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몇 명이나 남았어.”
“1~3순위는 확실히 처리했고, 3명은 진행 중. 아직 10명 이상이 남았어.”
“진행 상황은 어때.”
“모든 부분에서 우위.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확실히 로사의 도움이 크기는 컸어. 그래도 우선순위는 그들의 척살이야.”
“탁트는 도대체 누군데? 그렇게 깔끔하게 그것도 전장의 한 가운데서 목만 따고 사라져?”
“미친놈. 나중에 상세하게 설명해 줄게.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량과 카인 두 사람이 의도적으로 범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갈 무렵.
*
‘확실히 변했어. 이제 더 이상 기괴한 느낌이 방해하는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는 모기 같긴 하지만, 아까와 같이 직접적으로 오는 방해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제들은 어떻게 초인에 오르는 건지 모르겠네. 무슨 이런 괴물이 다 있어.’
신체는 무인과 다르지 않고 반응속도는 오히려 그 이상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덤벼볼 만해.’
지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힘은 빠졌다. 이상한 느낌도 힘이 빠졌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점차 약화 되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법했다.
‘그럼 다시.’
발에 힘을 주어서 강하게 구른다. 먼지와 대리석 조각들이 작은 용권풍에 휘말리며 아르데오 앞에 나타난다.
가벼운 기합으로 용권풍을 잠재우는 아르데오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기에 상관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숨을 내쉰 뒤, 들이마실 수 있는 최대한의 숨을 들이마신다.
“후우. 씁”
‘[에우루스의 탑] 1식. 폭풍은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기합으로 용권풍을 잠재우고 앞으로 달려오는 아르데오를 향해서 달려나간다.
아르데오가 다가오기 전, 그 앞에서 수십 번 휘둘려지는 도. 그에 생기는 바람을 도에 붙잡는다.
‘재능을 저 바람에 담고, [에우루스의 탑] 2식. 시작된 폭풍은 끊이지 않는다.’
강철 이상의 강도라고 생각하고 아르데오를 향해 도를 휘두른다. 막히고, 옆으로 차여서 방향이 꺾이지만 끊이지 않게.
여전히 강맹한 아르데오의 발차기였지만, 오러 블레이드를 울리는 느낌은 없었다.
몇 번이고 도가 튕겨 나가자고 방향이 바뀌어도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직진을 했다. 그리고 숨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크아! 이 하찮은 미물이 감히 성혈을 흘리게 하다니!”
“아까 흘린 피는 성혈이 아닌가 보지?”
한 번 이죽거린 뒤 충분히 바람이 위로 올라간 것이 느껴진다. 허리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에우루스의 탑] 3식. 바람이 빈 곳에 폭풍이 생겨나고.’
들어오는 바람을 빨아들인다. 도에 기세를 담아서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린다.
바람이라는 속성만이 가득한 오러가 바람을 끌어들여 온다. 그리고 위로 솟구치는 바람들.
허공을 베고 난 즉시, 아르데오가 눈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 표면에서 작은 회오리가 올라온다.
“이단이구나! 외도를 걸었어! 그것은 너의 재능이 아니다!”
너무나 작은 회오리. 아르데오와 자신을 제외하면 들어갈 공간조차 없는 회오리가 만들어져 두 사람을 가두었다.
아르데오가 외치는 그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한 귀로 흘리고 이내 손에서 힘을 풀었다.
‘거의 한계에 도달했네. 이게 안드로니쿠스님이 말한 [바람의 탑]의 한계.’
바람을 다루는 첫발에서만 머무를 수 있다고 명확히 단정을 지으셨다.
‘그 첫발이 회오리를 만들어내는 거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런데 고작 그 첫발만으로 할 수 있는 일치고는 너무 대단한 광경이었다.
‘회오리의 중심은 고요하다더니. 도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고 계신 걸까.’
바람에 관해서라면 마법사보다 훨씬 잘 아시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이고 싶은 적이 있다면 회오리의 내부에 가두라고 하셨지.’
만들어진 회오리는 바람뿐만이 아니라 오러를 머금고 있었다. 갈가리 찢겨나갈 수 있는 회오리의 내부에 들이는 것이 이해가 안 갔었다.
‘안드로니쿠스님 말씀대로 회오리 안의 벽이 가장 강렬하구나.’
오러가 회오리에 섞여 있으니, 바람에 대해서, 회오리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5보의 거리만이 허용된 회오리의 내부, 그래서 결정 내린 것이 산들바람이었다.
“부드러운 저녁.”
“이 하찮은 외도나 걷는 미물이!”
의외로 도발의 효과도 있는지 노래를 흥얼거리자마자 뛰쳐나오는 아르데오.
턱을 향해서 올라오는 발뒤꿈치에 도를 대고 그대로 뒤로 잡아 밀어냈다.
‘분명히 이상한 느낌은 사라진 것 같은데.’
동작에 더 힘이 실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밀어낸 발이 땅을 찍고 그대로 돌려차기로 돌아온다.
‘역시. 저 눈. 변하고 있어.’
5보 이내의 좁은 공간에서 오가는 공방 속에서 확실히 변하고 있는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다.
핏발에 가득 선 것 이상으로 점점 붉어지는 흰자위. 그에 반해 점점 하얗게 변하는 눈동자.
그 반대급부로 오히려 힘과 속도는 강해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밀어내는데도 자신도 같이 조금씩 밀려날 정도의 힘.
번뜩 피어오르는 생각에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발차기를 도를 대고 막았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밀려날 뻔했지만,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저릿한 손과 허리. 그리고 이때다 싶어 재차 날아오는 반대 발.
연달아서 좌우로 날아오는 다리를 힘겹게 막아내고 참아낼 무렵 때가 왔다.
앞선 발차기보다 훨씬 힘이 담긴 발차기가 날아올 때, 몸을 눕히며 도면으로 날아오는 방향을 따라서 힘을 더했다.
균형을 잃고 그대로 회오리의 벽으로 날아가는 아르데오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일어서 전진한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회오리의 벽을 발로 차는 순간, 발목이 돌아가며 갈려가는 것이 보인다.
바로 목을 베기 위해 아래에서 위로 도를 베려는 순간, 갈려 나가고 있던 발을 힘으로 빼서 도등의 끝을 힘으로 내리고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피범벅의 발이 보인다.
이제는 재갈이 사라지고 입이 자유를 얻었다. 자신의 발에 눈이 돌아간 아르데오가 소리친다.
“미물이! 지금 이 순간 나는 오로지 저 미물만을 바라보고 저 미물의 모든 것을 눈에 담는다!”
그 말과 함께 서서히 하얗게 변하던 동공이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흰자위는 이제 더 이상 하얀색이 아닌 붉디 붉은 색이고 눈 주위로 빨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전신에 핏줄이 나오기 시작하고, 주변으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인다.
‘진짜 위험한 것 같은데.’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 순간, 흐릿하게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아르데오.
가까스로 도를 들어 막았지만, 이어지는 공격들의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겨우 막아내고 물러서는 와중에 보이는 상체의 움직임. 쾌속한 발에 비교해 눈에 하나하나 들어오는 움직임들.
‘빨라진 게 아니라. 이거.’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어떻게, 어느 곳을 막을지 알고 있었다.
한 박자 이상을 앞서 있으니, 속도가 갑작스럽게 빨라 보인 것이 당연했다.
‘달려올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빠르지도 않아. 힘은 오히려 떨어진 느낌이고.’
처음 족쇄가 사라지고 나서 맞은 발차기였다면 자신은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럼 힘으로 가야지. 알아도 막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헐겁게 잡고 있던 도병을 양손으로 온 힘을 다해서 잡는다.
‘단 한 번. 한 번이 중요해.’
양손으로 잡은 도로 최대한 발을 막아내면서 한순간을 기다린다. 맞고 버틸 수 있는 그 한 번.
‘그 한 번도 분명히 어떻게든 알아내겠지.’
솔직히 위험한 상태였다. 몇 번 맞은 내부가, 비껴맞은 것들이 쌓이면서 내장 몇 군데는 상한 듯했다.
근육도 힘을 쓸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들이 전신에서 저릿하게 올라온다.
*
“오고 있습니다. 2명. 생각보다 많이 꼬여서 오는 듯하군요.”
“어디죠?”
“솟아오른 절벽의 가장 끝인 듯합니다.”
“가죠. 카인. 어떻게 돼가고 있어.”
“거의 다 정리했는데, 마지막 3명이 어디 있는지 파악이 안 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적어도 30분. 그것도 파악에만.”
“그림자를 쓴다면?”
“너…. 어떻게. 아니. 안 돼. 명분이 없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야.”
“빚 하나. 회주의 자격으로. 충분할 텐데?”
“후. 알았어. 일단 그렇게 보고 할게. 괜찮겠어?”
“내가 한 실수야. 처리해야지. 그럼 10분 이내로 알고 있을게. 가죠.”
일행과 함께 자리를 옮겨 도착한 절벽의 끝. 솟아오른 절벽이라는 이름처럼 말 그대로 갑자기 솟아오른 절벽의 끝이 보인다.
“혹시 모르니까 준비 해 주시죠.”
거머리 마법사님이 주변에 포자를 띄우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
품에서 시약병을 몇 개 꺼내서 주변에 흘려 놓는다. 준비가 다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절벽의 바닥이 열린다.
“개같이 뛰어서 왔는데 어떡하나.”
절벽의 바닥이 열리고 나오는 재인의 얼굴에 서린 절망이 몹시나 달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잡아요! 당장!”
그 말에 바로 반응하는 비븐. 바로 앞으로 뛰어가는데 재인의 옆에 있는 중년 여성이 단도를 꺼내며 소리친다.
“아버지! 제발. 제발. 제 딸만 구해주세요!”
그리고 단도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린다. 순식간에 피 분수가 솟구치면서 쓰러지는 중년 여인.
그에 맞춰서 달려가던 비븐이 자연스럽게 뒤로 계속 밀린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오즈안.
“초인이 이런 식으로 개입하면 안 될 텐데요. 그것도 그냥 초인이 아닌 당신이.”
더 이상 저 존재는 아군이 아니다. 분류하자면 죽일 수 없는 적군. 신전에 더 이상 호의적일 수 없을 것이다.
“허.허.허. 왜. 어찌하여 네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아버지. 제발. 제 딸만큼은 살려주세요.”
쓰러진 상황에서 피를 쏟아내면서도 중년 여인은 또박또박 말한다. 필사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도 괜찮지 않겠나. 선심을 쓰는 것도.”
“지금 당신이 저 여인이 죽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탁 이상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선심은 무슨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저들에게 당한 피해가 얼만데 그깟 선심이라니.
“애초에 자신은 개입할 수 없다면서 아르데오에게 범이를 던지고 나온 것도 당신입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자책 뒤에 머리를 굴려보니 이상했다. 마음을 놓았다고 해서 놓칠 부분이 아니었다.
성하께서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그 맹점을 저 인간이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성하께서는 그냥 가두거나 하실 생각이었겠지. 저 치는 그것을 살짝 비튼 거고.’
생각이 정리되고 나서야 이용당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힘. 힘이 없다는 게 이다지 불편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 그리고 미리 속단하는 위험함도.’
애초에 저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아니 간과했다는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
‘카인이 분명이 말을 했는데도 내가 넘겼지. 성하의 인자함을 사용할 줄이야.’
성하의 손과 발. 그리고 몽둥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고 자신의 눈이 가려졌다. 아니 놓쳤다.
“자신의 욕심과 동정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 모를 리 없을 텐데요.”
“후우.”
한숨을 쉬는 것을 보니 더 불안감이 차오른다. 하필이면 저런 괴물이라니.
“그래. 모순이지. 하지만, 힘이 있는 모순은 때론 진실이 되기도 하지. 이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지고 가도록 하지. 가거라. 너의 길을 막을 이는 없을 터이니. 다만 동대륙으로 가거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말에 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비븐과 레조난이 움직이려 하지만,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보인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 잠시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네.”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다. 자신이 힘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싫을 수가 없었다.
‘좀. 빨리!’
마지막 안배가 고개를 들 생각을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