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본 재능으로 정점-196화 (196/217)

[196화]

불꽃이 온몸을 감싸고 나서 눈앞에서 드러난 풍경은 똑같지만, 달랐다.

열기가 달랐다. 가만히 있는데도 온몸에 열감이 느껴질 정도. 화경이 아니었다면 실시간으로 체력이 사라질 것만 같은 장소.

아무도 존재하지 않던 장소에 거대한 존재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열기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승천자는 오랜만이네. 그것도 이렇게 특이한. 반가워? 꼬맹이도 오랜만이다?]

그림으로 본 존재지만, 역시나 그림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던 듯했다.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슴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보다 족히 3배는 커 보이는 신장. 뿔까지 한다면 더욱 커 보였다.

불이 잔잔하게 흐르며 만들어낸 거대하고 옹골차 보이는 몸체. 그리고 전신의 화염.

“불의 영왕이신 페루스님을 뵙습니다.”

[페루스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드리니, 순식간에 크기가 작아져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크기가 되셨다.

[그래도 첫 만남인데 진체는 보여줘야지. 그래. 본단에 도착한 느낌은 어때?]

“상상 이상의 열기가 휘도는데요? 도대체 이곳이 어디길래.”

[뭐. 넌 알아도 상관없겠지. 판테온과 흑색거성 사이에 바다가 있는 건 알지?]

발바라 대륙의 동쪽. 그곳에는 마치 누가 파낸 듯한 깊은 만이 있었다.

[그 바다 지하에 이 대륙에서 가장 뜨겁고 깊은 화산이 있지. 그곳의 위에 있어서 그래.]

“본단이…. 화산 위에 지어졌다는 말씀이신가요?”

[뭐 위라면 위지. 쉽게 설명하면 화산에 뚜껑을 닫고 공동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엄청난 이야기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는 듯 보였다.

“화산 위에 있으면, 위험하지 않나요?”

[내가 있는데? 그럴 리가.]

오만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전혀 오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하긴. 불의 정령왕 파편을 지니고, 어쩌면 불의 정령왕보다 강할 수 있다고 했으니.’

비록 이 세상 한정이라지만, 불의 정령왕보다도 강한 힘이란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불길을 관리하는 존재. 그런데 왜 날 보자고 한 거지?’

[왜 불렀는지 궁금한 얼굴인데?]

“승천자가 특이한 존재라고 해도, 페루스님께서 부를 이유는 없으니까요.”

[맞아. 사실이지. 뭐 답답이가 자랑질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가면서 이야기하자.]

공동에서 점차 밑으로 내려갈수록 열기는 더욱 심해졌다.

[내가 함부로 힘을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네. 지형이 변하는 것을 넘어 속성이 바뀌게 하는 힘이라고.”

[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 내 힘이 힘인지라. 숲이 사막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영왕들이 힘을 쓰면 자연이 호응한다. 그 후 힘의 잔재만으로 자연이 변한다.

‘현경. 그리고 그 위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기에 영왕들은 최대한 힘을 쓰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여타 다른 신전들이 사속성 신전에 선을 넘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후처리도 귀찮고. 그런데 요즘 계속 신경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단 말이지.]

“제가 아니더라도 불의 신전에는 인재가 많은 것 같은데요?”

[아! 맞다. 아르도르를 도와줘서 고마워. 꽤 멋진 불꽃을 피워낼 수 있게 되었어.]

“아닙니다. 저도 배운 게 많으니까요.”

[하여튼. 그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을 쓸어버리고 싶은데, 명분이 없단 말이지.]

“명분…. 이요?”

[나야 그런 게 필요 없지. 그런데 내 아이들은 그런 게 필요하니까 문제지.]

“그래서 제가 등장하는 건가요?”

[어차피 안 좋은 인연으로 얽힌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외부의 충격이 필요한 일이라.]

“흠. 왠지 엄청 골치 아프고 힘들 것 같은 그런 일입니다만.”

[그래서 보상을 두 개나 준비했단 말이지! 어때?]

“보상이 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좋아. 선금으로 2주일 동안 훈련시켜주마. 너 아직 경계에서 헤매고 있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저울추가 귀찮은 일을 맡는 것으로 기울었다.

[씽씽이에 비하면 못 하지만, 바람이라면 꽤나 잘 알고 있다? 거기에 임무를 완수하면 정수(精髓)를 주마.]

페루스님이 말하는 정수는 저렇게 쉽게 언급할 것이 아니었다. 네 명의 영왕들이 모두 모일 때 만들어지는 보물.

“솔직히 조금 무서워지려고 합니다만. 정수를 주실 정도의 일이라니.”

[어차피 모일 때마다 한두 개씩은 나오니까. 괜찮아. 솔직히 그만한 일이라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영수가 정수를 먹으면 성장하고, 인간이 먹으면 기운과 몸이 변한다.

몸에 지니고 있는 기운이 근원에 가까운 순수한 마나로 치환이 되며 몸의 불순물을 사라지게 하는 보물.

“어떤 일입니까?”

[흑색거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신을 섬기지 않는 무뢰배들의 쓰레기통 하지만, 실상은 마지막 보루?”

[하하하! 확실히 다르구나. 이 세상의 인간들과 전혀 달라! 맞지. 인간들의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지.]

흑색거성에는 신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전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흑색거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탑이 하나씩 있어. 뭔지 알겠어?]

“4개의 쌍둥이 탑. 마탑이자 무예를 이어가는 인간들의 보금자리. 이 정도뿐입니다.”

흑색거성에 가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그 쌍둥이 탑들에 있었다. 이 세계의 마법과 무예를 잇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맞아. 사대마탑이라고 불리는 건 사실 사속성 신전의 마법사들이지. 알려지지 않은.]

신전으로 통합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홀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지켜가는 이들.

[근데 요즘에 내부에서 썩어들어가고 있는 게 있단 말이지.]

“내부에서 말씀입니까?”

[탑은 괜찮아. 사승관계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중앙이 문제가 생기더군.]

공동에 나와서부터 시작한 설명은 점차 내려가더니 죽을 것 같은 장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도와주기로 했으니, 자.]

뿔에서 나온 작은 불꽃이 연하게 퍼지더니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페루스님이 어째서 아프를 다른 곳을 보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화경에 이르고 나서는 환경으로 인해서 힘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춥고 더움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자각하는 정도일 뿐 신체에 영향을 주지 못 했다.

하지만, 지금 아직 도착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온몸 녹이고 내부를 끓게 하는 열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이 태어나고서 한 번쯤은 꼭 들리는 장소이자, 성장의 장소랄까나. 가서 보면 알 거야.]

통로가 끝이 나고 모습을 드러낸 장소.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기운이 이렇게 순수하다고? 그것도 불뿐만이 아니야.’

대지는 굳건한 그릇이 되고 바람은 열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물은 용암이 되어서 흐르고 있었다.

[어때? 이 화산의 중심이자 우리 아이들의 휴식처가.]

온통 불의 기운이 가득한 가운데 셀 수 없는 불의 영수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영수들이 날아다니고, 용암에서 헤엄치고, 뛰어놀고 있는 광경은 너무 즐거워 보였다.

[왕이다!]

[어디 갔다 왔어!]

[인간도 있어! 괜찮은 인간인데?]

[근데 바람 냄새가 너무 강해.]

어린 영수들이 페루스님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열기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해하게. 꼬마들이 이곳에 와서 신이 나면 주체를 못 하는 경향이 있어서 말이지.]

하긴, 장난으로 불을 던지고 용암에 빠트리면서 노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이곳이 이렇게 숨겨진 이유가 있었네. 그럼 다른 곳도 있다는 건가?’

문득 다른 장소에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광경은 그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자. 선물이니 가서 놀아보게나. 아마 배울 것도 있을 테니.]

전신을 감쌌던 불꽃이 조금 더 두꺼워졌다. 그러자 열기가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가라고 하시는 건…. 설마?”

자신에게 부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는 것이었나 생각이 들었다.

[쯧. 겁이 많기는!]

겁이 많다고 하기에는 밑에서 끓어오르는 동시에 흘러 다니는 용암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콧김과 함께 뿜어진 불꽃이 다시 몸 주변을 감싸더니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페루스님!!”

어떻게 손써볼 도리도 없이 순식간에 용암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흐르는 용암이 가까워진다.

빠질 것 같은 찰나, 살짝 몸이 떠오르더니 용암 위에 설 수 있었다.

‘용암 위에 섰다고? 안 뜨거운, 아니 오히려 따스한데. 그리고.’

[괜찮지? 겁도 많기는 이 몸이 불의 영수들의 왕이니라. 그러니 꼬마들이랑 좀 놀아주거라.]

이런 경험을 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 조심스럽게 용암 위를 걷는데 꼬마 영수들이 슬그머니 오기 시작했다.

[인간이야! 인간!]

[괜찮은데 바람 냄새나는 인간이다!]

슬그머니 오더니 어느새 주변을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헤엄치는 꼬마들이 불꽃을 피웠다 꺼트리며 놀자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럼. 나도 한 번 뛰어볼까?”

꼬마들이 툭툭 치고 도망가는 모양새에 용암 위라는 것을 잊고 자연스럽게 [바람의 탑]을 개방한다.

순간 느껴지는 정순한 마나와 새로운 바람 아니, 느껴보지 못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이게. 이게 진짜 스키론의 바람이구나. 열풍이라는 게 이런 거였어.’

예기치 못한 깨달음이었다. 6번째 탑이 활짝 개방되며 열풍이 온몸을 휘감는다.

[바람 냄새가 불을 머금었어!]

[재밌는 인간이다!]

[쫓아온다! 도망가!]

온몸을 휘감은 열풍을 타고 풍도(風道)를 밟는다. 가장 열풍의 길을 잘 알려주는 이들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 길을 따라와!]

[아니야 우리 길이 아닌데?]

[신기한 인간. 특이한 인간이다!]

[가장 먼저 잡히는 놈은 깨끗한 물 폭탄 맞는 거야!]

[잔인해! 뛰어!]

꼬마 영수들이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그 뒤로 쫓아다니기만 해도 풍도가, 6번째 탑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

[저렇게까지 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생각 이상인데? 안 그래?]

[승천자 치고도 특이한 인간이라고 리퀴두스님께서 말씀하셨으니.]

[흠. 리퀴두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그런 거지. 근데 왜 나에게 정수를 주라고 하신 거지?]

[글쎄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좀 사건 사고를 겪었으면 하시는 듯했습니다.]

[키우시려는가? 아니면, 인간 세상을 좀 손보시려는가. 참 고생이 많으시군.]

[그분에게도 그분의 사명이라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니까요.]

[참. 아닌 것을 아실 텐데도. 정말 가장 드래곤다우면서 드래곤 답지 않으신 분이란 말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경하기도 하고요.]

[그래. 너도 고생이 많다. 그나저나 저 인간 정말 특이하네?]

[저도 사실 모든 것을 다 보지는 못 했습니다. 5계에 대한 전설이 맞는 듯하더군요.]

[아? 그 말? 진짜? 신기하네. 좀 알아볼까.]

*

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침내 경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진짜 넘어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지.]

“페루스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길만 보여줬는데 냅다 걸어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좀 멍청하긴 하지만, 무예 하나는 봐줄 만 하다!]

“뜨거워서 오지도 못 한 녀석이 말만 많아가지고.”

[보기가 좋구나. 그럼 잘 부탁한다.]

“네. 또 뵙겠습니다.”

마법진이 붉게 빛나더니 불꽃이 일어나고 시야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흑색거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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