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태양이 강렬한 날이었다. 이제는 만 명이 넘어가는 인원이 강의를 들었다.
‘진짜 점점 사람이 많아지는데, 이걸 노리신 건가?’
탑에서 나온 인물들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치안청, 행정청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최근에도 사람들이 많이 오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살려만 달라고 했던가? 그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진짜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생각을 털어내고 운동장의 끝에 높게 선 단상에 오르자 뒷면에 자신의 모습이 거대하게 떠올랐다.
“솔직히 제 강의가 뭐라고 이렇게 많으신 분이 참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특강을 오히려 마법사들이 더 좋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신기했다.
“오늘은 주제를 이어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주간 매일 이어지는 강의 진도는 매우 느렸다. 질의 하나가 하루를 잡아먹기도 했다.
의도하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진도가 딱 맞아 떨어졌다.
“왜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부터 신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가장 궁금해할 질문을 다시 던졌다.
“왜 흑색거성에서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는 단 한 명도 ‘신’이라고 불리는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 없을까요?”
3000년이 가까이 지나는 세월 동안 북부에서는 새로운 신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흑색거성에서는 신이 아닌 9서클의 대마도사나 그랜드 마스터 이상의 무인이 나타난 적 없었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표정들이 그 많은 군중 속에서도 보일 만큼 드러났다.
그중에서 성질이 급한 몇몇 이들이 일어나려고 하는 그때 다시 말을 이었다.
“과연 전혀 없었을까요? 이 흑색거성에서? 가르침이 이렇게 개방적인 곳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나 싶은 표정으로 변했다. 일어나던 이들도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저는 꽤 여행을 많이 다녔고, 그 과정에서 특별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프랑 학장님 덕분에 알게 된 거지만.’
아프와 학장님에게 듣고 나서는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법진도, 그런 선택을 내린 이들도.
“그중에서는 흑색거성의 초월자들에 대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수많은 군중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9서클에 다다른 마법사. 또는 그랜드 마스터 이상에 닿은 무인. 그들은 하나같이 은거를 선택했다는 것.”
소리 없는 경악이라는 걸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광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소문이라고,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닙니다. 가장 최근에 은거를 선택한 분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실제로 학장님이 주선해 준 만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 이상이었어. 확실하게 벽에 닿은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어부일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학장님이 만날 사람이 있다며 밤늦은 시각 데리고 간 부둣가.
그곳에는 정말 평범한 노인이 배 위에서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깨달았다.
신이라고 불리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강자였다.
‘하여간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리고 아프덕에 알게 된 사실은 그들이 벽을 넘었을 때, 자연적으로 드래곤이 찾아온다.
‘그것이 하나의 맹약이라고 했지.’
드래곤을 만나고 선택하게 된다고 들었다. 흑색거성에서 조용히 살아갈지 아니면 거처를 옮길지.
‘실제로 가디언이 된 사례도 있다고 했지?’
그때 느꼈던 것 이상의 충격을 이 자리에 있는 군중이 느끼고 있는 듯했다.
“여러분들이 모두 알고 계신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창 하면 생각하는 무인.”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군중 속에서 자신이 만난 노인의 칭호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창왕 세탄타. 갑자기 사라져 의문에 싸인 그분.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사라진 마창.”
아공간에서 꺼내든 창은 얇고 길었다. 마치 화살을 길게 만든 것 같은 모양새.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이 창은 창왕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공포로 통했다.
수많은 이의 심장을 찌른 창. 단 한 번의 찌르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창에는 하나의 특징이 있죠.”
창날을 손에 가져다 대어 살짝 긋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지지 못하고 창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창이 마창으로 불리게 된 이유. 피를 너무 많이 머금어 종내 피를 탐하는 창이 되었다는 창. 이 정도면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죠.”
웅성거림 사이에 탄성과 경악이 공존하면서 혼란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앞에 앉은 치르체와 그 일행들의 표정이 볼만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혼란이 찾아오려던 군중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모두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창이 될 만큼 전투를 좋아하던 창왕은 왜 은거를 선택하게 된 것일까요.”
다른 종류의 탄성이 터져 나오고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군중.
“우리는 마스터만 되어도, 5서클의 마법사만 되어도 자랑하고 싶은데 말이죠.”
인간은 힘이 생기면 표출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 장소였다.
“창왕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흑색거성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자부심. 그리고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강해지는가.”
외인인 자신조차 창왕과 대화할 때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은거를 선택한 그들에게는 흑색거성이 가지고 있는 신념에 대한, 그 피로 지킨 가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저 군중 대다수가 느끼는 자부심이. 벅차오르는 그 감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 가치. 어떤 인간 일지라도,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다른 인간 위에 신으로 군림할 수 없다.”
자유를 위해서. 핍박과 강제에 저항하며 이 땅으로 와 흑색거성을 지은 이들.
“그것을 위해 초월자들은 그 강대한 힘을 가졌음에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것을 저는 보고 느꼈습니다.”
의구심과 열등감이 묘하게 흐르고 있던 군중들에게는 이제는 자부심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 가치를 훼손하려는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부심과 기쁨에 넘치던 군중에게 그 소리는 분노를 일으키는 소리였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돕고 있다면, 그건 또 어떤 느낌일까요.”
분노와 당황,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속에서 두려움과 긴장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그 와중에서 평온한 신색이라 이거지. 하긴 완벽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치르체 일행은 두려움도 긴장감도 표현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경계 서린 눈빛이 보일 뿐이었다.
아젠스가 찾아온 정보는 예상할 수 있는 정보를 넘어선 정보도 있었다.
신전들이 난립하는 북부에서조차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용케 가져왔다.
‘그 팀장이라는 사람이 진짜 대단하다고 했지. 하튼. 이제 곧이네.’
분노한 군중들을 바라보니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학장님도 준비가 된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법진이 존재한다는 점. 물론 확장을 막기도 하지만 말이죠.”
실제로 500년 전부터 슬슬 나오기 시작한 불만이기도 했다. 흑색거성이 좁아졌다.
그만큼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한계에 다다랐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더 넓은 곳, 더 큰 땅, 큰 세계를 원하는 것은 힘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의견이자 욕망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흑색거성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 이 맹약은 문제가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겠지만.’
협의체의 문제가 이런 부분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명확하게 지시하는 한 지점이 없다는 것.
‘지금 중요한 게 이게 아니지.’
“그 마법진 덕분에 흑색거성은 신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었죠. 그들의 권능에서도.”
운동장에서 바로 보이는 곳은 기숙사. 그리고 그 가운에 있는 것은 학장실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러분들이 권능에 대해서도 신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학장실의 창문이 활짝 열리고, 학장님에게 신호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마법진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도 없죠. 우선 눈으로 한 번 볼까요?”
학장님의 신호에 따라 말하자마자 하늘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마법진. 일반적인 규모를 넘어선 마법진이자 움직이는 마법진이었다.
“거대하죠? 그리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보았겠지만, 마법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미 마법사들의 눈들은 돌아간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마법진을 가까이 보고자 날아오르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자리에 가만히 있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왜 학장님이 고민했는지 알겠네. 눈들이 다 돌아갔어.’
무인들이야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천고의 보물이 눈앞에 있는 것.
점차 투명하게 변하더니 사라지는 마법진. 그리고 마법사들의 분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독단이다. 당장 다시 마법진을 발동시켜라. 거기에 마법을 사용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냉철한 이성을 갖추었다는 마법사들이지만, 그 이성을 날려버릴 만큼이었다.
“지금 강의 중입니다만, 그리고 방금의 마법진은 초월자 분의 도움으로 잠시나마 보이게 한 것입니다.”
기세를 피워 올리고 나서야 자신들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이 난 듯했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이들이었다.
“베이그님. 방금 보신 마법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는 베이그보다 경지가 높은 마법사들도 마법진을 보고서는 찾아오고 있었다.
“감히 제가 평가할 수 없는 마법진이었습니다. 세상에 움직이는 마법진이라니.”
“그렇죠. 초월자분께서도 모두 알지 못하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마법진의 기능이 단 하나에 불과할까요?”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 바라보는 이들과 이제 와서 주변인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이들 섞였다.
그 사이에는 이 마법진을 드러내면서까지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탑주들이구나. 확실히 학장님의 말씀대로네.’
탑주들은 명분이자 증인이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안전장치였다.
‘묘하게 균형이 맞네? 무인이라도 나올 거라는 학장님도 맞았고.’
두 명의 무인과 두 명의 마법사. 각 탑주를 상징하는 로브를 입은 이들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중에 한 가지 기능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주제가 뭐였죠?”
오늘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탑주들은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신’이라는 것답게 여러분들에게 그 신에 대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법진의 일부가 하늘에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의 빛줄기가 되어서 떨어져 내렸다.
그 자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운동장의 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