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곧이라고 생각한 것이 안이했다는 듯, [맘몬]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재인이 떠난 다음 날, 카인과 량이 새벽같이 불렀다.
“무슨 일이야.”
“지금 블라우가 공격받을 뻔했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말이지.”
“너도 이제 움직여야 하니까 불렀어.”
굉장히 평온하게 말하는 두 사람이었다. 남아있던 잠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냥 이렇게 있어도 돼?”
말이 급하게 나온다. 그 뒤에 들어온 로사가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진정해. 말했잖아. 받을 뻔이라고.”
순간, 올라오려는 긴장과 다급함이 평온한 량의 태도에 사라졌다.
“무슨 일이야.”
뒤늦게 들어온 로사도 자신과 같은 과정을 겪는 게 눈에 들어온다. 다만 쉽게 진정하지 못한다.
“너희 지역은 괜찮아. 걱정 안해도 돼. 그리고 알고 있었잖아?”
량의 묘한 말에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로사였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너희 구역은 어떻게 하고?”
로사의 걱정에도 묘한 미소만 짓고 있는 두 사람.
“둘만 알고 있지 말고 공격을 받을 뻔했다는 게 뭔지 말을 해 주지?”
“자 여길 봐.”
량이 가리킨 곳을 보자 서섬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지도가 탁자위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우리 구역. 생각보다 취약한 부분이 많아.”
량의 손짓에 붉은 부분들이 새겨진다. 량의 말대로 구멍 투성이.
“근데 다른 두 구역주가 생각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거지.”
“뭔데?”
“서섬은 해적들의, 서섬 주민의 땅이라는 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히 주민들의 땅이지.”
“아니야. 그게 아니라, 자기들이 구역주가 되어서 그 땅이 자신들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응? 뭐가 다른데?”
“서대륙에서 보면 귀족들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영토 안의 모든 생명체도 마찬가지고.”
“근데? 그거랑 지금 구역주랑 무슨 상관인데.”
“구역주라는 건 말이지. 농부라고 생각하면 돼. 그 땅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존재인 거지.”
“조금 이해가 안 가는데?”
“귀족들이랑 다르다는 거야. 온전히 소유라는 개념이 없어. 징병할 권리도, 약탈할 권리도 없어.”
점점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뭔가 알 것 같은데 너무 복잡했다.
“그럼 주인이 누굴까?”
고민하는 와중에 찌르고 들어온 량의 질문에 새삼 생각이 밝아졌다.
“할머니? 근데 좀 이상한데?”
“맞아. 골드 로즈. 바다의 황제. 그분이야 말로 자유섬의 주인이자 유일한 지배자였지.”
“근데 은퇴하고, 무주공산이 되었다?”
“아니. 틀려. 장모님께서 지배하는 동안 온전히 모든 선택이 섬의 주민들에게로 향한 거지.”
“근데 레핀 일리야 마을을 보면 지배자가 귀족이나 다름없던데?”
“잘 이야기했어. 그 사건이 이후로 주민들도 알게 된 사실이 있지. 뭘 거 같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나 말고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지배자를 바꿀 수 있다…?”
“정답! 그 전까지는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권리를 알게 된 거지. 그리고 후속 대처가 어땠어?”
“다른 게 있었어? 해적이 사과하고 감찰이 돌았다 아니야?”
“그 부분이 중요한 거야. 해적이 사과를 한 거지. 자유섬의 지배자라고 생각했던 해적들이 오히려 사과한 거야.”
“아. 그래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는 거야?”
“아직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 소문은 아주 자세하고 빠르게 퍼졌어. 계기만 있다면 터질 수 있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량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소름이 돋을 일이었다.
그 시기에 이미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정확히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싶었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렇지도 않으려나?’
“아니나 다를까. 슬슬 전쟁을 대비하면서 각 구역에서 징수를 하고 있단 말이지.”
“왜? 징수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아? 그동안 쌓은 재물이 많을 텐데?”
자유섬에 지배자가 되면 상상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구역주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을 땐,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돌라만 해도 황금으로 산을 쌓을 정도였으니, 그것만 해도 턱없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있는 사람들은 사업도 전쟁도 나의 돈으로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 자기 돈은 자기 것인 거지.”
말문이 막힌다. 기가 막혀서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원래 권력이 생기면 그런 법이야. 하여튼 그래서 슬슬 불만이 나오는 중이지.”
“근데 후안과 아이 모두 자유섬 출신 아니었어?”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알려져 있는데 아니더라고. 그냥 말만 자유섬 출신이지. 한 명은 블레어 왕국의 몰락 가문 출신이고 한 명은 시디야 왕족의 방계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키워진 것 같더라. 꽤 여러 후보가 있는데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거겠지.”
“아니. 너무 산으로 갔어. 그래서 왜 받을 뻔했다는 건데.”
“이 시기에 공격은 너무 뻔했지. 내가 대비도 안 하고 왔으려고?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야.”
“이 이야기가?”
“응. 그래서 난 좀 다르게 접근했지. 완전 봉쇄를 하되 각 마을의 동의를 얻어서.”
“완전 봉쇄? 마을의 동의를 얻는다고 그게 돼?”
“바다만 열어주고, 도로는 마차를 제공하되 정기적으로만, 그리고 모든 길을 막았지. 보여줄게.”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빛나던 길들 사이사이로 초록색 선이 그어지고 몇 군데에는 점들이 찍힌다.
“이렇게 막아 놨어. 이 길을 통해야만 지나갈 수 있는데, 못 지나가.”
“왜? 무슨 짓을 해 놨길래 못 지나가는 거야?”
“살포해 놓으면, 10시간 지속되는 독을 뿌려놓았다고나 할까. 지나가면 익스퍼트면 몸이 천천히 녹고 마스터면 사지 하나는 떨어지는?”
단 한 번도 그런 독이 존재한다고 들어본 적 없었다. 마스터의 사지를 떼어내는 독이라니.
“만든 지 얼마 안 됐어. 그리고 실패작이야. 통제가 안 돼. 스승님께서도 안 된다고 하시더라.”
“실패작이라고? 그게? 그냥 적 한가운데 던져놓으면 낙승이겠는데?”
“안 그래도 신전에게 제한조치가 들어올 것 같기는 하더라. 그래도 뭐 그 전에 한 번 쓰는 거지.”
“제한조치?”
“있어 그런 게. 가끔 보면 신전은 연금술사들을 너무 쪼는 것 같단 말이지.”
‘솔직히 나 같아도 그러겠다. 어린아이 손에 들려도 위력이 같은데.’
“자! 그래서 본진은 일단 괜찮아. 5일간은 넉넉해. 일주일은 조금 빠듯하지만, 괜찮아 그전에 끝낼 거니까.”
“일주일 안에 [맘몬]과 전투를 끝낸다고?”
“응. 할 수 있어. 특히나 로사 덕분에 빠르게 끝낼 수 있게 됐지. 감사히 생각해.”
“응?”
“이제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숨기려고 그래.”
“하아. 상황이니 이러니 말을 해야겠지.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단호한 결의가 가득찬 로사의 얼굴이. 왠지 모르지만 순간 움찔하였다.
“나. 후계자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했어. 그리고 그 대가로 이번 전쟁에서 오빠의 모든 무력을 빌려 쓸 수 있고.”
“뭐?”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사와 친분이 조금씩 쌓이면서 은연중에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 일으킨 변화로 인해서 로사가 전생에 알던 로사보다 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이유로 [바람의 탑]을 알려주기도 했고, 은근히 량과 카인에게도 도움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로사가 카시스 후작이 되는 길을 내버렸다고?’
“후계자 쟁탈전에서 완전히 나올 거라고 했어. 계약서도 작성해 줬어. 엄청 좋아하더라.”
“왜? 아니! 뭐 때문에?”
“뭐. 너라고나 할까. 나도 상위 세계로 올라가고 싶어졌어. 하여튼 그래.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아.”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진행할지 알려줄게. 로사 덕분에 후안의 구역으로 바로 쳐들어갈 수 있는 길이 생겼어.”
로사라고 표시된 작은 조형물이 어느새 지도 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후안의 구역으로 선이 그어진다.
“카인이 브리제와 비엔토를 이끌고 하프리버를 타고 센트레 마을로 향할 거야. 이 부근이 주요 전장이 되겠지.”
서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그 강의 이름이 하프 리버였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중립 마을이 센트레 마을이었다.
“왜 강에서?”
“아마 저쪽으로 넘어간 해적들이 여기에서 전투를 치를 건데. 괜찮아 수월할 수도 있어.”
그 전장을 맡게 된 카인이 나서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함선이 차이 나니까. 거기에 퍼그님이 엄청 빡세게 훈련시킨 애들이기도 하고.”
“퍼그님? 비엔토? 그건 또 언제.”
“언제고 여기저기에서 뭉친 이들로만 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가 제일 중요해.”
량의 손끝이 향하는 곳에는 서섬 동쪽의 가장 아래. 아이의 구역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응? 거기가 왜? 작은 어촌 마을이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도 그런 줄 알았지. 실제로도 그랬고. 그런데 조사를 하던 중에 진짜 이상한 사실이 나왔어.”
서섬에는 30개의 마을이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마을도 있었다.
마을이라고 칭해지는 것은 일정 이상의 규모와 그 마을이 가진 여러 힘에 의해 정해졌다.
하지만, 량이 짚은 곳은 이제는 마을이라는 칭호가 사라질 위기의 작은 어촌이었다.
‘해년 회의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도 마을에 관련된 거라고 했었지.’
“이곳. 진짜 특이한 곳이더라.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사는 사람들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마을의 사람들이 서서히 바뀌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나 싶었다.
“정말 천천히 진행된 것 같아. 어촌에 사는 사람들, 어촌 태생이 아니야.”
“뭔 소리야.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 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게.”
“나이가 들면서 죽은 이들, 서서히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들. 그렇게 20년 전부터는 모두 외주민이 주민이 되었더라고.”
“그게 가능한 소리야? 왜 아무도 몰라?”
“세세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느리게 이루어져서 그래. 의심에 찬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조차 없어.”
“뭘 하려고 그곳에 그렇게 정성을 쏟은 거지? 뭐가 있어?”
“응. 있어. 너랑 나는 그곳으로 갈 거야. 그리고 마니에르와 마르쿠스, 레핀, 일리야 정도만 데리고 갈 거야.”
“그게 전부라고?”
“아니 우리 수호대에서는 그게 끝이야. 다른 이원도 합류할 거야. 최대한 조심해서 가야지.”
“넌 괜찮겠어?”
“호위와 함께 가니까 괜찮아. 곧 도착할 거야.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하자.”
너무 많은 대화가 오고 간 시간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로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응? 왜. 안 가고 여기에 있어?”
“넌. 이번 일이 끝나면 상위 세계로 가는 거지?”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상위 세계라니, 관심도 없었잖아?”
“너 때문, 아니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상위 세계가 어떤지 궁금해졌어.”
“얼마나 걸릴지도 몰라.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아무도 없어. 그런데도?”
“응. 두고 봐. 내가 너보다 더 위에 설 테니까. 마스터는 늦었지만, 다음은 달라. 나중에 꼭 만나자.”
그 말을 끝으로 돌아 나가는 로사.
“내가 잘한 건가. 저게 더 좋은 건가. 모르겠네. 내가 뭐라고 그런 결정을 한 건지 모르겠네.”
뭔가 찝찝하면서도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데 등을 치는 손길이 느껴진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너. 요즘에 엄청 어른인 척 하려고 한다? 이모한테 잡혀 사는 주제에?”
“아닌데?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량이와 투닥이며 수호대원들에게 가는 동안 찝찝했던 마음이 스러졌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구나.’
끝이 다가오는 느낌은 두렵고 떨렸다. 그래도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어때?”
량은 그것을 가리키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것을 본 순간 돈지랄은 누구도 량을 따라갈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미친놈인데, 왜 부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