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8)

야스 - 꿈을 먹는 괴물 1

001. 에덴의 사과

“날 믿지 않는군요.”

가놀게 눈을 뜨고 맞은편에 않아 있는 남자를 향해 말을 내벨는 윤슬의 얼굴 위로 약간의 허탈감이 떠올랐다.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윤슬씨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요.”

“나는……선생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손으로 감싼 도자기 잔은 여전히 따듯했다. 온기가 남아있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자. 진하게 우린 레몬차가 입 안에 맴돌았다. 지독하게 시고. 지독하게 단맛에 윤슬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이세요.”

“윤슬 씨는 본인이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내게 미쳤는지 아닌지를 확인받기 위해 왔습니까.”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남자의 손끝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단정했다. 서글 서글한 인상, 어색함이 없는 미소. 부드러운 목소리. 넥타이도 없이 셔츠의 윗단추를 풀어놓은 남자의 차림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신경정신과라는 타이를이 주는 딱딱함을 상쇄시키려는 것처럼 편한 모습이었지만, 윤슬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정신과에는 미친 사람들만 온다는 편견이 아직까지 남아있죠.”

남자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이곳을 찾는 환자들은 사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외롭고. 비밀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고.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가니까요. 다른 것이라면 이곳을 찾는 분들이 유독 여리고 예민하다는 점이랄까요.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비밀을, 고통을 홀로 이겨낼 수가 없는 겁니다.”

윤슬을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한없이 자애롭고, 엄격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부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온전히 당신의 편입니다, 라는 믿음을 주입받는 기분에 윤슬은 절끄러움을 느꼈다.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닙니까. 그것을 꾹꾹 눌러 담고 있으니 속병이 나는 거고요. 대나무 숲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닙니다. 보통 이렇게 말을 하죠. '너만 알고 있어.' 시간 지나면 너 하나가 세상 전부가 되는 일이 허다하지만요.”

남자의 말울 들으며 윤슬은 느슨하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에게 의지하고, 고백하고. 구원받고.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해받고. 위로받고, 용서받고 싶어 합니다. 아무 관련 없는 사람에게라도 '그렇구나. 괜찮아. 이해해.'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속마음을 풀어낼 수는 없고, 비밀이라면 더더욱 꺼려지겠죠.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는 겁니다, 계약으로, 약속으로. 사인한 종이 한 장과 돈으로 믿음을 교환하고 속에 있는 말을 풀어내죠. 이곳은 법적으로 비밀이 보장되는 곳이니까요.”

잠시 생각에 잠겨 조용히 앉아 있는 윤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남자가 윤슬 씨, 하고 이름을 불렀다.

“여기는 당신을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곳이 아닙니다. 윤슬 씨가 편하게 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 있는 곳이죠. 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 ……상처, 고통. 그런 것이 아니라도 윤슬 씨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아무것이나 괜찮습니다.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를 이야기해도 좋은 곳이 여기입니다. 나는 윤슬 씨를 판단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윤슬씨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죠.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요.”

남자의 말이 맞다. 윤슬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곳에 와서 확인받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쳤는지를 확인받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면 남자의 말처럼 윤슬은 토해 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혼자만의 비밀을. 내내 감추고 있던 비밀을. 다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그 누구도 설명해줄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이 일에 대하여.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윤슬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이며 남자를 응시했다.

“누군가에게 풀어내고 싶었던 거겠죠. 내게 일어난 일을 나조차도설명 할 수 없는데. 다른 누군가가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겠어요. 이런 허황된 이야기. 난 그저. 선생님의 말씀처럼 들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누군가의 동정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진심이 들어있지 않은 타인의 싸구려 동정, 거짓된 이해. 그것이 윤슬을 수치스럽게 했다. 손가락질을 하고, 괴물처럼 보는 것보다 더 윤슬을 진저리치게 했다.

“오늘은 그만 가야겠어요.”

잘 이어 나가던 대화를 한순간 칼로 끊어내듯이 잘라낸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급작스러운 말에 남자가 윤슬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악수나 한번 하죠. 내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이인데.”

쭉 뻗은 손을 남자에게 내일며 윤슬이 말했다. 그 손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남자가 이내 생긋 웃으며 가볍게 붙잡았다.

“편하게 생각해요. 윤슬 씨. 저는 언제나 여기서 윤슬 씨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세요.”

“선생님도요.”

윤슬은 남자의 까만 눈동자 안쪽에 감추어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둠이 남자의 눈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윤슬의 시선에 남자가 흠칫. 몸을 떨며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선생님도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제게 연락하세요.”

“상담은 상담의에게 해야죠. 지금 불법 의료행위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남자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그런 남자를 보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주일 안에 다시 올게요. 더 일찍 만날 수도 있고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저 단순한 인사라 여긴 남자가 웃으며 윤슬을 배웅했다. 과연 그 말뜻을 이해하긴 한 것일까. 다음 만남에서도 남자는 저리 웃을 수 있을까. 윤슬은 문득 궁금해졌다.

윤슬은 새하얀 공간 속에 서 있었다.

마치 도화지에 어느 한 장면만 그려놓은 것처럼 커다란 책상과그 너머에 앉아 있는 남자가 윤슬의 눈앞에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작은 여자아이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중년 남자. 말쑥한 차림새에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는데. 품 안의 아이는 유독 울상이었다.

앉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눈앞에 의자가 생겼다. 윤슬은 중년 남자와 아이의 정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덟아홉 살 정도 되었을까. 선하게 생겨 칭얼거림 하나 없을 것 같던 여자아이가 작게 울음울 터뜨렸다.

쉬이. 울지 말아야지.

중넌 남자가 아이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는 것이 들려왔다. 부스럭부스럭. 천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입고 있는 치맛자락이 들썩거 렸다.

손을 내젓자 중넌 남자와 윤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책상이 사라졌다. 책상 아래로 감춰져 있던 모습도 드러났다. 허벅지 위에 아이를 앉힌 남자의 손이 아이의 치마 속으로 반쯤 사라져있었다. 꾸물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아이의 하얀색 팬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슬은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건……뭡니까?”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에 윤슬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윤슬의 을음과 동시에 윤슬이 않아 있는 옆으로 나란히 의자가 놓였다. 그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윤슬을 보고 있었다.

“뭐냐고 물었습니다.”

“방금 엄청 바보 같은 질문 하신 거 아세요, 선생님?”

다정하게 웃던 얼굴이 아니었다. 상냥하고 친숙한 얼굴도 아니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윤슬은 남자를, 오늘 낮에 만났던 정신과 의사를. 강호수라는 여리고 예민한 인간울 마주하며 친절히 답해주었다.

“선생님의 비밀이죠. 감추고 싶은 비밀, 말하지 못하는 비밀. 떨쳐낼 수 없는……선생님의 악몽.”

강호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겁에 질린 울음이었다. 강호수의 얼굴에도 공포가 어렸다. 차마 눈앞의 장면을 보기 괴롭다는 듯이, 강호수는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쥔 주먹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중년 남자가 쪼글쪼글한 제 성기를 바지 밖으로 꺼냈다. 아이의 허리를 들어 제 사타구니 위에 앉히고, 작고 여린 몸을 느리게 흔들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거세졌다.

하얀 배경에 갈색 문이 선명하게 생겨났다. 그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사내아이가 소리를 질러댔다. 작은 얼굴 위로 떠오론 것은 혐오와 공포였다. 그것을 참아내며 중년 남자에게 달려든 아이가 여자아이를 끌어당겼다. 작은 제 등 뒤로 여자아이를 숨기고, 사내아이는 중년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맞은 사내아이의 몸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어디서 가져온 나무 몽둥이로 중년 남자가 사내아이의 몸을 내리쳤다. 끝없이 이어지는 구타에 여자아이의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울렸다.

“오랫동안 감추고 계셨나봐요. 선생님의 비밀.”

윤슬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을고 신음울 참아내는 남자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강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쓰러져 맞고 있는 아이보다 더 무력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나요? 대나무 숲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의 악몽을 토해낼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으셨어요?”  

강호수는 침음을 흘렸다.

“이건. ……현실입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이것이 현실일 리가 없지 않온가. 윤슬은 소년을 힐긋 보았던 시선을 다시 강호수에게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꿈이에요. 선생님의 악몽이죠.”

“그럼 당신은요. 윤슬씨는 왜…….”

“역시 나를 믿지 않았네요, 선생님. 알고 있잖아요. 난 이미 선생님에게 말해줬는걸요.”

“꿈…… 꿈이군요.”

강호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연신 꿈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어린 강호수가 중년 남자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어른 강호수는 술픈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씀해보세요, 선생님. 얼마나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어요?”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언제부터였는지. 언제부터 나는 악몽에 시달렸던 걸까요. 나는 왜 아직까지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나요?”

“……네. 저는 항상, 항상 이 악몽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습니다. 어릴 때에는 저 남자가 한없이 크고 두렵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남자에게서 벗어 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크면. 내가 나이를 먹고 저 남자보다 더 커지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리 말하며 강호수는 소년과 중년 남자에게서 시선을 둘려 한쪽에 멀거니 서 있는 여자아이를 응시했다.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이 악몽이 이젠 죄책감이 되어 사라지질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겠죠.”

“벗어날 수 있어요, 선생님. 도망칠 수 있어요. 선생님이 원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한낱 꿈일 뿐.

지독한 악몽이라고 해도 꿈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으세요? 윤슬은 초를릿처럼 달콤한 유혹을 내밀었다. 도망치고 싶으세요, 선생님?”

“어떤 꿈을 꾸고 싶으세요?”

이 지독한 악몽 대신에.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 악몽 대신 어떤 달콤한 꿈을 꾸고 싶으세요?”

윤슬의 물음에 한참 동안 소녀를 응시하던 강호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아원 뒷마당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들도 많았지만 유독 크고 오래된 나무였죠. 내가 고아원에 들어왔을 때에도 가장 큰 나무였어요. 저 아이가 고아원에 왔을 때도 여전히 가장큰 나무였습니다.”

윤슬의 손짓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비명과도 같은 울음을 내별던 소녀도, 구타를 당하면서도 옴을 웅크리고 고집스럽게 신음을 참아내던 소년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작은 아이를 몽둥이로 때리던 중년 남자도, 그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도화지 위에 강호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붓이 되어 고아원 건물을 만들고 커다란 나무를 그려냈다. 강호수의 기억에 남아있는. 푸르름을 한껏 머금은 나무였다.

“그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죠. 낯선 곳으로 오게 된 두려움에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작고 예쁜 아이였습니다.”

중넌 남자의 다리 위에 암아서럽게 울던 것과는 다르게,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은 소녀는 훌찍훌찍 코를 들이마시며 찔공거리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는 실컷 흙바닥을 뒹굴며 놀다가 그 아이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알았죠. 그날 새로 고아원에 돌어온 아이라는 것울. 우리의 처지가 어 떤지 충분히 알 나이였습니다. 저 어린아이가 안타깝고 안쓰러웠습니다. 그건 동정이기도 했고, 동질감이기도 했습니다.”

소녀의 앞에 어린 강호수와 그의 친구가 나타났다. 무릎울 굽히고 암은 어린 강호수가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등었다.

“아주 예쁜 여동생이네. 우리는 네 오빠야. 이제부터 우리는…… 가족이야.”

어론 강호수와 소넌 강호수가 똑같이 입술을 움직여 말을 별어냈다. 어린 강호수는 웃고 있었지만. 나이를 먹은 강호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날이, 그날이 내겐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내 형제와 내 여동생을 만나 가폭이 되었던 바로 그날이……”

기어코 눈물을 떨어뜨렸지만 강호수는 옷고 있었다. 행복해서 옷었고 행북해서 울었다. 강호수는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울 하고 울면서 옷었다.

“선생님의 악몽을 가져가고. 행복한 꿈울 남겨드릴게요. 대신. 내 선물이라는 것을 기념해서 나도 하나 정도는 흔적을 남겨도 괜찮겠죠?”

강호수에게 을었지만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나무 결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지나쳐 커다 란 나무의 몸통에 손을 을렸다. 그 순간 굵은 나뭇가지에서 어울리지 않게 새빨간 사과가 한 알 열렸다.

“행복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면 이 사과는 따지 마세요. 에덴동산의 사과를 딴 이브처럼 쫓겨 날지도 을라요.”

윤슬은 확인을 하듯 재차 물으며 강호수를 둘아보았다.

“아셨죠, 선생님?”

윤슬의 을음에 강호수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호수에게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껏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이 강호수는 외면했다. 침묵했고, 불신으로 남겨두었다. 어쩌면 꿈이라 치부하고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다르 리라 기대했던 강호수조차도 결국엔 다르지 않았다.

윤슬은 예약된 날짜, 예약된 시간에 맞춰 강호수를 찾아갔다. 그는 일주일 전보다 편한 얼굴울 하고 있었다.

“잘 지내셨나봐요, 선생님. 얼굴이 좋아 보여요.”

“보통 그 멘트는 제 것인데, 오늘은 선수를 빼앗겨버렸군요. 네, 요즘 잠을 묵 자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다행이네요.”

윤슬이 자리에 암는 것을 확인하며 강호수는 모니터를 술쩍 훌었다. 이 전 차트를 불러온 모양이지. 윤슬은 문득 강호수가 저기에 무엇을 적어두 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정신이상? 정서불안? 자아분열? 그도 아니면 그 냥 미친놈?

강호수의 을음에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쪽에 마련된 잔울 꺼 내 티포트를 기울였다.

적당히 식어 뜨겁지 않으니 마셔보세요.”

데커레이션이었는지 마지막으로 잔에 띄웠던 말린 꽃이 서서히 개화하 고 있었다. 마치 죽어서 말라버린 꽃에 다시 생명이 깃드는 것처럼 보여 윤슬은 그것을 유심히 지 켜보았다.

“노란색이네요.”

노랄고 투명한 찻을을 보며 윤슬이 말했다.

“생강나무 꽃차입니다. 꽃차는 대부분 자극적인 맛이 없지만, 대신 깔끔 하죠.”

“그래 봤자 묻이죠.”

어차피 입으로 삼켜 목으로 넘기면 다 똑같은물인데. 윤슬의 말에 강호수는 실없이 웃었다.

잔울 둘어 입에 대며 살짝 숨을 들이마시자 코끝에 묘하게 생강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코가 아릴 정도로 매운 냄새는 아니었고, 생강나무 꽃이 라서 그런가 생각할 정도로 희미한 향이었다. 윤슬은 살짝 차 한 모금 머금 어 삼키고 잔울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면 꽃도 참 종류가 많네요. 어릴 때 동요를 질리게 들어서 그런지. 노란 꽃이라고 하면 개나리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그렇긴 합니다. 노란꽃은 개나리, 분흥 꽃은 진달래.”

“주입식 교육이 이래서 무서운 거라니까.”

윤슬의 중얼거림에 공감한다는 것처럼 강호수가옷었다. 확실히 처욤 만났을 때보다 웃음이 헤퍼졌다. 친일하게 공감대륟 형성하려는 환자와 의사 의 관계를 떠나서, 강호수 자체가 느슨해진 경향이 보였다.

“악몽을 꾸지 않으면. 확실히 평소 생활할 때에도 여유로워지죠. 꿈이라 고 해도 의외로 현실에 영향울 많이 주거든요.”

“네?”

윤슬의 말에 강호수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나는 조금 실망했어요. 선생님. 선생님이 먼저 연락을 주실 거라고조 금 기대했거든요.”

“윤슬 씨가 오늘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가 연락을 드렸을지도 모 르겠네요.“

여전히 윤슬의 말을 이해하지 옷하는 표정이면서도 강호수는 반사적으 로 매고러운 대답을 내별었다.

“사과는 따지 않았죠?”

“로록. 차를 마시던 강호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행복한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면 따지 않는 게 좋아요. 아무리 말을 해 도 어린 애들은 가공 의외의 사고를 터뜨리곤 하니까요.”

“윤슬 씨, 지금 무슨 말을…….”

“내 꿈에 홍윤슬이 왜 나온 걸까. 낮의 상담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설마?”

크게 부릅뜬 강호수의 눈을 마주하며 윤슬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불쌍한 당신 형제와 당신 여동생을 위한.”  

윤슬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강호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 치 두려운 것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강호수는 윤슬에게서 눈울 떼지 못한 상태로 뒤로 두어 걸음 을러 났다.

“뭐냐니까. 당신 뭐예요!”

“그날……전부 말씀드렸었는데. 선생님도 꽤나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들었잖아요.”

그러면서 이제 와 왜 아무것도 을랐다는 것처럼 놀라. 전혀 관계없는 사람울 대상으로 이쪽의 비밀을 먼저 이야기해줬던 건 나름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확인까지 시켜줬잖아. 그런데 여기서 더 돗 믿을 건 뭔데.

윤슬은 원망과 책망이 담긴 시선으로 강호수를 응시했다.

“생각해봤는데, 선생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난 뭔가 치료를 받거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온 게 아니었어요. 그저 내 비밀을 누군 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거였죠. 내 비밀을 듣고, 공유하고, 그러면서도 그 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지 않을 사람. ……계약으로, 약속으로, 사인한 종이 한 장과 돈으로 믿욤을 교환하고 속에 있는 말을 풀어낸다는 그 말씀 아주 정확했던 것 같아요.”

딱히 강호수에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강호수가 무언가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해풀 수 있다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비밀을 강호수에게 풀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윤슬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확실히 이래서 돈을 내고 상담울 하는 모양이라고 윤슬은 생각했다.

“참, 속인 게 있어요. 속였다기보다는 말하지 않은 것에 가깝지만요. 어찌다 우연히 같은 게 아니에요. 나는 악몽을 선택해 찾아가죠.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내가 찾아갈 수 있는 악몽의 선택지는 늘어 나요.”

우리 ……악수나 한번 하죠. 내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이인데.

윤슬은 아무것도 모르고 웃던 일주일 전 강호수의 얼굴을 떠울렸다. 여리고 예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누구인가. 겁을 집어먹은 강호수를 바라보며 윤슬은 배부론 아이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요. 난 악몽 속의 괴물이라고.”

01. 괴물의 탄생

언제부터였을까. 내내 생각하고 고민했던 문제이지만, 윤슬은그에 대 한 답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후천적으로 어 떤 충격에 의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확인시킬 수도 없는 문제였기에 윤슬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 는 것조차 포기했다. 타인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가족조차도 윤슬을 괴물 처럼 보았다.

저주라고 말할 수도 있고,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이것을 자각했던 것은 윤슬이 고등학생 때였다. 윤슬과 여섯 살 차이가 나는 형 흥재영은 당 시 의대 본과 3학넌이었고. 원래 까칠했던 성격이 최고조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오랜만에 집에 왔던 재영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끼니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방문을 열었던 윤슬은 공공거리 며 잠꼬대를 하고 있는 재영을 발견했다. 나쁜 꿈을 꾸는지 식은땀읗 별별 홀리며 연신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재영이 윤슬은 문득 안쓰러워졌다.

무슨 꿈을 꾸기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의대 수업이 힘들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에 더해 다론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윤슬은 식은땀으로 젖은 재영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재영도 잠이 들었을 때에는 무방비했다. 흐트러진 이불을 끌어 덮어 주고 방울 나왔다. 그날 저녁 식사는 아버지와 둘이서 해야 했다.

잠이 들었을 때. 윤슬은 온통 새하얀 곳에 서 있었다.

윤슬을 제외하고 존재하는 것은 단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윤슬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다론 한 명은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 이렇게 있는 것도 우습네요할 말이 남아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재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하며 눈앞의 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변명하고 싶지만, 어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네 입장에서는 아니겠지.

- 변명할 생각이 없다면서, 지금 내별는 말씀 자체가 변명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재영은 팔짱울 낀 상태로 여자를 향해 조소했다.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여자의 턱 끝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의 말에 재영은 잠시 침묵했다.

- 설마 제 아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왜요? 윤 선배가 책임지지 않겠다고 합니까? 그래서 나라도 붙잡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까? 제가 어 지간히도 만만하게 보였나봅니다.

네 아이야.

확신할 수 있어요? 내 아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 ……그래, 너와 헤어지기 전에 생긴 아이야.

- 아, 나와 윤 선배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던 그때 말입 니까끝쎄요, 난 확신이 안 드네요. 나와 사귀면서 전 남친과 계속 만나고 있던 선배를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선배가 정말 임신을 했는지, 그 아이가 내 아이인지. 나 는 그 어느 것 하나 믿음이 가질 않습니 다.

재영의 냉정한 말에 여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돌었다.

- 아이가 태어나면 유전자 검사는 해드릴 의향이 있습니다정말 내 아이가 맞다면 내가 아이를 키우든, 양육비를 드리든 하겠습니다. 내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나는 선배와 다시 만난다거나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물론 이렇게 말을 하는 지금도 선배가 정말 내 아이를 임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잔인하리만치 차갑고 냉정한 재영의 말에 여자의 모습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마치 그림을 그린 종이를 구기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선명해진 여자 는 산발울 하고 있었다.

“너회는 다 개새끼야내가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좋아서 같이 윙굴 때는 언제고. 누구 하나 책임질 생각은 없는거지!

눈을울 홀리며 소리를 지르던 여자는 칼처럼 길쭉하게 솟은손톱으로 제 배를 갈랐다. 피가 즐풀 흐르는 배 안으로 손울 집어넣은 여자가 핏을 로 범벅이 된 핏덩이를 끄집어냈다.

윤슬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놀라고, 황망하 고, 두렵기까지 했다. 말을 하기는커녕 숨소리가 들릴까숨도 계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뭐야, 이건. 저건 대체…… 우리 뭘 보고 있는 거야.”

윤슬의 옆에 나타난 재영이 윤슬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울었다. 감정의 기복이 적고 종처럼 흥분하지 않던 재영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 었다. 

형의 꿈. 형의 악몽.

윤슬이 뒷말을 삼켰다. 꿈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꿈이 아 닌, 재영의 꿈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 옹에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이게 형이 꾸는 악몽이었어.”

“악몽? ……아, 그래. 악몽이지.”

재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반넌 넘게 사귀던 선배였어. 나를 만나면서 전 남자친구와도계속 만나 고 있었다는 걸 알고 헤어졌지.”

저 멀리 재영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는 여자의 모습올 보며 윤슬은 살짝 미간울 찌푸렸다.

“자살했어. 약을 먹었다고 하더라.”

“……정말 형의 아이였어? 그래서 괴로워하는 거야?” 대했던 내 태도야. 막다론 길에 서 있는 거였을 텐데. 지금 떠을려보면 그 때 선배는 막막하고 두려웠을 거야.”

재영은 한숨처럼 말을 토해내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금도 내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아.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종 그렇지만, 난 항상 피임에 신경을 썼으니까. 만에 하나, 정말 내 아이였 다고 해도 아이에 한해서는 내가 책임졌을 테지만 믿음이 사라진 여자를 다시 만나지는 않았울 거다. 하지만……목 그렇게까지 매정하고 냉정해야 했나 후회가 되더라. ……마치 죽어버리라고 내가 여자의 등을 떠민 것처 럼 느껴져. 선배의 얼굴이 지워지질 않아.”

“……형.”

흐느끼듯이 말을 하는 재영을 윤슬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꿈에서까지 고통받지 않아도 돼.”

“마치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죽은 선배가 계속해서 꿈에 나타 나.”

윤슬은 토닥토닥 재영의 등을 쓸어주었다.

“저 여자 불쌍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난 만난 적 없는 여자보다 형이 더 중요해. 형이 편해졌으면 좋겠어.”

쓰러지듯 무릎을 꿇은 재영이 윤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 마지막 구원인 것처럼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이런 꿈은 꾸고 싶지 않아, 윤슬아.”

재영은 아이처럼 흐느꼈다. 그런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슬이 고개 를 끄덕였다.

“형의 악몽은 내가 가져갈게. 형은좋은꿈만꿔.”

예브고 플거운 꿈. 형이 웃을 수 있는 꿈.

윤슬의 말에 저 멀리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쏟아내던 여자도, 무기력하게 서서 그 저주를 듣고 있던 재영의 잔상도 모두 사라졌다. 깨곳하리만치 하얀 공간에서 윤슬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재영을 끌어안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윤슬은 재영을 살폈다. 한결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재영을 보며 윤슬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의 저녁, 회식으로 늦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형제가 마주한 식사 자리에서 윤슬은 힐곳 재영의 안색울 살폈다.

“형. 이제 그 여자가 나오는 악몽은 안 꾸는 거지?”

밥을 먹던 재영이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단번에 안색이 하알게 질린 재영이 눈울 부릅뜨고 윤슬을 바라보았다.

“너, 너 그게 무슨…….”

“한결 편하게 자는 것 같더라. 다행이야. 나는 형이 계속그 악몽을꾸면 어찌나하고…….”

걱정했다는 윤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일린 의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1 그건 내 꿈이잖아. 그건 내 악몽이었어!”

“내가 없에줬잖아. 기억 안 나.”

꿈에서 자신과 대화까지 했는데. 윤슬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조심스럽게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너였다고? 네가, 그러니까 네가……내 꿈에서 나왔던 게 정말 너였다고?”

“형.”

“오지 마!'

왠지 모르게 흥분한 재영을 진정시키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윤슬이 재영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주춤 몸울 굳혔다. 뒤로 두어 걸음 을러난 재영 이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윤슬울 웅시했다.

“너……대체 뭐야?’

“형, 왜 그래.”

“너 정체가 뭐야. 어떻게 내 꿈에……

“형.”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재영은 마치 괴물을 마주한 것처럼 겁에 질 린 표정이었다. 말로 내밸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윤슬울 향해 괴묻이라고. 악마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윤슬이 재영에게 설명을 하려 했 지 만, 훌쩍 뒤로 물러 난 재영은 도망치듯 황급히 집을 나가버렸다. 

뒤늦은 가출 소동으로 애가 닳은 아버지의 연락에 결국 집에 왔을 때. 재영 과 윤슬의 관계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꿈에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재영이 의식적으로 윤슬을 피하고 있음울 알 수 있었다. 재영은 윤슬울 두려워하고, 꺼림칙해했다. 그것이 타인의 비밀을 엿본 대가였음울 윤슬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제야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 에 존재할 수 없는 괴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문울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데스크 너머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시 간울 확인하고 조금 곤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오늘 진료 끝났는데요.”

“진료 때문에 온 건 아니고요,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요 ”

표아, 네. 선생님 지금 마지막 상담중이시니 앉아서 기다리세요.”

고개를 끄덕인 윤슬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확인한 간호사가 곧 신경을 끄고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쪽 벽에 걸린 1\.”를 멍하게 보 

며 시간을 죽이던 윤슬은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상담실을 나오던 사람은 마주 걸어오는 윤슬을 발견하고 시선을 피하며 잽싸게 스쳐 지나갔다. 아는 사이도 아니건만 정신과에 다닌다는 것을 들 키고 싶지 않은 마융에 본능적으로 나오는 방어 행위였다. 윤슬은 낮게 혀 를 차며 상담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문을 닫자 컴퓨터에 뭔가를 작성하던 강호수가 고개를 들어 반가 운 얼굴울 했다.

“알아요, 윤슬씨. 나 이것만종 마무리하고 이야기합시다.”

“천천히 하세요.”

윤슬은 차분히 의자에 암아 기다리며 강호수의 옆얼굴을 보았다. 일 넌 동안 봐왔던 얼굴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상담은 다섯 번을 채우지 못했 지만, 그 뒤로도 한 달에 한 번은 꾸준히 마주했던 얼굴이었다.

“왜요? 새삼스럽게 내가 잘생겨 보입니까?”

“선생님도 그런 농담을 하시네요.”

“이런 농담 자주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컴퓨터를 껐는지 미미하게 울리던 기계 소리가 멈췄다. 버릇처럼 차한 잔? 하고 묻는 강호수를 향해 윤슬이 고개를 내저었다. 차를 마시면 필요 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 뻔했다. 일종의 직업병과도 같은 강호수 의 버롯이었다. 그것을 몇 번이나 경험했던 윤슬이었기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다.

“장은 잘 잡니까? 얼굴이 푸석해 보이네요.”

“마감에 걸려서요. 게으름 부린 자의 최후죠.”

윤슬은 뺨을 문지르는 척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변명했다.

“ 악몽울 꾸지는 않고요?”

“그건 보통 제가 하는 질문이죠.”

“나는 이 일이 윤슬 씨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 는 겁니다.”

“우리 둘 다 그런 걱정을 하기엔 조금 늦은 것 같지 않아요?”

약간의 자조와 약간의 조소가 섞인 대꾸에 강호수 역시 씁쓸한 웃음을 홀렸다.

“흑시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질문이 광범위하네요.”

“다론 사랑의 악몽을 없애면서 생기는 마이너스적인 요소 같은 거 말입 니다. ……양기가 부폭해지고. 음기가 강해진다거나.”

냘카로운 강호수의 지적에 움껄했지만, 뒤이은 농담에 내색하지 않고 옷 을 수 있었다.

“사람이 내별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뒤따르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건 타인에게, 흑은 자신에게 영향을주죠. 윤슬 씨는 지금괜찮은 겁니 까?’

빤히 쳐다보는 강호수의 시선은 마치 윤슬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선이 절끄러웠지만 윤슬은 아무렇지 않은 척 강호수를 마주 보았다.

“환자로 온 거 아닌데요.”

“우리가 얼굴 마주한 시간이 벌써 일 넌인데. 공짜 상담도 못 해주겠습니 까.”

“이쪽에서 거절이에요.”

이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 한 타인의 이해나 위로가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도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 진심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한 감정 으로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글쎄, 한 10%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지 도 모르겠다. 나머지 90%는 오롯이 혼자만의 고통이고.

왜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제는 원인을 알고 싶지도 않아요. 병이라면 고치겠지 만, 이건 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선생님의 말씀처럼 능력일지도 모르는 이 힘으로 이 제는 돈도 벌고 있잖아요. 쓰라고 생긴 능력이겠죠. 이 능력으로 상대는 악 몽울 없애고, 나는 돈울 벌고. 서로 좋으니까 된 거죠.”

“내가 했던 말이라 반박하기가 어 렵군요.”

강호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블을 긁적였다.

“왜 저주라고 생각해요. 이건 능력입니다. 악몽으로 고통 받고 있는 타 인에게 평온을 주지 않습니까. 윤슬 씨가 무작정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악 몽을 꾸는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까. 세상에는 악몽 에 시달리는 사람돌이 많습니다. 윤슬 씨가 그 능력을 사용해서 뭔가 안 좋 은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면, 나는 윤슬 씨가 이 능력을 보다 넓게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둘째 치고. 강호수의 제안은 윤슬에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강호수는 의사로서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윤슬이 이 능 력을 마주하고 활용하는 것에 큰 도움울 준 인물이었다.

“글 쓰는 것보다 돈올 더 잘 벌기도 하니까, 나쁘지 않아요. 선생님이 아 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능력을 활용할 수도 없었겠죠.”

“제 말만 잘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생색을 내고 싶지만. 근본적 인 도움은 드리지 못했으니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겠죠. 그래도 윤슬 씨 의 능력 하나로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니 보랑차긴 하군요.”

강호수는 서랍을 열어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내일었다.

“이번에는 종 이르네요.”

“한 달 정도 기다려 봐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만족하셨는지 일찍 주셨 습니다.”

“가지고 계시다 다용에 만날 때 주셨어도 되는데요.”

“이렇게라도 윤슬 씨 얼굴 한 번 더 보면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굳이 불러 일찍 주지 않았어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강호수는 느물느물 옷으며 윤슬의 지적을 받아넘 겼다.

강호수가 내민 봉투를 받은 윤슬이 안을 살렸다. 오만 원권 지폐가 봉투 를 꽉 채우고 있었다.

천만 원. 

누군가의 악몽을 지워주고 받는 돈. 어떤 사람들에게는 큰돈일 수도 있 지만. 악몽으로 인해 죽을 것처럼 마음고생울 하는 사람에게는 적은 돈이 기도 했다. 강호수는 그런 사람들울 골라 윤슬에게 연결해주고 있었다.

“왜 갑자기 옷습니까?”

“문득, 선생님이 브로커 같다는 생각울 했거든요. 걸리면 의사 면허 정지 되는 거 아니에요?”

지폐를 꺼내 액수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 윤슬은 봉투를 잘 갈무리해서 가방에 넣으며 강호수에게 을었다.

“확실한 사람들로만 골랐습니다. 게다가 악몽을 없애주고 돈을 받았다 는 신고가 돌어가도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제가 공갈협박울 해 서 돈을 뜯어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현금이지 않습니까. 깨곳하죠.”

강호수가 중간에서 수수료를 떼는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한 건 당 천 만 원이라면 적은 돈이 아니니, 더 욕심낼 일도 아니다. 윤슬은 고개를 주 억이며 가방을 풍에 끌어안았다.

“능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 만, 조금 바뀐 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뭡니까.”

“세상울……조금 더 냉정히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세상에는 여러 사람 둘이 있고, 그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겪잖아요. 그냥 나 혼자 살아간다 면 겪어보지 못했울 별별 일들을 꿈에서 간접적으로 보고 나니 이제 웬만 한 일로는 크게 놀라지도 않을 것 같아요.”

악몽은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 꾸기도 하지만. 무언가 룰 잘못하고 난 뒤의 죄책감과 후회로 생겨나기도 하니까.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추악한 일돌까지 보다 보니 사람에게 느끼는 안쓰러움과 측은함 또 한 조금씩 희 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윤슬은 뒷말을 삼켰지만, 강호수는 짐작한다는 둣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 다.

“윤슬 씨가 받는 중압감이 심해진다면 언제라도 이 일은 그만뒤도 좋습 니다. 다론 사람돌의 안식도 중요하지 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윤슬 씨 본인 이니까요.”

“중압감이 심해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가벼워져요. 감정이 하나둘씩 사라져서 가공은 내가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 때도 있어 요 ”

사람이 아니라 괴물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인간이라는 존재 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기분.

“강호수, 뒤하느라 안 나오고 처박혀서“'

윤슬이 잠시 생각에 빠져 침묵할 무렵, 벌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 큰 목소 리로 말을 했다.

“어, 죄송합니다. 상담 중인 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커다란 남자는 점잖게 사과의 말울 내별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뭔가 휘 물아치고 사라진 기분에 윤슬이 정신을 차렸다.

“약속 있으셨나 봐요.”

“그냥 친구랑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딱히 약속이랄 것도 없죠.”

그렇다고는 해도 이 이상 뭉개고 암아 더 나늘 이야기는 없었다.

“상담은 사양이라고 했는데, 결국 상담이 되어버렸네요.”

게다가 강호수에게 말려 뭔가 주절거린 기분도 들고. 윤슬이 살짝 미간 을 찌푸리며 자책했다. 

“윤슬 씨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공짜 상담의 문은활짝 열려있으니 언 제라도 부담 갖지 말고 찾아오세요.”

“상담하자는 말이 오히려 부담인데요.”

딱 잘라 거절한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니, 왠지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는 남자가 된 기분이라 두근 두근하네요.”

강호수의 헛소리가 느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일 넌 넘게 얼굴을본 탓 이겠지. 윤슬은 혀를 차며 상담실 문울 열었다. 문 옆의 벽에 기대어 서 있 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오는 윤슬을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이라면 바로 나오실 필요 없었는데.”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큰 키와 커다란 체구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외모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모델이나 배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날카롭고 사나운 기세가 느껴져 몸 쓰는 일을 하지는 않나 생각되기도 했다. 의외로 평범한 회사원일 수도 있고. 남 자의 매끈한 얼굴을 을려다보던 윤슬이 고개를 내저었다.

상담울 방해한 게 아니었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는데. 그게 환자가 아니 라는 변명처럼 들렸는지 남자는 애매한 얼굴로 웃울뿐이었다. 남자의 얼 굴에서 시선을 떼어낸 윤슬이 남자를 지나쳐 병원을 빠져 나왔다.

“나 때문에 그냥 간 거나? 마지막 상담자.”

“아, 상담자는 아니고.”

지글지글 삼겹살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소주 한 잔을 먼저 둘이켠 호수 가 크, 하고 소리를 냈다.

“상담자는 맞는데 이제 내 상담자는 아니고. 처음엔 상담받으러 온 사람 이었는데 지금은 상담이 아니라 다론 볼일이 있어서 찾아오는 뭐 그런 사 람이 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호수를 태준이 타박했다.

“난 또 나 때문에 그냥 간 건가 했네. 아니라면 다행이고.”

“다행은 아냐. 말문 한 번 열게 하기가 꽤나 어려운 사람이거든. 엄청나 게 방어적이라서 웬만한 상담자 상대하는 것보다 어려워. 마음울 열 준비 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밖에서 두드리고 쇼를 해도 문을 열어주 지 않으니까.”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을리고 집게로 삼겹살을 뒤집으며 태준이 새삼스 럽 다는 듯 대꾸했다.

“어차피 요즘 사람들은 다 마음에 병이 있어. 그 병이 커져 밖으로드러 나면서 혼히들 말하는 진상이 되는 거지. 옛날에 비해서 왜 미친놈이 많아 진 플 알아? 세상이 망하기 직전이라. 세상 살기가 팍팍해져서 그래.”

무슨 종말론자, 비관론자같이 말한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너 도 상담받으라고 하니 까.”

호수가 낄낄거리며 소주를 한 잔 더 들이켰다.

“고기 먹으면서 마셔. 속 버린다.”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건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 런데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면 괴물이라고 여기고 손가락질을 하 고 피하지. 그러면 능력을 가진 사람조차도 본인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 는 거야. 그게 참……안타깝더라.”

사회가 평 범하지 않은 사람들울 쳐내잖아. 부족한 사람이든. 뛰어난 사 랑이든 두드러지면 일단 안 좋은 시선을 받으니까. 세상이 발전하면서 사 람은 다양해져 가는데, 평범하기를 고집하는 사회가 병자를 만드는 거지.”

길쭉한 삼겹살을 가위로 큼직큼직하게 썬 태준이 한 조각을 집어 호수 의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건 그 상담자인 둣 상담자 아닌 상담자 같은 사람 을 말하는 건가.”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네 말장난은 참을드하고 후져.”

“그게 매력이지.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내 매력에 빠지지는 말고.

호수는 대답 대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커다랄게 싼 쌈을 입에 쑤셔 넣 고 씹는 호수를 보던 태준이 고기를 집어 먹으며 계속 이야기하라는 시늉 을 했다.

“아냐, 다른 사람한테 할 얘기는 아니야. 그냥……그 사람올 보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담자들에게 과하게 신경을 쓰는 호수를 알기에 태준은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도 멀쩡하게 생겼던데. 더 이상 상담을 안 받는 거면 괜찮아진 건 가? 아니면 병원 옮겼어?”

“딱히 괜찮고 안 괜찮고의 문제는 아니고. 대부분이 그렇듯이 대화 상대 가 필요한 사람이었지.”

“상담도 안 하면서, 일반인이 정신과 의사랑 엮일 게 뭐가 있어?”

“그건……”

뭔가 말을 하려던 호수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냐, 하고 고개를 내저 으며 관심을 돌리려는 둣 잔에 소주를 채워주는 것을 태준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그나저 나 너 요큼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얼굴이 안 좋다.”

“난 항상 잘생겨서, 그건 내게 전혀 필요 없는 걱정이다. 일주일 밤을 새 워도 내 얼굴은 변함없어.”

“항상 느끼는 거지만, 넌 어찜 헛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태준의 진지한 대꾸에 호수가 상추를 집어 던졌다. 어깨를 맞고 떨어진 상추를 날름 받아 태준이 고기를 싸먹었다.

“그래. 그래. 네 면상 잘난 거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거 믿고 날 새워 술 퍼마시지 말고, 푹 자. 이젠 늙어서 하롯방 새는 것도 힘들더라.”

“그거야 책상 앞의 양복쟁이나그렇지. 난 아직도 한창때야. 얼굴이면 얼 굴, 옴이면 옴, 체력이면 체력, 빠지는 것이 없지.”

호수는 작게 한승을 내쉬었다. 접시에 놓인 고기를 것가락으로 꾹꾹 지 르던 호수가 뜸울 들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직도……악몽 꾸나?”

호수의 을음에 태준은 낯빛을 바꾸며 침묵했다. 소주병을 집어 잔 위에 기울이다 병이 비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태준이 소주 한 병을 추가했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소주를 따서 물컵에 콸콸 따론 태준은 그것을 물처럼 둘이 켰다.

“처용에 널 말려야했어.”

“그랬으면 우리 세 식구 길바닥에 나앉아서 구걸하며 살았겠지.”

“나중에라도, 조금 힘들더라도 널 빼 왔어야 했어.”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 한다고 손 털고 나을 수 있는 바닥도 아니었어. 괜한소리 하지 말고 고기나 먹어.”

“……너한테 미안하다.”

호수의 사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태준은 인상울 찌푸렸다.

어릴 때 뒷골목에 발을 둘여 버는 족족 생활비와 호수의 등록금에 쏟아 부었다. 그때는 그것을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울론 지금도 그리 생각 하지 않지만, 호수의 생각은 다론 모양이었다. 태준은 그런 호수의 죄책감 이 싫었다. 그것이 마치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말 하는 것처럼 돌려 태준은 대답 대신 무시를 택했다.

“네가……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널 그렇게 만든 것 같 아서……”

“그만해. 난 머리 좋은 너한테 일찍 투자해둔 거야. 나중에 내가 칼 맞고 병신 되면, 그때 모론 척하지나 마.”

“말을 해도, 재수 없게.”

“언제 나자빠질지 모르는 바닥인데, 하루에 한 번씩은 상기를 시켜야지. 그래야 나중에라도 발뺌을 안 하지.”

타기 시작하는 고기를 모아 빈 그릇 위로 옮겨놓은 태준이 불판을 갈아 달라며 종업원을 불렀다. 길쭉길쭉한 삼겹살을 깨끗한 불판 위에 을리며, 

윤슬은 집으로 돌아와 가방울 던져놓고, 침대에 드러누워 정리해온 통장 을 펴 보았다. 일 넌 사이에 모은 돈치고는 꽤나 많았다. 이렇게 벌어본 적 이 있나 싶을 정도의 돈이었다. 이제껏 글울 써서 모은 돈보다도 많은 것 울 보면, 강호수의 말처럼 축복받은 능력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한번에 천만 원.

과한 돈이라고 생각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사용하고, 그 대가로 돈까지 받는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특별히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공돈을 뜯어내는 기분도 들었다. 내켜 하지 않는 윤슬에게 강호수는 단호히 말했다.

“적은 돈을 받는다면, 상대도 가법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불안해 하겠죠. 내 비밀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가는 건 아닐까. 겨우 이 정도의 돈처럼, 내 비밀 또한 가볍게 춰급되는 것은아닐까. 대가가 클수록 거래도 크게 느껴지고, 거기에 더해 거래를 대하는 마음도 무거워지는 겁니다. 가치를 낮추지 말아요. 윤슬 씨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지 을라도, 윤슬 씨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 니다. 상대에게는 그 액수를 대가로 치를 만큼 절실한 일이라는 걸 항상 상기해요.

강호수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신이 대단한 능력자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둘곤 했다. 핏줄이었던 형도 자신을 괴물처럼 보는데. 강호수는그 렇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윤슬은 그 점에 대해 강호수에게 감사했 다.

보란 둣이 강호수의 악몽 속에 들어가 확인까지 시켰욤에도, 강호수는 윤슬울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두려워하고 당황했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윤슬울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윤슬의 저주를 축복이 라고 말해주었다. 을론 윤슬은 여전히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호수의 제안울 받아들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축복이라 말해주는 강호수의 제안에, 그의 말을 따르면 축복의 흥내 정도 는 낼 수 있지 않울까 하는 생각이 돌었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윤슬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능력이 타인에게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 이 아니라, 고맙고 은혜로운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그들에 게 도움이 되고 있긴 할까.

홀로 이겨내지 못하고 침식되어버릴 악몽 속의 구원자.

강호수는 윤슬에게 그리 말했다. 구원자. 웃기지도 않을 소리지. 새삼스 럽게 떠을린 윤슬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도움이 되었다 한들, 괴물은 여 전히 괴물일 텐데.

생각에 빠져있던 윤슬은 요란한 벨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통장을 침대 아래로 던지듯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다. 상대방도 내켜서 전화를 건 것온 아닐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전화를 받을 마음이 생겼다.

“여보세요.”

「글쓰는 중이었니?」

“아니, 그냥 누워있어.”

휴대폰 너머에서 한숨이 들리는 것 같아. 윤슬은 뒤늦게 “나갔다 왔어.” 하고 덧붙였다.

「모레 아버지 생신인 거 안 잊어버렸지?」

“어, 알아.”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자.」

권하고 있는 것은 본인이 면서, 그 목소리 안에 내켜 하지 않는 감정이 담 겨 있었다. 형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윤슬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버지가 너 집에 너무 얼굴 안 비친다고 서운해하시더라. 한 달에 한 두 번은 아버지 찾아봬.」

“어.”

「아니면 전화라도 자주 해드리든지.」

“형은?”

「뭐?」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타박울 가법게 휼려보내며 묻자. 재영이 이해하 지 못하고 되물었다.

“형도 나 보고 싶어?”

독립을 한 뒤로 집에 가는 것이 점차 뜸해졌다. 처음에는 매주 집에 다녀 오다가 점차 간격이 벌어져 이제는 두어 달에 한 번, 훅은 집에 무슨 일이 생겼울 때에나 겨우 찾아가는 식이었다.

아버지는 서운해하신다며, 형도 그러냐고. 윤슬의 물음에 재영은 잠시 침목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당연히 걱정되지0

“걱정하는 거 말고. 나 보고 싶냐고. 형도 내가 자주 집에 갔으면 좋겠 어.”

「……그래.」

옆드려 절 받는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나온 대꾸에 윤슬은 날카롭게 웃 음을 별어냈다.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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