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화경(化境). 그리고 현경(玄境). 인간이 감히 닿기 힘든 지고한 경지임은 분명하다.
화경에 오르기만 해도, 검강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며 심기체(心氣體)가 하나 되는 경지.
현경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의지로 무기를 움직이고 의지에 따라 행 할 수 있다.
누구나 오르기를 원하지만, 소수 중에서도 소수만이 겨우 발을 디딜 수 있는 경지.
그러한 경지를 5년 만에 밟는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된다고 하셨다. 적어도 천재에, 운이 아무리 좋아도 10년은 걸린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에 반해서 자신은 겨우 5년 만에 화경을 지나서 현경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있었다.
화경에 올랐을 때, 어처구니없어 하는 스승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내가 재능 덩어리도 아니고, 천운을 타고난 것도 아니니까.’
천운도 재능도 없는 자신에게 있는 것은 노력과 선천 재능이라는 선물이었다.
노력은 누구나 다 한다. 마스터에 오르기 위해서도 범인은 생각하지 못한 노력이 필요하다.
약간의 상념을 이어가고 있을 때, 관리자님의 말씀이 폐부를 찌른다.
“근원을 탐하는 공부와 네 근원이 만든 길은 가히 최상의 궁합이지. 그러니 옆길로 새지 않고 똑바르게 나아갈 수 있던 것이고.”
“운이 좋았던 거네요. 정말로. 그런데 구층일원공(九層一原功)과 [바람의 탑]의 차이는 뭔가요?”
“허. 내가 괜히 감탄한 것이 아니지. 구층일원공이 한 층마다 세상을 탐구하고 궁구한다면 [바람의 탑]은 오로지 바람만을 위한 것인 것 같구나.”
‘천재가 하나에만 이렇게 미치면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걸까.’
“층으로 세상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탑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바람을 공부하고 그 탑이 모여 하나가 되게 만든 것 같구나. 자세한 것은 더 알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잠깐 말을 쉰 관리자님이 조금 고민하더니, 딜을 걸어오셨다.
“구층일원공(九層一原功)을 알려주마, 그리고 종종 첨언도 해 주고.”
“그런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인데요?”
“[바람의 탑]을 알려주는 조건이다. 거기에 네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이고.”
“그런 조건이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후하다 못해 퍼주는 조건이었다. 기실 가르침만으로도 후한 조건이었다.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뭐 어쩔 수 없는 그런 게 있다. 그래서 할 거냐 안 할 거냐!”
“저야 감사할 일이죠! 좋습니다!”
그렇게 관리자님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관리자님의 생각 이상으로 긴 시간 동안.
*
‘아마 금방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하신 거겠지?’
아무리 경지가 높다고 한들 이 유백색 공간은 사람을 묘하게 미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처음은 괜찮지만, 시간도 흐르지 않고 변화도 없는 그저 유백색 일색의 공간.
거기에 더해 밥을 먹지 않아도, 물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심각한 괴리감을 불러온다.
‘나도 아마 관리자님 덕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버티지 못했겠지만.’
적응을 도와주셨던 첫 번째 관리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래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바람의 탑]에 대해서 한결 깊고 제대로 알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진짜 안드로니쿠스님은 어디에 계실까 몰라.”
만일, 만에 하나라도 살아 있다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5계인 자신의 세계에서 [바람의 탑]의 모든 검식을 만들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천재가 아니라 그건 미친놈이라고 하셨지.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람의 탑]의 탑은 닫을 수도 있었다. 다만, 다시 여는 것이 극악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워 문제일 뿐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서 만든 것이 [바람의 탑] 검식이었고, 관리자님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인 검식을 넘어섰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뭐 나는 방향이 다르니까. 이렇게까지 할 수도 없고. 읏차!”
쉴 만큼 쉬었다. 다시 회복된 것이 느껴지자마자 다시 일어나 도를 잡았다.
“확실히 아직까지는 어렵단 말이지. 여기서는 이게 한계인 것도 같은데.”
연공을 하면서 하나의 탑을 다른 탑에 보내는 것과 운용을 하는 것은 다른 세상이었다.
“겨우 세 개까지는 어떻게 하겠는데 말이지.”
도를 쥐고 [바람의 탑] 1식을 펼치며, 1탑의 바람을 다음 탑과 그 다음 탑에 흘려보낸다.
1식인 산들바람에서 폭풍이 함께하고 그 뒤를 비바람이 따른다. 여전히 신비한 느낌이었다.
공간이 작다고 하며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1식을 마치니 다시 한번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딱 여기까지구나. 확실히 내가 바람에 대해 이해가 떨어지기는 하네. 아직 경험도 못 해봤고.”
다시 자세를 잡고 도를 패용한다. 한 보 앞으로 나서며 도를 빼는 동시에 베는 발도.
“라니우스 3식 : 만절(萬切)”
허공에 상흔이 흐릿하게나마 생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생겼다.
“이 부분이 현경으로 향하는 길인 건 확실한데, 아직 잘 안 되네.”
“이노무 시키야. 그것이 한 번에 되면 네놈이 천재게? 그건 나도 못 하는 것이니라.”
어느새 사라지셨던 관리자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셨다.
“에이.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확실히 이 알 것 같은데 모르는 느낌은 별로네요.”
“언제나 함께 가야 할 느낌이지. 그 느낌을 놓으면 또 안되는 거니라.”
“후우. 조만간 가야겠네요.”
“조만간이 무엇이냐! 당장이라도 가야지!”
“솔직히 현경에는 발을 들이고 가고 싶었는데, 안 되는 거겠죠?”
“뭐. 할 수야 있겠다면, 얼마나 걸린다고 말은 못 해 준다? 거기에 네 성향과 맞지도 않고.”
“하긴. 스승님도 저는 굴러야 성장한다고 하셨으니.”
“네가 스승이라 하는 아이의 말이 정확하다. 그 꼬맹이라면 이 몸의 열화의 열화판이라고 해도 좋으니.”
‘스승님을 열화판이라 말해도 할 말이 없네. 관리자님 나름의 극찬이니까. 사실이기도 하고.’
이 공간에서 관리자님과 함께하면서 왜 무광(武狂), 무치(武痴)로 불렸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짜 대충 한마디 하시는 게 엄청나단 말이지.’
현학적이고 현묘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한마디.
덕분에 후삼식 중 하나에 실마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슬슬 정리할 때가 되었다.
“혹시 다음 세계에 대해서 해 주실 조언은 없을까요?”
“아쭈? 뭐 그동안 많이 버틴 상이라고 하자. 흠.”
관리자님의 다음 세상에 대한 조언은 정말 값진 조언이었다. 있던 세상과 나아가는 세상을 모두 아시기에 달랐다.
‘관리자님이 해 주신 조언 덕분에 적응하는데 훨씬 편했으니까.’
“생각해 보았는데, 네 신념을 믿음을 따라 행하거라. 많은 분쟁이 오히려 너에게는 더 좋을 터이니.”
“신념…. 이란 말씀은?”
“알게 될 거다. 하나 확실히 말해준다면 네가 맞다.”
“감사합니다.”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경험으로 분명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가 올 것이라는 걸 배웠다.
“아! 그리고 힌트를 주자면, 가장 북쪽. 그곳의 가장 고귀한 땅에 있다.”
“이름이라도….”
“이노무시키가 날로 먹으려고! 후딱 가라!”
지팡이로 이마를 맞고 나자 몸이 붕 뜨며 익숙한 부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한 번만 볼 수 있으니까.’
하늘에서 전 대륙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비록 저번에는 혼비백산해서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었다.
“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눈을 사로잡았다. 푸르게 빛나는 곳이 있기도 했고, 이 높이에서도 보이는 검은 성이 보이기도 했다.
‘이곳도 하나의 대륙인가 보네. 크기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한참을 내려가는 순간에 순식간에 몸을 중심으로 전후좌우로 마법진이 생겨났다.
[인도자를 맡은 리퀴두스다. 괜히 반항하지 말고 몸을 맡기도록.]
머리에 직접 울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텔레포트 마법을 보게 될 줄이야.’
꿈의 마법으로 여기어졌던 공간이동마법이 너무나 간단하게 자신을 휘감으며 빛을 냈다.
‘어?’
생각을 이어가려는 찰나, 빛이 나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일변했다.
“반갑네. 자네의 인도자가 된 리퀴두스라고 하네. 범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승천자로 이 세계에 오게 된 범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시야가 변했지만,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빛의 머리색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이 남성. 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늠할 수조차 없다고? 이 세계는 도대체.’
화경의 끝에 서 현경을 바라보는 자신이 보기에 너무도 평범한 사람.
하지만, 그 평범한 사람이 마법을 통해 자신을 이리로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 평범할 수 없었다.
“호? 이번 승천자는 예의가 바르군. 눈치도 빠르고 말이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데, 나서는 건 만용이라 배웠습니다.”
“하하! 마음에 들어. 정말 이번 인도는 편하게 할 수 있겠군. 들어오게나.”
그제야 주변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거대한 공동. 아니, 거대하다고 하기에도 너무 큰 공동이었다.
마치 산 그 자체가 텅 빈 것만 같은 공동 벽들에 생동감 넘치는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다.
흘깃 보기에도 섬세함이 남다른 벽화들. 거대한 나무가 새겨진 주변으로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벽을 휘돌며 새겨져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고개를 내려보니 리퀴두스님이 거대한 나무가 새겨진 곳 아래에 있는 곳으로 가고 계셨다.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리퀴두스님을 뒤따라 그곳에 들어가니 다시 한번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어때? 나쁘지 않지 않나?”
“와…. 이게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면, 좋다는 수준은 뭔지 감도 안 잡히는데요?”
공동에 비하면 정말 작았지만, 그럼에도 도를 들고 수련을 해도 될 정도의 넓은 크기.
깔끔한데도 묘한 귀티가 나는 그 공간의 압권은 바로 천장이었다.
“내 레어가 호수 안에 있기에 한 번 만들어 보았지. 그리고 네가 여기에서 지낼 동안 묵을 숙소기도 하고.”
“호수…. 안에…. 이곳에 제가?”
천장에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산호와 해초들이 보이는 별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놀라주니까 즐겁기는 한데, 이제 슬슬 앉게나. 시간은 많으니.”
“아. 네! 죄송합니다.”
한구석에 놓여있는 탁자에 앉아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하지만, 놀랄 일은 더 있었다.
“리퀴두스님. 다녀오셨습니까.”
걸음 소리도 듣지 못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양손에 쟁반을 받치고 들어오는 남성.
탁자 위에 찻잔 두 개를 내려놓더니, 능숙한 손길로 흔들림 없이 차를 따른다.
“아. 여기는 랑코. 여러모로 내 레어를 관리하는 가디언이지. 랑코. 이 친구가 네가 보고 싶어 하던 범이란다.”
“안녕하십니까. 범님. 위대한 리퀴두스님을 섬기는 랑코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범이라고 합니다.”
‘나와 비슷한 경지의 강자!’
그 기척 없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어?”
귀가 있었다. 머리 위로 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꼬리도 있었다.
“아! 자네의 세상에는 수인(獸人)이 없었나? 뭐. 차차 알아갈 것이니 괜찮겠지.”
“수인…. 말씀이십니까? 혹시 리퀴두스님도?”
“글쎄. 알게 되겠지? 수인은 이 대륙을 이루고 있는 지성체 중 하나이지.”
“수인이라는 종족 말고 또 있습니까?”
“그럼. 이제 차차 알아갈 것이니. 자네 이야기부터 들려주게나.”
“제 이야기라면…?”
“인도자를 맡으며 희락이랄까. 알지 못하는 세계를 알게 되는 느낌이 있지.”
한껏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리퀴두스님이 왜 두려운지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