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한층 더 화려해진 접견실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이 아닌 접견실로 안내해 의아해하던 찰나.
“이렇게 초대에 흔쾌하게 응해주어서 고맙네.”
일단의 무리를 끌고 오는 돌라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대충 누군지 짐작은 갔다.
누가 보아도 무인인 사람들이 세 사람. 거기에 더해 한 명의 마법사까지.
‘저 사람들이 ‘어스퀘이크’겠지. 다들 꽤 괜찮은데? ‘비엔토’가 해볼만 하려나. 간당간당할 것 같기도 하고.’
내심 씁쓸한 마음이 조금 올라왔다. ‘비엔토’라는 이름에 애착이 없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뭐 쓸 곳이 있다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동안 비엔토의 대장이라고 소개(비록 에펫님 뿐이었지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와 같은 마법사, 아니지 나와 다르게 공격에 미친 마법사라네.”
“‘어스퀘이크’를 실제로 눈앞에서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피에트 가문의 차남 마울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카인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아련한 표정이라 잘 넘어갔다지만, 정신 차리라고 끊임없이 정신 공격하고 있었다.
“본래 ‘어스퀘이크’가 어떻게 뭉치게 된 것인지는 알고 있나?”
“[무투의 탑]을 위해서라고만 들었습니다. 제가 세상사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닌지라.”
“하하하! 그럴 수 있지. 응당 한 분야의 대가가 되려면 그런 자세가 필요한 법이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엄청 익숙한 것 같은데 말이지.’
한 명 한 명을 소개해 주는데, 유독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가 모이게 된 목표는 하나였다네. 다섯 명이 마스터를 이겨보자. 그것이 목표였지.”
그 말에 다들 뿌듯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이룬 것 같았다.
다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여전히 신체는 강건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렇게 쌓아온 인연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우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말일세.”
“돌라. 그럼 난 할 만큼 한 거지? 이만 들어가 본다?”
그러고서는 훌쩍 나가는 여자 마법사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을 이어가는 돌라였다.
“최근에 더 예민해져 있다네. 이해해주게나. 5서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나.”
“형님. 저도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아. 그래 네가 가서 좀 달래주거라. 참. 너도 대단하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같이 밖으로 따라나섰다.
‘저런 검사는 본 적이 없는데, 왜 익숙하게 느껴지지?’
“식사는 아무래도 우리끼리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다들 이런 자리가 어색한 사람이라.”
“괜찮습니다. 이렇게 환영해 주신 것만으로도 과합니다.”
‘아직은 다들 경계에 서있구나. 돌라는 조금 애매한 것 같고. 역시.’
마스터라는 경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그럼. 우리도 자리를 옮겨보도록 하지. 오늘은 특별한 곳에서 저녁을 준비했다네.”
다른 이도 아니고 돌라가 직접 나서서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도착하니 성의 2층 정원에 식탁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 바로 옆으로는 외성과 마을의 풍경을 지나쳐 저 멀리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오늘은 하늘이 맑아서 바다까지 보이더군. 마치 우리의 만남을 축하하듯 말이지.”
첫 시작부터 와인이 나오고 끊임없이 음식과 궁합이 맞는 술들이 나왔다.
신변잡기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디저트가 나올 때쯤,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떤가. 석양이 참 아름답지 않던가?”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이 풍경은 정말 머릿속에 새기고 싶을 정도입니다.”
“허허. 나도 이 광경을 보고 싶어서 성을 지을 때 엄청 신경을 썼지. 그나저나 조금 안 좋은 소식이 있네.”
“네? 좋지 않은 소식이라 함은?”
“아무래도 자네 가문에서 자네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네. 이 소식을 말해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숨기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네.”
그 순간, 카인에게서 머릿속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테지. 가문에서도 아마 소식이 전해질 듯싶네.”
“하지만. 하지만.”
‘조금 있다가 들어가서 보자. 진짜.’
필사적으로 스테인을 노려보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고 있을 때, 슈테힌이 입을 열었다.
“하아. 결국 그렇게 결정을 내린 거니. 참.”
“누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괜찮아. 흥분할 일은 아니니까. 돌라님.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서도 되겠습니까?”
“아! 슈테힌 교관. 그러도록 하게. 내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군.”
“아닙니다. 빠르게 이런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성을 나와서 외성으로 향했다.
외성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언성을 낮추지 못하고 누님께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입니까 누님? 스테인이 한 말이 진짜입니까?”
“글쎄. 아마도 처단이 아니라 축출로 결정 난 것 같으니. 조만간 무슨 이야기가 오겠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잘 지냈는데도. 누님도 언제나 가문 밖을 전전하신 것도 저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구. 우리 막내가 많이 컸구나.”
“아니. 더이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닙니다!”
어느새 걷다 보니 마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사가 아닌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범님 정말 연기를 너무 잘하시는데요?”
하지만, 유모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스테인에게로 다가가 살며시 뒷목을 잡았다.
“아. 아. 범아.”
“아니지? 너 진짜로 그런 장난치면 다신 이렇게 넘어가지 않아.”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범이는 너무 어색한걸. 그래도 진짜 미안해.”
“처음에 진짜라고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화낼 뻔했잖아.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래도 내가 아는 범이는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지 않을 아이니까.”
“하아. 잠깐 그대로 있어 봐.”
스테인에게 다가가서 혼신의 힘을 중지에 담아서 딱밤을 때렸다.
“도련님! 도련님!”
유모가 놀라서 소리지르는 것이 보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다음에도 그러면 가만 안 둬.”
“으하아… 진짜 아프다. 알았어. 정말 미안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냐고 속삭이는 유모가 보이지만, 들었을 때는 화들짝 놀랐었다. 진심으로.
‘마르쿠스가 용병단에서 사실은 축출되었다고 대뜸 말하면 내가 안 놀라나. 진짜. 장난칠 게 따로 있지.’
그 덕분에 돌라는 확실하게 속아 넘길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실수할 뻔하기는 했다.
“에라이! 진짜.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마지막으로 때린 거지? 화 풀렸지?”
“몰라. 이 시키. 진짜 다음에 그러지 마. 놀랐네. 하여간 잔대가리.”
“이제 아마 대놓고 슬슬 시작할 거야. 내일쯤 유모를 부를걸?”
“그러고 나서는?”
“그리고는 가만히 있으면 돼. 조만간 가문에서 연락 올 거니까. 그 이후에 다시 너가 나서야 하긴 하지만.”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카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
‘진짜 괴물들. 카인도 량도 어지간하구나.’
저녁 만찬 이후에 벌써 1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그 1주일 내내 소름이 돋았다.
한치도 틀리지 않게 카인이 설명한 대로 이루어졌다. 돌라가 유모를 불러서 넌지시 이야기하고, 가문에서 연락이 왔다.
그 이후에는 돌라의 은근한 설득이 계속 이루어졌다. 말을 키우는데 투자를 얼마나 할 수 있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절정은 바로 어제였다. 빅터를 태워주면서 들판을 함께 달라고 난 후에는 대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바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눈앞에 수십 명의 인부들이 마방을 새로 새우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자재들도 하나같이 자신이 바란, 카인이 알려준 것들과 일치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모르겠네.”
제 2 기마대로 위장한 이들을 돌라에게 소개해 주면서 성의 구조를 눈으로 보여주었다.
침투 방향과 병력이 있는 장소, 순환 시간을 모두 확인했다. 이제는 결행만이 남았다.
“왜 그러십니까? 조금 심심하십니까?”
스테인으로 위장한 카인이 사람들 앞에서 굵은 목소리로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 스테인.마방이 언제쯤 완성될까 싶어서 ”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차분히 기다리며 때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알지. 아는데 좀이 쑤시는걸.”
“조만간일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럼 잠시 빅터와 함께 나들이를 다녀오시겠습니까?”
“응? 그래도 되나?”
“저도 함께 가시지요. 가끔 빅터도 미친 듯이 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릿속으로 다른 말이 들려오자 조금은 신나기 시작했다. 스테인과 함께 마방으로 가기 전에 페니를 보러 갔다.
“아! 마울님. 오늘은 공사를 지켜보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스테인과 함께 잠시 밖을 다녀올까 합니다.”
“밖이라고 하심은…?”
“요즘에 빅터가 너무 달리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풀어주려 합니다. 주변에도 익숙해져야 하니 말입니다.”
그 말에 혹시 하던 표정에서 환히 밝아지는 페니가 보인다.
“말에 관한 것은 마울님께서 가장 전문가이시니. 도움이 될 이들을 붙여드릴까요?”
“하하하. 붙여주시는 것은 너무 좋지만, 따라오지 못할 것입니다.”
“아! 역시 피에트 마인가 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들판을 쭉 타고 가면 해안이 나온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아! 맞습니다! 그곳도 돌라님의 영역이지요. 그럼 내일 돌아오시는 겁니까?”
“빅터와 함께 다녀오면 오늘 저녁에는 들어올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은 페니를 보니 조금 웃기기는 했다.
그리고 이내 스테인과 함께 말을 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발로 뛰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시원함이 온몸을 강타하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서 꺾어져야 해. 아주 작은 부분이 있어.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부분.”
카인의 안내를 따라 질주하기를 한 시간. 작은 협곡으로 보이는 곳을 지나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 특이한데? 협곡의 끝이 절벽이라고? 근데 여기라고?”
“그럼. 이 정도는 되어야 아무도 모르게 올 수 있는 거지.”
말들을 잠시 세워두고 절벽의 가장 끝으로 다가가자, 작은 배가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카인의 수신호에 작은 배에 있던 인원들이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저거 설마?”
“헤에. 신박하지? 이곳은 어차피 버려진 곳이라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곳이라고 하더라.”
“그렇다고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내가 와야지! 그나저나 카인. 진짜 감쪽같은데? 범이도 그렇고.”
“오랜만이네 로사. 이제는 뱃사람이 다 됐어.”
귀공녀와 같은 인상을 온몸으로 표출하던 로사가 이제는 굳은 심지가 보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자! 인사해. 피더의 부단장인 둔클이야.”
“로사님의 친우분들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피더의 부단장 둔클이라 합니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인사.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년인이었다.
‘기사나 무인이라기 보단 오히려 집사 같은 느낌인데. 세바스찬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세빌인가?’
“블라우 구역을 다스리는 순의 부총수를 맡고 있는 카인입니다.”
“수호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범입니다.”
카인은 짧게 인사만 건넨 뒤 바로 로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일찍 왔네?”
“그치? 바람이 도와서 생각보다 좀 빨리 도착했어. 너희는?”
“다 끝났지. 이제 너랑 시간만 조율하면 돼.”
“우리는 한 3일 정도 있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 준비하고 여기에서 출발하는 시간까지 해서.”
“3일. 그럼 3일로 하지 말고 4일 뒤 저녁으로 하자. 해가 지고 나서.”
“좋아. 그럼 우리는 조금 돌아서 가야 하니까. 너희가 올 때는 얼마나 걸렸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자신은 둔클이라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 계기만 있으면 마스터가 될 것도 같은데? 분위기가 정말 끝내주는구나.’
사람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다 다른 기세와 분위기를 풍기는지 재미있고 신기했다.
“저. 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