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충격과 경악의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리퀴두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세계는 별세계였다.
“인간은 대륙의 1/3에만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지.”
공부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나의 농도가 전혀 달랐다.
‘이곳에 마나가 집중되어있다고는 하셨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마나의 농도가 진했다. 그러다 보니 하루종일을 오러를 밖으로 배출하고 다시 들이는 작업을 해야 했다.
‘전의 세계에서도 그랬는데, 마나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단 말이지.’
뭔가 묘하게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화두였다.
“오늘도 참 열심히 하시는군요?”
“아! 랑코님.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랑코님이 쟁반에 과일과 차를 들고 들어오셨다.
“아닙니다. 리퀴두스님의 손님이시니 당연합니다.”
“항상 얻어먹기만 해서….”
“저는 승천자를 보는 것이 처음이라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하긴, 랑코님이 돌연변이 같은 수인이라고 하셨죠? 리퀴두스님께서.”
“하하하. 그래서 리퀴두스님의 가디언이 될 수 있었던 거겠죠.”
그저 호인처럼 웃는 랑코가 실은 수인. 그것도 그 수인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다는 호족이라는 것.
돌연변이는 전투에 미친 호족과 다르게 전투뿐만 아니라 지식과 호기심에 미친 존재라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고서는 조용히 차와 다과를 놓고 나가는 랑코. 갑자기 공부가 손에 안 잡혔다.
이 세계에 와서 가장 뇌리에 남은 것은 리퀴두스님의 실체를 보았을 때였다.
‘위대하고 아름답다.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지.’
그 다음을 꼽자면 랑코와의 대련이었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투방식.
손이 갑자기 호랑이의 발로 변하고 움직임이 이족에서 사족으로 자유로이 변하는 전투방식은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발걸음 소리가 안 나. 기척도 안 느껴지고.’
이제 조금은 익숙해졌지만, 아직까지도 봐주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먼저 가서 몸이나 풀어야겠다.”
방을 나서자 천장이 보이지 않는 공동이 자신을 반겼다.
‘쓸데없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가 아니면 리퀴두스님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였지.’
새삼 충격적이던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바로 위에 있는 새겨진 나무가 있는 벽으로 몸을 틀었다.
“진짜 공간이동은 환상의 마법 같은 거였는데.”
나무의 뿌리 중 한 곳에 손을 가져다 대니 몸이 빛에 휩싸이면서 이동된다.
“연구실 중에 하나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연무장 같단 말이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동된 장소는 누가 봐도 연무장처럼 생겼다.
“게다가 [이니티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확실히 5계라고 하지만, 꽤 여러 안배나 보물들이 존재하고 있었단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로안 덕분이긴 하지.”
[이니티움]은 드래곤의 유산이었다. 본래 자식을 위해서 만드는 성장용 장비라고 하셨는데,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승천자가 아니었으면 이러시면서 입맛을 다시는 리퀴두스님을 보면 상상 이상의 보물이라는 거겠지.’
이미 나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쓰려면 완성이 되어 물려주거나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아쉬움을 보이는 모습에 처음으로 리퀴두스님이 무서웠다.
‘승천자라서 다행이지 진짜.’
하지만 그 덕분에 리퀴두스님의 문양을 도와 [이니티움]에 받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드래곤들이 봐도 탐내지 못할 거라고 하셨는데, 볼 수 있기나 할까?’
이 세상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실제로 드래곤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심판의 날이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를 가볍게 쥐고 1탑 아펠리오테스식 펼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두 번째 스승님이 알려주신 방법. 가장 느리게 자신의 식(式)을 펼치는 만법(慢法).
이전 세상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수련방법이지만, 완성했다고 하는 사람은 손에 꼽는 방법이었다.
‘완성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5년이 걸려서야 6탑의 모든 식을 만법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뻐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 1탑의 만법을 성공하고 기뻐하던 자신에게 스승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이제 첫발을 떼었다고, 속도를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
신기하고 웃긴 점은 화경에 올랐는데도 만법을 완성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는 점이었다.
분명 몸을 마음먹음과 동시에 움직이고 사용할 수 있는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완전히 체화하고 그를 넘어서야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난 그날이 오려나 몰라.’
다만 몸을 푸는 데는 만법만큼 제격인 것이 없어서 매일 빼먹지 않고 하고 있었다.
한없이 느린 도무가 시작되었다. 힘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너무도 부드러운 도무.
‘여기까지는 괜찮고, 그럼.’
1탑을 개방한다. 1탑을 개방하니 오러가 온몸을 휘돌며 강한 힘을 전신에 불어넣는다.
‘더. 더. 더. 느리게’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전신에 넘쳐 흐르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뛰쳐 놀고 싶다는 오러를 억누른다.
“정말 언제 보아도 신기하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이군요.”
“오셨어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요. 한번 해 보시는 것도 좋을 텐데요.”
“글쎄요. 저희 종족과는 전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각자 맞는 방법이 있는 거지.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아! 리퀴두스님. 오셨어요?”
“너희 둘이 싸우는 걸 보는 게 요즘 내 중요한 취미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연무장의 끝에 이미 의자에 앉아계시는 리퀴두스님이 보였다. 손에는 한가득 견과류를 들고 계셨다.
“취미라고 하시니, 참 할 말은 없지만. 저희도 리퀴두스님 덕분에 막 싸울 수 있으니까요.”
처음 대련을 할 때, 재미가 없다면서 생사를 두고 싸우라고 하는 말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랑쿤의 움직임이 변하면서 진짜 생사를 결하듯이 덤비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의 다리는 잘렸고 랑쿤은 양팔이 잘렸다. 그런데도 리퀴두스님의 마법 한 번에 상처 없이 치유되었다.
그때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 보이지 않는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 할 수 있었다.
“뭐. 그래도 네 놈은 싹이 보이니까. 한 백 년쯤 하면 되지 않을까?”
“그 전에 닿을 겁니다. 내가 억울해서라도 리퀴두스님 본체 구경을 한 번 더 해야지.”
“넌 진짜 재밌는 놈이란 말이지. 확실히 다른 세계에서 와서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단 말이지.”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은 리퀴두스님이 꽤나 흥미본위의 존재라는 점. 하지만, 몹시 깊은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의 리퀴두스님이지만, 간혹 내려주시는 가르침의 깊이는 차원이 달랐다.
“자! 그럼 준비도 했겠다.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리퀴두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랑쿤의 눈이 변한다. 손을 수화(獸化)시켜서 달려오는 랑쿤.
“진짜 너무 신나하는 거 아니에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수인은, 그중에서도 호족은 전투에 미친 종족이라고.
체술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에 호되게 당했기에 뒤로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나 자신이 있던 공간을 찢어발기는 랑쿤.
그새 4족으로 변해서 네 발로 뛰어오르는 랑쿤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몇 번의 공수 교환이 지나고 난 후에 불길하고 듣고 싶지 않았던 리퀴두스님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나도 시작한다?”
그 즉시 지형이 변한다. 갑자기 땅이 패이기도 하고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불만을 터트릴 시간이 없었다. 마나의 유동으로 변화를 감지해야 했고 동시에 랑쿤을 계속 감지해 두어야 했다.
‘진짜. 지형지물이 있는 곳에서 수인은 무섭구나.’
평평하던 연무장에 지형지물이 생기니 랑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계속 기척을 감지하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사라져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다.
순간 또 사라진 랑쿤의 모습에 무광님과 함께 했던 시간에 새로 배운 것을 실험해 볼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라퀴두스님도 계시니까.’
1탑의 바람을 2탑에 흘려보낸다. 산들바람 같던 기세가 폭풍을 지니려고 하는 그때, 그 오러에 선천 재능을 담았다.
‘아니지. 담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인 것처럼. 오러와 선천 재능이 하나인 것처럼.’
하늘거리던 기세 안에 폭풍을 담는다. 선천 재능과 오러가 하나로 섞이며 마치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기세에 녹아든다.
‘늦어도 괜찮아.’
산들바람 같은 기세가 주변을 돌면서 기척을 감지한다. 한 보의 위치가 되어서 랑쿤의 기척이 잡힌다.
‘[아펠리오테스의 탑] 1식. 뜬금없는 산들바람.’
폭풍을 의미하는 에우루스의 탑이 아닌 산들바람인 아펠리오테스의 탑의 도식은 부드러웠다.
춤을 추듯 부드러운 선을 따라서 랑쿤의 기척이 잡힌 곳을 향해 도가 올라간다.
도에 서린 산들바람의 기세가 랑쿤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그만. 여기까지 하지. 이건 좀 위험한데?”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리퀴두스님의 양손에 빛나는 배리어. 그것에 도와 랑쿤이 막혀있다.
배리어에 닿자마자 도에 서려 있던 기세가 폭풍처럼 배리어를 갉아버리더니 어느새 바람만이 남아 있었다.
“호? 배리어를 완전히 상쇄시키기까지 한단 말이지? 재밌는데?”
묘하게 불길하게 빛나는 리퀴두스님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두렵게 느껴진다.
“리퀴두스님. 방금 그게?”
놀란 눈으로 리퀴두스님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랑쿤의 개입으로 다행히 살아난 것 같다.
“신기하지? 아마 이게 5계에서 온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능력인 것 같은데, 이놈 것은 위험하네.”
“그 정도입니까?”
“응. 마음 같아서는 한 50년만 데리고 연구하고 싶은데.”
한 50년이라는 가벼운 말이 새삼 리퀴두스님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만년을 사는 존재라고 하셨지…. 만년이라니. 나한테 50년이면 할아버지가 되는 나인데.’
손가락을 턱을 쓰다듬으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불길함이 커지려는 찰나.
“쯧. 하필 타이밍이. 그래도 뭐 시간은 많으니. 따라오거라. 소개해줄 이도 있고 말이지.”
말이 끝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리퀴두스님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랑쿤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나중에 꼭 다시 보여주시죠?”
여전히 눈이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투쟁심이 전혀 가라앉지 않는 랑쿤이었다. 대답하고 나자 순식간에 표정이 변한다.
“그럼 가실까요?”
랑쿤의 어깨에 손을 얹자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된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호수였다.
“밖…. 이네요?”
“네. 리퀴두스님의 정원들 중 하나입니다. 꽤 괜찮죠?”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적응 안 되는 말이 ‘꽤, 나름, 나쁘지 않은’ 이었다.
‘이 세상 전부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진짜 스케일이.’
‘정원’이라 불린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나무가 있기도 하고 연못이 보이기도 하는 정원.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탁자와 함께 사라지셨던 리퀴두스님이 앉아계셨다.
“어때? 나쁘지는 않지?”
푸르른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고, 다양한 꽃들이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아름다운 공간.
“저는 아무리 살아도 리퀴두스님의 기준에는 못 다다를 것 같아요.”
“말은. 잠시만 기다려 봐. 곧 올 거니까.”
“뭐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에 잡히는 물체가 있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