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게 가능할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전장에서는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장에서 용병의 영향력이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병사와 비슷한 정도. 그렇기에 믿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다른 선택권이 애초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부단장님을 믿고 천천히 걸어가는 내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손에 도가 들려있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창이 심장을 노리고 검이 목덜미를 노리지만 눈은 오롯이 재인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부단장님의 기가 막힌 웃음소리가 귀에 들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허허허.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대단하네.”
“당연한 일이잖아요. 아군을 믿는 것. 그것도 이렇게 능력이 좋은 아군이라면.”
“이거. 늙은이를 다룰 줄 아는 청년일세.”
“뭐.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 하나 보이긴 하지만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부단장을 뒤로하고 점점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색이 된 재인의 얼굴이 점점 뚜렷이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 아! 넌 믿음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다.”
옆에 있던 검사가 소리 없이 앞으로 나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굴색이 돌아오는 재인이었다.
“나는 믿음을 받는 존재지, 주는 존재가 아니라서. 너는 모르는 그런 게 있어.”
“개소리하고 있네.”
싸늘한 느낌에 앞으로 나서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목 앞을 지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
아무말 없이 무표정한 사내의 눈빛이 살짝 이채가 어렸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검사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네. 암살자인가. 그 중간인가? 이 시기에?’
전쟁이 발발해서 각광받는 직업군이 생겼으니, 바로 암살자였다. 새로이 각광받는다기보다, 양지로 나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검사 중에서도 살검에, 그것도 조용히 목숨만 취하는 살검에 통달하는 이들이 많이 생겼지.’
암검이라고 새로이 분류되는 그 검을 지금 본다는 것이 새로우면서 씁쓸했다.
‘전검(戰劍), 암검(暗劍), 비검(飛劍), 진짜 수많은 검술이 새로 만들어지고 떠올랐는데 말이지.’
역설적이게도 전쟁만큼, 그것도 거대한 전쟁만큼 발전이 가속화되는 시간도 없었다.
수많은 전술과 마법 그리고 검술이 탄생하고 정립되는 그 시기. 자신은 그저 잡도였다.
‘정신 차려야지. 이게 진짜 암검이라면, 나도 여유 부릴 수 없어.’
암검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무시당하던 풍조가 사라지고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을 뿐이다.
검을 휘두르는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움직이는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장에서 그것은 치명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그러한 검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것도 꽤 역사가 깊어 보이는.
‘기척도, 검의 소리도, 심지어 오러조차 고요하구나. 이게 전통이라는 거겠지.’
하나라도 부족할 만한데,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조화를 이루어 더 고요해졌다.
“암검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신기하네. 그것도 마스터가.”
“……!”
“말을 못 하나 보네. 너도 그림자 중 하난가 보지? 보아하니 속박된 그림잔가 보네.”
눈이 찢어질 듯 커지는 검사의 얼굴을 보니 확실한 듯싶었다. 그러면 진짜 위험했다.
다시 싸늘한 느낌이 옆구리에 어린다. 평소보다 훨씬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는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검사가, 옆구리가 있던 곳에는 검이 있었다.
물러서는 동시에 탑을 열었다. 땅에 다리를 대었을 때는 이미 세 탑이 모두 열려있었다.
‘빨리 끝내야 해. 시간을 끌면 암검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니까.’
개방된 세 개의 탑을 하나의 탑으로 엮는다. 이제 조금은 그럴싸하게 엮을 수 있었다.
팔격형으로 이루어진 각 탑이 중앙에 삼각형을 비워두고 마치 하나의 탑처럼 뭉친다.
전신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진다. 오러가 바람이 되어서 전신을 누비고 다녔다.
‘확실하지 않을 때는 주변을 함께 쓸어버리면서 가야지.’
도를 팔방으로 휘두른다. 그리고 오러를 모두 끌어올리며, 도에 재능을 담는다.
‘보이는 이 순간에 점이 아니라 면으로 다가간다는 느낌으로.’
작은 바람이 기세와 함께 섞이면서 하나의 흐름이 된다. 그 흐름을 도에 붙잡고 앞으로 튀어나간다.
‘[에우루스의 탑] 1식. 폭풍은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마스터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게 된, 아니 변형할 수 있게 된 검식.
그리고 그 순간 도에 잡혀있던 흐름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속도를 더해 간다.
그 흐름을 담아서 그대로 정면의 검사를 향해서 휘두른다. 흐릿하게 변하는 그 검사의 신형, 그리고 오른쪽에 일렁임이 보인다.
‘이거?’
익숙한 암검이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나타나는 암검. 암검 중에서도 유명했던 암검.
다시 도를 들어 일렁임이 있는 곳으로 휘두른다. 위에서 아래로 베는 단순한 베기에 폭풍의 움직임이 변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허공에 도가 베어지자 검의 감촉이 느껴진다.
느껴지는 감촉에 도를 뉘이고 그대로 타고 들어간다. 동시에 발을 강하게 구른다.
기세와 바람에 어린 재능은 공간을 그대로 찢고 들어간다. 찢어진 공간에 나타나는 검사.
그제야 도가 타고 들어가던 검이, 그 검을 쥐고 있는 검사가 뚜렷하게 보인다.
순간, 눈에 작은 섬광이 터진다. 그리고 다시금 사라지는 검사. 도에 감촉이 사라졌다.
‘신기루가 데스투도가 아니라 [맘몬]의 소속이었구나! 그런데 이상한데.’
새로 태어난, 그리고 조명받은 검들 중 본류에 가까운 명성을 얻은 검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암검. 그중에서도 신기루라 불리던 암검이었다. 데스투도 백작가의 일원으로 출정한 검사.
처음에는 불신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어떻게 어린 여자를 내보내냐는 시선.
15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신체를 가진 여성 검사. 모두가 한목소리로 데스투도 백작가를 욕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그 욕은 칭송으로 바뀌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12명의 목을 잘라왔다.
가장 낮게는 천인장, 높게는 책사의 목을 누구도 모르게 베어 온 것.
몇 번의 전투가 이어지고 전장에서 어린 여자를 보면 무조건 도망가라는 말이 돌았다.
모두가 보지만 누구도 잡을 수 없고 어느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라며 칭송받았다.
‘그런데 분명히 어린 여자였단 말이지. 나이는 많았지만. 무슨 병이라고 했는데 말이지.’
풍문으로 듣던 신기루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조건 풍문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결이 달랐다.
‘전생에서 들은 풍문에는 사라지는 것과, 나타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었지. 이런 얕은수가 아니라.’
조금 억지를 섞어서 신기루를 만드는 느낌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기는 했다.
거기에 이런 확신을 내릴 수 있는 이유가 자신에게는 있었다. 같은 전장에서 몇 번이고 같이 구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분명히….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분명 혼자 날뛰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나타나 목을 잘라가곤 했다.
이번 생을 통틀어서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적이었고 검술이었다.
‘어쨌든 이제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이 정도라면 쉽지.’
전생에서는 초인이 나서야만 그녀를 사살할 수 있었다. 한 대대를 제물로.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걸 할 수 있지.’
잡고 있던 흐름을 놓아버린다. 도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폭풍이 바람으로 화(化) 한다.
기세가 섞인 바람에 일렁거리는 곳이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곳을 향해 강하게 발 구름을 구른다.
한 번. 땅이 살짝 울린다.
두 번. 조금 더 강한 일렁임.
그리고 세 번. 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용권풍이 쓰임이 많단 말이지.’
바닥에 작은 용권풍이 만들어지면서 바닥을 긁어낸다. 땅이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바로 존재를 드러내는 검사. 그를 향해서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도를 내리긋는다.
검사의 검에도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검에 도가 닿는 순간, 그대로 몸을 밀착한다.
“아직 많이 어설픈가 본데?”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그대로 다리를 걸어서 넘어트리는 동시에 옆구리를 벤다.
넘어지는 가운데 검을 옆구리 옆으로 붙이더니 그대로 날아가며 피한다.
놓지 않고 그대로 따라붙어서 다리를 베었지만,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뒤로 굴러서 피하는 검사를 따라가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3보. 그 안에 있으면 되겠어. 근데 진짜 까다롭네.’
몸을 움직이는데 기척이 나지 않는다는 게 이토록 까다로운 일일 줄 몰랐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까다롭다. 검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으니 반응이 살짝 느려진다.
몇 번의 공방이 오고 가는 사이에도 최대한 간격을 주지 않기 위해 붙어있었다.
점차 검사의 몸에 도흔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할 즈음 느려지는 순간이 눈에 들어왔다.
재능을 담은 도로 다리를 베어내려던 순간, 갑자기 토할 것 같은 역함과 함께 머리가 띵해졌다.
그 동시에 몸에 품고 있던 모든 기세를 방출하면서 주변으로 다시 폭풍을 그려냈다. 그저 본능이었다.
옆구리에 화끈한 느낌이 나면서 다시 띵한 머리가 돌아오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재인뿐이었다.
‘진짜 개 같은. 그나마 다행이네.’
본능적으로 펼쳐낸 폭풍은 주변을 모두 찢을 기세로 피어났지만, 일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재인의 머리가 저렇게 날릴 정도인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뭔가 더 있다는 거겠지.’
본래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을 테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실착이 있었다.
‘그래도 이 역겨움만큼은 없어지지를 않는구나.’
기척도 기세도 바람에 일렁임도 모든 것을 숨겼지만, 미친듯한 이 역겨움은 없애지 못했다.
‘아니. 애시당초 이 역겨움을 모를 테니까. 없앨 수가 없겠지. 그리고.’
역겨움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서 다시 세 번의 발걸음을 밟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그대로 주변에 펼쳐내던 폭풍을 도에 담아서 쏟아낸다.
숨을 한 번 쉬는 그 순간에 수십 번의 도격이 폭풍과 함께 앞의 공간을 찢어발긴다.
“말도 안 돼! 아니야!”
소리를 치는 재인이 보이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순간 선혈이 튄다.
“진짜 징하다.”
피가 흩날리면서 이제는 위치마저 정확하게 보이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전신에 공기를 잡아둔다. 그리고 숨을 참은 채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도격을 그려낸다.
강하게 발구름을 구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모으고 모으면서 한순간을 위해서 참아낸다.
모든 힘을 쏟아내려고 하는 순간, 재인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친구들이 죽어도 좋다면!”
그 동시에 한 벽면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광경은 자신의 머리를 정지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