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모이자 조금은 어색한 듯 입을 여는 거머리 마법사.
“전장에 구르면 이것저것 잡스러운 소식을 많이 듣게 된다네.”
뜬금없는 전장의 이야기였지만, 모두 말을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실종에 관한 소문들이 무성해졌었다네.”
“실종이요?”
“타의적인 실종이 아니라 소문이 더 무성했지. 이름을 조금 알린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말이네.”
거머리 마법사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이야기꾼이었다. 어느새 모두 그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그 소문에서 끝났으면 그리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이들의 원수들이 죽거나 병신이 되는 일이 발생하더군.”
그 말을 받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라트였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그럼 전장에 있는 이들이?”
“아마 대부분 그런 식으로 포섭한 실험체들일 겁니다.”
“그럼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도대체 누군가?”
“솔직히. 저는 재인밖에는 모릅니다. 그리고 재인의 어머니. 그 외에는 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허. 참 괴이한 집단이지 않은가. 당최 알 수가 없군.”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정도 병력이라면 아마도 가능하지 싶습니다.”
그 말을 자연스럽게 받은 것은 량이었다.
“마법사님을 굳이 모시고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 잔챙이를 전부 나에게 몰아줄 생각인가 보군.”
“네. 정확합니다.”
잔챙이를 맡긴다는 말에 기분이 별로 나빠 보이지 않는, 오히려 기분 좋아 보였다.
“대단하군.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장 효율적인 곳에 사용하다니.”
“초청했으니, 당연한 바입니다.”
“좋네. 내가 다 맡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백합 기사단은 부탁드리자면 1검에서 7검이 마니에르, 레핀, 마르쿠스와 함께했으면 합니다.”
“적어도 마스터 한두 명은 있다고 판단하는 모양이군?”
“아마.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단과 저들의 손이 안 맞을 텐데?”
“제 예상으로는 1검에서 7검이 마스터 한 명을, 그리고 셋이 마스터 한 명을 맡았으면 합니다.”
“허! 저 셋이 가능하겠는가?”
“네. 충분합니다.”
“알았네. 단장과 함께하지.”
‘그러고 보니 자연스럽게 부단장이 말을 하네? 량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비븐님과 레조난님은 절 부탁드립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량아. 나도 참가할게.”
“괜찮겠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야. 확실하게 해야지.”
“그럼 마르쿠스쪽과 함께해. 합은 안 맞겠지만, 너라면 가능할 법도 하니까.”
“알았어.”
베라트까지 참가를 확정하고, 일행의 이동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잠시만.”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빛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자의 숲이 끝나가는 지점에 베라트가 멈추어 섰다.
“그림자의 숲이 이렇게 빽빽하게 자라날 수 있는 이유가 오히려 영지를 방어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고.”
“그렇겠지 연근목(蓮根木)이니까.”
“도대체 넌 모르는 게 뭘까 싶다 이제는.”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량을 바라보니, 간략한 설명해주는 량이었다.
“높게 솟은 나무의 끝이 해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뿌리는 모두 한데 뭉쳐서 대지와 물의 기운을 받아들이니 이렇게 생동감 있게 자랄 수 있는 겁니다.”
“뿌리가 모두 하나라는 뜻인가?”
“하나라고 하기 보다는, 자라면서 뿌리들이 하나로 뭉친다고 봐야겠죠.”
“그래서 땅을 팔 수가 없지. 이 정도의 군락이면 뿌리가 어디까지 자라는지 상상도 하지 못하니까.”
그러면서 나무 둥치를 그대로 열어젖히는 베라트를 보면서 량이 감탄했다.
“하! 천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괜찮은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겠다고?”
“뭐든 모르면 어렵지만, 보면 쉽지. 군락을 키운 거겠지. 미리 통로를 만든 후에.”
량의 말에 그래도 굳어버린 베라트였다. 뭔지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정답이었나보다.
“진짜 괴물은 너였구나. 재인이 왜 그렇게 널 위험하다고 한 줄 알겠다.”
“오? 재인이 그랬어?”
“파울로님의 제자라는 것은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라고 하더라고.”
“주제에 보는 눈은 있네. 아니 스승님을 조금은 아는 건가?”
조금은 비웃는 듯 말하는 량에게 대답하는 이는 다름 아닌 부단장이었다.
“귀족 가문의 자제라면 누구든 알아야 하는 기본 소양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 같잖은 3재(災)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요?”
“그대의 입장에서 같잖을 수 있지만, 멋모르고 날뛰는 이 한 명 때문에 가문이 사라질 수 있는 귀족에게는 필수적인 거라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귀족들은 알고 있는 정보의 수준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3재는 또 뭔데?”
“있어. 귀족들이 마음대로 정해놓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아니 보면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어야 하는 세 명의 재앙.”
“마음대로 정했다기에, 고작 30년 전의 일이 아닌가.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장난이 아니라네.”
“그거야 멋도 모르고 사기를 치려고 하니 그런 것이지, 저희 스승님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안 합니다.”
“알고 있네. 파울로님의 한 걸음은 그 무엇보다 무겁다는 것을.”
자칫 조금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에 베라트가 타이밍 좋게 말을 꺼냈다.
“됐다! 이제 들어가면 돼. 아무래도 발견될 수 있다 보니 조금 복잡하게 해 놓아서.”
마음 같아서는 엄지를 치켜세워주고 싶은 타이밍이었다. 베라트가 연 밑동에는 긴 지하통로가 있었다.
“생각보다 쾌적한데? 공기도 잘 통하는 것 같고, 아예 흙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다 돌이지. 애초에 만들 때 통로의 벽과 바닥을 돌로 만들었어.”
“후퇴로 중에 하난가 보네. 네 말대로 개구멍이 맞구나.”
“대피로 중의 하나이긴 하지. 근데 아마 다른 곳도 많을걸?”
베라트의 걱정 섞인 말에 다시 평소의 얄미운 표정을 되찾은 량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어차피 갈 수 있는 곳은 없을 테니까.”
“너가 그렇게 말하면 이제는 무서워. 뭔 짓을 해놓은 건데.”
“아직 안 했어. 조금 있다가 될지도? 베라트 덕분에 가능했던 조치니까.”
한껏 의뭉을 떠는 량의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말해 줄 리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개구멍은 반지하랑 이어져 있어.”
“반지하? 지하는 한 번도 못 가 봤다면서.”
“반지하도 그냥 내가 붙인 이름이야. 개구멍이 1층과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에 있거든.”
“확실히 피난로구나. 그것도 꽤나 중요한.”
“사실 쓰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걸? 그냥 필요하다고 하니까 만든 거지.”
“다른 사람이 만들었어? [맘몬]의 총수가 아니라?”
“[맘몬]의 총수가 만들었지만, 설계하고 공사를 책임진 사람은 따로 있었어. 누구더라.”
“아윅이라는 이름일 건데. 넌 이름은 모르려나?”
“맞아! 아윅! 어떻게 알았어? 대부분 그냥 연구소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있어. 모를 리가 없지. 어쩐지 뭔가 싶었는데 말이지. 확실하네. 쯧, 스승님도 마음이 물러서 탈이라니까.”
그 말에 왜 부단장이라는 사람이 움찔하는지 모르겠다.
‘파울로님이 무섭나? 엄청 서글서글하고 좋으신 분인데.’
“아는 사람이야? 너가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던데.”
“나한테는 처리 1순위라고나 할까. 지저분한 먼지는 빠르게 치워야지.”
“먼지라니? 엄청 대우받는 분이신데? 아마 그 사람도 수뇌부일걸?”
“그렇겠지. 저거구나?”
“응. 그리고 바로 올라가야 해. 밑에는 도저히 내려갈 수가 없어.”
“잠시만.”
문을 열고자 했던 베라트를 멈춰 세운 뒤에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먼저 앞으로 나서는 량.
문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실소를 내뱉으면서 입을 열었다.
“역시 버릇은 남 못 준다더니. 의심병은 여전하네. 주제에.”
단봉을 꺼내서 여기저기를 건드리더니 베라트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안 돼! 다른 사람이 손을 대면 경보가…?”
“응? 에이, 그런 허접한 거에 내가 넘어가지는 않지. 가자.”
태연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며 말을 잃은 베라트에게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말을 건네고 따라 나왔다.
“량아.”
순간적으로 량을 뒤로 잡아당기면서 도를 꺼내 들었다. 지하에 말도 안 되는 무언가 느껴진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게 안 느껴져?”
“잠시만. 단장님 나와 주시겠어요? 나머지 분들은 그대로 있고.”
밖으로 나온 단장도 별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움찔하는 정도였다.
“확실히 공간이 미친 듯이 떨리기는 하는데, 그 정도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도망치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량이 이내 결심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다들 나오세요. 이대로 위로 올라갑니다. 어차피 우리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괜찮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 진짜 아닌데.”
“괜찮아. 들은 게 있으니까. 잊어. 우리 상대가 아니야.”
“하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만, 진짜 도망도 못 간다.”
“어느 정도길래 그래?”
“할머니가 진심으로 화냈을 때 살짝 삐져나온 정도.”
“그 정도나 된다고?”
살짝 삐져나온 것이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할머니면 달랐다.
그 살며시 삐져나온 것이 부발님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어.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지. 봐.”
도를 쥐고 있는 손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짜 괴물은 괴물인가 보네. 네가 이럴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아.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량의 말을 믿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량이 허튼소리를 한 적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미쳤다.’
그렇다면 한 시라도 빠르게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량의 손짓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빠르게 올라가죠. 1층에서 화려하게 시작해야 다 모이겠죠.”
“허. 생각보다 이 늙은이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경직되어있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거머리 마법사님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니 모시고 왔죠. 일대다라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소란은 어떻게 일으킬 생각인가?”
“그건 또 전문인 사람이 있죠.”
량의 눈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마르쿠스였다.
‘확실히 굉음과 진동을 일으키는 데는 마르쿠스만한 사람이 없지. 어?’
생각해 보면 이 일행에 비븐님도 계셨다. 굉음을 울리는 방패라 불리는.
‘설마 이것까지 생각하고 데리고 온 건가?’
“마르쿠스가 땅에 한 번, 진동을 울리고, 비븐님에게 한 번, 굉음을 울리면 됩니다.”
“참 치밀한 사람이군 자네는. 무서운 사람이야.”
“마법사나 연금술사에게 치밀함은 기본적인 덕목이죠.”
대화를 나누면서 올라가니 금방이었다. 다행히 올라오면서 점점 그 기운이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통로의 끝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별다른 문이 없는 듯했다.
“1층이라고 불리는 곳에 대략 30명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세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춘 단장이 눈을 감고 발을 몇 번 구르며 입을 열었다.
“통로 끝에는 인원이 없고 홀로 보이는 공간에 9명이 움직이는 중. 거기에 방으로 보이는 곳이 6개, 계단으로 보이는 곳이 2개. 방 안에는 15명이 존재. 계단에는 7명. 총 31명이 있습니다.”
미친 듯이 세밀한 판단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단장이 아닌 량이 더 무서웠다.
‘얘는 이걸 어떻게 다 아는 거지? 한 명 한 명 다 이유가 있네?’
단장의 말에 량의 반응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을 믿고 받아들인다.
“그럼. 소란을 일으키면 모두 뒤로 물러서요.”
“허허. 참 쉽게 가지를 않게 하시는군요. 그래도 밥값은 해야겠지요?”
그러면서 로브에서 기다란 완드가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카인의 완드처럼 길고 긴 완드였다.
“이런 선물을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야지요.”
마치 장난감을 새로 받은 듯한 거머리 마법사의 눈에는 흥미와 설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