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내성에서 나와 향하는 길이라 그런지, 자신들을 막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성문이 눈에 들어올 때쯤 마니에르와 눈을 맞추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이니 시선이 집중된다.
“멈춰라!”
“잡아! 막으라고!”
성벽 위에서 소리치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무시하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막으려는 이들은 일반 병사들이 대부분. 우리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문에 거의 가까이 왔을 때 자신을 지나쳐 성벽으로 올라가는 마니에르가 보인다.
약속한 대로 마니에르는 최대한 화려하게, 소란스럽게 움직이며 올라가고 있었다.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을 때, 자신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문.
“수도와 다르게 이곳은 안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했지.”
취약하다고 해도, 일반적인 성벽과는 강도가 다르지만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모두가 마니에르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순간 문을 향해 도를 휘두른다.
자신을 본 이가 있었는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잘려지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가장 먼저 나타났다.
자신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
“각자 나뉘어져서 성벽 위로 올라간다! 성벽만 정리하면 우리의 승리다!”
크게 소리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둔클.
“범님.”
확실하게 이전과는 태도가 달라진 모습의 둔클이었다. 겉으로 정중한 것을 넘어서 진짜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성문으로 들어오는 역동적인 이들을 배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둔클.
“범님.”
“이렇게 따로 나와도 돼? 일선 지휘관은 너 같은데?”
“괜찮습니다. 성벽만 아니라면 저희가 고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로사는?”
“후위에서 전체를 조율하고 계십니다. 아마 곧 오실 겁니다. 죄송합니다.”
“로사가 사과하라고 해서?”
“아닙니다. 범님께서 하신 말씀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고 어서 올라가 봐. 그래도 지휘관이 있어야지.”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성벽 위로 올라가는 둔클.
“로사도 사람 복이 없지는 않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성문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우리도 병력이 많은데? 로사네가 아니라 순의 이름으로 된 이들도 많네?’
“범아!”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의 파도가 끝나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로사였다,
“지휘관이 이렇게 대뜸 다가오면 어떡해?”
“에이. 끝났어. 구멍도 숭숭 뚫려있는데 뭐. 성벽만 아니면 네가 올 일도 없었어.”
“그래도 너무 마음을 놓는 건 좋지 않아. 네 재능이라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변수에는 어쩔 수 없어.”
“오랜만에 보는데 이렇게 할 거야? 애초에 들어갈 때 상황에 대비해서 다 이야기해놨거든!”
“알았어. 알았어.”
“너도 여기서 멍하니 서 있는 주제에!”
“나는 상황 정리를 다 하고 왔지. 거기에 카인도 있고.”
“두고 봐!”
“와. 언제 봐도 진짜 싸우고 싶은 분인데요.”
“늦었다?”
“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소란스럽고 화려하게! 딱 명령에 맞춰서 휘젓고 왔는데!”
“둔클이 올라가고 나서 내려와야 되는 거였는데, 누가 봐도 조금 더 즐기다 온 것 같은데?”
“생각보다 병력 구성도 좋고 무기도 좋고 지휘관도 나쁘지 않던데요?”
“아. 그러셔요. 그래서 놀다 오셨다?”
“아니. 지휘관이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안 되니까. 제가 나선 거죠.”
욕심만 챙긴 거였다면 뭐라고 하겠지만, 명분도 있으니 그냥 웃고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손쉽게 끝나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 때가 없으니까. 병력도 줄고, 내부에서 터지고 외부에서 짠.”
“때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량이라는 분. 진짜 뭐 하는 분이에요?”
마니에르가 량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드러낸 것은 오이겐이 수그리고 난 후였다.
별다른 소득이 없고 마니에르가 보기에 연금술사에 불과한 것 같은지 흥미가 빠르게 식은 게 보였다.
‘량이랑 이야기한 걸 물어보니까. 엄청난 행정가 같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번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다시금 열의가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계획을 짤 때 제일 의문을 많이 제기하기도 했지.’
그 후에 모든 일이 량이 설명한 계획대로 진행되자 량을 마치 사랑하는 여인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친구. 네가 포섭 못 할 사람. 그러니까 꿈은 깨자.”
“에이. 포섭은 무슨. 그냥 때때로 도움을 받는 정도는.”
“그렇게 다가가면 절대 량이랑 친해지지 못할걸?”
“뭐 노하우나 이런 것 없습니까!”
“응. 뭘 생각하든 니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그냥 진심으로 부딪혀 보던가.”
“오셨습니까.”
마니에르의 이야기를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내성 앞에 도착했다.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마르쿠스의 주변에는 적지 않은 인원들이 쓰러지고 찌그러져 있었다.
“응. 들어가자. 밖에도 이제 슬슬 정리될 것 같아. 이 사람들은?”
“보고 하러 오는 인원도 있었고, 묘한 기류를 느끼고 온 사람, 무언가 연락을 받은 듯 여럿이 온 경우가 있었습니다.”
“아까 전투할 때였을까. 이건 카인에게 말해줘야겠네. 고생했어.”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 보니 전투를 치른 흔적이 보이는 카인과 수호대원들이 보였다.
“너가 말한 대로네? 안 그래도 밖에서 들어오려는 인원이 꽤 많아 보이더라.”
“진짜? 흠. 확인해 봐야겠네. 다 잡으려 했는데, 빠져나간 인원이 꽤 있을 거야. 아슬아슬했어.”
중앙에 있는 ‘어스퀘이크’ 그중에서도 돌라의 표정은 거의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마르쿠스는 안에 두고 가야 했었나.”
“아니야. 밖에서 들어오려는 인원이 있었다며, 잘한 거야. 로사는?”
“성벽 정리 중. 조만간 끝날 것 같아.”
“마르쿠스, 마니에르. 여기에 다른 인원이랑 같이 홀로 가서 지키고 있어. 난 범이랑 주변 탐색하고 올게.”
카인의 말에 따라 이동하는 인원들.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입을 여는 카인이었다.
“완전히 넘어갔어. 아마 손쉽게 말할 것 같더라.”
“어떻게 알았어? 돌라도 꽤 오래, 그리고 높은 위치에 있는 거 아니었어?”
“외부인이니까. [맘몬]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외부인이라고?”
“응. 뭐 재인처럼 아예 처음부터 신분을 세탁하면 불가능한데 그게 쉬운 건 아니니까.”
“재인?”
자리를 옮기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표정을 보았는지 웃는 카인이었다.
“그러니까 과거가. 그것도 어린 나이일수록 그 기록이 확실하면 외부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어.”
“아! 그래서 외부인이라고 한 거구나.”
“응. 그리고 [맘몬]같은 조직은 외부인에게 웬만하면 어느 정도 이상의 지위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걸음을 옮기며 사용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깨끗하고 단출한 숙소.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아낸 거냐. 진짜.”
“훈련을 받으니까. 조금 어색한 공간, 의도적인 공간, 튀는 공간을 찾아내고 계속 확인하는 거지.”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은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를 살짝 밀고, 벽을 만지고 있었다.
“범아 여기서 여기까지 정확하게 잘라주라. 딱 이만큼.”
카인의 손짓에 따라 푸르른 선이 벽에 그려진다. 그려진 선을 따라 벽에 도를 집어넣으니 쑥 들어가는 것이 공간이 있는 듯했다.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애초에 이 성을 만들 때부터 [맘몬]의 지원을 받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손에 작은 빛 덩어리를 만든 카인은 자연스럽게 구멍이 난 통로로 걸어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이런 공간을 찾은 게 신기해서. 기감에는 전혀 안 느껴졌는데.”
“이건 좀 다른 영역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 돈을 쓴 곳들은 당연히 기감에 대한 대비는 해놓지.”
통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 계단이 바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완드로 하나씩 찍어보며 내려가는 카인.
“엄청 익숙해 보인다?”
“우리도 이런 거 몇 개 만들고 모의 훈련도 진행하니까? 나는 아직 멀었지. 어떤 분은 보는 순간 딱! 딱!”
그렇게 말하는 카인도 이미 전문가처럼 행동이 거침없고 자연스러웠다.
“여긴데. 쪼끔 애매하긴 한데.”
계단을 모두 내려오니 보이는 철문. 불을 밝힐 수 있게 양옆에 횃불이 있었다.
“기관은 아직은 어렵단 말이지. 흐음.”
문을 두드리고 여기저기 살펴보던 카인은 이내 품속에서 작은 시약병을 꺼냈다.
“그건 뭐야?”
“량이가 만든 말도 안 되는 괴물? 만능열쇠랄까. 봐봐.”
은빛 찰랑이는 액체는 점도가 꽤 있어 보였다. 그것을 그대로 열쇠 구멍에 들이붓는 카인.
“이런 문은 다른 장치가 없는 대신 열쇠가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거든. 잘못하는 순간 내부가 완전 박살 나겠지.”
“그럼 차라리 잘라내는 게 낫지 않아?”
“안 돼. 무조건 열쇠로 열어야 하게 되어있을 거야. 하지만 이게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
“속을 녹이기라도 해?”
“아니. 속에서 바로바로 굳으면서 열쇠가 되는 거래. 하여간 이런 걸 잘도 만들어 낸다니까. 됐다!”
은빛 액체가 열쇠 구멍을 다 채우고 조금 흘러나오더니 바로 굳었다.
흘러나와서 굳은 것을 잡고 돌리니 문 이곳, 저곳에서 딸칵 소리가 나더니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 들어가?”
“초보들이 흔히 하는 실수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게 날아갈 수 있다구.”
완전히 열린 문 앞에서 완드로 이곳저곳을 건드리는 카인. 주변으로 마나가 유동되는 것으로 보아 뭔가 하는 듯했다.
“그냥 서류 더미인가? 약간 네 방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서류 더미가 아니라 보물이지. 됐어.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가 주변을 살펴보니, 어떤 용도의 방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러 공책들, 그 앞에 인물, 지리, 재물 등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는 책장들.
그리고 마나석이 위에 박혀있고 밑에는 종이를 놓을 수 있게 한 상자 두 개.
“꽤 돈을 많이 들였나 본데?”
“꽤가 아니라 엄청나게지! 생각보다 돌라가 신뢰받는 건 아니었나 봐.”
여러 서류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것만으로 바로 판단하는 것이 의외였다.
“응? 그건 왜? 뭘 보고?”
“여기는 하인들이 지내는 곳이랑 이어진 곳이기도 하고, 이걸 봐봐.”
인물 카테고리에 있는 책에는 돌라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그의 연인들과 약점이 쓰여 있었다.
“나중에 다시 와서 정리해 봐야겠다. 일단 나가자. 슬슬 올 때도 된 것 같은데.”
“다른 곳은?”
“이미 빠져나간 이들이 있으니까 소용없어. 그리고… 뭐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또. 또. 어물쩍 넘어가려고!”
자연스럽게 나가는 카인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올라가는 카인은 내내 말을 피했다.
홀에 도착해 보니, 어느새 밖의 상황을 정리한 것인지 일단의 무리가 더 들어와 있었다.
“어디 갔다가 왔어!”
“로사? 벌써 들어왔어? 둔클한테 맡기고 왔구나?”
“맡길 수 있는 인원이 있으면 써먹어야지. 그나저나 카인! 너네 진짜 엄청나더라.”
“카인? 너네? 카인과 량이 말하는 거야?”
“뭐야. 범이도 모르고 있던 거야? 언제 그렇게 다 준비한 거야?”
“아니. 준비라기보다 그냥 몇몇 추려서 만든 거지.”
“너희 기준은 너무 높아! 병사들 하나가 다 십인장인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자유섬이니까. 그나저나 고생했어. 시간 맞추느라 힘들었을 텐데. 밖은 완전히 정리했고?”
“그럼. 누구 명령이라고, 싹 끌고 와서 정리해 놨지. 지금 다 도착해서 막고 있을 거야. 근데.”
“효과가 있겠냐는 거지? 괜찮아. 후속조치만 제대로 해도 되는 거니까.”
로사와 카인 두 사람이 그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홀로 들어왔다.
“모두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정리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