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온 마음이 놓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음이 놓여도 여전히 미칠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 불길한 기운은 더욱 강해져 원형의 판이 마침내 바닥에 닿았을 때는, 도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초록 연기의 재인도 꽤나 긴장을 했는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걸어나가는 것이 보인다.
“재인도 무섭기는 무섭나 본데?”
“글세. 너가 이걸 느끼면 ‘무섭다’라고 단순히 이야기하지 못할 텐데 말이지.”
불길하고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 지르는 본능과 다르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사뭇 경건했다.
하얀 대리석, 마치 빛이나 보이게 정돈된 기둥과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건물과 모습이 완전히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면 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곳이 맞는 거지?”
“어. 신전. 그것도 대예배당 가는 길이랑 똑같이 해 놨네.”
“허허. 어쩐지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곳이랑 똑같군.”
더욱 어이없는 것은,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초록 연기의 재인이 한 행동이었다.
“지금 얘 무릎걸음으로 걷고 있는 거지?”
“이 정도면 사이비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문은 자연스럽게 열렸는지, 무릎 걸음으로 걸어가 문 앞에 있다가 일어서서 들어가는 연기.
“하. 근데 진짜 이 문 열기가 너무 싫은데.”
문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불길한 기운이 그 문을 마치 지옥의 문처럼 느껴지게 했다.
“내가 열게.”
량이 당당하게 걸어서 문을 열자 상상하지 못했던 압박감에 무릎이 꿇려지려고 한다.
부단장님과 자신만이 겨우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다. 온 힘을 다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긴 직사각형 모양의 내부공간, 맨 끝쪽에 단 한 칸 높은 곳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있는 청년.
단상 바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재인. 문 바로 옆에서 피를 토했는지 내장조각과 함께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는 마니에르.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엄청 달짝지근한.’
“성안(聖顔)을 그리 오래 보고 있으면 안 되지.”
나른하고 권태로운 얼굴의 청년이 말하자 전신을 누르는 압력이 더 강해진다.
할머니를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참을 수 없었을 압박. 부단장의 어깨와 얼굴이 수그러지는 것이 보인다.
“너구나. 내가 보지 못한 변수. 본래는 존재해서 안 되는 변수.”
나른하고 권태롭기만 한 그 얼굴에 광기가 서린 눈빛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늙은이가 무엇을 믿고 있었나 싶더니.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섰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 초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이들을 마주하면 절로 경외심이 떠오르곤 했다.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 내뿜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뭐지. 역겨운 게 아니라 찐득한 끈적이는 이상한 느낌이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싶게 만드는 이들과는 다르게 강제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런 것을 넘어서서 자신만이 이 세상에 유일한 무언가라고 강요하는 느낌이었다.
힘이 없는 이가 그리 말하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만, 힘이 있는 이가 그러니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너는 나의 세상에 없다. 그러니 사라지거라.”
이상한 느낌이다. 세상이 자신을 속박하고 지우려고 하는 기괴한 느낌.
온몸에 오러를 회전시키면서 재능을 전신에 두른다. 그저 본능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꺼져!”
소리를 지르고 나니, 그제야 이상한 느낌이 사라진다. 압박감은 여전했지만, 기괴함은 사라졌다.
“쯧. 주제에 변수라 이건가. 그러나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서도 원하지 않는 것이지.”
‘내가. 씨발. 이래서 오기가 싫었는데! 뭐라도 좀 해라 제발’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압박은 압박대로 느껴지는데 그 기괴한 느낌이 계속 조여 온다.
“우선은 그 건방진 눈이 보고 싶지 않군.”
필사적으로 오러를 순환시키면서 재능을 있는 그대로 끌어올려 보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온몸을 지우려고 하는 느낌과 다르게 눈 주변으로만 느껴지는 기괴한 느낌.
시야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점차 뿌옇게 보이려 하는 당장의 상황이 너무나 두렵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구슬이 깨지는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아. 씨발 뒤질 뻔했네.”
걸걸하기 그지없는 량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에서 새는 피를 소매로 대충 닦은 량은 보기 드물게 분노에 차 있었다.
“하. X같이. 예전 성격 나오게 하네. 진짜 뭔 이상한 새끼 때문에 이게 뭐야. 진짜.”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깨진 구슬이 있는 바닥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늙은이의 청소부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나. 신언으로 맺은 계약은 아직 유효할 텐데?”
사람의 형상이 만들어지던 바닥은 어느새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되어서 일어섰다.
‘오즈안님을 부르는 게 아니었어? 하. 개같은데. X된 거 같은데.’
불안감이 급속도록 차오르면서,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 빠르게 자라난다.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량이 말한 소환 덕분이었다.
원리는 모르지만, 던지면 우리가 있는 장소로 오즈안님이 나타나신다고 했다.
오즈안님의 힘을 아주 조금이나마 겪어보았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는데, 눈앞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제는 완벽하게 오즈안님의 형상을 한 대리석 덩어리가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하튼 미꾸라지 새끼 하나 때문에 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안 그러냐 아르데오.”
‘설마했는데, 진짜 저 청년이 아르데오라고? 저렇게 어린 얼굴이라고?’
새하얀 형상의 오즈안님이 손을 휘적거리니 단상이 낮아지고, 쓰러진 이들이 한구석으로 정리가 된다.
“쯧. 그놈은 신언으로 계약을 왜 해서. 야. 어디서 건방지게 앉아있어.”
다시 손을 휘적거리니 순백의 빛을 내고 있던 거대한 의자가 순식간에 분해가 된다.
“청소부가, 그것도 분체로 감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사라지고 싶다는 거겠지?”
“호오? 확실히 변했구나. 역시 외도는 쓸모가 없다니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만.”
권태로움으로 가득하던 청년, 아니 아르데오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괜히 통쾌했다.
“범아. 미안하구나. 사정이 있어 내가 크게 개입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구나.”
“그래도 저희를 모두 데리고 나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신 거죠?”
솔직히 이 자리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시야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그것도 조금은 애매하단다.”
다시 한번의 손짓에 바닥에 있던 대리석이 올라오더니 아르데오와 재인을 가두었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연결을 강하게 하는 것밖에 없단다.”
량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별반 소득이 없었다. 이 정도일 것이라 생각을 못 한 듯했다.
전신에 차가운 물을 쏟아부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든다. 방법이 없다는 것.
‘원하는 게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량을 만날 이유가 없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거야.’
량을 사지로 보낼 이유가 없다. 자신이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량이 이곳에 존재했다.
파울로님이 신전에 많이 양보한다고 하지만, 말 그대로 양보였다. 종속적인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생각이 든다.
“연결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 뭔가요.”
“좋아. 결단이 중요하지. 네가 역겹다고 느낀 이들과 저 미꾸라지의 연결이 강해지는 것이란다.”
“그 연결이 강해지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지금 한창 전쟁 중이지. 너희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그들과 연결이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미꾸라지는 약해진단다.”
“그래 봐야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상대가 죽으면 그 이상의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아직 저 미꾸라지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
“저보고 믿으라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의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거라. 길게 설명해 줄 수는 없지만, 바다에서 한 바가지 펀다고 차이가 없지만, 그것이 뚫린 구멍이라면 어느 순간 해수면이 낮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때까지 어쨌든 버텨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요. 방금 그 잠시만으로 저는 눈을 잃을 뻔했습니다만.”
“그건 네가 이미 지고 들어가서 그런 것이란다. 그 부분은 도움을 조금 주마.”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요.”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너무 멍청했어.”
넋이 나간 표정에서 돌아온 것을 보니 비슷한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하긴. 나도 생각을 했는데, 량이라고 다를까.’
이곳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사람이 있다면 오로지 량 그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괜찮아. 뭐. 어떻게 하겠어. 확실히 승산이 있는 거겠죠?”
“내가 보기에는 그러하단다.”
“다른 이들은 데리고 가주시죠.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길을 만들어주마. 그 정도까지다.”
또다시 느껴보는 무력감. 힘이 없어서 결정권에 휘둘리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알겠습니다.”
벽이 깎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오즈안님의 손짓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벽들.
“이 청소부가!”
말을 하면서 달려오던 아르데오의 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다. 시시각각 갉아 없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
‘족쇄는 얼마 안 지나면 사라질 것 같고, 재갈은 그래도 쫌 버티려나.’
“자! 이 정도면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길은 너희 뒤로 열어주마.”
“아버지!”
그때 한켠에서 문이 열리며 달려 나오는 여성이 외치는 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나는 너 같은 딸을 둔 적이 없다. 그럼 부탁하마.”
잠시 뛰쳐나온 여성을 바라보던 오즈안님은 이내 매정하게 말하고 그대로 먼지로 사라지셨다.
그대로 주저앉는 여성이 보였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빨리 가. 괜히 이러고 있다가 큰일 난다. 너희도, 그리고 부단장님도.”
“미안해. 진짜 미안해.”
“마르쿠스. 얘 데리고 가. 빨리!”
족쇄가 점점 갉아져서 없어지는 것이 보인다. 광기와 분노가 섞인 기세는 훨씬 강렬해졌다.
‘저릿저릿하네. 그나마 저렇게 마구 날려서 다행인가.’
일행들이 뒤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정면으로 아르데오를 마주한 순간부터 다른 곳에는 쓸 힘이 없었다.
‘저 괴물을 내가 맞상대할 수 있다고. 진짜 이해가 안 가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변화가 있다는 점이었다. 광기와 분노로 기세가 모이지 않고 폭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재갈이 물려서 그런지 그 이상하고 기괴한 느낌이 덜 하다는 점이었다.
‘덜 이라서 문제지. 하. 일단.’
전신에 일단 끌어올리던 오러를 오러 홀로 모았다. 그 짧은 순간 느껴지는 기세에 죽을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가까이. 마치 하나처럼. 정말 딱 붙여서.’
사람은 죽을 것 같으면 뭐라도 해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