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량의 평가에 자신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후작이 다시 물었다.
“로사였다면?”
“공작가. 카시스 후작가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겠죠. 거기에 블레어 왕국의 염원도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량의 말이 끝나자 시원하게 웃는 카시스 후작이었다.
“아쉽군. 아쉬워. 내가 판단을 잘못했군. 지금이라도 잡으면 어찌 될까.”
“글쎄요. 로사도 이제는 제 친우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라.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군요.”
“좋군. 좋아. 확실히 내가 자식 농사는 잘 지었나 보군. 단장!”
“각하.”
“전력을 다해서 돕도록. 모든 제약을 풀어도 좋다. 부단장도 마찬가지. 백합 기사단의 강함을 보여주도록.”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이 일이 끝나면 로사와 함께 한 번 찾아오도록 하게. 딸의 친우를 보고 싶구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범군도 마찬가지일세. 로사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이가 자네일 테니.”
어리둥절한 말이었지만, 호의가 가득한 말이었기에 바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맘몬]이라. 좋아. 대륙에서는 걱정하지 말게. 이걸 바라는 것이겠지? 대신 꼭 찾아오게나.”
그 말을 끝으로 통신구의 빛이 사라지면서 카시스 후작의 모습도 사라졌다.
“량님도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통신구가 꺼지자마자 단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누구의 제자가 아닌 오로지 량을 보고 한 말이었다.
“후작님이 부럽군요. 이런 이가 단장으로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해하신 겁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못 알아들으면 안 되지요.”
“글쎄요.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만.”
“그래. 무슨 말인데. 난 왜 못 알아듣는 건데?”
“하. 이 쉬운걸. 카시스 후작님의 평가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모습을 보면 단장님이 얼마나 후작님을 신뢰하는지 알 수 있잖아.”
“그게 쉬운 거냐.”
“쯧. 눈이랑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아니지 네가 무(武)에 투자하는 거에 반의반만 써도.”
여기서 멈추게 하지 않으면, 단장의 앞에서 언제까지 구박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왜 우리를 부른 건데.”
“아! 설명할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 단장님께도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들어 드릴 수 있는 것은 들어드리지요.”
“그럼 우선 설명부터 해 드릴게요.”
어젯밤 카인과 함께 있을 때 들은 개요를 설명 해 주는 량이었다.
‘근데 진짜 소수 정예로 가야 하는 임무이긴 하네. 뭐가 있을지 모른 다라.’
웃기게도 이 인원 중에서 가장 약한 이가 마니에르였다. 마니에르 역시 이를 알고 있는 듯, 꽤 자존심이 상해하는 듯 보였었다.
‘그래도 그녀가 있으니, 마니에르는 괜찮겠지.’
설명이 얼추 끝나자 량의 눈동자에 스멀스멀 광기가 다시 자리하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공간점유에서 있던 일을 상세하게 듣고 싶어서요.”
“네?”
“뭐?”
“그러니까. 두 분이 공간 점유를 했던.”
“그걸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단장님은 혹시 가능하신가요?”
“어….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요. 말로 설명을 하라고 하니 이건 또 다르네요.”
“하아. 이래서, 아니지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잠시만요.”
잠시 눈을 감고서 입을 오물거리던 량이 슬며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단장님이 시작했죠. 공간 전체의 압박으로, 거기서 범이가 왼편을 찌르고 오른편 아래를 점유.”
‘저렇게 말하는 거로는 안 될 텐데, 아무리 량이라고 해도.’
“그리고 나서는 단장님의 행태가 변했어요. 전방위적인 압박이 아니라 공간을 나누고 그 나뉜 공간들을 점유하고 깨트리고, 거기서 범이는 쫓아가기 바빴지만, 그래도 공간을 찢으며 따라갔죠.”
생각이 짧았다. 량이라는 천재를 감히 재단하려고 했었다. 그 이후로 나오는 말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도 보일 수 있구나. 그런데 어떻게 그걸 다 보고 느끼고 기억하는 거지?’
심드렁해 보이던 단장도, 부단장도 어느새 자세가 앞으로 나오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단장님이 은근히 들어오면서 마무리. 이렇게 진행된 거죠.”
“도대체 사람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배어 나오는 단장의 한 마디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도대체 무슨,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신 겁니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듯한데. 세상에. 량님이 검을 잡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돋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보아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량은 태연했다.
“에이. 전 감각이 없어서 아마 대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왜! 가 저에게는 중요해서요.”
“왜냐니? 무슨 왜를 말하는 거야?”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판단했는가. 무엇을 보았는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이런 거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런데 생각할수록 꽤 재밌을 것 같았다.
“네가 물어보면 대답을 할게. 난 머리로 생각을 하나하나 하고 결정을 하는 편이 아니니까.”
그 말에 단장도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가만히 있던 부단장도 입을 열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만.”
“다른 마스터의 의견이 더해진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얼마든지요.”
‘근데 이상한데. 단장이 은근히 부단장 눈치를 보는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그 작은 의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사람의 토론 아닌 토론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을 새우면서 이야기가 끝이 났다. 확실히 량의 시각은 남달랐다.
“개안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량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새로운 시각입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린듯한 말투였다. 모두가 약간 의아함을 가지고 있을 때.
“범이에게만 해 주려고 하던 이야기입니다만, 두 분께서 진심을 보이셨기에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청하는 자세를 잡는 두 사람이었다. 처음과 전혀 다른 태도가 된 두 사람.
“범아. 바람은 공간과 다르지 않아. 알고 있어?”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말이지만, 이럴 때는 조용히 듣고 있어야 한다.
“아니.”
“네가 점차 바람을 다룰수록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필요할 거야. 공간이 뭐라고 생각해?”
질문하고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량이었다.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무조건 외워야 했다.
하지만 말이 이어질수록 격한 반응을 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단장이었다.
‘텄네. 나중에 다시 써달라고 해야겠다. 감각인 줄 알았는데 그게 공간에 관련된 거였나 보네.’
량이도 눈치를 챘는지 단장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변화가 찾아왔다.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단장의 눈이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동시에 온 공간에 단장이 느껴졌다.
‘재능이 발전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이렇게 확 바뀌는 건가?’
순식간에 바뀐 기도가 선실을 가득 채운다. 이길 수 있던 상대가 알 수 없게 되었다.
‘와. 박탈감 들게 하네. 이렇게나 변한다고?’
이내 정신을 차린 단장이 투구를 벗어서 내려놓은 뒤에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한다.
“후작님께 캄프라는 이름을 받고, 토예라는 성을 물려받은 백합 기사단의 단장.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성취에 축하를 드립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방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들어가시지요.”
단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부단장이 량의 옆으로 오더니 어깨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감사하네. 정말로. 나도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네.”
그리고는 그도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순간적으로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멍청아! 너가 알아들어야지 왜 애먼 다른 사람한테 넘겨주고 그러냐!”
“그래서 말인데, 좀 써주라. 이해가 안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일단 외우게.”
“됐거든! 앉아. 오늘 하루 내내 다 외울 때까지 못 나가.”
“우리 바쁜 거 아니야?”
“아니. 안 바빠. 적어도 2일간은. 어차피 돌아가야 하니까. 이미 설명도 다 해 놨을 거야.”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 거지?”
“응. 그러니까 닥치고 뭐가 이해 안 되는지부터 말해.”
진짜 고마운데, 진짜 지옥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망망대해가 주는 고요함이 이렇게 평안하고 감사한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선장님의 말씀이 맞았네. 망망대해만큼이나 평안한 게 없구나.’
지옥에서 돌아와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탁 트인 이 광경이 너무 좋았다.
“근데 왜 여기에 나오라고 한 거야?”
“너도 돌아가는 상황은 알아야 하니까. 곧 눈에 띌 거야.”
“뭐가 눈에, 어?”
작은 점들이 무수히 많이 수평선을 채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새끼손톱만 한 점들도 있었다.
조금 더 집중해서 보니 모두가 선박들이었다. 심지어 함선보다 큰 배도 있었다.
“뭔데 저건? 뭐가 저렇게 많아?”
“조금 빠르긴 하지만, 이 시기는 원래 서섬의 어부들이 단체로 조업(操業)에 나서는 때거든.”
“물고기를 이렇게 한꺼번에 나서서 잡는다고?”
“이제는 전통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생존의 문제였지. 마수들이 이 시기에는 이상하게 근해에 오지 않으니까.”
“근데 왜 갑자기?”
“장모님이 이제 물러나시고, 패와 기를 수거해 간 건 기억하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 모든 해적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걸 주민들도 다 들었지. 그러니까 전부 나선 거고.”
“근데 이렇게 시기가 좋게 나선다고?”
“뭐. 누가 살짝 도움을 주면서 날짜를 정했을지 모르겠네.”
분명 량이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묘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얄미웠다.
“근데 왜 그 누구는 날짜를 이렇게 정했을까?”
“아무리 마수가 슬그머니 존재감을 내뿜는다고 해도, 이 바다는 해적의 권역이니까.”
“그래서?”
“쿡쿡. 이것 봐.”
악동처럼 웃는 량이 단봉을 꺼내고 선체에 가져다 대니, 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함선이 어선이 되는 거지.”
“진짜 징하다 징해. 도대체 이 배는 못 하는 게 뭔데?”
“뭐. 주인을 잘 만난 배라는 거지!”
의기양양한 량이었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점차 가까워져 오던 선박들이 이제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원래 그런 거야. 일반 선박들은 말 그대로 어부들이니까 다른 수가 별로 없지.”
“어? 그럼 어떻게 해?”
“그래서 작은 어선은 이렇게 멀리 나올 때는 주선을 정하고 오는 거지. 잠시만.”
량의 수신호에 정체 모를 항해사가 옆에 있던 기를 들고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몇몇 대형 어선에서 이를 보았는지, 다른 깃발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소란이 줄어들었다.
“주선의 수기에 따라다니는 거지. 우리는 미리 온 선박이 되는 거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출발한 자신과 다르게 량은 모든 수 하나하나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짜 같은 편에 량이 있으면 이렇게 편하구나.’
량의 손짓에 따라서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항해사만이 밖에 남아있었다.
‘원래 정찰선은 저렇게 항해사 하나만 보낸다 라니. 진짜 어디까지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함선은 대형 어선이 되어서 그 무리에 스며들었다.
“자! 우리는 여기서 이 방향으로 나갈 거야. 하루 정도는 쉬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갈 거니까 준비해.”
량의 방에는 자신이 본 말도 안 되는 정경이 나타나 있었다. 주변 상황이 훤히 보이는 신기한 광경.
덕분에 답답함이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자 무리를 이루었던 어선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다 흩어지고 알아서 돌아가는 거야?”
“아니. 다시 만나기로 한 지점에서 만나는 거지. 저 어선 보여?”
“내가 저 어선을 보고 놀랐잖아. 저렇게 큰 게 어떻게 어선이야.”
“맞아. 직접 물고기를 잡는다기보다 보관과 이정표가 되는 거지. 저곳에서 모이는 거야.”
“우리는 이대로 빠져나가고?”
“그렇지! 이대로 가면 하루면 충분할 거야. 그러면 카인도 로사도 전투를 시작했을 거고.”
“진짜 대단하다.”
“다들 준비하고 있으라고 해. 이제 하루만 남았으니까.”
“그래서 항해사는 누군데?”
“빨리 안 가?!”
“알았어! 간다. 가!”
량이를 선실에 두고 전령의 역할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제 시작이구나. 뭐가 있을지 상상이 안 가네….’
전령의 역할을 하고 선실에 들어오고 나서 하루는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저곳이구나.”
마법으로 확대하여 보이는 곳은 그저 평화로운 작은 어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