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바다 밑에 있는 화산. 그곳에 있는 통로를 따라서 왔는데 작은 정원이 눈앞에 있었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며 싱그러운 색의 풀들이 자라나는 광경. 그곳에서 뛰어노는 영수들.
“어떻게 이런 장소가 여기에…….”
[자연의 신비이지. 조금 힘을 쓴 것도 있지만. 이 통로는 숲이랑 이어져 있단다.]
“숲이라고 하시면, 그 숲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대숲. 그 숲 등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저 숲이라 불리는 그곳.]
“그래서 이렇게…….”
공기가, 바람이 달랐다. 폐부를 씻어내는 바람이 불고 싱그러운 새싹은 생명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조금은 변명 같았지만, 아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오히려 네게 더 좋게 되었을 수도.]
페루스님의 등장으로 정원의 중심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자세를 편히 하거라.]
페루스님의 말에 따라서 정원의 가운데 앉아서 편하게 있자 입을 벌리라는 말씀이 들렸다.
역동적인 움직임이 보이는 빛나는 구슬이 슬며시 날아오며 입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편하게 집중하거라. 가두려고 하지 말거라. 그저 기운을 느끼는 것에만 신경을 쓰거라.]
기운이 느껴지자 자동 반사처럼 기운을 제어하고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을 멈추었다.
신기한 맛이 혀를 타고 내려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상쾌하고 뜨겁고 텁텁하다가 깊은 맛.
목을 타고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기묘한 느낌.
전신이 뜨겁다가 차가워지고 답답하다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찾아오는 안온함.
‘……’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평안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 속으로 끊임없이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간다.
*
[여러모로 신기한 인간이네. 승천자가 항상 이러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꽤 신기한 인간이죠? 욕심도 내려놓을 줄 알고.]
뛰놀던 영수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두 영수와 하나의 인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불타오르고 젖고 돌이 되었다가 공중을 뜨던 한 인간은 검고 검은 공간에 태아처럼 누워있었다.
[저걸 영수가 아니라 인간이 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는데. 위험자일지도?]
[아닐걸요? 확고한 목표가 있는 녀석이라. 아마 튀어나올 거예요.]
[저렇게 깊이 들어가는 놈이?]
페루스의 말처럼, 점차 검기만 하던 공간에 빛이 나는 작은 점들이 무수히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5계 인간의 특징인 것 같은데,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모르겠네요. 그래도 나올 거예요. 제 친구니까요.]
그 말에 고민하던 페루스가 놀라는 표정으로 아프를 바라보았다.
[친구? 친구라고? 너의?]
[네. 제 친구입니다.]
[진짜 지랄 났네……. 나와야 하는데 말이지.]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점차 공간이 일그러지듯, 유리되는 것처럼 변화하고 있었다.
*
깊이. 더욱 깊이. 안온함을 느끼며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캄캄하기만 하던 곳에 빛이 보인다.
‘와…. 미쳤네.’
빛나는 수많은 점이 모여서 띠를 이루기도 하고 원을 이루기도 한다.
그 점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태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저거…. 뭐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그 하나의 점이 확대되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빛나는 별들보다는 조금 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 갈무리하고 있는 건가? 폭발 직전처럼?’
처음 보는 별. 아니 빛나는 무언가.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 느껴진다.
‘마치…. 나처럼? 그래! 나!’
그 별이 나인 것을 깨닫는 순간 별이 뒤로 감기를 맹렬하게 시작한 듯이 모습이 순식간에 변한다.
‘가스들 같은 건가?’
기체 덩어리들이 보였다. 여러 기체가 모이면서 격렬한 반응을 보이더니 엄청난 빛과 열이 나온 후에 별이 되었다.
무엇도 될 것 같았던 별은 순식간에 차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되감겨지더니 별이 되었다.
빠른 속도로 회전을 시작하더니 옆의 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두 번의 껍질을 벗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난 후에 진실로 그 별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이렇게나 많구나. 이렇게나 크구나.’
자신이 얼마나 빛이 나는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검은 공간에 수많은 다른 별들이 보였다.
‘이게 나의 근원인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머리로 그려진다. 저 별이 하는 말이. 저 별이 그리는 그림이.
‘페루스님께서도 삶이 생명에 더해진다고 했지.’
그 뜬구름 같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안 돼. 약속이 있어.’
약속 하나를 떠올린 순간. 목표가 떠올랐고 순식간에 몸이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별이 마치 자신에게 잘했다는 듯이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웃기는’
내려가던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올라가던 몸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이 떠지고 경악을 표하는 페루스님의 표정과 흡족해하는 아프가 눈에 들어온다.
‘뭐가 달’
생각이 끊어질 정도의 변화. 우선 오러가 정순해졌다. 마치 자연의 마나처럼.
‘그런데 조금 달라. 자연의 마나가 아니라. 내 마나인가.’
자유로이 몸을 흘러 다니는 마나 하나하나에 자신이 느껴졌다. 재능이 느껴졌다.
변한 부분을 세세하고 확인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페루스님.”
[어디까지 갔다가 온 것이냐.]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이었지만, 자신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의 근원까지입니다.”
그 말에 잠시간 말이 없던 페루스님은 이내 호탕하게 웃기 시작하셨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구나.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그 것이 너의 근원이었나 보구나.]
“보신 겁니까?”
왠지 모를 거부감이 살짝 든다. 아니, 위화감이라고 불러야 하나. 발가벗은 몸을 본 것 같은 느낌.
[누군가의 근원을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엄청난 녀석을 볼 수 있었지. 멋지더구나.]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정수를 먹는다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너이고.]
[역시다! 나는 네가 올 줄 알고 있었다!]
아프와 페루스님에게 근원에 대한 설명을 다 들어갈 때쯤 정원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페루스님?”
이곳까지 느껴질 진동이라는 것에 긴장했지만 페루스님은 오히려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하아. 이 녀석들이. 사고뭉치랑 무슨 짓을 또 하는 건지. 타거라.]
“네?”
[너라면 괜찮다. 자신의 근원을 마주한 이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탁월한 승차감. 아니, 안락함이었다. 은은하게 엉덩이가 따듯하게 지펴진다.
[다리에 힘을 주도록. 생각보다 빠를 테니까.]
단 한걸음에 불길이 치솟으면서 달리기 시작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따듯하다. 진짜 최곤데.’
바람이 거세게 불어옴에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 그 자체인 페루스님이었기의 바람이 오히려 불을 키워주기만 했다.
따듯한 엉덩이. 흔들림 없는 등. 그저 다리에 힘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내리고 싶지가 않잖아.’
너무 짧았다. 순식간에 도착한 어린 영수들이 노는 그곳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파인 벽들을 제외하고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치 터질 것 같은 용암들이었다.
“저…. 저거? 혹시 폭발하는 건가요?”
[이미 한 번 폭발한 것 같구나. 그러니 그렇게도 울리지. 정말.]
“헤헤. 페루스님 오셨어요?”
[하아. 너는 정말. 도대체 왜 너를 아끼시는지 모르겠다.]
“태생적으로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요?”
‘저런 이미지였다고? 그 젬마가?’
좌중을 압도하던 카리스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철없는 어린아이.
그 모습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은 페루스님을 보면서 신기했다.
‘젬마를 아끼는 분이 도대체 누구길래?’
약간의 분노가 담긴 페루스님의 앞 발구름에 용암이 위로 솟구치면서 폭발한다.
“우와. 역시 저희가 한 거랑은 비교가 안 되네요.”
화산을 폭발시키려는 장난을 치기 위해서는 저 정도의 뻔뻔함이 있어야 하는 듯했다.
어린 영수들도 젬마의 주변으로 몰리면서 신나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페루스님.
[다시는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휴.]
“젬마를 아끼는 존재가 엄청난 건가요?”
[응? 아. 그렇지. 정말 젬마를 왜 선택하셨는지 모를 정도로 기품이 넘치시는 분이지.]
“저는 그런 분이 딱! 어렸을 때부터!”
[세계수는 우리 영왕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하단다. 그리고 그런 세계수를 돌보시는 분이시지.]
“진짜 왜 그러셨을까요.”
[내가 지옥에 안 가면 누가 갈까 이런 마음이셨나.]
그때 이글거리는 화염을 뽐내고 있는 진흙이 얼굴을 스쳐서 지나간다. 피하지 않았으면 맞았다.
“야!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난 영수가 아니라고!”
[더 좋은 냄새가 난다!]
[너도 같이 놀자!]
[더더 깊어졌다! 놀자! 놀자!]
[젬마보다 더 진하다!]
[조금 놀아주거라. 아마도 너 때문인 듯하니.]
본래도 템포가 높았던 어린 영수들이 지금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더 영향을 받는 건가?’
어차피 확인해야 했을 일이고, 이곳에서 영수들과 뛰어노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기에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다.
“진흙 던진 놈. 너부터다!”
풍도를 걸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달라진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길을 보고 흐름을 보고 걸었다면 이제는 몸이 알고 있었다. 아니 바람과 몸이 다르지 않았다.
진흙 던진 놈을 용암에 빠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어린 영수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놀았다.
*
“진짜 괴물이구나. 인간 맞아?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지친 영수들이 잠이 들고 용암에 빠져있게 되자 공동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사고뭉치에 철없던 젬마는 어디 가고 다시 도도한 젬마가 나타났다.
“페루스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왔죠.”
확실히 사고만 일으키는 존재는 아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바로 정답을 맞혔다.
“페루스님! 설마! 정수를 주신 건가요?”
[그럴만한 일을 했으니 받아간 것일 뿐이다.]
“인간이 그걸 받고도 이렇게 금방 돌아왔다구요? 저렇게 변한 걸 보면 기운만 흡수한 게 아닌데.”
그 이후로 젬마에게 괴물이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영수들과 놀아주고 괴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동안 약속된 시간이 찾아왔다.
불의 신전, 그것도 본단에 와서 영수들의 왕을 보고 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세탄타님.
하지만 누구도 그를 불쌍해하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초대해 준다는 말에 희희낙락하셨다.
그 모습에 조금은 경직되어있었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확실히 나이를 괜히 먹은 게 아니란 말이지.’
환기된 기분으로 공동의 중간에 섰다. 이제 적진의 한 가운데로 갈 시간이었다.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일지 모른다. 너는 마법사. 그것도 괴물이 된 마법사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저 불길이 아니었다. 조금 특이했다. 푸른색과 자주색이 섞인 묘한 불길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네가 돌아와야 아이들이랑 놀아주니 그럴 뿐이다. 그럼.]
페루스님의 걱정 어린 말씀과 함께 신비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그 불길은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엘프, 영수를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