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해상(海商). 두 세력의 공백을 파고든 신흥 세력은 기존의 자잘한 해상이 통일된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직까지는 모든 세력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해상을 통일한 알카이드가 총수를 맡으며 대부분의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그 밑에 있는 두 대행수도 얕볼 수만은 없었다.
그중에서 여성으로 대행수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기로 한 사람뿐이었고, 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그 누구도 이 안의 상황은 알 수 없을 테니까요.”
호위무사가 여전히 있기는 했지만, 서서히 몸을 풀면서 감았던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치 창사인 것 같이 창을 들고 경갑을 입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눈에 가득 담긴다.
숨겨진 흑색거성의 군에서도 첩보를 담당하는 군이 있었고, 눈앞의 대행수가 그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다행이네요. 도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오히려 범님께서 홀로 여기에 당도한 게 신기한데요? 그리고 다행이라뇨, 계획이죠.”
“솔직히 반반이라고 생각했는데, 믿어주셨네요?”
“뭐. 오늘 하루를 날리는 소소한 정도인데요. 잘 되면 돌아갈 수 있는 거고. 근데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 안에는 욕심도 보였다.
“잘? 배를 타고? 열심히?”
“하. 그렇게 편하게 알려주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아니. 알려주고 싶어도 일반인은 할 수 없는 거라.”
그제야 수긍하는 여성, 다른 의미로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황하더니 인사를 한다.
“위신을 베어낸 영웅을 뵙습니다. 흑군 첩보대 독립작전과 테키나 인사드립니다.”
손이 오그라드는 별명이었다. 그래도 신색을 유지한 채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학장님께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학장님께 듣기는 했지만, 정말 해상의 총수가 7성 중 한 명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다는 뜻이겠죠.”
“확실히 위신이라는 건 어렵네요. 가늠이 잘 안 된다고 할까.”
“그렇기에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요. 애초에 격랑을 담당한 이유가 시일은 맞추려 하는 거니까요. 조금 촉박했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답니다.”
3일의 격랑이 지나고 4일째가 되는 날 해상은 본격적으로 상행을 시작한다.
3일 간격으로 찾아오는 격랑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잠잠해지는 순간 나가야 4일의 항해를 할 수 있기 때문.
본단을 비울 수 없기에 두 대행수가 나누어가며 상행을 나간다. 그 기회를 양보한 것.
‘양보했다기보다 의도적으로 빼앗긴 거지만.’
본래라면 평판을 위해서도 절대 빼앗기면 안 되는 기회였으나, 이제 상관이 없었다.
‘학장님도 꽤 무리한 거라고 했지. 해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거라고.’
떠나기 전, 매번 밤에 찾아와 강의 아닌 강의를 해주고 가신 학장님.
‘아카데미의 학장이 군의 총수라는 건 또 처음 알았지만.’
왜 그렇게도 학장의 자리가 위엄 있는지 다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죄송한 말이지만, 범님이 사건을 일으키는 순간 저희는 도망가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쪽이 훨씬 수월하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싹이 피었다면서요? 직접 가르치기도 하셨다면서, 어떤 것 같으세요?”
군의 총수라고 하지만, 해상을 포기하는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전 지역에 나가 있는 독립작전과의 요원의 판단이 가장 우선이 되기 때문.
하지만, 눈앞에 있는 테키나의 성은 다름 아닌 독투스. 세상은 언제나 보이는 진실이 다가 아니었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싹은 자라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이놈의 핏줄은 왜 그리도 군주를 싫어하는지.”
“제 눈앞에 계신 분도 군주를 싫어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학장님의 설명으로는 계략과 음모에 꽂힌 인물이라고 들었다.
“뭐. 저도 어쩔 수 없는 독투스 가문이라는 거겠죠. 전 그림자가 그렇게도 좋더라구요. 안 그래도 이번에 들어가길 기대하고 있다구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까지 하룻밤이 걸린 것으로 말을 맞추었다.
총수를 만나게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테키나의 호위가 자신을 마스터라고 설명했기에 더욱 그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해상을 책임지고 있는 총수입니다.”
‘자신은 이름을 버렸다고 했지. 그러면서 정당하게 이름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고.’
“말로만 듣던 해상의 총수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서탑 5층 지기였던 무스라고 합니다.”
“층지기! 말로만 듣던 층지기를 볼 줄이야.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화려한 식사가 준비되어있는 자리에는 두 명의 대행수와 총수가 자리했다.
층지기라는 말이 나오자 아쉬워하는 다른 대행수를 보니, 확실히 층지기라는 것이 잘 먹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한 이야기로 식사 자리를 이어가는 총수가 식사가 끝날 때 쯤 질문을 던졌다.
“제가 듣기로는 층지기는 탑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기로 스스로 맹세한 이들만이 그 자리에 임명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탑을 위해 평생을 살기로 했었지요. 고아나 다름없는 저를 거두어준 탑이니까요. 지금도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뭐든 배워 놓은 것이 쓰일 일이 있다면서, 기본적인 연기를 가르쳐준 량에게 감사했다.
“그런 편치 않은 마음을 가지고서도 탑을 나온 이유를 혹시 들을 수 있을까요? 괜찮다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공감하면서도 부드럽고 상냥한 총수의 말은 절로 마음을 여는 힘이 있는 듯했다.
“고아인 줄 알았던 제게 가족이, 그것도 살아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학장님이 준비해준 이야기를 읊자 대행수는 더욱 아쉬워했고 총수에게서도 의심의 빛이 줄어들었다.
‘게대가 내 로브를 가져가서 확인해 봤을 테니까. 반은 먹고 들어간 거지.’
문양만을 새겨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의심이 처음부터 적었을 것이다.
“설마. 무스님께서는 탈교인의 후손이십니까?”
놀라는 총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 끄덕이는 두 사람이었다.
“혹여 어느 신전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 도시라도 알고 계신다면 이번에 나가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굉장히 호의적으로 나오는 총수였다. 마스터일 뿐 아니라 층지기였으니 당연할 만했다.
“아닙니다.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다만, 상행에 끼워주시기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지금 상황으로 가시면 언제 찾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길을 가야 하시는 것 아니시겠습니까.”
호의 가득한 총수의 말. 세간의 평가 그대로의 모습을 보였다.
‘자비로운 상인. 상인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녀를 표현하는데 그 말밖에는 없다.’
흑색거성으로 해상을 통해서 온 모든 인물이 하나같이 그녀를 칭송했다.
‘이제는 그 모든 사람이 검사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는 무예말고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쓰이신다면 저희 선원들의 무예를 조금만 봐주시면 됩니다.”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혀 부담이 가지 않는, 철저히 배려하는 대화법.
절박한 이에게는 은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가족을 찾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대행수가 이번 상행에는 꼭 나가겠구나. 진짜 머리 좋은 인간들은 몇 개를 생각하는 건지.’
지금 말하는 모든 배경은 학장님이 준비해준 방법이자 계획이었다.
테키나의 손이 닿았다는 것을 어제야 알았고, 오늘 식사에서 진행되는 상황이 너무 익숙했다.
‘테키나가 설명해준 그대로 흘러가는구나. 알카이드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닐 텐데.’
게다가 치르체 사건이 벌어진 것이 불과 하루 전.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무렵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 질문이 날아왔다.
“그런데 혹시 흑색거성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고 들어서요.”
해상들에게는 애매한 시각이기도 했다. 모두 바다에 있는 시각이니까.
혹여 진동과 굉음을 들었을지언정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총수는 해상의 총수가 아닌 천공의 신전 7성. 당연히 에트라에게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단 말이지.’
“사실 곧 아시게 되겠지만, 전투가 있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전투가….”
최대한 전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진실돼 보인 듯했다.
“사실. 북부로 향하려는 마음을 굳힌 것도 그 전투를 보고서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북부의 삶은 모르지만, 저런 힘이 있다면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로는 주로 신변잡기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다. 정확한 배경이 아니었다면 실수를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장님이 괜히 층지기로 배경 설정한 게 아니네. 역시 머리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편하긴 편해’
총수의 배려로 식사 후에는 머무를 수 있는 숙소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테키나가 찾아왔을 때 밝은 표정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넘어간 것 같나요?”
아무리 연기를 배웠다고 하지만, 솔직히 두뇌파들을 속일 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불안함도 있었다.
“다행히요.”
“후우. 어색한 것 같았는데 다행히 티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나 보네요.”
“아뇨. 엄청 어색하셨어요. 그런데 그래서 넘어간 상황이라고 할까.”
“네?”
“만약에 너무 자연스러웠다면 오히려 더 경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층지기라는 것과 어색함이 오히려 좋은 효과를 낸 거죠.”
테키나의 말에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넘어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
“내일은 다른 대행수가 찾아올 거예요. 그러면서 선원들의 훈련장을 둘러보게 하겠죠.”
“아. 오늘은 테키나의 차례였나 보네요.”
“나름 공평하게 기회를 주는 편이죠. 그러면서 공은 자기가 다 가져가지만.”
그러면서 내일 일정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해주는 테키나였다.
“2일 정도는 조금 편하게 있으셔도 될 거에요. 중요한 건 출항하는 새벽이니까요.”
“출항하는 날 전부가 나가서 본다고 했죠.”
“격랑이 약해지는 때라고 하지만, 비교적이니까요. 그리고 아마 초대받으실 거에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시간을 맞추고 나서야 테키나는 돌아갔다.
‘확실히 이 영역이 영왕님의 영역이라 다행이지.’
그 덕에 천공의 신 시선이 덜 미칠 수 있었기에 이런 계획도 세울 수 있었다.
‘앞으로 북부에 가면 훨씬 빡세지려나.’
상념을 가진 채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에도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격랑의 때 마지막 날 새벽. 출항하는 이들과 배를 고정하는 이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장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