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저. 범님?”
“네?”
대답하는 순간, 둔클의 발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 상황에서 떠오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족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이래서 귀족 놈들은. 자기들이 항상 위에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그대로 한 손으로 바짓단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목을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놀란 카인의 옆에서 머리를 짚고 탄식하는 로사를 보니 독단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았다.
“왜? 시험한 대로 안 풀리니까 이상해?”
바닥에 처박혀 어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둔클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로사 때문에 아무런 문제없이 멀쩡한 거야. 어디 가서 그렇게 함부로 나대지 말고.”
볼을 한 번 가볍게 쳐 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로사와 카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
“괜찮아. 저러는 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경계에 있으면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자유섬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부끄러웠는지 바로 일어서지 않고 있다가 슬그머니 로사의 뒤로 향하는 둔클을 불러 세웠다.
“야.”
자신을 부르는 건지 처음에는 모르다가 이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서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여는 둔클.
“자네가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린 나이에 강해져서 그런지 예의가 없군?”
“둔클!”
로사가 제지를 시켰지만, 자신은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 이럴 때 느끼는 감정인가 싶었다.
“냅둬 로사. 하. 진짜. 야. 다짜고짜 발을 날린 건 너라고. 그리고 땅에 처박힌 주제에 내가 존대를 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공녀님께 감히? 지금 누구에게 야라고 하는 것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
“알 필요가 있나. 아나 진짜 어이없는 새끼네 이거. 로사가 네 목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공녀님과는 상관이 없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한들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다.”
“하. 예의는 주고받는 거라고 안 배웠나 본데?”
“공녀님의 친우라기에 예의로 다가가 주었더니, 역시 이래서 핏줄은.”
거기까지였다. 개소리를 들어줄 인내심은 그렇게 깊지 않았다. 힘으로 일을 해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대로 달려가서 목을 잡고 다시 땅에 처박아 주었다.
“하. 진짜 귀족 새끼들은 대가리에 무엇이 찼기에 이럴까? 로사. 변명.”
마음 같아서는 오러홀을 부시고 오른팔을 자르고 싶었지만, 로사의 수하이니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진짜 미안해. 자유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귀족이라는 생각이 변하지 않았어. 미안하다. 한 번만 용서해 줘.”
고개를 숙이는 것을 넘어 허리까지 숙이는 로사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녀님! 저 때문에 이.”
“닥쳐라! 내가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
‘오? 괜찮은데? 아직은 멀었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의 로사와 비슷해지고 있는 거 같네.’
헛소리로 인해 상했던 기분이 확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부채감이 옅어지는 기분이기도 했다.
“야. 조심해라. 블레어 왕국에서는 네가 힘깨나 쓰는지 모르겠지만, 자유섬에서 그랬다가는 네 목이 날아가는 거로 모자라 로사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다. 쯧. 카인?”
“응. 다 했어. 시간도 맞췄고.”
“그럼 가자. 로사 너도 고생해라.”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아 빅터에게 올라탔다. 카인과 함께 협곡으로 향할 무렵, 뒤에서는 둔클의 뒤통수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사 엄청 화났나 봐. 그치?”
“화날 만도 하지. 어떻게 보면 자기 권위를 넘어선 일을 한 거니까. 근데 숨겨진 검이라며?”
“큭큭. 카시스 후작가 내에서도 혈통주의자들이 있으니까. 뭐. 이번에 깨닫는 게 있으면 변하겠지?”
“근데. 그 눈빛은 뭐냐. 소름 돋게끔.”
“로사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거다. 크하! 멋있다!”
“좀!”
“네 목이 날아가는 거로 모자라. 크흐! 무슨 연기 보는 줄. 상 남자였구나 우리 범이가!”
“아! 진짜!”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를 때리고 싶었지만, 괜히 다칠까 봐 빅터의 배를 박찼다.
‘진짜 내가 한 번 봐준다.’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빅터의 뒤로 카인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번 죽어봐라. 내가 멈추나 보자.’
순혈 피에트 마가 모든 힘을 개방하고 날뛰는 순간에는 어떤 말도 범접할 수 없다고 한다.
배양된 말이 아닌 오로지 달리기 위해서 태어난 말.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부수고 지나가는 흉포함.
빅터가 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본능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본능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온 마체의 근육에 힘을 주며 튀어나가는 빅터는 맹렬했다.
‘이제는 카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구나.’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달리던 빅터는 거대한 성벽이 눈에 보이자 차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와. 빅터. 너 진짜 대단하구나?”
성벽이 어수선해 보이는 것이 빅터가 전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본 듯했다.
“카인이 좋아하겠는데?”
의도치 않게 카인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며 뿌듯해 있을 때, 전신에 나뭇조각을 덕지덕지 붙이고 오는 카인이 보였다.
“마울님! 제가, 제가!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응? 뭐가? 빅터가 오랜만에 달리고 싶다고 그래서 나도 달렸지.”
“피에트 마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그렇게 달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직 준비도 안 된 아이인데!”
“아! 잠시 잊었어. 빅터랑 달리는 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마울님! 아니? 스테인님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겁니까?”
다행히 때가 좋게 스테인의 잔소리를 막아줄 구원군이 도착했다. 페니가 성벽 밖으로 마중을 나왔다.
“별일 아닙니다. 오랜만에 빅터와 함께 달렸는데, 스테인이 타고 온 아이는 어린아이라 주체를 못 해서 그렇습니다.”
“아! 그 유명한 종군(從軍)인가 보군요. 역시 피에트 마는 다른가 봅니다.”
흉포하고 달리기 위해 타고난 피에트 마들은 특이한 특성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페니가 말한 종군이었다.
서열이 엄격한 피에트 마들은 그들의 수장이 달리는 곳으로 함께 돌진한다.
기본적으로 20개체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 피에트 마가 달리는 모습을 본다면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한다.
“저희 경비가 마울님께서 달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저에게 급히 보고하더군요. 그것을 보지 못 한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곧 볼 일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피에트 마의 질주를 따라올 수 있는 것은 같은 피에트 마 밖에는 없는지라.”
“이렇게 서 계실 것이 아니라 들어가시지요. 제가 따로 말해서 저녁을 준비하라 했습니다.”
확실히 일주일 사이에 확연하게 대우가 달라졌다. 거의 한 가족이 된 것처럼 대해주는 페니와 돌라.
‘카인이랑 량의 손안에 있다는 걸 알고나 있으려나? 오늘은 뭐가 저녁으로 올라오려나.’
자신은 그 가운데에서 대우를 받으며 맛있는 것을 먹으면 될 일이었다.
항상 새로운 음식과 선물로 환심을 사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제는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안장을 가지고 왔었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던 기억이 있었다. 빅터에게서 내리며 안장의 끝에 새겨진 문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장은 좀 어떠하신지요? 확실히 불스 용병단의 가죽은 질이 좋지요.”
‘데마르님이 호구들이 있다고 하더니, 가장 큰 호구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반쯤은 전략 물자 취급을 받는 마수 가죽이기에 유통되는 모든 가죽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다.
그중에서도 무조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표기하게 되어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되었다.
‘근데 이게 창고에 쌓여있는 거라고 말하면 난리 나겠지?’
“확실히 가벼워서 빅터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말에서 내려 페니의 안내를 따라서 저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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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울도 내일이면 죽는 건가. 아쉽네, 꽤 재밌었는데.”
“처음에는 엄청 어색해 했으면서, 금방 익숙해졌나 보다?”
“말투가 조금 오그라드는 것 빼고는 매일 말 타고 좋은 음식 먹고, 이렇게 빅터 갈기 빗겨주고. 생각보다 괜찮던데?”
“그래도 슬슬 정리해야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뭐. 내가 바빠지나, 너랑 량이 고생하겠지.”
“치. 누가 들으면 전쟁이란 전쟁은 다 경험한 줄 알겠어.”
“아마도?”
“헛소리 그만하고, 마저 정리하고 어서 들어와. 애들이랑 모여서 마지막으로 정리해야지.”
“알았다. 금방 갈게.”
카인이 마방을 나서니 고요해진 마방. 그곳에서 긴장감이 살짝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걸 기가 막히게 눈치챈 빅터가 투레질을 하는 것이 보인다.
“워. 워. 아니야. 괜찮아. 그나저나 전쟁인가?”
전쟁에, 전장에 몸을 담으며 깨달은 사실은 그렇게 급박한 전쟁은 없다는 점이었다.
전투는 말도 못 하게 급박한 상황의 연속이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의 연속이지만, 전쟁은 달랐다.
전쟁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있는 이들이야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겠지만, 자신 같은 칼에게는 전투를 제외하면 늘어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지만, 뭐. 내가 고생하나. 자! 됐다. 내일 보자.”
몇 번을 토닥여 주고 나서야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빅터를 뒤로하고 저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레핀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응. 다들 준비는 잘하고 있었어?”
“예. 안 그래도 모두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자.”
한 층을 올라서 서재에 도착을 하자, 레핀은 문 앞에서 경비를 서게 두고 서재로 들어갔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스테인의 얼굴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듯했다.
“응. 다들 잘 모여있었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동시에 문이 닫히고 스테인의 영창이 끝나자 모두 각을 잡고 서 있던 자세에서 풀어진다.
“에이. 다들 너무 확 풀어지는 거 아니야?”
“대장은 도련님이라 편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내내 각 잡고 살아야 한다구요.”
“에이. 프라우. 너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여기서 제일 익숙한 사람인데.”
“익숙하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거든요!”
“말은 잘해요. 그래서 내일은 어떻게 진행하기로 했어?”
“돌라가 우리를 포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저녁을 먹고 난 후 연회를 열어주겠다고 하더라.”
“무슨 명목으로?”
“우리가 여기에 정착을 하는 것으로.”
“그렇게 가기로 결정이 된 거야?”
“우선은. 휘하에 들어가는 건 보류지만, 여기에서 마방을 맡기로 했지.”
“어제 엄청 바쁘더니 그 일이었구나. 새삼 도련님이라는 게 편하네.”
“안 그런 귀족들도 있지만, 대다수 귀족은 좀 그런 편이지.”
“가서 악수만 하면 되는 일이라니. 전부 참여한대?”
“응. 오히려 먼저 말하던데? 아! 그리고 연회를 시작하고 나서 조금 연기가 필요하긴 한데. 너한테는 쉬울 거야.”
“왜. 이번에도?”
“아! 진짜 미안하다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구성은 그렇게 가는 건가?”
조금 늦은 시간까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왜?”
“영 어색합니다. 역시 저는 범님께서 알려주신 망치가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참아. 그동안 고생했어.”
망치는 눈에 너무 띄는 무기이기에, 메이스로 바꾸어서 들고 있는 마르쿠스였다.
“사실 설레기도 합니다. 얼마 만에 범님과 합을 맞추는지.”
“나도 기대하고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너랑 맞추는 게 제일이기는 하더라.”
그렇게 내일을 준비하며 하루빨리 내일 저녁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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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이런 결정을 내려주어서 몹시나 고맙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