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어처구니없어하던 아프가 말해 준 내용은 단순했다.
[중급이니까. 꽤 강할 거다. 근데 최상급 이하의 영수들은 대부분 계약자와의 합이 중요하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런 것도 되는지 물어봐.”
토리스에게 가르쳐주려던 의미를 지나서 이제는 자신을 위한 공부였다.
아프와 함께 손을 보고, 파빌라의 통역을 맡기면서 전투법을 보니 생각보다 재밌었다.
‘나도 차용할 수 있는 부분이 꽤 많단 말이지. 너무 갇혀서 생각하고 있었어. 아니 버거웠지.’
어느새 기록원에 들어온 목적은 잊혀지고 눈앞에 전투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기록원에서는 아무것도 만지지 않은 듯 기록원은 깨끗했다. 그곳에서 나온 수행자님께서 대뜸 연무장으로 가자고 하셨다.
연무장에 도착한 수행자님께서 지팡이를 빌려 가시더니 한가운데 자리하셨다.
“두 가지가 있는데, 일단 보고 말씀하세요.”
연무장에 펼쳐지는 움직임은 입으로만 이어져 왔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다.
“불꽃의 춤! 정말.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짜로 실전되었던 전투법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못 하는 수행자님의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상상되었다.
불꽃처럼 격정적이다. 불꽃처럼 폭발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끝난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있을 때, 수행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파빌라와 함께 하는 겁니다.”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파빌라가 수행자님의 곁에 서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한 사람과 영수의 조합은 처음 보는 황홀한 광경이었다.
잊지 못할 한 바탕의 연무가 끝이 났다. 고작 기록원의 열람으로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확실히 재밌는 일이었어요. 이번에는 꼭 기록으로 남겨 놓으세요.”
별거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는 수행자님의 모습에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연무를 배우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다. 마치 처음 마법을 배우는 것 같았다.
머리가 좋게 태어난 것이 이 연무의 형을 외우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빌라와도 연무를 추는 동안 친해지는 느낌이었다. 의지를 넘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저렇게도 행복할까. 진짜 잘한 느낌이 들어서 다행이네.”
[당연히 즐거울 거다. 영수와 계약을 한 인간에게, 영수와 유대가 강해지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
“확실히…. 영수와 계약을 하면 속성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다 이거지?”
[그렇다! 그래서 인간들이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영수를 찾는 거다! 영수의 힘은 자연을 다루니까!]
“신기하단 말이지. 마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인데, 어딘가 비슷하기도 하고.”
[그건 네 경지가 높아서 그렇다! 원래는 전혀 다른 힘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의 연무가 끝이 나고 토리스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파빌라도 꽤 마음에 들었는지, 토리스의 곁에 붙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저도 배우는 것이 많았으니 상부상조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부탁하는 토리스.
따라간 곳은 다름 아닌 건물의 중앙. 불이 피어오르는 그 장소였다.
“수행자님. 저 불 한가운데 서주시겠습니까?”
거의 사람의 키만큼 타오르고 있는 불.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 달라고 하는 토리스.
하지만 그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한 번 속는 셈 치고 들어가기로 했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아프가 뭐라고 안 하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으니.’
뭐라고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눈길로 후딱 들어가라고 눈짓하고 있었다.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저러는 건지.’
아프를 한 번 흘겨보고서는 불로 걸음을 옮겼다. 활활 타오르는 것에 발을 놓았지만, 그저 따스했다.
‘신기하네. 타는 게 아니라 그저 피어오르는 건가.’
불의 가운데로 향하면서 바닥에 아무것도 없음을 볼 수 있었다. 탈 것 없이 그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의 한가운데 자리하자 불길이 마치 온몸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신기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불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 불의 타오름에 매료된 자. 걸어가는 불꽃을 걸고, 체르부스의 축복을 바라옵니다.”
파빌라에게서 시작된 불길이 토리스에 의해서 자라난다. 불길에서 튀어나오는 하나의 불꽃이 거대한 불길에 닿는 순간.
순식간에 불길이 푸르게 변하며 피어오른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한 마디.
[재밌는 아이네. 곧 보자?]
머리를 갸웃하게 하는 말소리이자 왠지 모를 불안함을 주는 말소리였다.
푸르게 피어오르던 불길이 다시 붉게 변하자, 토리스도 입을 열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저 불 가운데 들어갔다가, 불이 푸르게 변하고 다시 붉게 변한 것.
“망토를 보시지요.”
그 말에 망토를 보자 가면이 새겨진 곳에 푸른 불꽃이 새겨져 있었다.
“그 불꽃은 저희 불의 신전의 전폭적인 지원을 상징합니다. 대주교와 동일한 대우를 받습니다.”
주교, 대주교. 자신이 보던 이들이지만, 실상은 굉장히 보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인간의 세상에서 시티를 관리하는 주교. 그리고 그 시티들을 묶어서 관리하는 대주교.
“이런 걸 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실. 불의 신전의 호의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제 권한이 미치는 것은 거기까지여서.”
토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직위 바로 아래까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체르부스님께서 좋게 보신 듯합니다. 제가 드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한입니다. 역시 수행자님은.”
“체르부스라고 하면, 불 속성 영수들의 왕 아닌가요?”
정령계가 닫히고 태어난 영수들. 그들에게도 왕이 존재했다. 정령왕의 파편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영수 그 자체가 본디 정령이었던 이들의 파편을 지니고 태어나기에 왕이 존재했다.
“예. 감사히도 저희 신전의 본단에서 머물고 계시죠. 모든 신전의 불은 그분의 불입니다.”
정령계의 일을 대신 수행하고 있는 이들. 이 세상의 자연의 흐름을 관리하는 이들.
오히려 정령계가 아닌 이 세상에 살면서 존재하기에 영향력을 더 크게 미친다고 하는 존재.
“왠지 모르게 굉장히 큰 부담과 압박으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만.”
멋쩍게 웃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토리스였다.
“판테온에 가시게 되면, 아마도 뵐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갑자기 판테온에 가기 싫어졌다. 그냥 다 내려놓고 숲으로 향하고 싶었다.
‘아니지. 그러다가 못 들어가는 수가 생기면 더 꼬이니. 하. 인생 진짜.’
이번 세상에서는 조용하게 사건 사고 없이 지나가고 싶었는데, 과한 꿈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이제 불의 인장을 가지고 계시니 기록원의 모든 것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서도!”
“사서요?”
“기록원을 관리하는 이입니다. 그리고 기록원에 있는 모든 기록을 알고 있으니 굉장이 유용할 것입니다.”
굉장히 편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잠깐의 행복을 위해서 너무 큰 것을 포기한 기분이었다.
“불의 인장을 받으셨으니! 제가 거하게 한 상 대접하겠습니다. 혹시 저 불길에 꼬치 구워 먹어 보셨습니까? 어마어마합니다!”
‘그래. 포기하면 편하지. 뭐 더 생각한다고 변할 일도 아니고.’
“방에 들어가셔서 씻고 나오시지요. 제가 준비되면 제자 놈을 보내겠습니다.”
안내받은 방에서 씻고 나온 뒤에 아프가 다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근데 일전에는 말을 해 주면 되지 왜 굳이 눈빛을 보낸 거야?”
[그런 의식을 하게 되면 불에 의지가 깃들게 된다! 그러면 대화하는 게 어렵다!]
“응? 왜?”
[그 공간에 체르부스님의 의지가 존재하기에, 다른 영수들의 의지는 가라앉게 된다!]
“하. 근데 다른 대화 방법은 없어? 이렇게 말로 하려니까 좀 번거로운데 말이지.”
[문신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그곳에 오러를 넣고 의지를 전달하면 된다! 멍청이!]
‘이렇게?’
[그래 멍청이야! 가계약이라 어쩔 수 없다. 만약 진짜 계약을 한 것이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을 텐데.]
“그래도. 지금이 좋아. 친구 같고 좋잖아. 난 여기에 계속 머무를 게 아니니까.”
영수와의 계약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계약이었다. 계약자가 죽으면 영수도 죽는다.
영수를 이루던 정령의 파편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새로운 영수로 탄생한다.
영수가 죽게 되면, 계약한 당사자는 죽지는 않지만, 영혼이 비어버린 느낌을 갖는다고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미치거나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고 알고 있었다.
[하긴. 넌 좀 부족하다! 이 내가 가계약이라도 해준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넌 어느 정도인 거야? 등급이 있다고 했는데, 하급, 중급, 상급이었나?”
[상급 위에 최상급이 있고 그 위에 영수들의 왕이 존재하는 거다 멍청이!]
“그럼? 넌? 최상급인 거야?”
상급이 되면 계약을 하지 않은 인간들에게도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성장을 통해 등급이 올라가기도 하지만 성장하는 영수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영수도 존재했다.
[이 몸은 최상급! 그중에서도 기사의 직위에 있는 몸이다! 넌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너 같은 경우는 거의 다 기사인 거야?”
[음. 대부분 그렇다. 아무래도 기사의 파편은 남다르기에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영수라는 존재는 신비하단 말이지. 그래서 너는 새끼 낳을 생각은 없어?”
[무슨! 이 몸의 짝이 될 이를 찾는 것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는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영수들이 짝을 만나고 새끼를 낳게 되면 대부분 영수로 태어난다고 했다.
다만, 처음부터 성장하는 영수가 될 뿐이었다. 빠르게 성장하고 강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짝을 찾을 생각은 있나 본데? 음흉한 영수 같으니라고!”
[이! 이! 이 몸은 음흉하지 않다!]
새도 얼굴에 표정이 있다는 듯이 당황하면서 의미 없는 바람을 날리는 아프.
‘저런 놈이 어떻게 기사인 건지 몰라. 내가 읽은 것과는 전혀 다른데 말이지.’
왕의 일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영수. 그렇기 다른 영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대한 영수.
책을 읽으면서 한 번쯤 보고 싶은 존재이기도 했다. 날카롭고 굳센 그런 영수.
하지만, 현실에서 만난 그 영수는 전혀 달랐다.
‘뭐.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어리숙한 영수 한 마리와 함께 투닥이다 보니 어느새 4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
“곧 따라가겠습니다. 은인.”
기세가 달라진 토리스가 지나치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이 보인다.
“너무 그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희 스승님께서도 은인을 꼭 뵙고 싶어 하십니다. 판테온에서 꼭 초대에 응해 주십시오.”
3일. 토리스가 주교에서 대주교로 성장하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파빌라도 이제는 토리스의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애초에 계기만 있었다면 넘어섰을 이였다. 그 계기를 제공했을 뿐인데 마치 제2의 스승을 대하듯이 한다.
‘게다가 저 초대에 응하면, 진짜 귀찮아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 점이 너무 슬펐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사서를 통해 이 세계에 대해서, 인간의 세상에 대해서 확실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기록원은 괜히 기록원이 아니었다. 사서에게 사속성 신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신전과는 다른 점이 확연했다. 또한 그 뿌리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와 정령사들이 만든 신전. 정령계가 닫히고 나타난 최초의 신부터 직금까지의 역사가 있었다.
눈앞의 게이트에 진입하면서, 판테온이라는 장소에 대해 다시 떠올려 보았다.
‘기만자가 만든 무대라고 했던가. 최초의 신이 나타난 장소이기도 하다고 했지.’
빛이 가득해지더니 어느새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판테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행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