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량의 설명 도중에 등장한 카인 덕에 묘한 분위기는 빠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결국에는 할머니만 없으면 최속의 배라는 거잖아?’
효율이 거지 같다고 하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을 함선에 고루 펴 바르는 것. 그것 하나만 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한 효과는 상당히 좋았다.
카인이 등장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마니에르와 레핀 그리고 마르쿠스가 함선에 올라왔고, 수호대원들과 로사 등이 나타났다.
카인이 부른 거머리 마법사, 비븐과 레조난이 함선에 올랐다. 그리고 바다에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보인다.
백합이 그려진 기를 펄럭이며 들어오는 배. 그 배를 보면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다.
‘저게 로사가 후계를 포기하고 얻어낸 전력 중 하나란 말이지.’
카시스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면 수많은 혜택과 가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중 하나가 백합 기사단을 단 한 번에 한해서 출병시킬 수 있다는 것.
대외적인 백합 기사단이 아닌 진짜 백합 기사단을 운용할 기회가 있는 것이었다.
‘나도 전생이 아니었다면, 백합 기사단에 대해서 몰랐겠지만. 대외적으로 부단장이 기사단장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는데.’
카시스 후작가를 대표하는 기사단이 백합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이 백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기사단.
단 한 번의 출병에 불과하지만, 기사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 기사단의 수는 매우 적다는 점이었다. 현재는 기사단장까지 9명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수를 유지했을 때도 14명에 불과했고, 6명에 불과했을 때도 있었다.
‘백합 기사단 자체가 전부 익스퍼트의 경계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니까. 그것도 후작에게 충성하는 이들로만. 진짜 괴랄하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들 모두가 언약의 서로 충성을 맹세했다고 알려졌다.
그런 소문이 돌 정도로 후작가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하긴, 국왕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이들인데 뭐. 말 다 했지.’
공식적으로 국왕에게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받은 이들. 카시스 후작가의 심장인 이들.
그들이 로사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을 돕기 위해서 오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 이상으로 뽑아서 써먹을 테니까. 기선만 좀 잘 제압해 봐.”
마음이 불편한 것을, 분명히 똑같이 앞을 보고 있는데도 알아차린 량이었다.
“눈치하고는. 알았어, 그러면 이따가 물러나 있어. 카인 너도.”
“오오! 마스터끼리의 기세전을 볼 수 있는 거야? 엄청 궁금했는데!”
“우선 내려가자.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말이지.”
모든 일행을 데리고 선착장으로 다시 내려갔다. 가장 선두에 량과 로사가 섰고 배가 점차 다가왔다.
9명의 기사단이 내리자 배는 바로 다시 출발했다. 하얀 전신 갑주를 입고 있는 이들.
흉갑에 투명한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투구까지 차고 있어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동. 차렷!”
로사의 앞에서 대형을 갖추어 바로 서는 백합 기사단. 량이와 함께 잠시 뒤로 물러났다.
“위대한 무인의 길을 걸어가는 로사 공녀님께 경애를!”
““경애를!””
동시에 한 무릎을 꿇고 각자의 무기를 양손으로 수평이 되도록 드는 이들.
단 9명에 불과했지만, 선착장에 그 장엄함과 진중함이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로사가 인사를 받고 난 후, 그들의 경애가 끝이 나고 자신들을 향해서 다가왔다.
“백합 기사단의 단장을 맡은 단장입니다. 블라우 구역주이자 순의 총수, 파울로님의 제자분을 뵙습니다.”
정중하지만 명확한 선이 있는 인사였다. 선이 있음에도 정중함이 넘치는 인사에 신기할 따름이었다.
“진정한 백합 기사단의 단장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량입니다.”
서로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간 후에 단장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서자 말한 대로 량과 일행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반갑습니다. 순의 수호대의 대주를 잠시 맡고 있는 범입니다.”
“최연소로 마스터에 오른 무인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단장입니다.”
내미는 손에 몸이 절로 반응해서 손을 내밀었다. 꽉 쥔 손에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묘한 기류가 흐르더니 이내 단장의 투구에 미소가 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저희 같은 무인은 말이 별로 중요하지 않죠.”
말이 끝남과 함께 공간 그 자체가 서서히 조여드는 느낌이 든다. 익스퍼트의 기세와는 차원이 다른 형상.
‘역시. 이 느낌이지.’
[맘몬]과 대적하며 만난 이들 중에서는 오로지 티거만이 이런 압박이 가능했다.
[바람의 탑]이 모두 열리면서 몸 안에 바람이 휘몰아치는 상쾌한 느낌.
단장과 공간을 점유하는 공방이 시작된다. 재능과 오러가 서로 부딪히고 깨지고 점유하는 공방.
오로지 마스터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공방이자 유희였고 공감이었다.
‘감각 계열인가 본데. 미친듯한 속도네.’
공간을 점유하는 속도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한 공간을 잡는 즉시 다른 공간들이 잡힌다.
‘그래도 다행이네. 량이 말을 들어줄 수 있겠는데?’
오러로만 이루어지던 공방에 느닷없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바람이 지나가는 공간이 찢겨진다.
오러로 공간을 잡는 동시에 다른 잡힌 공간들을 바람으로 찢어버렸다.
순식간에 여유만만하던 단장의 태도가 변하며 속도가 더 빨라진다.
*
“저게 공간점유라는 거구나.”
“너도 처음 보는 거야? 왜?”
“나야. 마법사기도 하고, 무인들이 저렇게 공간점유를 하는 건 처음 보지.”
“지금 선착장이 깨지는 거지?”
“그나마 선착장이 덜 깨지는 거지. 주변 공간이 찢겨나가는데. 무시무시하구나.”
“백합 기사단 단장이 누군지 알아?”
“아니. 추정은 하는데 정확하지 않아서. 오히려 부단장이 더 명확하다고 해야 하나.”
“두 사람이 마스터랬지? 후대의 카시스 후작도 굳건하겠네.”
“그러고 보니 범이가 저러는 것도 처음 보네.”
“범이는 이상하게 초인을 만나거나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아니면 이상한 이들이나.”
“신나 보이는 건 내 눈에만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기선을 제압해 달라고 했더니 저렇게 신나 하고 있네.”
한참을 신나 하는 것 같은 범이와 어울려주고 있는 단장의 모습이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저거?”
“너도 느껴지나 보네. 확실히 이제 존재감이 많이 늘었단 말이지.”
“진짜 [바람의 탑]이 사기인 건지, 범이 재능이 사기인 건지 모르겠네.”
“그때 이야기한 거 기억 안 나? 궁합이 있을 것 같다는 말.”
“하긴. 저 모습을 보니까 진짜 그런 것 같다. 공간점유를 하는 동시에 공간을 부수는 건 뭐냐.”
“저 재능이 발전하고 발전하면 어떤 모습이 되려나.”
“량아. 가끔 너가 그런 눈으로 말하면 좀 무섭다. 알지?”
“무섭기는 집중하는 거라고 하자. 그것 좀 해 줘.”
“하아. 진짜 알았어. [센시티브].”
“좋아. 역시 확실히 넌 천재야. 그러니까 잠시만 조용히 있어 주라.”
“… ”
“지금 그 소리도 들리니까 가만히 있어.”
증폭된 감각에 모든 상황이 조금 더 명료하게 보이는 량이었다.
*
“조금 강하게 가도 괜찮겠습니까?”
말없이 대치하던 단장이 입을 열었다. 한층 더 정중하고 흥미가 동한 말투였다.
“좋습니다.”
서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빈 허공을 가르는 무기들. 의미 없어 보이는 휘두름에 공간이 터져 나간다.
확실히 무기를 꺼내 드니 단장의 속도가, 변칙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슬슬 위험해지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상대방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지닌 것이 아니기에, 이 이상으로 진행하면 상대가 위험했다.
다행히도 자신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닌 듯했다. 부단장이 공간을 침투해 들어온다.
불청객이 공간에 진입하자 그제야 단장이 정신을 차린 듯 뒤로 물러선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흥이 올라 추태를 부렸습니다.”
“아닙니다. 적당한 때에 멈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 기대됩니다. 후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로가 뒤로 물러나고 앞으로 나서야 할 량이 나서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눈이 살짝 풀린 량이 눈에 들어왔다.
“량아?”
량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 카인이 옆에서 완드로 땅을 살짝 내려치니 그제야 눈동자가 돌아오는 량이었다.
“저희는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니 함선에 오르시죠. 그리고 단장님은 잠시 저와 이야기를, 아니 일단 오르시죠.”
처음 보는 량의 약간이지만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눈동자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광기가 미친 듯이 압축되면 저런 눈빛이 되려나. 좀 무서운데….’
*
언제나 똑 부러지던 량이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한 모습으로 정리를 하고 함선에 올랐다.
각자에게 배정된 방과 함선의 내부를 알려준 뒤에 단장, 부단장과 함께 량의 방에 들어왔다.
“저희와 함께 하는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한결 차분해진 량이었다. 여전히 눈동자는 번들거리지만, 겉으로는 단정했다.
“공녀님께서 내린 결정에 우리는 응했을 뿐이니. 그리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거부권을 지니고 있음을 압니다. 그럼에도 와 주신 것에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제 스승님의 덕분에 견문이 좁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가 상대해야 하는 이들을 정확하게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저희도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가문에서도 [맘몬]의 상황은 예의 주시하고 있는 편이니.”
“역시 카시스 후작가라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량의 설명에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놀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게 놀라는 둘이었다.
‘근데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닌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서 잠시 통신을 해도 괜찮을까요?”
“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고 정신을 차린 단장의 말에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꾸하는 량이었다.
흉갑 안에서 나온 통신구. 손 위에 올려두고 활성화를 시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번 본 얼굴이 떠오른다.
“단장인가. 파울로님의 제자도 보이고, 범군도 보이는군. 무슨 일인가.”
‘저 통신구, 이렇게 쉽게 드러나면 안 될 텐데도 대처가 자연스럽네. 대단하다.’
확실히 모든 귀족이 배가 부른 돼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느낀다.
단장의 설명에 가만히 듣고 있던 카시스 후작이 량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것을 말해 주는 이유가 뭔가. 지금 말해 주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로사의 결정에 대한 존중입니다. 존중받을만한 일에는 대접을 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감사하네. 이 일은 잊지 않도록 하지. 그나저나 아쉽군. 아쉬워. 아! 파울로님의 제자이지?”
“그렇습니다.”
“파울로님은 연금술뿐만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독보적이셨지. 그 제자인 자네도 마찬가지이겠지?”
“스승님께 배운 바는 있으나 감히 비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만 묻지. 로사에 대해, 아니 내 아들과 딸을 평가해 주겠나.”
“부탁입니까?”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카시스 후작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다시 열었다.
“부탁하지.”
“아드님께서는 카시스 후작가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힐 후작가를 세울 것입니다.”
“로사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