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흥윤슬.」

“그래도 전화가 좋긴 좋아. 얼굴 안 보고 통화하니 거짓말도 쉽게 할 수 있고. 얼굴 마주 보고 있었다면, 형은 지금 그 대답도 못 했울 거야.”

그래도 나름 정직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지는 못하니 까. 뻔히 보이는 변명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차라리 그런 모습이 진실되 어 보이기라도 하지, 괜한 변명을 지껄였다면 더 우스워 보였을 거다.

윤슬은 그것울 다행이라 여기 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퍼졌다. 이제는 재 영과의 관계를 회복할수도 없을 만큼 너무 멀어져버린 기분이 돌었다.

섣부론 판단으로 그의 악몽울 홈쳐보았던 일이 미안하고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원망스럽고 밉기도 했다. 가족인데, 가족이면 서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형에게 참울 수 없을 만큼 분노가 솟기도 했다.

“말해 봐. 내가 독립한다고 했을 때 기옜지? 조금은 속이 후련하지 않았 어?”

「모처럼 통화하면서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형은 내가 미운 거야, 아니면……내가 두려운 거야?”

휴대폰 너머로 한껏 숨죽인 신음이 희미하게 전해져왔다. 윤슬은 시선 울 돌려 이제 완연히 어두워진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도……그때 참 많이 무서웠어. 내가 너무 무섭더라.”

「……미안하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윤슬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 알 수 없어서 무서웠고, 그런 불가능한 일울 하는 내가 대체 뭘까 알 수 없어서 무서웠어. 그런데 가장 무서웠던 건원 풀 알아.”

십 넌 가까이 지난 일을 이제 와 이야기하면 뭐할까 싶으면서도, 제멋대 로 입술이 움직여 말을 토해냈다. 윤슬은 휴대폰을 꽉 쥐고, 스피커 너머 로 들려오는 재영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겁에 질려 나를 보던 형의 시선이었어. 날 외면하고 도망치듯 등을돌 려 나가버리던 형의 뒷모습이었어. 그게 날 너무 두렵게 했어.” 형을 잃을까봐. 그리고 결국 형을 잃어버렸지.

윤슬은 토해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목구멍을 쫙 막은 울음도 함께 삼켰 다.

“형, 형……”

엄마를 부르는 아이처럼. 윤슬이 떨리는 목소리로 재영을 불렀다.

“형……“ 요즘은 악몽 안 꿔?”

을기 젖은 목소리 끝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여들었다. 작게 홀러나오는 윤슬의 옷용소리에 헛숨을 돌이켠 재영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지 마, 형.”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은 윤슬이 침대 위로 뒹굴 몽올 굴 려 엎드렸다.

“형이 자꾸 나를 괴물처럼 보니까, ……정말 괴울이 되어가고 있잖아.” 서두론다고 했는데도 조금 늦어 버 렸다.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가자 아 버지와 형이 자리를 잡고 암아 있었다. 머쓱하게 옷는 윤슬울 아버지가 자 리에서 일어나끌어안았다.

“이농, 두어 달에 한 번 보는데 그마저도 늦어.”

“죄송해요.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차가 막혔 어요.”

“그러면서 설마 지하철 타고온 건 아니지?”

“아버지는 아들 참 못 믿으셔.”

찔리는 마음울 매끄러운 웃음으로 감추며 윤슬이 아버지의 풍에서 벗어 났다. 아버지가 다시 자리에 암는 것을 보며 윤슬이 재영의 옆에 암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술찍 방석을 옆으로 옮겨 떨어져 앉는 재영의 행동에 윤슬이 쓴웃음울 삼켰다.

“형, 잘지냈어.”

“그래. 너도 별일은 없었고?”

“그냥, 뭐 똑같지.” 아버지를 의식해서인지 의미 없는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형제가 똑같았

다.

“옹식 시켰어요?”

“그래. 뭐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주문해.”

“넉넉하게 시켰을 텐데, 뒤.”

아버지가 회를 좋아하셔서 고론 일식집이었다. 아니, 선택은 재영이 했 고 윤슬은 동의했다. 딱히 그런 것으로 윤슬과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 지, 통보에 가까운 재영의 문자에 윤슬은 토를 달지 않았다. 하나하나 재영 에게 시비를 놓는 것은 윤슬에게도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밥은 잘 먹고 지내는 거 나? 얼굴이 어째 마론 것 같아기 “잘 먹어요. 살도 더 쪘는데.”

“사랑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해. 밤에 글이 잘써진다고 밤새워서 글 쓰고 해 뜰 때 자고 그러다 금방 몸 상한다. 사람은 해를 보고 살아야 하는 거야.”

“네, 네. 산책도 하고, 외촐도 하고 그래요.”

“그 산책과 외출이 시장 불 때를 말하는 거냐?” “아버지, 오랜만에 만나서 또 트집 잡으시네.” 

“케이크 안 사 왔죠? 내가 형 성격을 뻔히 알지. 케이크 사왔으니까. 케 이크에 불붙여요.”

메이크는 무슨.”

“생일 때 케이크 안 먹으면, 또 언제 먹어요? 이럴 때라도 먹는 거지.”

재영이 케이크까지 챙길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다정다감 한 성격이 아닌 재영이 아버지 생신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거였 다.

을 때 사 가지고 온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을려놓은 윤슬이 아버지의 나 이에 맞게 사 온 슷자 초를 케이크 위에 꽂았다. 불을 붙이자 슷자 초가 목 지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빨리 소원 빌고 후, 하세요.”

“시커먼 사내 셋이서 잘하는 짓이다. 홍이 안 나, 흥이.”

“여기서 왜 흥을 찾아요. 초 다 녹는다. 발리 불어요.”

윤슬의 채근에 아버지가후. 하고 숨을 내뺄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뿌 연 연기가 꼬리를 말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초를 뽑고, 케이크를 잘라 아버 지와 재영의 접시에 옮겨준 윤슬이 남은 케이크를 젓가락으로 떠 입에 넣 었다.

부드러운 생크림은 달콤해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모래를 씹는 것처 럼 껄끄럽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슬은 맛있다는 둣 케이크를 퍼 먹었다.

“많이 먹지는 마라. 곧 음식 나오니까.”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커다란 접시를 둘고 종업 원이 들어왔다. 요즘 생선이 어찌고, 횟감이 싱싱해서 색깔이 어찌고 하는 말울 휼려들으며 윤슬이 품 안에서 봉투룯 꺼냈다.

“선묻보다는 현금이라고 하잖아요. 많지는 않지만, 필요하신 거 사는데 보태 쓰세요.”

이전에는 학생이었고. 작넌에는 첫 출간을 하기도 했지만 수입이 적었 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의 선물은 와이셔츠나 넥타이 같은 소소한 것들 이었다. 작넌까지와 다르게 불쑥 내민 봉투를 받아 안올 살핀 아버지가놀 란 눈으로 윤슬을 보았다.

“잘못 넣은 거 아냐?1

“제대로 넣었어요. 저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그 정도 드릴 형편은되니 까 괜찮아요. 또 모르죠. 매넌 생신마다 액수가 더 커질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아버지가 알고 있는 집필은 아니었지만, 아무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맞으니까.

아버지의 반옹에 옆에 있던 재영이 궁금한 둣 옥을 쭉 빼고 봉투 안욷 노 려보았다. 투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본다고 보이지도 않을 텐데.

“윤슬이 이놈 봐라. 저도 일한다고 이런 데서 생색을 낸다.”

아버지가 허허 돗으며 봉투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짠, 하고 꺼내 둘었 다. 재영이 놀란 눈으로 아버지의 손에 돌린 수표와 윤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버지도 너무 아끼지 마시고. 이제 종 쓰세요. 자기 관리도 하시고, 연 애도 하시고. 내넌 생신 전에 새어머니 생기면 그때 생신 선묻로 여행 보내 드릴게요.”

“아이고, 내 걱정하기 전에 니들 앞가림이나 잘해.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 지 애인이 없냐. 애인도 만들고, 결혼도 하고 그래야지. 이러다간 니들보 다 내가 먼저 새장가 가겠다.”

“그럼 뭐 좋죠. 이참에 동생도 하나 보고.”  

“에라. 이농아.”

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우을거리며 대꾸하자, 아버지가 옆에 놓아두었던 물수건을 집어 던졌다. 기우뚱 고개를 젖혀 물수건을 피하며 윤슬이 장난 스럽게 혀를 날름거렸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재영이 유난히 과묵했다. 그제 통화할 때 재영의 신 경울 과하게 건드렸었나. 윤슬은 반성했다.

“회를 먹어, 회를. 왜 옥수수를 퍼 먹고 있어.”

마요네즈에 버무린 옥수수를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는 윤슬을 향해 아버 지가 핀잔했다.

“날생선 좋아하시는 아버지 많이 드시라고요.”

“싫어도 떠먹는 시늉이라도 해.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편식이야?”

“떠먹는 시늉은 아까 했잖아요. 만날 회 이런 거 드시고. 날 거 잘못 먹으 면 탈 나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윤슬이 얄미웠는지, 아버지가 옥수수 샐 러드를 푼 윤슬의 숟가락 위에 회 한 점을 을렸다.

“이건 무슨 맛으로 먹어요?”

“네 아비의 사랑으로.”

우웩,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긴 했지 만, 윤슬은 숟가락울 들어 입에 넣었 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던 것이 이제는 차갑고 밍밍하고 비린 맛이 섞여 역 하게 느껴졌다.

아, 진짜 토할 것 같아. 이건 아버지의 사랑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맛이 야.

윤슬이 급하게 휴지 몇 장울 뽑아 입에 있던 것을 밸어 냈다.

“와. 지옥이었다.”

“지옥은 무슨.”

“다융엔 고기 먹어요. 날 거 먹지 말고, 구워 먹는 거.”

“네 생일에 먹자, 고기. 소고기로.”

“아버지 이기적이야.”

“생일에 생일인 사람이 좋아하는 것 먹는 게 뭐가 이기적이나. 네농이 더 이기적이다.” 말 같지도 않은 것으로 아버지와 말씨름을 하던 윤슬은 입 안이 텁텁해 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종 갔다 울게요.”

“오냐.”

입을 행구러 화장실에 간 김에 블일도 보고. 천천히 손울 씻고 있는데 문 이 열리며 재영이 돌어왔다. 소변이 마려워 온 것 같지는 않고. 한 걸음의 간격을 두고 제 옆에 서서 괜스레 손을 씻는 재영을 물끄러미 보며 윤슬은 그런 형이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돈은 어디서 났어?0

“……왜? 홈쳐왔울까 봐 걱정돼?”

“생활비도 빠듯할 거 아냐. 아버지께 용돈 안 받아간 거 꽤 되었다는 말 둘었다.”

“대학 졸업한 지 오래고. 나도 직업이 있으니까. 돈 버는 사람이 부모한 테 용돈 받는 거 웃기잖아.”

젖은 손올 탈탈 털고, 남은 묻기를 바지에 대충 닦아 운지르는 윤슬을 재 영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별로. 이거 가지고 대충 이번 달 써라.”

재영이 지갑에서 카드 한 장울 꺼내 윤슬에게 내밀었다.

“아직 자리 잡았다고 하기엔 어려운 시기잖아. 아버지 이 정도로 안심시 켜 드렸으면 됐어 . 괜히 고건부리 면서 굶거나 하지 말고.”

괜히 앞에서 생색내고 뒤에서 굶지 말라는 소리인가. 형은 대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윤슬은 재영의 손에 들린 신용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나글써서 얼마돗 벌어.”

“그럴 것 같았다. 받아.”

“그런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야. 나 다른 일 해서 돈 벌거든. 궁금하지 않 아? 내가……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버는지.”

가늘게 눈을 뜨고 재영을 바라보며 윤슬은 입술을 을려 웃었다. 손가락 을 카드 끝에 대고 지그시 재영 쪽으로 밀며 윤슬이 용? 하고 재차 묻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재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세상에는 말이야. 악몽을 꾸는 사람이 참 많더라고. 그런데 내 앞에 있 는 누구누구 씨와는 다르게. 몇몇 사람들은 악몽이 너무 공찍하고 괴로워 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하더라. 누구는 괴을이라고 말했던 나 룰, 또 다른 누구는 구원자라고 하던데. 참 옷기지?”

재영의 얼굴 위로 서서히 표정이 사라져 갔다. 핼쑥하게 질린 얼굴이 공 포로 물들고 있었다.

또, 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잖아. 괴물울 보는 것처럼, 애써 악몽올 없애 줬더니 현실에서 악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펴고 윤슬은웃었다. 언제나처럼. 재영을 마주할 때마다 상처 받지 않은 거짓된 얼굴울 하고.

“이제 내가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었을지, 짐작이 가?” 01. 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퇴근도 못 하시고, 죄송해요.”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고개를 내저으며 웃었다.

“난 윤슬 씨가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준 것에 오히려 기쁩니다. 진료를 보 는 게 아니니,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편하게 암죠.”

상담실 책상과 반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윤슬이 자리 를 옮겼다. 그사이에 따뜻한 차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은 강호수 가 윤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마셔요. 오놀은 특별히 티백입니다.”

강호수는 항상 상담자에게 수제로 만든 과일차나 꽃차를 내주었다. 티백 으로 우린 차를 내온 것은 처음으로, 강호수의 말처럼 특별하다고 말할 수 도 있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평소에는 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윤슬 씨가 먼저 전화틀 해 서 시간을 내어 달라 요청한 것도 그렇고, 지금 윤슬 씨가 술퍼 보이기도 해 서요.”

강호수의 대꾸에 윤슬은 손으로 뺨울 쓸었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도,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걸까. 아니면 직업이 직업인만큼강호수가예 민하게 알아차린 것일까.

“맞아요. 안좋은 일이 있었어요.”

이야기를 하자고 먼저 찾아온 만큼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윤슬 은 담담한 목소리로 긍정했다.

“오늘 아버지 생신이었거든요. 그래서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어요.”

“윤슬 씨의 아버님은 모르신다고 했죠?”

“네. 처음 형의 반응을 보았올 때 이건 남이 알면 절대 안되겠구나, 하 고 느꼈거든요. 아직까지 형이 절 괴물처럼 여기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 말 하지 않은 건 잘한 선택 같아요.”

“형님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까?”

강호수의 을음에 윤슬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문제는 형일까. 자신을 대하는 형의 태도가 운제인 것일까. 공곰이 생각하던 윤슬이 이내 고개를 혼들었다.

“형이 절 두려워하고 피하고 있는 건 알아요. 앞으로도, 아마 죽울 때까 지 이 관계에서 달라지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걸 오롯이 형의 잘못이라고 는 생각하지 않아요. 전 그때 너무 성급했고. 형을 배려하지 않았고. 독단 적이었으니까요. 그냥 전……형과 저의 멀어진 관계가술픈것 같아요. 형 제이기도 하고, 그전까지는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으니까요.”

작게 한숨을 내쉰 윤슬은 머그를 집어 차를 홀짝 삼켰다. 정말 고백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될지 가늄이 되지 않아, 그저 차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 렇게 홀짝거리던 차를 절반쯤 비웠을 때, 강호수가 작게 웃으며 윤슬에게 말했다.

“처움 윤슬 씨에게 말했었죠. 난 윤슬 씨를 판단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난 들어주기 위한 사람입니다. 윤슬 씨가 어떤 말을 해도 나 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아요. 그 정도는 윤슬 씨 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입니다.”  

강호수의 말뜻울 파악한 윤슬이 내리뜬 눈을 들어 강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윤슬의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히 암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정말 괴을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예 생각과는 다르지만, 전 판단하지 않기로 했으니까요. 일단들어보겠 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둣, 눈썹을 모으며 말하는 강호수의 표정이 옷겨서 윤슬은 작게 웃음울 휼렸다.

“형이 절 괴을처럼 볼 때마다, 절 두려워할때마다……형을괴롭히고싶 어져요. 형이 왜 저룯 두려워하는지 알지만, 더 이상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 는지도 모르겠고요. 아니, 형은 그럴 기회조차 제게 주지 않아요. 그게 답 답하고, 그래서 화가 나요. 형은 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그래, 괴물이 되어 풀게. 이런 충동을 자꾸 느껴요.”

윤슬의 고백에 강호수는 으음, 하고 작게 신음했다.

“물론 그냥 생각일 뿐이에요. 정말 형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아요. 그

런데 못된 소리를 하게 돼요. 형이 절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이용해서, 형 .”1 .” 869

을 자꾸 겁주게 돼요. 예전에는 이상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내가 괴물 인가 생각했다면. 이젠 내 인성, 내 내면까지 괴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반복해서 악담울 들으면 사람이 그렇게 변한다고 하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윤슬 씨가 형님의 말을 가승 깊이 담아두고 내가괴을인가? 나 는 정말 괴을인가? 하고 생각하다보면, 언젠가 괴을이 될 수도 있을 겁니 다.”

언젠가 괴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지금 괴을이 아니라는 뜻일까. 스스 로 생각하기에 이미 자신은 괴을인데. 윤슬은 강호수의 말에 씁쓸하게 옷 기만했다.

“그런데요, 윤슬 씨. 윤슬 씨는 왜 악담만 듣고, 칭찬은 듣지 않고 있습니 까? 왜 내가 윤슬 씨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는 느끼질 돗하고 있습니까.”

“그건…….”

“난 윤슬 씨의 능력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악몽으 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돌에게 구원자라고 생각해요. 윤슬 씨는 그 사람돌 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건 감사받울 일이지, 손가락질받을 일은 아니에요. 누구보다 내가 윤슬 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윤슬 씨를 만난 후로, 윤슬 씨가 내게 도움을 준 후로……내가 과연 이렇게 편히 자도 괜찮 은 걸까 싶을 정도로 숙면을 춰하게 되었어요. 그런 윤슬 씨를 내가 괴물 로 보고 있습니까.”

“저는 구원자 같은 게 아니에요. 이건 축복도 아니고요.”

“구원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왜 괴물은 맞다고 생각합니까? 답은 어 디에도 없는데요. 누구도 윤슬 씨를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윤슬 씨 본인이 판단할 문제예요. 윤슬 씨의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 는 겁니다. 나는 확실히 말해줄 수있습니다. 윤슬 씨는 지금사람돌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하는 강호수를 윤슬은 을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로하고, 이해하고, 토닥여주고 있었다. 그러한 타인의 감 정은 다 거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거짓된 감정이 진 심이라 생각하고 싶어졌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 찾아왔던 게 아닐까. 면전에 대고 “네, 당신은 괴을 입 니다.”라는 말 따위 할 수 없을 테니, 듣고 싶은 말을 해줄 것이 분명한 강호수를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원하는 답을 듣고, 위로받고, 안심하고 싶어

“이래서 사람들이 상담울 하나 봐요.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서. 참 이 상하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거든요. 공짜 상 담 싫다고 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네요.”

“돈 받자고 내별는 틀에 박힌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윤슬 씨가 나  

를 힘 빠지게 만들었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죄송해요. 그래도 다론 사람의 말을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기엔 제가 나이를 먹었고, 사람에 대한 믿음이 부폭해서요.”

윤슬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힘없이 옷었다.

“그래도 이떻게 풀어내니까 속은 후련해요.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함 께 이야기를 나놀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였네요. ……형이 그런 상대가 되어 주었다면 더 좋았겠지 만요.”

“제가 형님 대신 윤슬씨를 종 안아풀까요? 힘내라고 말입니다.”

두 팔을 쭉 벌리며 말하는 강호수의 행동에 윤슬이 미간울 찌푸리며 반 사적으로 몸울 뒤로 물렸다.

“왜 피합니까? 이러면 감동스러운 장면이 안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서 감동 받은 얼굴로 품에 안겨야 완벽한 마무리죠.”

이제는 슬슬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강호수의 농담에도 적응이 되어 갔 다. 윤슬은 힘이 빠진 옴을 소파에 늘어뜨리고 느슨하게 웃었다.

“여전히 기대를 버리지 못한 거겠죠. 거창하게 나를 인정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난 그저 나룰 이해해주기를 바랐던 것분인데. 혼자 멋대로 기대하 고, 혼자 배신감을 느끼고.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저 참 우습네요.”

“내가 윤슬 씨를 인정하고, 내가 윤슬 씨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것으로는 부폭하겠지만, 그래도 윤슬 씨의 편에 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요 ”

핏플도 등을 둘리고 외면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강호수를 보 며 윤슬은 입매를 늘어뜨렸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자신이 문 득 싫어졌다.

“그래도 감동적인 장면은 사양할게요. 대신 힘내서 선생님이 말씀하시 는 구원자 노롯이 나 다시 해불까요. 겸사겸사 돈도 벌고. 이 번에는 돈도 일 찍 받았고, 다용 일을 해도 될 것 같으니까 다용 사람을 정해주세요.”

윤슬은 어깨를 으쑥이며 말을 돌렸다. 윤슬의 요구에 강호수가 장시 멈 칫했다.

“……사실 생각해둔 사랑이 있습니다.”

강호수는 답지 않게 조금 긴장한 얼굴을 했다. 강호수가 왜 갑자기 저러 지 ?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윤슬이 잠시 입을 다물고 강호수의 얼굴을 살폈 

“처융 윤슬 씨에게 내가 도움울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을렸던 사람입 니 다. 그 녀석에게도 윤슬 씨가 도움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강호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뭔가를 다짐한 사람처럼 윤슬 울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윤슬 씨가 준비가 되었울 때, 시간올 잡도록 하죠.”

강호수는 항상 의뢰자의 상담이 끝나는 시간을 문자로 넣어주었다. 그러 면 윤슬은 그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여유흡게 병원에 도착하여 의뢰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상담실에서 나오는 의뢰자와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것 이 이 일의 첫 번째 단계였다.

의뢰자는 누가 자신의 악몽울 없애주는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악몽이 사라지는지. 자신이 누구에게 사례금울 주는지 몰랐다. 윤슬 또한 자신의 의뢰자가 누구인지, 이름도. 상황도. 사정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약속과 돈 으로 얽힌 비밀스러운 관계였다. 

“선생님과 약속이 잡혀 있는데요.”

“흥윤슬 씨?”

“네.”

“안으로 돌어가시면 됩니다.”

“……네?”

간호사의 말에 윤솔이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울었 다.

“지금 상담실 안에 상담자 없어요?”

“네,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담자가 일찍 가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윤슬이 입술을 깨물며 곤란함 을 감추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돌어서자, 잠시의 휴식을 즐기는 둣 강호수가 홀로 앉아 눈울 감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눈 을 뜬 강호수가 윤슬을 발견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상담이 일찍 끝났어요? 저 늦게 왔어요?”

“아닙니다. 윤슬씨가도와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는 강호수의 행동에 윤슬이 느릿느릿 걸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제가 운자로 시간울 보내면 윤슬 씨는 항상 삼십 분 전에 와서 기다리 죠? 오놀은 그 반대일 거라는 말입니다.”

“왜 그런……”

평소와 다론 일을 꾸민 것에 대해 불만울 품으며 윤슬이 미간울 찌푸렸 다.

“그냥. 윤슬 씨와 이야기를 종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건……그래요, 이 건 내 고해성사쯤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두 손을 마주해 깍지를 껴 책상 위에 울린 강호수가 조용히 심호홉을 하 묫 숨을 내별었다.

“윤슬 씨는 내 악몽울 보았죠. 그러니 나의 불유쾌한 과거도 함께 기억 할 겁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내 어린 시절이 마냥 악몽만은 아 니었습니다. 그땐 한없이 두려운 존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소중했던 내 가족도 있었으니까요.” 

강호수의 말에 윤슬은 고아원 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모여 있던 세 꼬마 를 떠을렸다. 어릴 때에도 상냥했던 꼬마 강호수, 선하디 선한 눈망울을 가 졌던 예쁜 꼬마 숙녀, 말수는 적지만꼬마 강호수와 꼬마 숙녀의 옆에 우직 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내아이.

“오늘 윤슬 씨가 구원해플 사람은 내게 너무나도 특별한. 너무 소중하 고. 그리고 이제는 유일한……내 가폭입니다. 내 부모이자 내 형제고, 내 친구입니다. 그 녀석은 나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어요.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 정작 자신은 사람이기를 포기했고, 그래서 자신의 삶은 지 옥이자 악몽이라 말하는 녀석입 니다. 나는 윤슬 씨가…….”

“그만.”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강호수의 말에 윤슬이 날카롭게 잘라냈다.

“그만하세요.”

윤슬이 강호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지금처럼.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난 그냥 그 사랑의 악몽만 없애주면 되는 거예요. 선생님이라고 해 도 내 규칙을 깨는 건 용납 못 해요.”

“나는 그 녀석이 어떤 악몽을 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악몽이 그 녀석 을 짓누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죠. 나는 윤슬 씨가 그 녀석을 구원해주기 를 바랍니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돈울 받고 악몽을 없 애주는 것뿐이에요. 선생님이 왜 갑자기 이런 말씀울 하시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누군가와 깊게 연관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상대와 인연을 맺고, 그리고 상대의 악몽울 없애주고, 그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대 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공포를 윤슬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비즈니스적인 관계였다. 애초에 그것을 정해놓고 시작한 일이었 다. 타인의 악몽의 원인이나 배경에는 관심도 없었고,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단호한 거부에 강호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윤슬 씨를 화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윤슬 씨가 그랬 던 것처럼, 여기 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내게도 감추고 싶지 만 토해내고 싶기도 한 속마음이 있으니까요. 그것을 내보일 만큼 윤슬 씨 를 가2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윤슬 씨는 내 악몽을 보고 나를 지켜줬던 사 랑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강호수가 윤슬에게 손짓을 했다. 그 손을 따라 윤슬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슬 씨가 일찍 을 거라 생각해서, 그 녀석에게 윤슬 씨와 같은 시간으 로 약속울 잡았습니다. 윤슬 씨처럼 미리 오는 성격은 아니니, 지금쯤 딱 맞취 와있겠네요.”

“선생님, 저는 더 이상 다론 사람에게 괴을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 게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단지 그 이유로 돌팔 매질울 당하는 기분이에요. 사람돌이 내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를보 는 시선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두려워서 울었다면, 이제는 화가 나서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되갚아주고 싶어져요. 그래서 적당한 선 이 필요한 거예요. 나를 지금보다 더한 괴을로 만둘지 마세요.”

처음에는 공포를 느꼈고, 그 뒤로는 분노했다. 자신을 피하고 두려운 눈 으로 보는 것에 술퍼했고, 스스로에 대해 덩달아 겁이 나기도 했고. 그러 다 문득 왜 자신이 그런 취급울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났다.

잘못한 것은 없는데, 오히려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그런데 다르다는 이 유만으로 괴물 춰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부당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조급했어요. 윤슬 씨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내가 사과하겠습니 다.” '말했잖아요, 이건 일이라고. 선생님이 말하는 구원자 같은 게 아니라

돈울 받은 만큼, 그 사람에게 주는 대가. 돈이 오고 가는 거래. 단지 그뿐 이라고.

윤슬의 말에도 강호수는 그저 옷기만 했다. 그 옷는 얼굴 너머로 강호수 가 무슨 생각울 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네, 압니다. 하지만 윤슬 씨가 그렇게 말해도, 윤슬씨는 내 구원자입니 다. 이제껏 윤슬 씨가 악몽을 없애줬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고요.”

이렇게 말을 섞다가는 계속 도둘이표처럼 말이 둘고 돌 것 같았다. 자신 은 괴물이라 말하고, 강호수는 구원자라 말하고. 윤슬은 작게 한숨을 내쉬 며 목구멍까지 울라온 말을 삼켰다.

“이번에도 잘 부탁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윤슬 씨가 구원하는 거예요.

구원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강호수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자, 지금쯤 와있을 거라는 강호수의 말과는 달리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강호수를 바라 보자, 강호수도 예상 밖이었는지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전화를 해보겠습니다.”

그럼 저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올게요.”

“그사이에 온다면 상담실에 묶어 둘 테니, 이쪽으로 오세요.”

윤슬은 무겁게 내려암은 마음을 감추며 화장실로 향했다.

가폭과 같이 가까운 사이라면, 강호수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윤슬은 다론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강호수가 아무리 구원자라고 말해봤자. 돈울 받고 하는 일에 불과했다. 더 이 상 타인울 향한 측은항도. 호의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런 인간적 인 부분이 남아있기는 할까. 돈을 받고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건 누 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돈울 받으며 하는 노동에 불과했다. 이것을 강호수가 알게 된다면 혀를 차겠지만.

화장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통화를 하고 있 는 남자의 옆얼굴이 윤슬은 묘하게 낯익다는 생각울 했다.

일주일 전쯤. 사례금울 받으러 왔을 때 상담실에 난입했던 남자였다. 강호수와 친분이 있는 사이처럼 보였지.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혹시 이 남자일까. 윤슬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바로 앞이다. 그래. 다 왔어.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왜 해.”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남자는 휴대폰에 대고 심드렁한 목 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남자의 옆에 서서 을이 없는곳에 가방과 휴대폰울 내려놓고 손울 씻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촉울 해? 그래, 간다. 1 분이면 도착해.”

윤슬은 젖은 손을 털어 대충 바지에 닦으며 가방을 들었다. 통화를 끝내 고 옷매무시를 가다동는 남자를 힐곰 쳐다본 윤슬이 자연스럽게 걸음울 옮 겼다.

“저기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서려는 찰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들려왔다. 떼?”

“휴대폰 놓고 가셨습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세면대 위에 놓아두었던 윤슬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남자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 손을 내일었다. 남자의 손을 감싸듯 잡아서 휴대폰울 건네받자. 남자가 손을 움찔거렸다.

그래. 이해해.

윤슬은 속으로 사과의 말을 내벨었다. 여자를 상대로 했다면 성추행으 로 고소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거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는, 꽤나 꺼림칙하고 험오스러운 접촉이지.

그농의 접촉만 아니었다면.

한숨을 삼키며 윤슬이 고개를 돌었다. 울려다본 남자의 얼굴은 뭔가 미 묘한 표정이어서. 윤슬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울.”

남자가 가볍게 대꾸를 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하아. 이번에는 크게 숨울 내별었다. 성추행 비슷한 짓까지 했는데 저 남자가의뢰인이 아니라면. 정 말 성추행이 되는 거다. 아무 의미도 없이 남자 손이나 주물럭거리는.

힘없이 걸음을 옮겨 상담실로 향했다. 상담실의 문을 열었을 때. 화장실 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있기를 바라며 .

똑똑. 작은 노크 소리 뒤에 윤슬이 상담실 문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았 울 때, 윤슬은 제 운이 그리 나뜨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강호수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 뒤를 돌아본 사람의 얼굴은 윤슬이 화장실에서 만났 던 남자의 얼굴과 동일했다. 그 남자는 윤슬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화장실에서의 접촉이 남자에게 안좋은 기억으로 남 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 그만 가불게요.”

“어? 윤슬 씨. 잠깐……”

상황을 모르는 강호수가 급하게 달려 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강호수가 상담실 안쪽울 가리 켰다.

“그……해야 하잖아요, 접촉.”

“아까 화장실에서 만났어요. 왠지 저 사람일 것 같아서. 화장실에서 접촉 했어요.”

참 이상하지. 화장실과 접촉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지니 의미가 미묘해졌 다. 윤슬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강호수는 윤슬의 말에 고개룹 끄덕일 뿐 이었다. 

“네, 저 그럼 가불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화장실에서 처음 본 남자를 추행해야 하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까 싶지만. 윤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강호수의 병원을 나섰다.

어둥. 손끝마저도 보이지 않는 어둥 속에서 윤슬은 무력하게 서 있었다. 윤슬을 내리누르는 공기는 무거웠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압박울 받는 것처럼 턱턱 막혔다.

언제나 관찰자의 입장이었지, 이렇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은 처음 인지라 윤슬은 조금 당황했다.

천천히 걸음을 을겨 걸었다. 암흑 속에서 어디를 향해 걷는지도 물랐다.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둥이 움직였다. 마치 물결이 흔돌리는 둣, 어둥이 술렁거렸다.

어둥 속의 물결치는 검은빛은 붉은빛처럼 보이기도 했고, 붉은빛처럼 보 인다 생각했울 때 다시 검은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윤슬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 검붉은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이었다. 까만 것은 그들의 머리였고, 붉은 것은 그들의 피였다. 꿈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슬래셔나 고어 무비를 보고 있다고 착각했울 터였다.

신음을 홀리고.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치고. 울부짖는 소리가 한순간 스 피 커를 켠 것처럼 고막울 찢을 둣이 날카롭게 을아쳤다. 그들이 뿜어내는 증오, 공포. 원망과 같은 감정돌이 걸러지지 않은 채 윤슬에게 전해졌다.

구역질이 나울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윤슬이 잠시 비틀거렸다. 많은꿈 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껏 봐왔던 타인의 꿈중에 이런 경우는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지금 보는 이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윤슬은 생각했다.

“불청객인가.”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홈칫. 몸울 굳혔다. 움직임울 엄춘 것은 윤슬만이 아니었다. 고운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피를 흘리고 비명을 질러대던 사람들 역시 발버둥울 멈추고 소리를 삼켰다. 동시에 수십 쌍의 눈동자가 윤슬에게로 향했다.

마치 남자의 악몽이 아니라. 윤슬의 악몽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윤슬온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에 됫걸음질을 쳤다. 윤슬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윤슬을 주시하고, 윤슬의 행동을 따라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마다 다가왔다.

무릎 아래가 절단된 사람이 두 팔로 바닥을 깊으며 윤슬에게로 기어오고 있었다. 바닥 위로 붉은 피가 어지럽게 흔적을 남겼다.

배가 갈린 사람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열린 뱃가죽 틈으로 장기가 줄 즐 홀러내렸다. 기다란 밧풀처럼 구불거리는 창자를 바닥에 질질 끌고흐 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손목이 잘린 사람, 가슴이 낭자된 사람, 무언가 둔기에 맞은 것처럼 머리 통 한쪽이 찌그러져 얼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사람, 목에 둘둘 감겨있는 밧 풀을 풀어내기 위해 연신 손으로 목과 밧줄을 긁어대는 사람. 그 모든 사람 둘이 윤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겁이 났다. 이 사람돌에게 잡히면, 이 악몽 속에 그대로 먹힐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윤슬은 옴울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헉.”

급하게 숨을 둘이마시며 윤슬이 눈을 딨다.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 보았지 만 사위가 어두워 아직까지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악몽의 잔재처럼 가슴이 여전히 쿵광쿵광 뛰고 있었다. 윤슬은 심호흡 을 크게 하며, 지금 눈을 뜨고 있는 이곳이 현실임을 깨닫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골목은 고요했고, 저 멀리 도로를 달리는 차소리가희미하게 전 해져왔다. 암흑과도 같은 까만 하늘 위로 점점이 뿌려진 별과 인공위성의 빛을 을려다보며 윤슬은 가슴을 진정시켰다.

“뭐야, 대체.”

목이 칼칼했지만.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확인 받아야 했다.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을을 한 컵 들이켜고 나서야 윤슬은 쿵쿵 울리 던 가슴을 진정시 킬 수 있었다.

여전히 손끝이 시리고 체한 것처럼 가승이 답답했지만, 적어도 현실이라 는 점에서 안도할 수 있었다.

뭘까, 그 꿈은.

언제나 타인의 악몽이라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어떤 장면을 본다 해도 느껴지는 감정은 없었다. 안쓰럽거나 화가 나기도 했지만 어디 까지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상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고통과 악의가 전해지는 꿈이라니. 이건 마치 자신의 악몽처럼 느껴졌다. 아니, 윤슬은 자신의 악몽에서조차 이런 절실한 감정을 받지 못했었다.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어서일까.

침대에 걸터암아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운질렀다.

남자의 악몽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공포일까. 아니 면 죄책감일까. 남자가 지켜보아야 했던 일인지, 아니면 남자의 손으로 행 했던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윤슬에게는 꿈에서 보았던 그 상황들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꿈. 허 황된 꿈울 본 착각처럼 느껴졌다. 멀껑한 사랑은 찾아불 수 없을 정도로 망 가지고 낭자된 그들이 뽑어내는 질은 감정이 윤슬을 숨 막히게 했다.

처음으로 이 일을 하기로 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 다. 휴대폰을 조작해 띄운 강호수의 연락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윤슬 이 이 내 한숨을 내별으며 휴대폰을 끄고 책상 앞으로 을겨 앙았다.

다시 높는다 한들 잠이 을 것 같지 않온 밤이었다.

윤슬은 낮에 걸려왔던 강호수와의 전화 통화를 떠을렸다.

“그 녀석의……악몽을 보았습니까?

그리 묻는 강호수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속에 담겨있는 불 안과 희 망이 전해져 윤슬은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어제 몸이 안 좋아서 못 했어요.

“그렇군요미안합니다. 보통 하루면 윤슬 씨에게 연락이 오는데, 연락 이 오질 않아서 조급했나봅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힘든 일도 아니었기에 윤슬은 보통 당일 밤에 악몽울 방문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예상했다는 강호수 에게 그랬었다는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남자의 악몽울 보고 당황해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유일하게 자신을 배척하지 않고 구원자라 말하며 믿는다는 강호수 에게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울까.

“선생님, 그……

대체 뭐 하는 사람이나고 묻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 에, 그의 악몽 속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공찍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거나 고. 그 남자가 꾸는 악몽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냐고.

하지만 윤슬은 묻지 않았다. 아니, 을을 수 없었다. 그건 지금까지 윤슬 이 해왔던 행동과 다론 것이었고, 그것을 강호수가 모르고 지나칠 리도 없 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악몽에 들어간다는 것은 타인이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을 흥쳐보 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현실로 가져와 말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이 윤슬 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비밀 보장을 기본으로 하는 거래이기도 했고.

“오늘 할게요.

“재촉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알죠? 내가윤슬씨를 믿고 있다는 것을요.

그래. 그걸 알기 때문에 못 하겠다는 소리를 못 꺼낸 것이겠지. 아니. 딱 히 강호수가 아니 더라도 타인의 악몽을 본 이상, 윤슬은 그 악몽이 무엇이 든 없애야 했고 계약을 끝내야 했다. 그것이 타인의 비밀을 본 대가이자 책 임이라고 윤슬은 생각했다.

윤슬은 혀를 차며 눈앞의 어둥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악몽의 주인이 자신을 알아차리기를, 그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나기 를기다렸다.

“또 왔군. 불청객.”

누군가의 목소리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악몽이 정지되었다. 울고불고 비 명과 고함울 지르던 사람들이 마치 동상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적막함이 찾 아들었다.

“모습을 드러내요.”

윤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슬의 옆으로 남자가 나타났다.

“너는 내 악몽이 아닌데.”

마치 악몽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남자는 말했다. 보통 윤슬이 악몽에 나타났을 때, 그 악몽의 주인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전까지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윤슬의 등장과 함께 객관적으로 꿈을 보게 되고 비로소 악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눈앞의 남자는 다론 것일까. 마치 윤슬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악몽이라는 것울 알고 있었다는 것처 럼 .

“내가 당신의 악몽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죠?”

“왠지 날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질 않아서 말이야.”

검승 같은 감이다. 눈울 가늘게 뜨고 저를 살피는 시선에 윤슬이 어깨를 움츠렸다. 시선이 닿은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목덜미가 서놀해졌다.

“다르네요.”

“뭐가?’

“이게 악몽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남자의 시선은 정지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일순간 제약에 플린 것처 럼 멈춰있던 사람돌이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쳐댔다. 윤슬은소 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으로 귀를 막았다.

“저들은 말이야. 모두 내가 죽이거나 고통울 줬던 인간들이거든요

남자는 낮게 옷으며 말했다. 그 웃옹이 잔인해 보이는 한편, 조금은 술 퍼 보이 기도 했다.

“악몽울 없애고 싶어요?”

윤슬의 을음에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천진한 아이와 같은 행 동은 커다란 남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연극을 보는 기분이 었다.

“악몽… … 없애고 싶어요?”

윤슬은 재차 물었다. 남자가 공정의 대답을 하고, 악몽을 없앤 뒤에 남자 의 꿈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악몽의 주인과 윤슬 사이의 거래가 성사될 수 있는 조건.

윤슬은 남자의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기만울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 의 입을 타고 홀러나온 말은 윤슬의 기대와 정반대의 말이었다.

“아니.”

“그건 답이 될 수 없어요. 애초에 약속되어 있었던 거잖아요.”

“약속?”

남자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론 척하는 것일까. 모론 척하는 것 이라면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을 시험하려는 건가.

윤슬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말장난하고 싶지 않아요.”

“마치 네가 내 악몽을 없앨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의뢰자가 바뀌었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강호수에게 확인까지 받았으 니까.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두 명이 아닌 이상에야. 화장실에서 만난 남자 와 상담실에 있던 남자가 얼굴만 똑같은 다른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의뢰 자가 바뀌었을 리 없다. 

의뢰자가 바뀐 것이 아니라면. 그럼 이번 의뢰는 강호수의 독단으로 이 루어졌다는 것일까. 남자의 동의 없이 자신울 남자의 악몽으로 보냈다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윤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남자가 윤슬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날카로운 시선이 윤슬을 훌고 지 나갔다.

“어떻게 내 꿈에 들어온 거지?”

낯선 것을 보는 시선. 신기하고 특이한 것을 보는 시선.

만약 자신이 정말 악몽울 없앨 수 있음을 현실에서 알게 된다면 저 시선 은 험오와 공포로 바뀌겠지 .

윤슬은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 그것이 지금 윤슬이 생각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윤슬의 모습이 흐릿해지려는 순간, 남자가 윤슬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건……내 꿈이야.”

남자는 으르렁거리듯 험악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남자의 사나운 기세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윤슬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가능할 리 없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꿈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제약된 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꿈의 주인돌은 언제나 악몽에 시달려 지친 약자을이었다. 악몽 속에서 그들은 무력했다. 그리고 윤슬은 그런 사람듈을 눈앞에 두고 내려다보는 포식자였다.

그러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윤슬의 손목을 잡아 가까이 끌어 당긴 남자가 입술을 을려 옷었다.

“난 네 얼굴올 봐야겠어. 그 빌어먹을 가면 밑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안……”

윤슬이 거부하기도 전에 다가온 남자의 손이 윤슬의 얼굴 위로 씌워진 가면을 벗겨냈다. 하얀 가면이 남자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윤슬이 고개를 돌리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보지 마.”

남자가 얼굴울 알아불지도 모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윤슬 은 남자의 몸울 일쳐냈다.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자에게서 훌쩍 멀 어진 윤슬이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날 부론 건 당신이었잖아요

힘들다고 손을 내민 주제에,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부당했다. 형도 그랬지. 다론 사람들도 독같아. 그리고 당신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 고.

왠지 모르게 분한 마음에 윤슬은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이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윤슬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한 자 한 자 짓씹듯 말을 토해냈다.

“선생님, 거짓말했어요. 그렇죠.”

「윤슬 씨? 윤슬 씨입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어 강호수가 재차 윤슬 씨, 하고 불렀다.

「윤슬 씨, 무슨 일 있습니까?」

“거짓말했어요. 그 남자가의뢰인이라고. 사실 그 남자……아무것도을 랐던 거죠?”

날카로운 윤슬의 지적에 강호수가 잠시 침묵했다.

“난 선생님이 나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어요.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고 타 인을 이해한다 어껀다 하는 거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선 생님만은 나를 이해할지도 모론다고 기대했거든요. 그거야말로 개소리였 네요.”

「윤슬 씨, 그건 거짓이 아닙니다. 난 항상 윤슬 씨를 믿고, 윤슬 씨가 상 처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항상 말했잖아요. 이제껏, 일 넌이 넘 도록 내가 윤슬 씨에게 말하고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강호수에게 넘어갈 뻔은 했지. 그걸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었다. 강호수에게 완전히 홀려 그의 말이라면 다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저주받은 능력이 강호수의 말처럼 축복이라고 생각되기도 했고, 괴을이었 던 자신이 구원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호수의 달콤한 말에 홀려서. 주 제 파악이 덜 되었던 모양이 었다.

“규칙이라는 게 있어요. 나에겐 나만의 규칙이 있고, 선생님과 나 사이에 도 규칙이 있죠. 동의 없이 남의 악몽울 보는 건 내 규칙에 벗어나요. 선생 님은 그걸 어기게 만둘었어요.”

「미안합니다.」

강호수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안합니다. 그 녀석은 악몽에 짓눌려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그걸 옆

에서 지켜보는 게 힘들고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그건 변명이 되지 않아요. 선생님은 날구원자라고 말하면서, 괴물로 만

든 거나 다름없어요. 그 남자가 나를 보고 구원자라고 할까요? 도움을 줘

서 고맙다고 할까요? 아뇨. 나를 괴물처럼 보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101.”869

거예요.”

강호수는 윤슬에게 구원자라고 했지 만, 윤슬은 강호수를 구원자라고 생 각했었다. 괴을인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울 내일어 준 구원자. 그 손이 다 시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 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 만.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낮게 한숨울 내쉬었다. 곤란함과 피곤함이 적절하 게 섞인 그 한숨이 유독 무겁게 전해졌지만, 이제 와 안쓰러운 감정은 들 지 않았다.

「내가 잘돗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돗했어요. 악몽을 없애기만 하면, 그럼 괜찮을 거라고 생각……니

“싫다고 했어요.”

「네?」

“악몽 없애기 싫다고 했어요.”

강호수의 기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통쾌하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느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을 엿 먹인 강호수가 도리어 엿 먹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살 짝 좋아졌다.

자!몽을 없애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요? 모든 사람들이 악몽을 없애주  

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어요? 악몽을 없애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치부를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본인의 마음도 아닌데, 다 론 사람의 마음울 너무 쉽게 단정 지으신 것 같네요.”

이게 바로 당신이 멋대로 꾸민 일의 결과라고 말하며 윤슬이 나직하게 웃음을 훌렸다. 결과만 좋으면 될 거라고? 정작 당사자는 원하지 않는 일 이라는데, 누구의 기준으로 결과가 좋고 말고를 따질 수 있을까. 한없이 높 아 보였던 강호수를 윤슬은 기꺼이 비옷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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