이 켰다. 태준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 빈 병을 혼들며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마셔. 그렇게 멍하게 있지 말고.”
“응.”
“그동안 네가 많이 노력했다는 거 알아.”
“알긴 뭘 알아?”
찰랑거 리는 술잔을 들여 다보던 태준이 그것을 비우며 타박하듯 을었다.
“술프고 힘든 건 나만이 아니었는데도, 넌 네 감정보다 먼저 나룰 추술러야 했지. 네가 영주의 죽음에 술퍼할 시간울 내가 뺏은 거나 마찬가지야.”
“옷기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사람들이 다 똑같은 방식으로 술퍼하지는 않아. 난 내 방식대로 충분히 술퍼했고. 애도했다. 그러니 그런 소리는 그만뒤.”
“그래. 네 방식대로. 난 항상 그랬돗이 널 믿고 내 마옹껏 술퍼했고, 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치다꺼리를 한 거지. 그게 네 방식이라는 게 술프다.”
“강호수.”
태준이 미간울 찌푸리며 이름을 부르자, 호수가 실없이 웃으며 태준의 잔에 제 잔을 쨍, 하고 부딪쳤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태준아. 난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
태준올 위로하거나 안심시키려는 얼굴이 아니었다. 호수는 정말 편해 보 였고,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태준은 더욱 의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 떤 것이 호수와 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데, 그 이유가무엇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기도 했다.
“난 지금 편안해. 영주의 죽음울 순수하게 술퍼하고 에도하고 있지. 예전 처럼 그것으로 자책하며 나를, 그리고 너를 힘들게 하지 않고. 지금의 모습 이 울바론 게 아닐까. 영주가 우리를 원망하고, 괴로워하라고 죽은 건 아닐 거 아냐. 그런데 그 녀석의 의도와 다르게 우리가 괴로워한다면 그게 잘 못된 게 아닐까.”
“나는 내가 편안해진 것처럼, 영주의 죽음울 바로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모두 다르지. 예전의 네가 영주를 따라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던 것도, 내가 조용히 영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너룯 위로했던 것도, 그리고 지금 네가 평온하게 영주의 죽옹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오답이 아니고,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어. 사람에 따라 다를 뿐이지. 이건 평소의 네가 말해왔던 지침 아니었어?”
태준의 을음에 호수는 가볍게 웃음을 홀렸다.
“그래, 그렇지.”
맞아, 하고 태준의 말에 긍정을 하며 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입을 다울고 소주 몇 잔을 들이켠 호수가 술잔을 내려놓고 태준을 반히 쳐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평온함울 너도 느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넌 분명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거야.”
“내 감정은 지금도 평온하다, 강호수.”
“아냐, 그런 게 아나.”
장난스러운 태준의 대꾸에 호수는 손울 내저으며 고개를 혼들었다.
“우리……참 고생 많이 하고 살았어. 열심히 살았고, 바브게 살았고. 치열하게 살았지.”
“이 빌어 먹을 세상을 사는데 누군들 치열하지 않겠나.”
“유독, 그래, 유독 네가 고생했어. 우리 중에서도 넌……정말 넌…….”
“그만해. 신파 찍으려고 폼 잡지 말고.”
또 술술 강호수의 십팔 번 신세 한탄이 나오려고 한다며 핀잔울 하며 술병을 쥐는 태준의 손울 호수가 와락 잡았다.
“너 항상 장등 때마다 악몽을 꾸잖아. 그게 네 속죄라고 했지. 그렇게 속죄하면. 그럼 네 죄는 누가 용서해주는데. ……그게 끝이 있긴 해?”
“취했나. 강호수. 이야기 주제가 아주 널을 뛴다.”
“속죄 받을 수 있는 기회였어. 네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태준의 손을 놓아준 호수가 술병을 빼앗아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콸콸 슬을 넘겼다. 거하게 병나발을 불고 빈 병을 광 내려놓으며, 호수가 낮게 중얼거렸다.
“멍청한놈.”
똑폭똑.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다. 너무나 희미해서 무슨 소리가 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
탕탕탕.
조금 크게 울린 소리에 시간을 확인하고, 누군가 방문을 하기엔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에 옆집 남편이 늦게 퇴근울 했나 보다고 흘려 넘 겼다.
광광광.
문이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울리는 소리에 윤슬은 그제야 누군가 두드리는 운이 자신의 집 현관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찾아을 사람도 없고.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을 사람은 더더욱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지만. 윤슬은 선뜻 운을 열기에 앞서 잠시
“누구세요.”
살짝 짜증이 섞인 윤슬의 을음에 답을 하듯 광광,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윤슬 씨.”
기세 좋게 두드려대던 것과는 다르게 희미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윤슬이 현관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윤슬 씨, 납니다.”
걸쇠를 걸고 살며시 문을 열자, 그 문틈으로 쑥 들어온 손이 문을 잡아당겼다. 탕, 소리를 내며 걸쇠에 걸려 문이 멈추자, 문 너머의 남자는 문틈에 집 어 넣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문안열어풀 겁니까?”
“손울 빼야 문을 닫든 열든 할 것 같은데요.”
윤슬의 지적에 손이 사라졌다. 문울 닫은 윤슬은 이대로 문울 잠근 채 방 문자를 무시하고 싶은 충동울 느꼈다. 문울 안 열고 버터도 알아서 운을 따 고 들어오겠지만. 생각해보니 오늘은 왜 문울 안 따고 열어달라고 기다리고 있는 거지. 문울 두드리고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은 분명한데. 권태준이 정상적인 행동울 하니 오히려 더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평소와 다론 비정상적인 상태의 사람울 자극하면 결코 좋은 꼴울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윤슬은 내키지 않는 손길로 걸쇠를 플고 문을 열어주 었다.
방금 전과 달리 활짝 열리는 문 앞에 어깨를 축 놀어뜨리고 서 있는 권태준이 보였다. 권태준 너머로 대기하듯 서 있던 사내 두 명도 추가로.
“이 밤에 남의 집에 오는 건 예의가 아닌데요.”
“커피 한잔 주지 않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우리 집이 카페인 플 알겠네.”
“선묻입니다.”
권태준은 두 손 가득 안고 있던 인형을 윤슬의 풍에 안겨주고. 현관 안으 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형님, 쉬십시오.”
“그래. 수고했다. 너희들도 그만 들어가.”
“예. 형님.”
누가 보면 조폭인 줄 알겠다. 허리까지 구부려 인사를 하는 사내들울보 다가.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먼저 안으로 들어갔던 권태준은 익숙하게 침대에 등을 기댄 상태로 바닥에 암아 있었다.
“술 마셨어요.”
“조금만 마셔야지 했는데 조금 과하게 마셨습니다.”
보통 취한 사람들이 안 뤼했다고 우기고 조금만 마셨다고 우기는 것과는 다르게 꽤나 솔직한 답변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그리 퓌한 것 같지는 않은데, 권태준의 근처에만 가도 술 냄새가 를를 나는 것을 보면 정말 그 의 말처럼 과하게 마신 것 같기도 했다.
“술 마셨으면 집에 가서 자야지, 남의 집에는 왜 와요?”
“커피가 마시고 싶었습니다.”
“커피 맡겨놨어요?”
“외상 안 됩니까. 다음에 오늘 것까지 사다가 맡겨두겠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로도 저 주둥이는 어떻게 저리 거침이 없을까. 작게 한숨
“이건 뭐예요?”
“술 한잔하고 인형 뽑는 게 춰미입니다.”
“그런 건 취미가 아니라 술버릇이라고 하죠.”
“역시 글울 쓰는 사람이라 요점을 잘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말을 해봤자 무엇할까.
윤슬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싱크대로 향했다. 그렇게 원하는 커피나 빨리 먹여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포트에 생수를 붓고 전원 버른을 늘렸다. 큼직한 머그를 꺼내 인스턴트 커피 한 봉지를 탈탈 털어 넣고 을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자, 등 뒤에서 권태준이 혼잣말처 럼 웅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처음엔 엄청 못했습니다, 인형 뽑기. 작은 인형 하나 뽑겠다고 이만원을 그 자리에서 날렸으니, 수지에 맞는 장사는 아니었죠.”
“그런 승부욕읕 자극해서 돈울 버는 장사니까요. 권태준 씨 같은 사람이 한둘은 아닐 거예요.”
“참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흐, 하고 옷던 권태준이 해봤습니까? 하고 물었다.
“전 손재주도 없고, 기계와 상성도 안 맞고. 운도 나빠서요. 마음에 드는게 있다면 그냥 돈울 주고 사는 쪽을 택하죠. 뽑기, 도박. 사행성 게임도 안 하고, 추가로 복권도 안 해요.”
“건강한 정신을 가진 모범적인 사람입 니다, 윤슬 씨는.”
“네, 참 고맙습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칭찬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윤슬은 대충 대꾸하며 머그에 뜨거운 을을 부었다.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것고, 머그를 조심스럽게 권태준의 앞에 놓아주었다.
“마셔요. 마시고 정신 차려서 빨리 가줬으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머그를 감싸 후후 불어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호수와 싸우기라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축 늘어진 모습도 그렇고, 술 에 츼했다면 강호수를 먼저 찾았겠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신을 찾아오지 는 않았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처음 해봤을 때, 제 취향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원 말을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윤슬은 그게 인형 뽑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권태준은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었나. 이런 타입은 피곤한데. 을론 술에 취해서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기물을파손하거나, 길거 리에 있는 을건을 집어온다거나, 싸움을 건다거나 하는모든종류의 주정이 다 곤란하긴 하지만. 을질적으로 피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타격울 주는 타입이라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죽기 전에, 저녁때 가공 셋이 나와 밥을 먹으면서 반주를 했었습니다. 그게 팍팍한 삶에서 그나마 작은 플거움이었습니다. 언젠가 집에 가 는 길에 영주가 인형을 뽑아달라고 하더군요. 길가에 있던 인형 뽑기 기계 였습니다. 그 나이에 무슨 인형이냐고 핀잔을 주려고 했는데, 항상울상이 던 녀석이 그때 어린애처럼 눈울 반짝거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만원을 날렸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눈을 반짝거리면서 뽑아준 인형을좋다 고 풍에 안고 있는 모습이 좋아서, 하나둘 뽑아보다 보니까 실력이 늘더군요. 그거 압니까? 호수 그놈은 인형 하나 뽑겠다고 그날 오만 원을 썼던 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윤슬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한숨도 같이 삼켰다. 네, 네.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권태준이 들고 있는 머그 속 커피의 잔량을 살폈다. 저거 다 비우면 을래 강호수에게 연락울 해서 데려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그게 습관이 되어서, 나중에는 슬만 마시면 하나둘씩 인형을 뽑아 집에 가져갔습니다. 영주 방이 인형으로 가득 찰 정도로 말입니다.
“여동생이 좋아했겠네요.”
“네, 좋아했습니다. 그런데……이젠 영주가 없네요. 인형을아무리 뽑아서 가져가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권태준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가법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윤슬이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을자. 조용히 침묵 이 내려앉았다.
“영주 기일이었습니다. 오늘.”
“아……”
그래서 이렇게 침울해 있던 거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술을 마셨던거구나.
술에 취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술을 마신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이제야 강호수가 아닌 자신에게로 온 이유도 조금은 알게 되었고. 강호수는 권태준만큼, 아니, 이보다 더 취해 있겠지. 그렇다고 권태준이 굳이 자신에게 온 이유가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수가 영주의 죽음에 죄책감과 책임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건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그 녀석도, 나도 알 고 있지만 쉽사리 그 감정을 떨쳐녈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죽음은……”
잠시 목이 엔 윤슬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가족의 죽음은 그런 거니까요. 항상 죽은 사람을 떠을리고,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하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죽음읗 바꿀 수 있지 않았울까.”
더 잘해줄걸. 더 신경 써풀걸. 그런 생각에서 시작되어. 내가 뭔가를 했으면 그 죽음을 바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돼 살아있는 사람묻까지도 미치게 만들지.
윤슬은 씁쓸하게 옷으며 뒷말을 삼켰다. 그것이 권태준에게도. 자신에게도 딱히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탓이었다.
“그 녀석은 유달리 심했습니다. 영주를 따라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어떻게……죽었어요, 여동생?”
“자살했습니다.”
권태준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윤슬이 잠시 입을 다을었다.
그래서였을까. 유달리 강했던 책임감이 강호수를 짓놀렀던 것이었을까. 그의 악몽은 그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어째서 자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릴 때의 충격이 그녀의 자살에 영향울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 었을까. 그걸 막지 못해서 그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호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였나.
“영주의 죽음을 마주하고,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오로지 우리 셋으로 이루어졌던 우리의 세상이. 무너진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술주정에서 비롯된 권태준의 한탄과도 비슷한 말을 들으며 윤슬이 자조하듯 웃었다.
“살수 없울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엔 살아가게 되더라고요.”
그게 사람이니까. 죽을 것처럼 아프고, 죽울 것처럼 술프고, 죽울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결국엔 살아가게 된다. 그게 사람이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내가 살아있고 호수 녀석이 살아있는 것을 보면, 윤슬씨 말처럼……결국 살아가기 마련인 모양입니다.”
윤슬을 따라하듯 권태준이 낮게 웃었다.
“고통 속에서 영혼이 죽은 채로 살아가는 것도 살아있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술픔에 익숙해지는 걸까요. 술픔이 무더지는 걸까요, 아니면 슬픔이 사라지는 걸까요. 시간이 지난다고 그 고통과 술픔이 깎여 사라질 수 있다 고 생각합니까.”
“사랑은 망각의 동을이라고 하잖아요.”
문득 이 지지부진한 문답에 어째서 호옹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술 취한 침입자를 빨리 쫓아내야 하는데. 답지 않은 권태준의 모습에 휘말려. 취한 사람이라는 것도 및고 휩쓸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게원 줄 압니까?"
손가락울 꼼지락거리며 어떻게 권태준을 내쫓울까 잠시 고민하던 윤슬이 태준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사 넌, 겨우 사 넌인데……그 녀석이 달라졌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울던 녀석이 영주의 기일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더군요.”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을 했지만 윤슬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검작되었던 탓이었다.
“사 넌이면, 감정을 추스를 시간으로 충분했던 게 아닐까요.”
“윤슬 씨는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사고로.”
누구는 상처받았던 적이 없었을까. 누구는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을까. 마치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자란 철부지로 몰아가는 듯한 말에 윤슬이 코웃음을 홀리며 권태준에게 대꾸했다.
“윤슬 씨는 충분했습니까. 사 년의 시간으로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슬품과 그리움이 사라졌습니까.”
반박할 수 없는 을음에 윤슬이 입을 다을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내가 헛것을 본다고 착각울 할 정도였습니다.”
“그 녀석을 짓누르던 죄책감, 자책, 후회, 그리움과 같은 감정들이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강 선생님이 그 감정돌을 이겨내셨던 것일 수도 있죠.”
따1찌면 그것을 외 면하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강 선생님이 선택한 결과겠죠.”
권태준의 말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윤슬은 당당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권태준을 상대로 뻔뻔하게 말을 내별을 만큼. 그것은 어 디까지 나 사실이었으니까.
한 번도 강요했던 적은 없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었고, 선택은 그들이 했으니까. 자신이 한 일은 그들의 부탁을 들어준 것밖에 없었다.
'강 선생님이 젊어지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운 고통이어서, 권태준 씨의 말처럼 도망친 거라고 해도……강 선생님의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대신 고통 받울 것도 아니면서 왜 아파하지 않느나고 강요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권태준 씨가 보기에 강 선생님의 태도가 이상하 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그건 강 선생님 본인의 감정이고 강 선생님 스스로의 선택이었겠죠
“편해진 것으로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도피가 모든 걸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 괴롭고 힘든 감정들 모두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감당해 야 할 것들인데, 눈을 가리고 도망을 친다 한들 그게 사라집니까? 그건……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걸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돌이 있다고요. 권태준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권태준 씨처럼 그 감정들을 감당할 만큼 단 단하지는 않아요.”
“그 무게에 짓늘려 죽는다고 해도, 호수는……그 녀석은 적어도 그걸 외면하고 도망칠 녀석은 아니었습니다.”
댁은 모르겠지만. 강호수는 그랬어. 외 면하고 도망쳤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행복한 꿈을 꾸기를 원했지.
그래서 자신의 손을 잡았다는 것을 윤슬은 말해주고 싶었다. 단호히 말하는 권태준의 면전에 대고 현실을 말해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윤슬 씨.……윤슬 씨.”
권태준은 상체를 수그린 상태로 흐느끼는 것처럼 윤슬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호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고개를 수그린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윤슬은 권태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둘었다. 억늘린 비명이 목구멍을 꽉 채웠고,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어떤 대꾸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윤슬은 부흡뜬 눈으로 권태준의 머 리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렵게 입을 때 말을 내밸었지만. 윤슬의 머릿속은어떤 말로 권태준의 의심에서 벗어날 것인지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왔던 거였을까. 술에 취한 척을 했던 것도 연기 였겠지. 이제까지 인형 뽑기가 어찌고, 죽은 여동생이 어쩌고 했던 소리는 지금 이 말을 내쒣기 전에 자신의 경계를 없애기 위한 연극이었을까.
“그런 헛소리를 들어주기엔 피곤하네요. 커피 마셨으면 그만 가세요.”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요구했지만. 권태준은 고목나무처럼 자리를 지키고 암아 있을 뿐이었다.
“권태준 씨.”
애초에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술 취한 사람이라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대충 말상대를 해줬던 것이 잘못이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권태준에게 휩쓸렸다. 정중한 척을 하면서 속으로는 어떻 게든 자신울 뒤흔들려는 수작이었겠지. 연극을 해보자는 둥. 거짓말을 해 보자는 둥 했던 것도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는 속셈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방심했울 때 한순간 치고 들어오려고 했던 걸까. 얼굴울 마주하고 직 접적으로 묻는 것도 싫지만, 이런 식으로 빙빙 둘려 묻는 것도 질색이다. 이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나가요. 권태준 씨. 내 말안들려요?”
대답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것처럼 꾹 입을 다물고 암아 있는 권태준을 바라보던 윤슬이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언성을 높이려는 윤슬의 귀로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칫. 걸음을 멈춘 윤슬이 까만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설마……아니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권태준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암은 윤슬이 귀를 기울였다. 색색, 고론 숨소리와 합께 잘못 둘은 것은 아니었는지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가 울렸다.
“……자?”
잔다고? 그런 질문울 던져놓고,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들고 짜증 나게 만들어 놓고, 지금 자?
“야, 권태준.”
태준의 어깨를 살짝 잡아 혼들며 감정을 담아 이름을 부르자. 윤슬의 손에 잡혀 작게 혼들리던 몸이 갸우뚱 기울어지더니 바닥으로쓰러졌다. 편 한 자세를 찾으려는 아이처럼 뒤척거리다가, 팔과 다리를 웅크리고 태아 자세로 몸을 구부린 권태준이 색색 숨을 내별었다.
언제부터 잠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새 깊게 잠이 든 권태준을 내려 다보던 윤슬이 하, 하고 작게 헛웃음울 내밸었다.
암은 상태로 밤울 지새웠다. 희미하게 동이 트는 것을 느낀 게 몇 분 전 같은데, 벌써 창문 밖이 환해져 있었다.
책상 앞에 않아 키보드 위에 손울 울리고 있었지만.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하얀 화면이었다. 분명 글울 쓴다고 썼던 것 같은데, 정신울 차리고 보 자 알 수 없는 문자 몇 개가 찍혀있었다.
작게 한숭을 내쉰 윤슬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잠든 권태준을 내려다보았다. 괘씸한 아음에 베개도 이불도 주지 않고 쓰러진 상태 그대로 두었는데, 불편하지도 않은지 권태준은 까만 정장을 입은 채로 잠이 둘어 중간에 한 번 깨지도 않고 쭉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 그 것도 남의 집에서.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적응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작신작신 밟아서, 아니, 한발 양보해서 그냥 운밖에 내다 버렸으면 좋겠는데. 무거워서 끌고 가지도 옷하겠고. 그렇다고 굴려서 내보내자니 중간에 깬다면 됫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인생에서 이렇게 상대하기 짜증 나고골치 아픈 사랑이 있었던가.
몇 번이나 한숨을 내뱉은 윤슬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 걸어 권태준의 지척으로 다가간 윤슬이 발로 권태준의 어깨를 밟아 혼들었다.
“그만일어나죠?”
불만을 담아 조금 세게 밟아 누르자 권태준이 희미하게 신음울 흘렸다. 몇 번을 더 밟아대자 공, 하고 소리를 내며 권태준이 눈을 떴다.
“……윤슬 씨?”
자다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기민한 움직임으로 윤슬의 발목을 콱움켜 쥔 권태준이 윤슬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해요? 남의 발 붙잡고.”
“미안합니다. 누가 밟는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내가 밟았어요.”
내장이 터지도록 세게 밟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참은 거였음을 권태준은 알고 있을까.
붙잡고 있는 발목을 놓으라며 윤슬이 발을 흔들자, 권태준이 손에 힘을 주어 윤슬의 발을 끌어당겼다. 균형을 잃고 비를거리던 윤슬이 권태준의 복부를 발로 밟자, 컥, 하고 신음울 내별으며 권태준이 발을 놓아주었다.
그러게 눈 떴으면 빨리 일어나서 나갈 것이지. 왜 남의 발은 가지고 놀 아.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듯 윤슬이 팔짱울 낀 상태로 짝다리를 깊고 서 서 권태준을 내려다보고 있자, 바닥에서 몸울 일으켜 않은 권태준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몇 시입니까.”
내내 입고 잤던 정장 윗도리를 벗으며 권태준이 을었다. 더웠는지 와이 셔츠의 등 부분이 땀으로 젖어있는 것이 보였다.
“권태준 씨가 나갈 시 나갈 분이요.”
“지금 투정부리는 겁니까?”
“자다 일어나서 잘 안 보이시나 봐요. 이건 화난 건데요.”
시계도 보지 않고 날카롭게 대꾸하자, 그런 윤슬을 을려다보며 권태준 이 씩 웃었다. 자다 일어난 주제에 늘린 자국도 없이 멀끔한 얼굴로 말갛 게 웃고 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장 깼으면 일어나서 가시죠?”
“지금 일어난 사랑울 을 한 컵도 안 주고 쫓아내려는 겁니까.”
을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건가. 기껏 술 춰한 사랑 재워줬더니 지금 뭘 달라고?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크게 한숨을 내쉰 윤슬이 두어 차례 숨울 고르고 는 싱크대로 가서 울 한 컵을 떠 와 권태준에게 내일었다.
“마시고 얼론가시죠.”
“물도 마시고, 볼일도 보고, 경사겸사 세수라도 종 하고 갑시다. 정 없게 굴지 말고.”
“정이 없었으면 애초에 권태준 씨가 여기서 자고 일어날 일도 없었겠죠.”
“내게 정이 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겁니까.”
맷값 묻어를 생각하고 한 대 칠까. 아니면 멱살을 잡고 끌어낼까, 지금쯤 이면 일어났을 강호수에게 전화를 할까. 윤슬은 진지하게 고민을했다. 그 사이에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선 권태준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해요?”
“자면서 더웠나 봅니다. 샤워라도 해야…….”
권태준의 말을 막으며 윤슬이 조용히 권태준의 정장 윗도리를 집어 건넸다.
“ 나가요.”
“정 있는 사이에 샤워 정도는…….”
“나가.”
손가락으로 현관울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하자. 권태준이 눈 끝울 접어 옷으며 손울 내저었다.
“세수만 하고 나오겠습니다. 오해한 모양인데 소매 올리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왜 소매 단추가 아니라 가승 쪽의 단추를 플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상대를 해주다간 끝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윤슬은 입을 다물었다. 윤슬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권태준이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후우. 작게 한숭을 내쉰 윤슬이 들고 있던 정장 윗도리를 대충 바닥에 던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잠이 밀려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빨리 권태준을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태준이 버티고 가질 않아서 더욱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찌면 이런저런 것들은 다 핑계이고. 권태준이 어젯밤했던 질문의 답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북엇국 같은 거 없습니까? 아니면 콩나을 김칫국이라도.”
수건으로 물기 젖은 머리카락울 털며 욕실에서 나온 권태준이 물었다. 불편하게 X울 텐데도 피곤함이 없는 얼굴은 매끈하기만 했다. 세수를 하고 나와서인지 오히려 더 깔끔하고 멀공하게 보이는 얼굴에 윤슬의 기분 이 착잡해졌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제 표정이 어떤데요.”
“뭐랄까, 내 얼굴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스스로의 얼굴을 생각하고 씁쓸 해하는 그런 표정 같습니다.”
앞부분은 맞았는데 뒷부분은 아니었다. 저거 지금 은근하게 둘려서 까는 거 맞지? 주먹을 움켜쥐게 만드는 권태준의 발언에 윤슬이 침대에서 일어나 권태준이 들고 있던 수건을 빼앗았다.
“내가 자괴감을 느낀다면 그건 권태준 씨 얼굴 때문이 아니라, 권태준 씨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 때문이겠죠. 씻었으면 이제 꺼져주세요. 권태준 씨 때문에 나 잠도 못 자고 일도 못 했어요.”
“그럼 나 자는 동안 뭐한 겁니까? 잠도 안 자고, 일도 안 하고.”
권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탐색하듯 윤슬을 쳐 다보았다.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시선에 윤슬은 말없이 정장 윗도리를 주워 권태준의 풍에 안겨주 었다. 무슨 대꾸를 하든 자신의 손해라는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침묵을 가장한 축객에 권태준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커피 한잔. 아니, 물 한잔이라도 마시고 가면 안됩니까. 입이 절끄럽네요.”
“나가서 사 드세요. 콩나을국이든. 커피든. 돈만 있으면 다 먹을 수 있는 세상이에요. 생수도 편의점에서 팔아요.”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을 활짝 열고 어서 나가라는 액션을 춰하자. 권태준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윤슬 씨. 냉정하네요.”
“그거 아셨으니 다음엔 에써 친절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다융도 기대한 겁니까.”
조금만 참자. 권태준이 현관문 넘어가는 순간까지만 참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윤슬이 입을 꾹 다을었다. 구두를 신고 정장 윗도리 룰 팔에 걸친 권태준이 윤슬울 마주했다.
“어젯밤에…….”
그 한 마디에 절로 옴이 굳었다. 표정을 굳힌 윤슬울 가만히 쳐다보고 있 던 권태준이 살며시 옷었다.
“어젯밤엔 실례했습니다.”
“그걸 알면 어서 가주시죠.”
“갈 겁니다. 그러니까……그렇게 긴장 안해도됩니다. 그렇게안쓰럽게 떨고 있으면, 내가 질문하기도 미안하지 않습니까.”
윤슬의 뺨울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린 권태준이 고개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섰다. 조용히 닫히는 문울 바라보던 윤슬이 낮게 한숨울 내쉬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