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로사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병력이었다. 거의 5천 명에 이르는 수많은 병력.
그 병력들이 성을 포위하듯 외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외성까지 포함한다면 굉장히 넓은 지역.
압도적으로 부족한 수였지만, 초소처럼 지역을 방어하듯 포위하니 전 방위가 포위 가능했다.
‘확실히 훈련 시키는 걸 보면, 타고나기를 다른 건가?’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카인? 안에 있던 거 아니었어?”
“대충 이야기도 끝났고, 수습은 마니에르랑 레핀에게 지시했으니까. 왜 나와 있었어.”
“안에 있어 봐야. 내가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로사랑 네가 정리할 일이지.”
“또! 매번 이렇게 스윽 나가고 그러더라? 안 그래도 된다니까.”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근데 포위가 꽤 좋지?”
“그치? 저 중에서 로사가 키운 이들이 반이 넘어가니까. 대단하기는 하지.”
“응? 그럼 나머지는?”
“우리 병력이지. 정확히는 량이의 병력이지만. 준비는 처음부터 하다가 형수를 만난 이후 아예 본격적으로 했더라고.”
“안 보는 사이에 엄청 바빴겠네. 근데, 어색하지 않은데?”
“전체를 총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거기에 애초에 섞어서 훈련도 했었고.”
“미친 거 아니야? 섞어서 훈련을 했다고?”
“서로 원하는 게 맞았다고 해야지. 로사의 병력은 배움이, 량이네는 사람을 이끄는 경험이. 근데 은근히 범이 넌 아는 게 많다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다른 두 군대를 하나로 합쳐서 운용하고 훈련을 했다고? 어떻게 하려고?”
“로사는 로사대로 량이는 트리분에게 맡겨서 훈련부터 손수 한 거라.”
“트리분은 또 누구야? 생각 이상으로 순이 커진 모양이네.”
“누가 의도적으로 피하고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다 알고 계실 텐데 말이지요.”
섭섭한 듯 말하는 카인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 발 떨어져 있어야 했다.
“최근에 블라우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 끄고 있지? 이제는 에밋 세력은 거의 다 축출되고 있어.”
성벽에 앉아 카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신선하고 아쉬웠다.
이렇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일부가 되고 싶었지만, 카인에게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카인과 로사는 미친 듯이 바빴다. 자신이야 조금 돌아다니는 정도지만 3일간 자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점점 다크서클이 둘의 눈밑에 내려오고 눈의 핏줄이 하나둘 터질 때쯤 그들의 구원자가 도착했다.
“량! 이렇게 훌쩍 와도 되는 거야?”
“오이겐도 있고, 핵심은 블라우로 들어왔고 주변도 정리했으니 괜찮아. 여기가 중요하기도 하고.”
“이이가 친구들을 보러 간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괜히 이러는 거예요.”
기마를 타고 온 두 사람의 뒤로는 100명에 가까워 보이는 기마대가 서 있었다.
“근데 같이 온 사람들 혹시?”
“맞아. 피에트 가문의 기마대. 그것도 제 2 기마대 전원이지.”
“제 2 기마대의 라이터입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도련님께서 자유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모두 카인과 량의 덕일뿐입니다.”
“구역주님. 저희는 그럼 마방으로 우선 가 있겠습니다. 그럼.”
뜬금없이 나타났다가 량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기마대장과 기마대.
“뭔데? 갑자기 도련님이 자유를 찾은 건 뭐고.”
“임기응변이 많이 늘었는데? 내심 걱정했는데 잘했어. 저들에겐 마울이 실재하니까.”
“당최 너희가 하는 일은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도 오니까 좋다.”
“그쵸? 이이가 꽤 무리했다구요. 이곳으로 오려고 얼마나 열심히 하던지.”
“근데, 이모 갑자기 왜 존대에요.”
“부군의 친구분들이니까요! 그럼 들어갈까요?”
“다음에는 좀 미리 말해주고 와. 비상 걸려서 난리도 아니었다.”
“그럼 얼마나 대처를 잘하는지 볼 수 있었겠네. 정리는 얼마나 됐어?”
“아직 먼 것 같더라. 그래도 카인이랑 로사가 죽어라 수습하고 있어. 널 보면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할걸?”
“쯧. 구역도 아니고 고작 성 하나 가지고 뭐가 그리 어렵다고.”
“성 하나의 행정이 공백이 생겼는데 그렇게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건 너니까 가능한 거지.”
그나마 무력으로 누를 수 있기에 어떻게라도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본래 행정을 맡은 이들은?”
“다 보류. 처리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 서류에 장난을 치면 답이 없다고 하던데?”
“쯧. 탁트. 네가 정리해야겠다. 별것도 아닌 걸 시켜서 좀 미안하긴 한데, 인원이 너무 없네.”
그제야 량이와 칼라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던 이가 앞으로 나왔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니까요. 회주님 곁에 저밖에 없는데 제가 해야지요.”
“아. 이 친구가 범이야. 인사해 여기는 탁트라고 여기 있는 동안 내 수행원.”
“회주님의 친우분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본 탁트의 눈은 특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분위기는 그저 수행원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수행원이라고 스스로를 너무 낮추시는 거 같습니다.”
카인 덕분에 나름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정중하게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을 했다.
“아닙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수행원도 달라지는 법이지요. 회주님을 수행하는 영광을 맡은 수행원일 뿐입니다.”
정중하게 대하는 법은 무슨. 다 필요 없는 것 같았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아예 연금회를 자유섬으로 뽑아온 거야?”
“쉽게 포기하는데? 너무 한 번에 포기하는 거 아니야?”
“몰라. 소용없는 거 같아. 그리고 어차피 내 주변에 정상은 없는 것 같으니까.”
피식 웃더니 대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량.
“그래. 넌 그게 차라리 맞지. 너다운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리고 거의 다 뽑아 왔어. 정리만 하면 돼.”
이야기하며 가니 내성이 금방 보였다. 소식을 들었는지 성문으로 한걸음에 달려 나온 로사와 카인이 보였다.
“량아아아!”
“량!”
애타게 부르는 것이 마치 이별한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너가 오니까 세상이 밝아 보여!”
“생각보다 빨리 왔네? 우리 할 일이 많아!”
두 사람의 간절한 외침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던 량이 입을 열었다.
“너네 둘이 하고 있던 일 다 탁트에게 넘기고, 행정을 맡던 이들을 소개해 줘. 마르쿠스 한 명만 붙여서.”
“예쓰! 알았어!”
“이분에게?”
상쾌하게 대답한 카인과 다르게 로사는 탁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너가 아무리 그렇게 봐도, 너한테 안 가니까 포기하고.”
“쳇. 따라오시죠.”
아쉽다는 듯이 여전히 가면서 탁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로사를 보면, 대단하다 싶었다.
“저것도 병이지. 이제는 상관없을 텐데도 자연스럽게 저러는 걸 보면. 로사도 대단해.”
“응? 상관없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게. 궁금하면 너가 물어보든가! 로사 같이 가!”
불퉁한 표정으로 쏘아붙이고는 뛰어가는 카인이 보인다. 괜히 궁금한 말만 던지고 떠나는 것이 얄밉다.
“상관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궁금하면 네가 물어봐야지.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가자 칼라.”
자신을 지나쳐서 가는 량이와 칼라가 보인다.
“야! 그냥 그렇게 간다고? 진짜로? 야! 거기 아니야! 마방으로 가야지!”
내성으로 들어가려는 량과 칼라를 데리고 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치사하게 진짜 끝끝내 말해주지 않는 량이었다.
*
량이 도착하고 하루는 푹 쉬기로 했다. 저녁도 간소하게 먹고 바로 방으로 갔던 카인과 로사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돌라의 집무실에서 모이기로 했기에 그리로 향했다.
“왔어? 일찍 왔네.”
“표정이 어째 더 힘들어 보이는데?”
“그런 게 있어. 어린아이는 몰라도 되는.”
뭔가 더 놀리려고 했는데, 개운한 얼굴의 카인과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들어오는 로사.
“이제 좀 살 것 같다!”
“량아. 탁트 그분은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셔?”
“말해줬잖아. 그냥 내 수행원.”
“아니 무슨 그냥 수행원이 오자마자 우리가 했던 거에 10배는 더 빠르게 진행해? 그것도 이건 기본이라면서….”
“뭐. 탁트 기준에서는 기본일 수 있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일 텐데, 너라면?”
고심에 빠진 로사와 다르게 카인은 이미 알고 있는 듯,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근데 왜 집무실에서 보자고 한 거야?”
“우리가 애초에 돌라를 생포하려고 했고, 생포 한 건 기억하지?”
“응. 너네가 신신당부를 하고 또 했잖아.”
“지금 돌라는 어디 있게?”
“너가 말해줬잖아.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고. 안 그래도 그거 말하려고 했는데, 좀 대우를 해 줘야 좋은 거 아니야?”
카인이 돌라와 일행을 지하감옥에 가둔다고 했을 때, 그러지 말고 방에 감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을 했었다.
단칼에 거부당하고, 다 생각 해 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던 카인이었다.
“에이. 아니지. 언제나 고전은 통하는 법이라구. 어쨌든!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절대로 말을 안 하는 게 있더라고.”
악동처럼 웃는 카인. 이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면 상대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자기 집무실에 금고가 있다는 거지. 그런데 절대로 말을 안 하는 거야. 자기와 ‘어스퀘이크’의 대우에 따라서 말해 주겠다고.”
“응? 그럼 그냥 네가 탐색했으면 되는 일 아니야?”
“나도 그럼 좀 좋아? 근데. 오로지 기관으로만 만들었는지 마나의 흔적이 전혀 없는 거지.”
“그게 오히려 더 허술한 거 아니야?”
“아니지. 너 량이의 기관들 생각 안 나?”
[빛과 바람의 집] 2층 지하에 위치한 량이 만든 괴랄한 공간이 떠올랐다.
“그 정도라고?”
“아니. 솔직히 누굴 데리고 와도 량이의 반도 못 하지. 그래도 반만 해도 엄청난 거야.”
“아! 우리는 량이 있구나!”
“그치! 역시 범이 너는 머리를 안 써서 그렇지 바보가 아니라니까!”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말이었다. 뭐라고 하려는 찰나에 다시 카인이 입을 열었다.
“집무실에 있는 건 확실해. 근데 나는 못 찾겠더라고. 그러니 가라! 량이!”
“진짜 별거 없기만 해 봐. 죽을 듯이 굴려줄 테니까.”
그 말에 얼굴이 하얘지면서 뭐라고 변명을 하려는 카인이었지만, 시약 주머니에 손을 넣은 량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시약병이 나오고 단봉을 꺼내는 량이. 액체를 바닥에 뿌리고 단봉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바닥에 떨어진 액체가 자욱하게 연기를 일으키고, 단봉의 움직임에 따라서 연기도 따라 움직인다.
“흐응. 여기구나. 확실히 연금술에 발은 담가 본 사람이 만들었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새 문을 찾아내는 량이었다. 손을 올리려 하자 카인이 입을 열었다.
“거긴 그냥 액자인데, 내가 다 떨어트려 봤지!”
“모르면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잖아?”
카인이나 량이나 정말 얄밉기 그지없는 인물들이었다. 이내 액자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바보 카인은 모르는 거지만, 연금술에서도 기본적으로 마나는 쓰이지.”
“내가 집무실 모든 곳을 샅샅이 탐색했는데?”
“쯧. 쯧. 기관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마나를 열쇠처럼 사용할 수 있어.”
말을 하면서도 손을 계속해서 액자에 댄 채로 있었다.
“하지만 나 정도 되면 또 다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액자가 그대로 문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놀라는 카인과 웃는 량이의 뒤로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데?”
열 명의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공간이었지만, 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범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니까?”
웃으며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량의 모습이 너무 얄미워서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다들 일단 들어와.”
의아함을 품고서도 모두가 량의 말에 따라서 그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량아.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를 하는 량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별게 없었다.
“아!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