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벽면이 열리며 드러난 광경은 어이가 없다기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하는 장면이었다.
레핀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고, 마르쿠스의 목에는 익숙한 창날이 대어져 있었다.
그 둘에게 마나 구속구가 묶여있는 것도, 비참한 얼굴로 있는 것도 열이 끓어오르게 했지만, 더 열 받게 하는 것이 있었다.
“마니에르!!!”
“대장. 미안.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왜! 어째서!”
지금의 삶에서는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모두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이었다.
뒤통수와 기만이 판을 치던 전생과는 달랐다. 그래서 마음을 놓았던 것이 잘못이었던 건가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눈을 빛냈던 마니에르의 첫인상부터 모든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무리 버려진 황자라 해도, 조국을 내려놓을 수는 없더라고.”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는 마니에르였지만, 온몸을 잠식하는 것은 깊은 배반감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찢어 죽이고 싶었다. 아니, 한껏 팬 다음에 이유를 묻고 싶었다.
위치도 괜찮았다. 자신의 바로 옆 벽면에서 나타났다. 재인보다 자신이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더 분노를 키운다. 마르쿠스와 레핀의 모습이 머리에 화인처럼 박힌다.
마리에르의 빠르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이성과 감성이 미친 듯이 부딪힌다.
“지금 당장 피를 이쪽으로 보내! 아니면, 팔 하나를 자를 거야!”
“미안한데 그럴 생각은 없는데, 대장 그냥 물러나 주시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마니에르가 가식적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재인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대장이라고 해도, 이 거리에서는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괜한 생각 마시고, 물러서세요.”
마르쿠스의 목에 댄 창날을 까닥이는 저 손을 부셔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손? 손. 손이 왜 익숙하지.’
분노로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지만, 머리는 무언가 익숙함을 감지한 듯 돌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믿지? 애초에 배신자를 믿는 것이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나?”
공간을 채우는 분노와 살의를 한 곳으로 모은다. 그것을 마니에르에게 집중한다.
“와. 진짜 죽을 것 같은데,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다리가 떨리는 마니에르가 눈에 들어온다. 점점 눈이 붉어지려고 하는 것도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창을 잡고 있는 손. 머릿속을 간질거리게 하는 그 손이었다.
‘3번 대형으로, 미끼는 자신. 이 새끼들이 진짜. 장난하나.’
빠르게 식어가는 분노가 다른 열 받음으로 차오르기 시작한다. 왜 눈에 익나 했더니 자연스럽게 읽히는 수신호 때문이었다.
수호대를 훈련시키며, 수호 용병대 시절 배운 수신호를 가르쳐준 적이 있었다.
몇 가지 대형을 변형시켜서 수신호는 그대로 가르쳐주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수신호가 그중 하나였다.
3번 대형은 미끼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특정 마수들을 상대할 때를 위한 대형.
수호대도 종종 잘 써먹던 대형이기에 바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량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허허. 그러기에는 인질을 교환할 수가 맞지 않는 것 같네만.”
거기에 생각지도 않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갑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팔 하나가 잘린 검사와 기절한 검사를 끌고 오는 부단장님. 자잘한 상처 외에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인질의 가치는 대상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따라 다른 거지요. 피가 아닌 저 둘은 그리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군요.”
“글쎄. 자네는 그럴지 모르지만, 저쪽은 생각이 다른 것 같네만.”
“저쪽과 저는 동등한 관계라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대장에게 이 둘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니에르의 동등하다는 말에 얼굴이 찌그러지면서도 뭐라고 말을 못 하는 재인.
“우선 레핀부터 건네주지. 위험 해 보이는데.”
“에이. 레핀 정도면 몇 시간은 거뜬하죠. 괜찮아요.”
“더 이상하면 뭐든 간에 여기서 다 찢어 죽이는 수가 있다.”
능글거리는 마니에르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마니에르도 그렇지만, 량이 이 새끼도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지나쳤다. 진심으로 열이 받는 상황이었다.
“빨리 정리해! 쓰러진 놈을 두고 니가 이리 오면 되잖아! 쟤 눈 돌아가는 거 안 보여?”
여러 일이 동시에 터져 혼이 나갔는지, 재인은 자신이 진심으로 파탄 낼 것이라 믿는 듯했다.
“뭐. 그 정도야. 대장? 여기 두고 갑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마르쿠스의 목에 창날을 얹은 채로 재인에게 다가가는 마니에르가 어딘가 모르게 즐거워 보인다.
‘저 새끼. 나중에 마르쿠스한테 손 보라고 시켜야지.’
우선은 한 번 만져준 뒤 추후의 일은 마르쿠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부단장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가서 데리고 올게요.”
“그렇게 하게나. 참 개같은 상황이구만.”
재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멈춘 마니에르가 고갯짓을 하니, 그제야 레핀에게 달려갈 수 있었다.
황급히 레핀의 목에 손을 대보니 멀쩡했다.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는 뭔가 싶었다.
뭐라고 달싹거리는 레핀의 말이 들려왔을 때, 이 새끼도 한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장. 난 기절해 있슈. 좀 부탁합시다.”
“이 새끼들아. 너희는 다 뒤졌다 진짜.”
대답을 듣지 않고 상처처럼 보이는 부위에 포션을 쏟아붓고는 벽에 등을 댈 수 있도록 뉘었다.
“이제 피를 보내! 그러면 마르쿠스를 보내 줄지 생각해볼게!”
그새 다시 의기양양해진 재인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마르쿠스가 나한테 어떤 의민지 알아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쟤도 참 불쌍하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야 마르쿠스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헛소리하는 재인을 마니에르가 재촉해서 사라지게 했다.
7층으로 향하는 다섯 사람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옆으로 온 마르쿠스는 진심으로 비통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뭔 소리야. 됐어. 저걸 어떻게 알았겠어.”
재인이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레핀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량을 막고 있던 투명한 벽이 언제 사라졌는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진짜 미안해. 근데 이 시나리오로 갈 줄 몰랐어.”
저 표정이 진심일까. 아마도 아니지 않을까 싶다. 갈 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아니었더라도 이런 시나리오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인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량이었다.
“확실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진짜 미안해. 근데 조금 급해서.”
“지금 방금의 배신이 계획이었다고 말하는 건가?”
놀라는 부단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니 부단장님도 어이가 없을 만했다.
“네. 부득이하게 속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언반구 없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솔직히 이 상황으로 가게 될 줄 몰랐습니다. 대비하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경악을 표하는 부단장님. 량과 자신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여신다.
“이게 대비한, 아니 범군은 몰랐는데 임기응변으로 대응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멀쩡히 일어나서 나오는 레핀을 보며 또 놀라시고, 두 사람의 손에 있던 마나 구속구가 쉽게 풀리는 것을 보면서 경악을 하는 부단장님이었다.
“수신호가 있어서 그나마 눈치챌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수신호가 눈에 들어왔단 말인가! 대단하군.”
“아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덕이었겠지만, 진짜.”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량을 보자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연다.
“그나저나 우리 빨리 움직여야 해. 괜히 마니에르에게 일을 맡긴 게 아니라고.”
“뭔데.”
“일단 따라와. 우리도 7층으로 향한다.”
7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아무런 문도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7층으로 올라가니,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숙소…. 같은데?”
침대와 옷장이 있는 이상한 공간. 장롱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침실로 보였다.
“기다려 봐.”
손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량을 보니 준비해 놓은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저 가방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뭔들 다 나오는 것 같은데.’
초록색 연기가 가득한 포션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량의 단봉에 따라서 이내 초록색 연기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저거?”
“재인이야. 재인이 이 방에서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량의 말대로 재인의 형상을 만든 초록 연기가 장롱 옆으로 향하더니 벽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량은 재빠르게 다가가서 그 연기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러자 장롱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마치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초록색 연기는 드러난 통로를 향해서 그대로 들어갔다.
“빨리 따라와. 이거 지속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
그 소리에 일행이 량을 따라서 통로로 들어갔다. 초록 연기를 따라 하니 바닥에서 원형의 판이 올라왔다.
“이거?”
“그런 것 같지?”
어리둥절한 일행과 달리 익숙한 일이었다. 원형이 그대로 일행을 올린 채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인 것 같은데. 돈이 많으면 다 이런 게 하나쯤 있나?’
마치 익숙한 듯 서 있는 부단장님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한두 번이 아닌 듯한 태도였다.
그 생각도 잠시, 반쯤 왔다고 느낄 때부터 불길한 감각이 엄습했다.
점점 더 내려갈수록 그 불길함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압박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정도야?”
표정을 보았는지, 량이 물어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을 쉬는 량이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혼나는지 모르지? 그놈에 감이 뭔지. 본래 그 어떠한 이보다 연금술사의 감이 좋아야 하는데, 넌 뭐냐.”
뜬금없는 량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다소 분위기가 환기되기는 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진짜 위험해. 온몸이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고.”
그 말에 분위기가 다시 경직되려는 찰나, 다시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는 량이었다.
“알아. 너 진지한 거. 나도 내 목숨이 이제는 내 목숨이 아니라 마음대로 살지도 못해. 에효.”
계속해서 하는 헛소리, 아니 분위기를 풀어지게 하려는 소리를 들으니 위화감이 느껴진다.
‘이런 소리를 하는 애가 아닌데. 또 뭔가를 준비했구나. 이 새….’
분명 무언가를 준비해 놓고서는 마음에 걸리니 이러는 것이 분명했다.
“뭔데. 또 뭐가 있는 건데.”
“내가 살아오면서 나 스스로가 꽤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
갑자기 자기 자랑을 하는 량이었다. 더 짜증 나는 건 사실이라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진짜. 세상에 괴물이 왜 이렇게 많냐. 나는 스승님만 제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수식어가 너무 많아서 골라 불러야 하는, 아니 이제는 다른 것도 아닌 연금술 그 자체로 여겨지는 파울로님을 제낀다는 소리가 저렇게 어울리는 인간이 있을까.
“성하는 성하니까, 장모님도 장모님이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와.”
“왜. 뭔데. 누구를 만나고 왔길래 너가 이 정도로 질린 건데?”
세상에 량의 기준만큼 괴랄한 기준도 없었다. 그 기준치가 워낙 높아서 평균이면 세상은 천재라고 부른다.
그런 량이가 기가 질릴 만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네 덕에 만난 분이야. 내가 [무투의 탑] 탑주님을 뵙고 왔거든.”
그 말에 감을 잡은 것은 놀랍게도 부단장님이었다. 오히려 레핀과 마니에르는 그래서? 라는 얼굴이었다.
“그분을 뵙고 왔다면 그럴 만하지.”
“알고 계신가요?”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후작님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들은 게 있다네.”
“그래서 받아 온 게 있지.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