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손위에서 생겨난 마법진이 공동을 가득 채우자 그저 벽으로 보이던 곳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오! 신기한데? 뭐가 이렇게 방이 많아?”
마법을 펼치고서도 놀라는 젬마의 표정이 웃기기도 했다.
“애초에 이곳을 먼저 온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분명히 소환했을 당시에 마법사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준비했지만.
눈앞에서 놀란 눈과 신기함으로 무장한 저 엘프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그래도 다행이긴 하네. 근데 마법도 할 줄 알았던 건가.’
아공간에서 주먹보다 조금 작은 깨끗한 원형의 돌을 꺼냈다.
“이건 뭐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에첸트로스님께서 주신 거예요. 위치 파악기라고 해야 하나?”
신체(神體)가 있는 장소는 모든 신전에서 극비에 해당했다. 심지어 추기경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7성 정도 된다면 통신구 정도는 있으리라는 예상으로 이곳으로 먼저 온 것이었다.
다양한 방 중 가장 깨끗하고 경건하기 그지없는 방에 예상대로 통신구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통신구라기 보다는, 매개체라고 해야 하나?’
신의 모든 행위에는 신성이 소모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거기에 매개체가 있다면 훨씬 효율이 높아진다.
7성은 그 자체로도 매개체이기는 했지만, 분명 다른 매개체가 있을 거라고 예상한 학장님.
‘의식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
학장님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신앙와 의식에 대한 말들이었다.
대략 의식이 더해져야 권위가 뚜렷해지고 그것이 더 확고한 신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학장님이 사뭇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경건한 그 장소에 돌을 살짝 던졌다.
위에서 떨어지다 말고 중간에 멈추더니 빛이 나기 시작하는 돌.
‘진짜 돌이었던 것 같은데, 드래곤은 다 이런 건가.’
뭔가를 더 받아야 한다고 말을 했다가 [포이드]를 받았으면 일을 하라고 면박을 주시던 리퀴두스님.
그 말에 주변에 있던 바닥이 떠오르고 원형 돌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 번의 핑거 스냅. 그것만으로 돌덩이였던 것이 위치 파악기가 되는데 충분했다.
“된 건가?”
[됐다! 가지고 가서 불의 신전 본단으로 가면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쉬운 방법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불의 신전 본단이라면, 페루스님을 뵈러 가는구나! 좋네! 가자!”
분명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고고하고 범접하기 힘든 인상이었는데,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그래도 챙길 건 챙기고 가야죠. 그리고 아프도.”
[알았다! 근데 테키나는 싫어할 것 같다!]
“뭐.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
바람이 되어 사라진 아프와 아니마를 뒤로하고 열린 공간에서 이것저것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물건들을 고를 때, 젬마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아니 젬마가 거의 다 한 것 같았다.
“저건 아니야. 저것도, 이건 괜찮겠다.”
확실히 젬마는 좀 달랐다. 감각이 전혀 다른 듯했다. 묘한 감각을 느끼는 자신과 달랐다.
에트라의 신성이나 손길이 닿은 것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젬마를 신기하게 바라보자 머쓱하게 웃는 젬마.
“잡스러운 기운을 느끼는 게 민감할 뿐이니까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
“그런데 절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아니셨나요?”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그 질문에 조금 움찔하는 젬마.
“아니. 뭐 싫어하는 건 아니고, 어떤 인간인지 보는 거지.”
“저를 미리 알고 계셨나요?”
“흐음. 그냥? 존재는 알고 있지. 승천자라는 것도. 들은 말도 있고.”
승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았는데.
“엘프들도 알게 되는 건가요?”
“그럼. 당연히 듣지. 진짜 드물기는 한데, 우리가 인도자가 되기도 하니까.”
“네?”
“설마 승천자가 인간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머리를 뭔가로 맞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하긴, 인간들만 있던 세상에서 왔다고 했지.”
뭐라고 하셨지만,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라 잠시 어벙했었다.
“그러게요. 왜 저는 인간만을 생각했을까요.”
생명체, 이종족. 다른 종족과 생명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뒤덮는다.
순식간? 아니, 하루? 잠시 정신을 잃고 난 후에 보이는 표정.
“뭐냐. 뭐가 그리 특별했다고 그래? 어이가 없네?”
“네?”
“하? 그리고 모르네?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하여간 인간들은 특이하단 말이지. 이래서인가….”
들리지 않은 뒷말은 해주지 않았지만, 왜 놀랐는지는 설명을 해준 젬마.
“방식이 완전히 다르네요. 그리고 불가능한 방법이기도 하고.”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사는 엘프들에게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깨달은 너를 보고 놀란 거지. 진짜 신기한 종자라니까.”
[뭐가 신기한 종자냐!]
“왔어? 근데 여기서 불의 신전…. 아.”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에 참 타이밍도 좋게 바닥에 원형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페루스님은 여전하시구나? 가자!”
원의 안에 들어가자 불길이 치솟으면서 시야가 변하는 것이 보인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내 덕에 고생하는구나.]
보고 또 봐도 거대한 수사슴의 모습은 멋있는 것을 넘어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더 도와주고 싶지만, 미안하구나. 그리고 사고뭉치를 하나 데리고 왔구나?]
“페…페루스님?”
[갑자기 조신한 척을 한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얼굴이 새빨개지는데도 그것이 부끄러워하는 청초한 미녀로 보이는 건, 좀 부러웠다.
‘저렇게 태어나면 어떤 느낌이려나.’
조금 대화해 보려는데, 갑자기 어린 영수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불장난하러 왔나!]
[오랜만이다! 왜 이렇게 안 왔어!]
[좋아! 놀자 놀자!]
어린 영수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페루스님이 이제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의 젬마에게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가서 같이 놀아줘야 할 것 같은데?]
황급히 도망치는 젬마가 왜 조금이지만 신나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 쟤는 언제 크려나. 참 고민이 많으시겠어.]
“네? 젬마의 부모님도 아시는 건가요?”
[어미 아비도 알기는 하지. 다른 분도 알고. 그나저나 생각보다 훨씬 잘 해주었더구나.]
“조금 급하게 하느라 꼬인 감이 없잖아 있지만요.”
[어떻게 했어도 널 원했을 것 같더구나. 이미 관심을 갖고 있었어.]
“네? 저한테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생각나는 것은 알리오츠의 일밖에 없었다.
‘몽상가가 그렇게나 관심의 대상이었나?’
[아마도 뭔가를 듣거나 찾은 것이 있는 것 같더구나. 승천자에 대해서 말이지.]
“네? 승천자에 대해서요?”
[확실히 아는 것은 아닌 것 같더구나. 분명히 다 없앤 것 같은데, 기록이 꼭 남아있단 말이지.]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말을 이어가기에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지적 생명체가 생각하고 만들어 낸 최흉이자 최악의 숭배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너무 가라앉은 목소리, 은은한 분노가 느껴지는 기세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아니면 타인의 생명을 공양하는 건가요?”
[그래. 하나의 생명을. 온전히 바치는 것. 꼭 등장하는 거지. 그런데 그 생명에도 차등이 있지.]
“차등…. 인가요?”
[생명이라는 것. 그 자체로도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단다.]
조금은 거북한 말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할수록.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가 더해지거나 아니면 삶이 더해지는 경우지. 역경을 넘어선 이의 생명.]
“플러스가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래. 그리고 그중 승천자 만큼이나 역경을 넘어선 이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지만, 인간들 사이에는 승천자라는 단어조차 없는 듯했는데요.”
[맞단다. 고대에는 알았지만, 그 사건 이후에는 사라졌지. 하지만 기록이라는 건 끊임없이 나타나더구나.]
고대의 기록. 그리고 뜬금없이 나타나는 강자에 대해서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알고. 배경이 확실한 거 아니었어요?”
[몽상가의 후예라는 점을 아마 이상하게 여긴 것 같구나. 너무 다르기도 하고, 사실 네가 몽상가의 후예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다르거든.]
하지만 확신은 못 하는 정도라고 했다. 맞으면 너무 좋고 아니어도 괜찮은 그런 입장.
[게다가 너만한 경지에 이른 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삶이 너의 생명에 더해지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에는 이 세상에 나타나는 그 순간, 알리오츠를 만난 순간부터 표적이었다는 말씀이네요.”
[천천히 공략하자는 대상에서 반드시 지금 당장으로 바뀐 정도랄까?]
“리퀴두스님이 아니었다면 엄청 고생할 뻔했네요. 이 세상도 복잡하네요.”
[인간은 짧게 타오르는 만큼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인생을 사는 거지. 어떨 때는 놀랄 정도로 말이지.]
“왠지 그 놀랄 정도가 저인 거 같은 건 느낌인 거죠?”
[하하하! 그렇게 느끼면 그런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페루스님도.”
[이 정도 도와주면 된 것 아니겠느냐. 거기에 직통으로 보내주기도 하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뭐라도 도와주실 것 같은데.’
“페루스님의 부탁을 잘, 빠르게 해결했으니 소소한 상 정도는.”
[아프가 주지 않더냐?]
“네? 뭐를 말씀하시는 건지.”
[허. 이놈의 자식을. 아프!]
그 외침에 홀연히 나타나는 아프였다. 마치 소환당하듯 나타났다.
[아프야. 내가 준 정수는 어디에 팔아먹었을까?]
[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페루스님께서 옆에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지금 주려고 했습니다!]
‘정수! 까맣게 잊고 있었어! 진짜 멍청한가?’
솔직히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아서 잊은 것도 있었다. 정수라고 해도 자신의 오러는 거의 가득한 상태.
[말을 잘하니 넘어가 주마. 따라오거라.]
다만 페루스님께서 옆에 있으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서 순순히 따라갔다.
어린 영수들이 노는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는 페루스님. 천천히 걷는 걸음으로 1시간은 걸렸다.
해저에 있는 화산인데도 신기하게 상쾌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원하기까지 한.
[확실히 바람에 민감하기는 하구나. 벌써 느끼는 것을 보니. 조금 빠르게 갈까?]
똑같은 걸음으로 걷는데 순식간에 앞으로 나가는 페루스님을 따라잡기 위해서 다리에 힘을 준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시원한 바람이. 청량하고 깨끗한 바람이 더 강해지기 시작한다.
곧이어 나타난 광경은 방 위에 호수가 있던 리퀴두스님의 레어만큼이나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아름답지 않느냐? 넌 또 다르겠구나.]
페루스님의 말씀대로 아름답고 신비하며 정신을 못 차릴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