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하아. 네. 괜찮습니다.”
깊은 한숨을 쉬더니, 앞으로 나서서 다른 전투의 신전 사제들에게 소리치는 토리스.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불의 신전은 수행자님의 편에 설 것이다! 정식으로 전투의 신전에 항의할 것이니. 끼어들지 말도록!”
토리스의 말과 동시에 한 발 떨어져 있던 불의 신전 사제들이 앞으로 나선다.
그 사이 이미 눈이 붉게 변한 폴른이 검을 꺼내서 쇄도하는 것이 보인다.
‘광화(狂化)에서 적아 구분을 한다는 건가? 아니면 목표가 나라서?’
제압하고자 하면 손쉽게 할 수 있지만, 말한 꼬락서니로 보아서 분명 다음이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마니에르랑은 다르네. 순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마니에르의 광화는 순수한 광기의 폭발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상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화는 마치 짜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것도 권능인가.’
광화가 일정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슬며시 움직이며 피하고 공격을 쳐내도 광화가 더 진행되지는 않았다.
‘거기에 광화가 돼도 검식은 그대로 따라온다는 거지. 신기하네.’
이번에는 피하는 것을 그만두고 반격을 시작했다. 검을 피하고 얼굴을 한 대, 다시 피하고 복부를 한 대.
그래도 단련은 꽤 잘했는지, 때리는 맛이 있었다. 찰진 손맛과 함께 점차 찢어지고 피가 나는 곳이 늘어나는 폴른이 보였다.
“그…마안. 그만.”
생각보다 빠르게 광화가 해제되는 것이 보였다. 인위적인 광화의 한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때려봐야 아프지도 않을 거 아냐?”
“아…니… 분묭휘… 아무 기은드….”
“너 멍청이냐? 어떻게 주교가 된 거냐? 기세를 풀풀 흘리고 다니는 병신이 어디에 있어.”
“그뢔도오…나…느은… 주교오!”
“하! 진짜 이런 놈은 왜 어딜 가도 하나쯤 있는 건지 모르겠네.”
주교라고 해서 자신의 동년배는 무조건 자신보다 약할 거라고 생각하는 인간.
자신을 믿고 위가 없고 패기로운 인간으로 보이지만, 강자 앞에서는 누구보다 비굴한 인간.
“됐다. 그냥 자라.”
대충 뽑아낼 것은 다 뽑아냈다. 게다가 권능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
턱을 돌리고 기절한 폴른을 불의 신전 사제들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에게 던져주었다.
“괜히 불의 신전에 지랄하지 말고, 불만 있으면 나한테 오라고 해. 여기에 며칠 있다가 판테온에 있을 거니까.”
그리고 뒤돌아 다시 불의 신전으로 향하자, 토리스님도 정리를 맡기고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제 아무리 폴른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토리스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셨으니까요. 그나저나 반쪽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표정이 흐려지는 토리스. 하지만,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희 스승님의 스승님. 그러니까 몽상가님과 함께 하시던 분이 성전(聖戰)에서 전사하게 되면서부터 조금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굉장히 무서운 단어를 들었다. 본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단어.
‘이 세계에서는 성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건가? 하긴. 신도 많은 세상이니.’
기록원에서 시간을 꽤 많이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야기에 다시 집중했다.
“그러면서 몽상가님과 함께 만든 전투법이 사라지게 되었죠. 본래 있던 전투법은 한계가 명확하다고, 그 이후로 반푼이 신세가 된 거죠.”
“한계가 명확하다고? 아니, 이미 주교까지 올라왔는데 반푼이 취급을 당한다는 건 무슨 소리입니까?”
“몽상가님과 함께하시던 스승님의 스승님께서는 추기경이셨습니다. 그것도 교황님과 맞상대가 가능한.”
“흠. 그럼 그렇게 이야기가 돌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전투법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결코 폄하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때 전투법을 개량하면서, 기본이 빠져있으니 제대로 설 수 없지. 라는 말씀이 있어서.”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전투 마법사가 전투법이 없으면, 반쪽이라 불린다는 그 말.
‘제대로 된 전투법이 있어야 진짜 전투마법사로 인정받는다 이건가.’
마법사가 전투법을 갈구하는 것이 조금 새로워 보이기도 했다. 한번 보고 싶었다.
“지금 기록원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천천히 가셔도 되는데.”
“저도 여기에 언제까지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불꽃에 도착하자, 이제는 오히려 아프를 귀찮게 하는 파빌라의 모습이 보였다.
“기록원에 갈 거야. 어떻게 할래?”
[간다! 같이 간다! 이 꼬맹이. 너무 귀찮다!]
냉큼 날아와서 어깨에 앉은 아프가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꽤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자님. 혹여 폐가 되지 않으시다면, 파빌라를 데리고 가셔도.”
좋은 타이밍에 토리스가 제안을 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아프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오히려 심심하지 않고 좋을 것 같네요.”
[아니다! 아니라고!]
“게다가 토리스님도 이렇게 간청하시고, 파빌라도 저렇게 바라보니.”
어깨를 으쓱거리자 토리스와 파빌라를 번갈아 보던 아프가 결국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가! 가자! 진짜. 두고 보자.]
투덜거리는 아프가 고갯짓을 하자 세상 밝은 얼굴로 발치로 달려오는 파빌라.
혹시나 해서 손을 땅에 가져다 대니 눈치를 조금 보다가 반대편 어깨로 순식간에 올라왔다.
파빌라의 발에서, 꼬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열감이 일전의 짜증을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파빌라가! 파빌라가 어깨에!”
감격에 떠는 토리스가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기록원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너무도 부족하여 파빌라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인가 고민이 많습니다.”
[아니다! 부담스럽다고 했다! 너무 아기 다루듯이 다룬다고 했다!]
“전투법에 골몰하는 것도 경지가 오르면 파빌라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더 절실해진 것도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조급해한다! 일방적인 애정은 부담스럽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방적인 애정은 폭력이다!]
“그래도 파빌라 덕분에 삶이 행복해지기는 했습니다. 수련밖에는 모르던 제가 여유가 생기기도 했구요.”
파빌라를 바라보는 눈빛에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이 보였다. 특히나 어깨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심히 부러워하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집착은 안 좋은 거다!]
머릿속에서는 아프가, 옆에서는 토리스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지하에 도착했다.
“이곳이 저희 기록원입니다. 대부분이 사본이지만, 저희 시티의 특성상 수행자님께는 오히려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경험을 하러 오는 이들이 배울 것들이 있어서 그런가 보네요.”
“네. 경험이라는 게 알고 경험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로 갈 수 있으니까요.”
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자 기록원의 문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 작은 우물과 함께 건량이 있으니. 언제까지고 편히 있으시면 됩니다.”
나름 배려를 해 주었는지, 내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금 여유를 가지고 아이가 아니라 동등하게 바라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설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어가면서 문이 닫히는 사이로 감격에 차 있는 토리스가 보였다.
‘왜 전투법을 알려준다고 했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지 모르겠네.’
생각보다 그렇게 큰 공간은 아니었다. 책장도 6칸짜리가 4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충 알 건 다 알 수 있다는 뜻이겠지.”
4명이 앉을 수 있는 책상과 함께 한 쪽에 있는 우물과 잔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 근데 네가 전투법을 알려 줄 수 있다는 건 무슨 소리야?”
다시 생각해 보면 의아한 부분이었다. 새가(영수지만). 인간의 전투법을. 인간에게?
날개를 파닥이면서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멍청이! 나는 위대한 영수라는 걸 너무 모른다!]
사방이 밀폐되어 있는 곳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먼지가 한 명의 인간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의 크기였지만, 정교함은 남달랐다. 표정마저 표현한 세밀함.
‘와. 이 세밀한 조종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바람을 다루기도 했지만, 저런 세밀한 조정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세미스드라가 만든 전투법은 생각보다 많다! 창조보다는 개조에 능력이 있던 검사였다!]
“몽상가라는 사람이랑 친했어?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다 아는 수가 있다! 나만큼 친한 사람은 없었을 거다! 하튼! 세미스드라와 루디아가 함께 만든 건,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법이 중요하다!]
“보법을 말하는 건가?”
[뭐.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잘 봐라!]
먼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지팡이가 손에 생기더니 발을 움직인다.
격정적이고 폭발적인 움직임. 하지만, 중간중간 비어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비어있는 곳들은?”
[마법이 들어가는 장소들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항상 다른 움직임. 그것이 이 전투법의 핵심이다.]
“한 번만 다시 해 봐.”
전체를 눈에 담으면서 어딘가 익숙한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익숙했다.
다시 움직이는 먼지의 발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하자, 그 익숙함을 깨달았다.
“이거. 풍도(風道)랑 어느 정도 비슷하다? 움직임이 바람을 보고 만든 것 같은데.”
풍도(風道)는 바람의 길이라는 뜻도 있지만, 바람 그 자체라는 뜻도 있다.
그만큼 바람의 이치 그 자체를 담은 움직임이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먼 보법이기도 했다.
그런 풍도의 움직임 중의 하나가 눈앞의 먼지에서 보이고 있었다. 마치 불을 키우는 바람이었다.
‘스키론의 탑이랑 비슷한데?’
풍도가 [바람의 탑]을 중심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 빠르게 알아볼 수 있기도 했다.
[네가 배우고 있는 풍도는 리퀴두스님도 인정할 정도다! 그러니 당연하다!]
“그러니까 보법이 바람을 참고해서 만든 거라는 거야?”
[그렇다! 본래 전투법에서는 보법이 없었다. 그래서 기본이 없다고 한 거다!]
“확실히 그러면 그럴 만도 했네. 그 몽상가라는 양반도 괴물이었나 보네.”
하나의 무예를 창조하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무예를 보완, 발전시키는 무예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먼지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흠이 없었다.
마치 만들어지기를 본래부터 짝이 되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움직임.
“그런데 그 몽상가라는 양반 있잖아. 혹시 다른 곳에서도?”
[사속성 신전은 한 명씩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있기도 하지만, 후예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엄청 대단하지 않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프와는 다르게 머리가 살짝 아파지는 느낌이다.
‘설마 만나는 이들마다 그러겠어?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지.’
불길한 상상을 떨쳐내고, 눈앞에 먼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배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고칠 점인가? 저건 저렇게 움직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먼지가 움직임을 반복했을 때, 눈치를 보고 있던 파빌라가 슬그머니 나왔다.
먼지의 형상과 함께 이리저리 뛰는 모습에, 무언가 머릿속에 벼락처럼 떠올랐다.
‘영수! 영수도 같이 전투할 수 있잖아?’
영수와 함께 다니는데, 영수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 파빌라는 어떻게 전투를 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알려주는 아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