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

“제가 그렇게 신뢰가 없는 사람입 니까?”

“새벽에 통화했던 선생님의 말씀 중에 하나도 맞은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건 변명할 여지가 없네요.”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긴장으로 팽팽했었던 신경이 느슨해지자 옴이 노 곤해졌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침대에 눕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가물거 리는 눈을 둘어 강호수를 을려다보았다.

“제 차트에……다 적어두셨죠? 권태준 씨는 어디까지 읽어봤울까요.”

“그게 진짜라는 것과 의뢰에 관한 것들은 적혀있지 않습니다. 태준이도 확신은 없울 겁니다.”

윤슬은 고개를 내저었다. 상담했던 내용을 본 것만으로도 권태준은 확신 을 가졌을 거다. 윤슬은 짐승처럼 번들거리던 권태준의 눈을 떠을렸다. 회 칼만 제외하면 상냥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모든 것에 확신을 갖고 움직이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

“환자 정보 유출된 거. 고소당할 사항 아니에요?”  

으로 따지면 저 또한 피해자이지요.”

“은행들도 고객 정보 유촐되 면 소송당하고 그러잖아요.”

“그럼 어쩔 수 없이 비싼 변호사를 사야겠군요. 윤슬 씨에게 미안하긴 하 지만, 일단 저도 병원 문을 닫울수는 없으니까요. 발뺌울 하든 태준이 놈 한테 덤터기를 씌우든, 아무론 책임은 최대한 회피할 겁니다.”

“ 나쁘네요.”

“그게 우리의 거래 아닙니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약속. 그것을 제 외하면 상담의와 상담자의 관계이니, 저도 나름 방어를 할 수밖에요.”

강호수의 얄미운 대꾸에 윤슬이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옷었 다. 그런 윤슬의 가슴울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려주며 강호수가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요. 긴장 플고 잠돌어도 좋습니다. 아무도 윤슬 씨를 해치지 않아 요 ”

조용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색에 윤슬이 눈을 감았다. 누군가 곁에 있는데 도 잠이 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이 들락 말락 하는 경계에서 윤슬은 타인 의 소리죽인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고요한 자장가와도 비슷했  

밤장을 설친 것은 윤슬만이 아니었다. 새벽의 통화에 신경이 쓰여 다시 장들기가 쉽지 않았고, 병원에 나오자마자 누군가 침입해 뒤진 듯한 서류 몰과 패스워드 오류가 뜨는 컴퓨터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쳤고, 그리고 윤슬의 연락에 미친 둣이 뛰어와 권태준과 승강이를 벌였던 강호수는 죽을 맛이었다.

터덜터덜 오피스텔올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걷는 호수의 옆으로까만 세단이 다가와 섰다. 천천히 내려가는 창문 너머로 태준을 확인한 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타.”

호수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태준이 손울 까닥거려 호수를 불러들였다. 화를 내려던 호수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태준의 옆자리에 을랐다.

“기다렸나?”

“아침 안 먹었다며. 근처에서 설렁탕 한 그릇 먹자.”

태준의 말에 차는 조용히 도로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호수는 태준의  

지 치밀어 오르는데. 저 녀석이 저렇게 꾹 입을 다을고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빌어먹을 고집. 호수가 입술을 뒤틀며 속으로 욕설을 내별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니들도 내려. 설렁탕 한그릇씩 먹고 들어가자.”

“저흰 괜찮습니다.”

“아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어야지. 빨리 내려.”

“알겠습니다, 형님.”

운전석과 조수석에 암아 있는 사내들의 어깨를 치며 말한 태준은 그들이 열어주는 문울 통해 세단에서 내려섰다. 깔끔한 식당 내부에는 아침과 점심 사이의 애매한 시간 탓인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시커먼 사내 넷이 들 어와 둘씩 짝지어 테이블에 앉자, 그 주변만 어두워지는 기분이 둘어 호수 는 종업원의 시선을 홀려보내며 헛기침을 했다.

“뭐 먹을래?”

정장 재킷을 벗어 옆 의자에 걸쳐놓으며 태준이 물었다. 

“아무거나시켜. 지금뭐 먹을지가중요하나.”

“중요하지. 밥 먹으러 온 건데. 설렁탕으로 주세요.”

“ 같은 거로요.”

주문울 받은 종업원이 멀어지자 호수가 태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무슨 생각이야?”

“질문 참 뜬금없다.”

“그렇게 뜬금없는 질문은 아닐 텐데. 윤슬 씨 집에 왜 쳐들어갔나고.”

호수의 물음에 을을 따르던 태준이 고개를 돌어 호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뼌히 알고 있을 텐데, 왜 그런걸 을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환자 정보는 왜 흥쳐보고, 남의 집에 쳐들어가서 칼은 왜 둘이일어? 너 미쳤어? 윤슬 씨가 소송 걸고 신고하면 너 어쩔 거야?,

“왜? 신고하겠대? 하라고 해. 홍윤슬이 정말 날 신고할 건지 궁금해지네.”

권태준.”

.”첫판부터 밑천 드러내라는 농이 어닸어? 남의 패가 보고싶으면 자기 패부터 보이는 게 상도지.”

“상도? 상도 좋아하네. 야. 상도를 찾기 전에 니 이성부터 찾아라. 이성이 없으면 법을 떠울리고.”

기어코 큰 소리를 낸 호수가 열을 식히려는 묫 을울 벌컥벌컥 둘이켰다.

“나한테 해줄 말이 있울 텐데. 그걸 먼저 꺼내야, 나도 해플 말이 있지.”

“뭘? 내가 뭘 말을 해?” “흥윤슬.”

“……환자와의 상담 내용은 유출 금지야. 그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거야. 윤슬 씨가 동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해즐 말은 없어. 난 네가 왜 윤슬 씨에게 그렇게 관심을 주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흥윤슬에게 있고.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말은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는데, 거기에 대고 말을 하면 벽이랑 말하는 것과 뭐가 달라.”

호수는 갑갑한 마음에 머 리를 아구 형를었다. 윤슬에 대해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을 다울고 있자니 태준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모르 겠고.

설렁탕이 나오자 양념 간을 한 태준이 밥을 말아 후루룩후루룩 떠먹었

다. 태평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끓었지만 호수 역시 천천히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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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먹기 시작했다. 속으로 뜨거운 것이 들어가 배를채우자 천천히 이성이 둘아왔다.

“윤슬 씨 괴롭히지 마라. 약한 사람이야. 관심 끊고 신경 쓰지 마.”

“괴롭히긴 누가괴롭혀? 나한테 반했다잖아. 관심 끊으면 홍윤슬이 술퍼 할걸.”

도“건 네가 칼울 들이미니까 했던 말이고. 그걸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충분히 진심인 것 같은데? 날 보고 반했다는 말이 거짓일 리가 없잖아.”

태준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것울 깨달은 호수가 할 말울 잃고 침목 했다. 자신의 친구는 얼굴이 잘난 것에 더해, 제 얼굴이 잘났다는 것을 스 스로도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잘난 얼굴이 세상 모두에게 통한다고 착 각하고 있었다. 주먹과 합께 얼굴도 무기라고 생각하는 태준의 사고를 어 떻게 고쳐줘야 할지 호수는 암담했다.

“하나만 묻자.”

몇 번 뜨지도 않은 것 같은데 거의 비운 설렁탕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내 려놓은 태준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어젯맘 일. 너도 관계있는 거나? 아니면 흥윤슬 독단이냐.”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됐어. 흥윤슬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알수 있겠지.”

“권태준. 꿈 때문에 이러는 거. 남돌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네가꾼꿈 인데 왜 윤슬 씨에게 책임을 을어 ?”

“그 이유는 너도 알고 흥윤슬도 알고 나도 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지지부 진하게 암아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지낄이는 건 그만하자. 나도 출근해야 하고, 너도 병원 가봐야지.”

벗어두었던 양복 재킷을 집어 들며 태준이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칼 들고 찾아가는 일은 없을 거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라고 해. 나도 그 렇게 막무가내인 농은 아니 니까. 아침에는 종 당황해서 그랬다. 아나. 됐 어. 나중에 내가 설명하면 되겠지.”

“됐어. 너 다시 나타나면 윤슬 씨 아주 기절할 거다. 다신 윤슬 씨 곁에 나타나지 마.”

“왜 이래? 우리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앞으로 잘 만나볼 사이인데. 거 기 끼어들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종 웃기다, 강호수.”

저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농담이라면 좋겠는데, 왠

지 모르게 진담인 것도 같아서 두려웠다.

괜한 짓을 저질렀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울 하고 식당을 나서는 태준의 뒷모습울 바라 보며 호수는 후회를 했다.

- 쉽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선생님악몽을 침범당한 사람들은 다 저렇게 경계해요. 권태준 씨는 확실히 과한 면이 있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더라 도 대부분 저를 괴을 보듯이 두려워하고, 꺼리고, 경계해요. 그들의 악몽 울, 비밀을 홈쳐본 대가라고 제가 말했었잖아요.

태준에게 먼저 말을 하고 동의를 구하려고 했다면 태준은 그 거래에 응 했울까. 자존심만 센 녀석, 강한 척만 하는 녀석, 혼자모든 것을 감당하려 고 하는 녀석. 그런 녀석이 자신의 가장 약하고 비밀스러운 부분울흔쾌히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울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태준울 속이고 윤슬을 속였다. 윤슬이 태준 의 악몽을 없애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윤슬의 능력은 미리 설명 을 듣고 꿈속에서 확인받기 전까지는 아무리 말로 한들 쉽게 믿을 만한 것 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윤슬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태준도 그냥 꿈이겠 거니 하고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그 녀석이 꿈에서까지 예민하게 굴 거라 고 예상하지 못한 탓이 컸다.

- 악몽이 사라진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그 비밀을 누군가와 공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안심할 수 있울까요.

권태준. 넌 불안해하고 있니? 너의 비밀을 흥윤슬이 알게 되었다는 것 에 너는 흥윤슬울 두려워하고 있는 거나. 그렇게 두려울 정도로 네가 감추 고 싶은 것은 원데.

윤슬은 조금 멍한 상태였다. 일어날 시간이 아닌데 억지로 깨어난 기분. 이런 기분을 어제 아침에도 느꼈던 것 같은데, 하고 막연한 생각도 했다.

눈울 감은 상태로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윤슬은 이불 안 쪽에서 손발을 작게 꼼지락거렸다. 자면서 어떤 자세를 뤼하는지는을라 도, 일어날 때 항상 온몸의 뼈가 오그라붙은 느껑을 받곤 했다. 서서히 움 직여서 펴줘야 그나마 하루를 힘들지 않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윤슬은 장에서 깨어날 때마다 왜 오랜 시간을 침대 위에서 소비했다.

암아 있기만 하니까 몸이 망가지는 거라고, 밖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 걷 기도 해야지 만날 암아서 컴퓨터만 보고 있으니 허리와 목이 굽는 거라고. 아버지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윤슬은 작게 웃었다.

발을 쭉 편 상태로 발가락 끝까지 힘을 줬다가 플며 옴을 이완시키던 윤 슬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묘한 위  

화감. 타인의 발소리와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잠결에 들었던 헛것이 아니 었용을 깨달은 윤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윤슬 씨, 일어났습니까.”

싱크대를 향해 등울 둘리고 서 있던 남자가 윤슬울 향해 반갑게 인사했 다. 그 남자의 옷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윤슬은 문득 저 남자가 어떻 게 이곳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권태준 씨?”

제는 물랐는데 그래도 두 번째라고, 자다 일어난 모습이 나름 귀엽네

요 ”

저 말은 칭찬인가 아닌가. 말 속에 들어있는 나름의 뜻은 무엇인가. 귀엽 다는 말에 감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많은 생각을 하던 윤슬이 자리에 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둗어왔어요?”

문이 열려 있었다는 말은 변명으로도 할 수 없을 거였다. 전자 도어록인 데다, 비밀번호를 0느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으니까.

“그거 압니까? 전자 도어록이 문 따기 더 쉬운 거. 그런데 요즘은 다 전 자 도어록으로 바꾸더군요. 뭐. 열쇠를 쓴다고 해도 도둑맞을 팔자면 도둑 맞으니까. 차라리 편하게라도 살자는 마음 이해는 합니다.”

그 말인즉. 문울 따고 돌어왔다는 것이었다. 어제처럼 유인해서 문을 열 게 해 칼을 들이민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제나 오놀이나 범죄인 것은 마찬 가지였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하며 옷고 있는 권태준의 심리를 윤슬은 차마 이해할 수 없었다.

권태준을 경계하듯 멀찍이 떨어져 벽에 붙은 윤슬이 권태준의 행동을 지 켜 보았다. 그는 익숙하게 쟁반을 찾아 그 위에 컵과 접시를 옮겨 담고 있었 다.

“뭐 하세요?”

"말했잖아요. 다음 커피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그런 말을 어제 들었던 것도 같지만, 그것이 결코 이 아침 시간에 문울 따고 등어와 커피를 타주겠다는 뜻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랬더라 면 더 강하게 거절을 했을 테지.

“왜 그렇게 서 있습니까? 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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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반울 들고 성큼성큼 다가와 침대에 암은 권태준이 윤슬을 손짓해 불렀 다. 권태준이 가까워질 때마다 반대편으로 술금술금 걸음울 옮긴 윤슬은 문 근처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그 차림으로 어디 갈 생각입니까? 급하면 태웨다플까요?”

.”이리 와요. 나도 촐근해야 해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야 합니다.”

윤슬의 얼굴울 보며 생긋 옷는 권태준이 도대체 무슨 생각울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오라며 손을 까닥이는 행동에도 윤슬은 움직이지 않 았다.

“커피 없다고 하데니, 찬장에 있더군요. 그새 사다 놨습니까? 정말 없는 증 알고 카페에서 사 왔습니 다.”

“주기 싫다는 말이었어요. 우회적인 표현을 대충 알아듈을 정도의 눈치 도 없으셨던 모양이네요.”

“오는 길에 빵도 같이 사 왔습니다. 혹시 아침에 밥 먹는 타입입니까?”

우리 대화하고 있는 것 맞니?

어제와 비슷하게 홀러가는 대화에 윤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서 먹어요. 갓 구운 빵이라서 부드럽다고 합니다.”

"'오늘은 칼 없어요?”

.”네, 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와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상냥한 요청으로 들리지 않았다. 경계하듯 서 있는 윤슬울 향해 권태준이 재차 손 짓했다.

“아침 안 먹습니까? 나도 아침을 안 챙겨 먹었는데, 이제는 기력이 달린 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챙겨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밥 차려 먹기는 힘드 니 사 먹거나 간단하게 때우더라도 뭔가는 배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죠.”

혼자 열심히 말을 하며 권태준이 빵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우울거렸다. 고소한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잠시 권태준울 보고 서 있던 윤슬이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가 약간의 거리를두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권태준이 문을 따고 들어온 시점부터 이 상황은 멜로가 아니라 범죄 스릴러였다. 애초에 남자 둘이 있는 상황에서 여유와분위기는어울리지 않 는 단어였고. 그렇지만 그것을 구구절절 얘기해봤자, 들어먹을 남자였다 면 처음부터 문울 따고 침입하지는 않았울 거란 생각에 윤슬은 가볍게 권태준의 말을 무시했다.

“누군가를 매일 같은 시간에 본다면, 그 시간 그 사람울 기다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 시간에 올 그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그 사람이 을 그 시간을 기다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도 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 말을 입 속으로 삼키며 윤슬이 꾸역꾸역 크루아상울 입에 처 넣었다.

⑴ㅣ 시간에 윤슬 씨를 보러 온다면, 이 시간이 되기 전부터 내가 기다려 질 것 같지 않습니까?”

권태준의 말대로라면 확실히 이 시간이 되기도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 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목숨의 위협도 느끼면서.

계속 이렇게 문을 따고 불법침입을 할 것인지 묻고 싶었는데, 묻지 않아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경호 안전 시스템을 이용해야 할 것 같았다. 사설 보호 서비스를 개인이 신청할 수가 있던가. 돈이 얼마나 들지 는 모르겠지 만, 그걸 강호수에게 청구해도 괜찮겠지.

“네, 기다려질 것 같지 않네요. 오히려 피하고 싶겠죠. 그리고 저 이 시간 에 안 일어나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서, 지금 이 시간에 쳐들 어오는 건 새벽에 남의 집 쳐들어오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애초에 시간대의 문제가 아니라 무단침입이 문제였지만, 그것에 대해 권태준은 아무런 거 리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출퇴근은 안 하는 것 같은데. 윤슬 씨는 무슨 일을 합니까? 첫날에도 제 명함만 드리고 받질 못했습니다.”

“명항 없어요.”

오늘 커피를 발견한 것처럼. 내일은 명항을 발견하게 될지도모르겠습니다.”

내일 서랍움 뒤져보겠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하고 있다. 윤슬이 커피를 마시며 권태준을 노려보았다¬-회사에 다니는 게 아니라서 진짜 명함이 없어요. 미리 말해두는데 서랍 뒤지지 마세요.”

“회사에 안다니면, 뭘 합니까?”

“글 조5씩;.”고 있어요.”

대답울 해주지 않는다고 그냥 넘어갈 사랑은 아닐 거다. 궁금하다면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하겠지. 정말 서랍을 뒤질 수도 있고. 윤슬은 머리가 아 픈 기분에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아. 작가님이셨군요. 어찐지 책장에 책이 가득하다했습니다. 여기에 윤슬 씨가 쓴 책도 있습니까?”

권태준이 놀란 표정울 지으며 벽 한쪽에 세워진 책장으로 다가갔다. 어 계 그가 칼을 몰고 설쳤던 기억만 아니라면, 지금 커피를 둘고 책장앞에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했다. 미친농만 아니었으면 괜찮았 을 텐데. 윤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대단한 건 아니고요. 그냥 판타지 몇 권 썼어요.”

“이겁니까?1

자료집이나 참고용으로 산 책들도 많은데, 그중에서 정확하게 자신의 책 을 꺼낸 권태준을 윤슬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론 건 펼쳐 본흔적이 있는데, 이건 보관? 수진용처럼 깨곳해서요. 제 목만 봐도 판타지인데 수집용으로 사 놨을 것 같지는 않고, 윤슬 씨 책인 가 싶었습니다.”

저 정도로 감이 좋고 눈치가 있는 거라면, 권태준이 자신을 의심하고 단 순한 꿈으로 치부하지 않은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윤슬은 한숨울 내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 씨가 쓴 책이라니, 읽고 싶네요. 빌려주겠습니까? 깨끗하게 읽고 가져오겠습니다.”

“싫은데요.”

“윤슬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둘었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의 물건이 남의 손을 타는 것이 싫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저 책을 가 져가 둘려받기 위해 권태준을 또 만나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그냥 가지라 고 줘버릴까. 윤슬은 시리즈 중 단 한 권만 끼내 들고 있는 권태준을 보며 얄팍한 생각을 했다.

.”01 어제 호수랑 아침 식사를 같이했습니다.”

“여기 나가서요?”

“네. 우리가 호감을 가지고 만나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화를  

내더군요.”

권태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며 윤슬을 빤히 쳐다보았다. 권태준이 왜 저런 시선으로 보는지 이해할 수 없어, 윤슬이 미간을찌푸렸다.

“저도 화를 내고 싶네요. 호감을 가지고 만나보기로 했다는 말은 저도 금 시초문인데요.”

“호수가 윤슬 씨를 많이 아끼는 모양입니다. 그 녀석이 누군가의 편을 들 어서 화를 내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거든요.”

그건 보통 때의 일이겠지. 어제의 일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보더라 도, 권태준을 욕하고 탓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윤슬은 그러한 마욤울 담 아 권태준을 옹시했지만,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권태준이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화를 내는 게 당연한 거죠. 모처 럼 강 선생님께 고마워지네요.”

“어제는 내가 조금 성급했었다는 거 압니다. 윤슬 씨도 놀랐을 거라고 생 각하고요.”1

“정말 알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왠지 아닐 것 같은데. 매끄러운 권태준의 면상울 바라보며 윤슬은 불신 의 말을 내별었다.

“보통은 일반인 상대로 연장까지 꺼내지는 않는데, 나도 많이 당황했었 나봅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가 아니라면 연장을 꺼낸다는 말인가. 아니면 일반인 이 아닌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장울 꺼 낸다는 말일까.

“앞으로 계속 만날 사이인데, 이런 껄고러운 일을 그냥 묻어두면 안 된다 고 생각했습니다. 윤슬 씨 보면 목 사과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사과 받 아주겠습니까?”

“권태준 씨.”

윤슬은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운지르며 나직이 권태준울 불렀다.

“먼저 앞으로 계속 안 블 사이였으면 좋겠어요. 은근술찍 앞으로 만날 사이라고 계속 말씀하시는데, 전 그럴 생각이 전혀 없고요. 그리고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면서. 당장 오늘 아침에도 운 따고들어오는 범죄를 저질렀 다는 거 자각하고 있어요?”

“윤슬 씨도 내게 호감이 있다고 했고, 나도 윤슬 씨에게 호감이 생겼으 

그 호감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 핵심인데. 그걸 말할 수가 없으 니 계속 대화가 꼬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무단침입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 한 것처럼 권태준은 무시하고 있었다. 이래서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질 수 없는 거겠지.

“권태준 씨, 흑시 게이예요?”

“윤슬 씨는게이입니까?”

“아닌데요.”

에이가 아닌 두 사람이 호감울 가지고 만난다니, 뭔가 술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술픈 이야기가 될 것 같다는 점에서는 공감했다. 지금도 과할 정도로 충 분히 술픈 상황이었다.

“계속 이렇게 저를 만나겠다는 말씀이에요?”

“윤슬 씨는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처음본 내게 호감이 생겼고, 그래서 내 손을 잡았던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아니었 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겁니까?” 빤히 쳐다보며 묻는 얼굴 위로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그옷음이 거짓

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느 쪽으로 대답을 하든 윤슬에게 곤란 한 질문이었다. 권태준은 그렇게 윤슬의 앞뒤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윤슬이 어떤 대답을 하든. 빠져나갈수 없도록.

“……네, 호감이 있죠.”

감정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돌을 씹은 사람처럼 인상을구 기며 윤슬이 책울 읽묫 대답했다.

“윤슬 씨는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정이 들 것 같은 얼 굴이긴 합니다.”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둘려 까기를 참 잘하시네요.”

“전 얼굴만큼은 만인의 취향이라. 역시 윤슬 씨도 제 얼굴을 보고 반했겠 죠. 차춤차춤 알아가다 보면 얼굴이 아닌 다론 부분에서도 서로의 취향에 맞는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권태준의 말을 들으며 윤슬은 많은 생각을 했다. 저 스스로 얼굴이 만인의 취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권태준의 뻔뻔함이라든지, 과

연 다른 부분에서 호감을 느낄 만한 점이 권태준에게 있을까 라든지, 왜 어제오늘 본 권태준의 모습에서는 호감이 생길 아주 작은 여지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인지 등등.

“그럼 언제가 좋겠습니까.”

“네?’

“아침에는 자는 시간이라면서요. 그럼 우리는 언제 만나는 게 좋울 거냐는 질운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에 들르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아니면 낮 시간이 좋습니까? 그 정도면 저도 점심시간이니, 윤슬 씨는 아침울 저는 점심을 먹으면 되겠군요. 역시 커피보다는 식사 쪽이 좋지 않 겠습니까.”

“권태준 씨 벽창호예요? 나왠지 벽이랑 말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요.”

“윤슬 씨룹 보기만 한다면, 어느 시간이라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는 시간대 상관없이 권태준 씨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거거든요.”

윤슬은 오늘 당장 강호수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전화로 나놀 이야기가 아니었다. 협탁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힐곳 쳐다보며 윤슬이 한 숨울 내쉬었다.

“아까 출근하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출근하시죠.” 

“아, 그래야죠. 윤슬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졸을 을랐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권태준의 행동에 침대 위에 않아 있던 윤슬이 반사적 으로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커피는 다 마셨습니까?”

“네?”

“더 자야 하는데, 괜히 커피를 줬나 봅니다.”

“커피의 문제가 아니라, 권태준씨가 무단침입을 한 시점에서 이미 잠 깼어요.”

“확실히 아까보다 눈이 돌망를망하네요.”

권태준은 불쑥 얼굴올 들이일어 눈을 마주했다. 한 소리를 하고 싶었는데, 빤히 용시하는 시선에 머쓱해져 윤슬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코끝으로 권태준이 웃으며 흘려보낸 숨결이 내려앉았다 홑어졌다.

“윤슬 씨는 나랑 있는 게 아직은 부끄러운가 봅니다.” 

이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꺼리는 건데. 제 표정이 그렇게 이상한가, 상대방이 오해할 정도로 표정이 이상한 것일까. 아니면 오해하고 있는 상대방 의 눈이 이상한 것일까. 윤슬은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한숨울 내쉬었다.

“저녁에 식사 같이하겠습니까?”

“아뇨.”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내밸자 권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약속 있습니까?”

“네, 약속 있어요,"

약속 따위 없지만 같이 먹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다간 같이 먹겠다는 말이 나울 때까지 권태준이 웅개고 있을 것 같아 윤슬은 생각 을 바꾸었다. 없는 약속을 만둘기 위해 집에라도 다녀오든가, 아니면 저녁 에 몇 시간 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요. 아쉽지만 다용을 기약해야겠습니다. 윤슬 씨도 너무 그렇게 아쉬운 표정은 짓지 말아요.” 대체 자신의 표정 어디에 아쉬운 감정이 보이는 건데?

윤슬은 자신이 아는 아쉬움이 권태준이 느끼는 아쉬움과 다른 감정인지 의심했다.

“이렇게 있다가는 정말 출근 못 하겠습니다. 윤슬 씨 나쁜 사람이네요. 출근도 못 하게 만둘고. 이러다 나 또 지각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대체 언제 출근울 못하게 만들었다는 건가. 찾아온 것도 권태준이고, 이제까지 말울 한 것도 권태준이고, 늘러 앉아 있던 것도 권태준이었는데. 윤슬은 기가 막혀 대꾸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합시다.”

윤슬의 힘 빠진 얼굴윱 손가락으로 가법게 톡혹 두드리며 인사한 권태준이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으로 향했다.

“나오지는 말아요. 문은 알아서 잠기니 그냥 편하게 쉬어요.”

배웅할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권태준은 저 좋을 대로 말을 했다. 윤슬은 현관운울 열고 나서는 권태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다. 

오 진퇴양난

“아침에 눈을 뜨니까, 그 사람이 와 있었어요.”

강호수의 상담 시간이 꽉 차 있어, 병원 진료가 끝나는 시간까지 윤슬은 기다려야 했다. 상담이고 뭐고를 떠나서 상담실에 쳐들어가 강호수의 멱살 을 잡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윤슬은 가까스로 그 충동울 참아냈다.

부둘부들 떨리는 손으로 특별히 요구해 내온 얼욤을이 담긴 컵울 잡아 들이켠 윤슬이 광, 하고 빈 컵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강호수를 노려보았 다.

“이게 말이 돼요? 문울 그냥 따고 들어왔다고요. 그리고 커피와 빵을 주더라니까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로 수습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무마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윤솔은 권태준에게 엎드려 빌 수도 있었다.

“어제 한 번은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오놀도…….”

윤슬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하다. 언성이 높아진 것울 깨닫고 장시 말을 명춘 상태에서 후우, 하고 크게 숨울 내쉬었다.

“보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 같은데, 이거 사생활 침해예요.”

“태준이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물어보고 싶어도, 먼저 이야기룯 하지 않으면 저도 말을 하지 않겠다고만 하고. 이래서야 도둘이표니, 상황이 어렵네요.”

“조금 더 생각울짜내보세요.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선생님이잖아요.”'

“네, 저도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강호수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할까봐요.”

“……네?”

“사생활 침해. 스토커로 신고할 거라고요. 그럼 경찰이 알아서 해주겠죠. 아니면 사설 보호 업체에 의뢰하겠어요. 대금은 선생님 앞으로 하고요.

.”그렇게 해서 윤슬 씨 상황이 편해진다면 저도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강호수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옷었다. 그 표정에 뭔가 말 못 할 것이 있음을 알아차린 윤슬이 강호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숨길 게 남아있나 보네요.”

“태준이의 행동으로 윤슬 씨에게 육체적인 폭력이 가해진 것도 아니고, 금전적인 손해가 가해진 것도 아니죠. 경찰이 와서 을으면 태준이는 아마도 호감울 갖고 만나보기로 했던 사이인데 영문울 모르겠다고 말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경찰은 게이의 치정 싸움이라고 생각하겠죠. 윤슬 씨가 경찰에 신고를 아무리 넣어봤자, 경찰이 윤슬 씨의 말을 더 믿는다는 보 장 하에 윤슬 씨를 보호해주는 것도 하루 이틀입니다. 대한민국 경찰이 윤슬 씨를 24시간 보호해줄까요? 사설 보호, 이건 그나마 믿을 만하죠. 그런 데 태준이가 가만히 있을까요. 칼부림 안 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

“그렇게 하나하나 반박할 머리로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을 내놔보시죠.” 

남의 희망울 무참히 짓밟는 소리를 하면서. 정작 윤슬에게 도움이 되는 소리는 없었다. 강호수가 자기 일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친구라고 두둔하려는 것은 아닐까. 윤슬은 자꾸만 질어지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태준이에게 솔직하게 말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의뢰인들에게도 미리 고지했던 이야기이니,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만 말을 한다면.”

“안 돼요.”

윤슬은 날카롭게 강호수의 말을 잘라냈다.

그 사람은 제 얼굴을 알아요. 제 집도 알고요. 제 인적사항까지 다 알아요. 그런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라고요? 의뢰인들과는 다르죠. 그 사람 둘은 내 존재를 모르니까. 돈을 주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현실 적이지 않은 일이니까요. 선생님이 뭔가 약을 썼겠거니, 최면을 걸었겠거니, 뭐 그런 식으로 회피를 하겠죠. 왜냐면 그게 더 현실적이니까. 그런데 권태준은? 그 사람은 다르잖아요.”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도 윤슬은 더 이상 괴물처럼 보이기 싫었다. 그런 춰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권태준 씨에게 말할 생각 없어요. 그걸 제외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해요.”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우린 계속 같은 문제를 반복하게 될 겁니다. 태준이는 더 궁금해하겠죠. 괜한 호기심을 키워풀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타이르고 설득하려는 강호수의 말에 윤슬은 짜증이 났다. 대체 왜 이런 상황울 만둘어서 수습하지도 못하고. 화를 내고 싶었고, 고함을 치 고 싶었다. 강호수의 멱살을 잡고 책임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을 실행한다고 한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슬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홉을 했다. 크게 숨울 쉴 때마다 윤슬의 가숨이 오르내리는 것을 강호수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태준이의 악몽 속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말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물으시네요.”

“그 녀석이 감추고 싶어하던 것. 그것을 봤습니까?”

강호수의 묻옹에 윤슬은 침묵했다. 

확실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어령픗하게 걸만 훌은 기분. 학살이라도 당한 것처럼 처참한 모습의 사람들 속에서 권태준이 숨기고 싶어하는 악몽 이 무엇인지 윤슬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악몽 속에 있던 모든 사람들일 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권태준 이 숨기고 싶어하는 악몽이 있다는 것이고. 윤슬에게 그것을 둘켰을지도 모론다는 생각에 권태준이 집요하게 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권태준 씨가 숨겨야 하는 비밀이 있다면. 그래서 그걸 제가 봤다고 생각한다면……권태준 씨가 저를 죽일 가능성이 있나요?”

살인이라는 게 그리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만, 왠지 권태준을 앞에 두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다. 옷고 있는 시선 너머에서 언 제 죽일까 간울 보는 짐승처럼. 그 짐숭 앞에 무방비로 서 있는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저와 관계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 테니. 쉽사리 행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강호수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쉽게 죽였을 거란 말인가. 윤슬 

“선생님과 친한 척을 많이 해뒤야겠네요.”

우““가 많이 아끼는 사랑이라는 걸 태준이도 알 겁니다.”

윤슬은 강호수를 을끄러미 바라보았다. 많이 아끼는 사람. 그 둣이 무엇일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 아니면 단순히 불쌍하고 안쓰러워 신경이 쓰이는 환자? 그도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까.

“이사라도 갈까봐요.”

“……윤슬 씨의 힘을 빼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윤슬 씨에 대해 알고 있으니 됫조사 정도는 일도 아닐 겁 니다.”

“권태준 씨는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할 사랑이겠죠. 남의 집 문도 따고 둘어오는 사랑이 니까.”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씁쓸한 웃음을 홀렸다.

“매사가 그런 식이에요, 그 사람?”

“법에 가까운 녀석은 아니죠.”

“ 영업 이사님이?”

“단순히 영업 이사만은 아님니다. 윤슬 씨도 대충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무서운 사람울 엮 어놓으셨네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윤슬 씨에게 부탁하지 않았을 겁니다. 태준이 녀석의 방어가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말해 무엇하랴 싶었다. 이사도 소용없을 거라고 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것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하고, 사설 경호도 오히려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니 . 강호수의 말을 무시하고 세 가지를 한꺼번에 실행해불까 싶은 충동 도 들었다. 권태준의 얼굴울 떠올린 윤슬이 이내 고개틀 내저었다.

“윤슬 씨가봤던 것처럼. 우린 고아원에서 합께 자랐습니다. 태준이와 영 주까지 우리 셋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었죠. 나이를 먹고 사회에 떠일려 나왔울 때. 우린 그 사회를 견더낼 만큼 충분한 어론이 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태준이가 많이 고생했습니다. 많은 것을 포기 했죠. 언젠가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자기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고.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

말하지 마. 당신 목적이 권태준에게 안쓰러움을 가지라는 것이라면 그걸 굳이 말하지 마. 불행했던 과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윤슬은 싸늘한 시선으로 강호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슬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호수는 주절거리고 있었다. 제 생각온 해주지도 않으면서 권태준을 변호하려는 강호수가 싫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선생님은 권태준 씨를 변호하고 있네요. 피해자는 나인데.”

“그냥……옛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상담의도 가공은 상담울 받고 싶기도 하거든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기 도하고. 인간이니까요.”

날 선생님이 말씀하셨죠. 상담은 상담의에게 해야 하는 거라고. 선생님과 권태준 씨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권태준 씨가 정말 힘들게 살아왔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건 저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많이 고생하고 많이 포기했다고요? 그게 누굴 위해서였는데요? 저 륟 위한 건 분명 아니었을 걸요. 왜 그걸 제가 보상하듯 피해 받고 참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윤슬 씨.”

자리를 털고 나가려는 윤슬을 붙잡으며 강호수가 급하게 윤슬의 이름을 불렀다.

“모든 사람이 윤슬 씨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윤슬 씨를 괴묻처럼 보지도 않아요. 오히려 나는……내 악몽을 공유했던 윤슬씨를 가깝게 여김 니다. 내 어두웠던 내면을 공유한 사람은 윤슬 씨뿐이 니까요. 그렇게 생각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요. 나는 윤슬 씨를 내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 가폭이라도, 태준이라도 해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이런 것 때문에 강호수를 내칠 수 없는 거였다.

윤슬은 제 팔을 붙잡고 있는 강호수의 손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신의 어두운 내면, 숨기고 싶은 것돌은 가까운 사람에게, 가폭에게 가장 내보이기 어렵습니다. 두렵거든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나의 추악한 면울 봤을 때, 나를 어떻게 볼지. 나를 두려워하고, 나를 손가락질하고, 나를 피하고, 나를 외면할까봐. 그래서 나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태준이에 게도 내 악몽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감추고 있었죠. 그걸 본 유일한 사람은 윤슬 씨였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고.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 그런데 도 윤슬 씨가 내 악몽을 함께 지켜보고, 그것을 없애준 순간……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윤슬 씨가 나와 아주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내 모든 것을 말해도 좋을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기 어려운 충만 감읗 윤슬 씨와의 사이에서 느꼈습니다. 그건 믿음이었고, 신뢰였습니다.”

윤슬은 느릿느릿, 그러면서도 명확하게 말을 하고 있는 강호수를 돌아보았다.

.”나는 윤슬 씨가 두렵지 않습니다. 괴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제껏 말해왔던 것들은 거짓이 아니에요. 나는 내 진심을 윤슬 씨도 알고 있 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윤슬을 다독이고 안심시키기 위한 상담의의 노력이 아니라, 강호수의 진심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까지 강호수를 만나고 있는 거였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유일하 게 거짓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태준이 녀석이 감추고 있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의 악몽은 나보다 더, 그 누구보다 더 어둡고 추울거라고 생각 합니다. 나는 윤슬 씨가 나를 구원해줬던 것처럼 그 녀석을구원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게 신뢰와 안정을 주었던 것처럼, 권태준 그 녀석에게도 윤슬 씨가 구원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 녀석에게 무엇 보다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 사랑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악몽을 지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강호수의 의도는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호수의 기준에서였다. 아무리 좋은 말을가져다붙이 

고, 좋은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한들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어디에도 권태준의 의사는 없었으니까.

“사실을 알게 된다면, 권태준 씨는 좋아할까요? 조금 궁금하기도 하네요. 과연 그 사람이 나를 원망할지, 아니면 선생님을 원망할지.”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서서히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로수의 질어진 녹음울 바라보고,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하늘도 을려다보았다. 퇴근길의 여유로운 사람돌도 구경하고, 치열하게 반짝일 준비를 하는 가게 들의 간판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은 현실인데, 윤슬은 저 혼자만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이지 않은 존재. 그래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그래서 두 려운 존재. 그것이 흥윤슬이었다.

주머니에 손울 넣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윤슬의 손바닥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주머니 안에서 쥐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자, 모르는 번호가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대부분 피싱이나 광고 전화인지라,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윤슬이 통화 버튼을 늘렸다.

“여보세요.” 

「저녁 약속은 끝났습니까?」

“……누구세요?”

「권태준입니다. 통화는 처음이라 목소리를 못 알아차린 모양이군요.」

예상치 못했던 상대의 정체에 윤슬이 잠시 걸음을 엄추었다.

「집에는 언제 들어갑니까?」

“늦게 들어가요.”

카페라도 가 있을까. 윤슬은 집에 돌어가는 걸욤을 멈추고 잠시 고민했다.

「저녁식사는 했습니까?」

“이제 먹으려고요.”

대체 왜 권태준과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윤슬은 알 수 없었다.

「약속장소는 집에서 가깝습니까?」

“엄청 멀어요.”

지금이라도 부모님 집에 갈까. 가서 하루, 아니. 일주일 정도 있다 올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 윤슬의 귀로 권태준의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왜 옷어요?”

「윤슬 씨는 거짓말도 참 못하는구나 싶어서요.」

“예?’

「딱히 보고 있지 않았더라도, 윤슬 씨 목소리만으로 알아차렸을 거란 생각이 둡니다.」

그 말과 동시에 윤슬의 옆으로 까만 세단이 다가왔다. 윤슬이 한쪽으로 피하듯 서자. 지나쳐갈 거라 생각했던 세단이 멈추었다.

「아주 먼 약속 장소가 오피스텔 근처였습니까?」

창문이 내려가고 그 너머로 보이는 권태준은 휴대폰에 대고 말하며 웃고 있었다. 윤슬을 향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권태준이 들고 있던 휴 대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식사 전인 것 같은데 같이 먹읍시다.”

권태준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운을 통해 윤슬에게 말했다. 분명 권유였는데 명령처럼 느껴졌다. 권태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조석 문을 열고 내린 사내가 세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윤슬이 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자동차 문손잡이를 잡고 계속해서 서 있는 사내의 존재가 윤슬울 압박했 다.

“이젠 납치까지 해요?”

“데이트 신청입니다.”

“사양할게요.”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한 윤슬이 걸음올 옮기자, 그런 윤슬을 따라 세 단과 열린 문울 잡고 있던 사내도 따라 움직였다. 해괴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 것인지. 권태준은 열린 문 안쪽에서 윤슬을 바라보고 있었 다.

“계속 이렇게 따라을 거예요?”

“윤슬 씨는 내가 내려서 에스코트해야 탈 겁니까?”

권태준의 막무가내인 행동이 한두 번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윤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슬이 걸음올 엄추자. 서서히 움직이던 차도 다시 멈추었다. 차에 을라 권태준의 옆자리에 앉자, 뒷문을 닫아준 사내가 보조석에 다시 올랐다. 말도 없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윤슬 씨 집을 알아낸 것과 같은 방법이겠죠. 설마 집 주소만 알고 있울 거라고 생각한 겁 니까.”

그렇겠지. 집 주소와 연락처, 거기에 더해 정확한 이름과 생넌뭘일. 어쩌면 주민등록번호까지, 진료 차트에 기재된 모든 것이 권태준의 머릿속에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기금 만난 건 우연이에요?”

“글쎄요.”

권태준이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 적어도 사람울 붙여놨을 거라는 의심이 돌었다. 그럴 정 도로 자신에게 가치가 있을까. 윤슬은 문득 의아해졌다.

“식사 같이합시다. 원래는 윤슬 씨 오피스텔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이왕 밖에서 만났으니 먹고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뭐 좋아합니까.”

저에 대해 다 알고 계신 것처 럼 보이는데, 그건 모르시 나봐요.”

“안타깝게도 윤슬 씨 취향에 대한 것은 적혀 있지 않더군요. 그래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즐거우니까요.”

조롱하듯 내별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권태준은 타격 하나 입지 않은 얼굴로 생글거리며 대꾸했다. 강호수의 웃는 얼굴보다 더 얄입구나. 윤슬은 권태준의 얼굴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윤슬 씨가 좋아하는 건 뭡니까.”

“음식 가리지 않아요.”

“편식 많이 할 것 같은데, 의외네요. 정말 좋아하는음식도 없고. 싫어하는 음식도 없습니까?”

“별로요.”

“은근히 대화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윤슬씨.”

그러면서도 권태준은 윤솔을 향해 반쯤 옴을 를어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어 윤슬이 술쩍 한 뼘 정도 뒤로 엉덩이를물렸 다.

“채식주의자?”

“아뇨.”

“그럼 채소가 좋습니까, 고기가 좋습니까?”

“고기.”

“육해공 중에 어느 쪽이 좋습니까?”

“육.”

“거봐요. 이렇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취향을왜 아무거나로 통치려고 합니까. 요즘 사람들 귀찮아서 그냥 대충대충 이러는 거 이해 하지만, 본인 취향까지 대충대충 넘기는 건 안 좋습니다. 적어도본인이 좋은 건 표현하고, 실행하면서 살아야죠.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말입 니다.”

윤슬은 문득 제 앞에 있는 남자가 권태준이 아니라 강호수인가. 하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사람 가르치려는 성향도 있는 것 같고. 여러모로 귀찮 고 낄끄러운 남자였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 정도는 말하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본인 호불호 정도는 주장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아요. 그럼 윤슬 씨 취향에 맞 게 고기 먹으러 갑시다. 네발짐승으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 정도는 말해도 괜찮다고? 윤슬은 권태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글생글 눈을 휘어 웃고 있는 남자의 면상에 대고, 댁 얼굴 보는 거 너무 싫다고 말을 한다면 그 상황에서도 권태준은 저렇게 웃읕 수 있을까.

권태준과 단둘이 있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금 상황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윤슬은 운전석에 앉은 사내와 보조석에 앉은 사내의 뒤통수룯 바라보 았다.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그대로 야산에 끌려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막연한 상상울 떠을리던 윤슬이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물 흔들었다.

“편하게 먹어요. 난고기 굽는 거 좋아합니다.”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집게를 손에 들고 손수 고기를 굽고 있는 권태준을 무시하며 윤슬은 반찬 몇 가지를 집어 먹었다.

딱 보기에도 고급 음식점 같은 곳으로 들어와 자리 잡은 롭이었다. 막힌 곳에 단둘이 있으니 다시금 갑갑해졌는데, 권태준이 종업원울 을리고 손 수 고기를 굽고 있으니 더욱 속이 갑갑했다.

“먹어요. 소고기는 너무 익히면 맛이 덜합니다.”

접시에 옮겨주는 고기를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자, 좋은 고기를 쓰는지 혀 위에서 살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가깝지 않은 사람과 겸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본능적으로 밥이 입으로 안 넘어갔을 텐데, 쓸데없이 고기가 맛있어서 짜증이 났다.

“내가 불편합니까.”

“네.”

“생각보다 더 솔직한 답변이라 놀랐습니다.”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권태준이 말했다. 빠르게 고기를 뒤집는 권태준의 손은 멍추지 않았고. 차곡차곡 윤슬의 접시에 고기를 을려주기도 했다.

“불편한 것에 더해 껄끄럽네요. 권태준 씨가 제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 고, 이렇게 둘이서 밥을 먹고. 아니. 그냥 얼굴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불 편해요.”

“호감울 갖고 만나기로 한 사이인데.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그렇게 불편 합니까

이러다 정말 체하겠다. 입에 있는 고기를 끌꺽 삼킨 윤슬이 첫가락을 놓 고 권태준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김에 그냥 다 말하죠. 사실 호감 같은 거 그냥 명분일 뿐이라는 걸 권태준 씨도 알고 있잖아요. 난 그런 말장난에 장단 맞춰풀 기 분도 아니고, 권태준 씨는 지금 도를 넘었어요.”

“누가그럽니까, 명분이라고. 난 진심인데”  

집게를 내려놓은 권태준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대꾸했 다.

예게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솔직히 이 자리도 불편해서 체할 것 같아 요.”

“그런 것치고는 입에 맞는 것 같던데. 어서 둘어요. 식은 고기는 맛이 없 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권태준의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고 싶은 마융은 없는 데, 고기 맛이 좋아서 절로 젓가락이 움직였다. 윤슬이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권태준이 말을 이었다.

“윤슬 씨에게 원하는 건 하나뿐입니다. 그날 일을 내게 솔직하게 말해주 는 것.”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윤슬도 양보할 수 없는 운제였 다.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올 가까이하고, 싫은 사람을 멀리합니다. 또어 떤 사람은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싫은 사람은 더욱 가까이에 두죠. 윤 슬 씨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올 가까이에 둘 것 같습니까?” 싫은 사람은 눈에 보이기만 해도 칼을 휘두를 것처럼 단호해 보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곁에 둘 것처럼 영악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판단이 서지 않는 사람을 제일 가까이에 둡니다. 그리고 관찰하죠. 이 사람이 내게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리 말하는 권태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권태준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윤슬이 제게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있다고.

“나는 그날의 꿈이 단순한 꿈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윤슬 씨가 내게 어떤 의도로 접근한 것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고요. 나는 지금 판단을 보류한 상태입니다. 윤슬 씨가 내 적인지 아닌지.”

“나는 권태준 씨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죄가 있다면 강 선생님 병원에서 권태준 씨와 마주한 죄밖에 없어요. 그게 죄라는 것도웃기지만요. 단순히 권태준 씨의 그런 망상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신고할 거예요, 라는 말을 하려던 윤슬은 저를 보며 웃고 있는 권태준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다묻었다.

“윤슬 씨가 솔직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날 수 없습니다. 내가 윤슬 씨를 괴롭힌다고요? 아니죠. 내가 정말 윤슬 씨를 괴롭게 만을 작정이었다면. 윤슬 씨는 지금 이 자리에 편하게 않아 고기를 먹고 있지 못 할 겁니다. 그건 장담할 수 있죠.”

윤슬도 장담할 수 있었다. 권태준이 말하는 것이 분명한 협박이라는 것

“솔직해지고 싶지도 않고, 날 그냥 때고는 싶고. 두 가지를 다 원하는 건 욕심 아닙니까. 한 가지를 얻고 싶으면 한 가지는 포기해야죠. 날 때고 싶 으면 솔직해져요. 솔직해지기 싫다면 끌까지 거짓말을 하면 됩니다. 그냥 내게 호감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노력해요, 내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계속 그렇게 잡아때다보면 또 압니까. 나도 언젠가는 속게 될지.”

윤슬의 접시에 옮겨주었던 고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고기를 한 점 한 점 집어 먹던 권태준이 불판을 비우고 새 고기를 을렸다. 치지직. 소리를 내 며 고기가 익는 것을 윤슬이 멍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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