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정적.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 주변의 사람들만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있었고, 우스트 이모는 머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봐. 다만, 개짓거리하면 진짜 뒤집는다?”
그 말에 당당하게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계단에 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 중 한 명으로 보였다.
“하아. 그래 말해봐. 뭔데?”
“그러면 1대대와 9대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진짜 대가리만 열심히 굴리지? 왜 그렇게 변했니.”
안타까움이 섞인 말투에 그 질문을 한 사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래. 1대대와 9대대는 나중에 결정되고 나면 그때 알아서 움직일 거란다.”
“그 결정된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까?”
“마음을 얻는다면 따를 것이고 아니면 지들이 알아서 갈 길을 가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머리를 쥐어 잡으셨다.
“하. 오늘도 긴 하루가 되겠구만.”
그 말에 옆에 있던 우스트님이 이를 악물고 말씀을 하신다.
“엄마가 자초한 일인데 왜? 진짜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해.”
“됐다. 여기서 대충 마무리하면 되지. 하여튼 시작하자.”
러더님은 이미 언질을 받으셨던 듯, 자연스럽게 회의를 시작하셨고, 이내 정리된 난장판이 일어났다.
*
파란만장한 회의가 어떻게 마무리되고, 할머니의 집에 오자마자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한 사람은 찡얼거리고 한 사람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엄마! 진짜 이러기야?”
“왜! 그럼 누구를 시키리? 너? 웃기고 앉았네. 너를 시키려면 그놈아는 뒤져야 해. 퍽이나 황제가 좋아하겠다?”
“엄마가 막아줄 수 있지 않아?”
“그러니까 왜요. 제가 왜 막냐구요. 그리고 너에게도 좋지 않다니까 이 화상아.”
“아니, 그래도 이제는 아이도 많이 자랐구. 그이도 많이 변했다고!”
“얼씨구나. 그놈의 콩까지는 왜 벗겨지지를 않는 게냐. 벗겨져도 한참을 전에 벗겨져야 했는데.”
온 저택을 울리는 소리에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었지만, 더욱이 식당에 모두가 있기에 더 잘 들렸다.
“엄마. 두 사람은 원래 저런 거예요?”
“하아. 둘째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데, 거기에 완전히 홀려가지고 문제지.”
“네? 홀렸다니요? 남자한테요?”
“그래. 남들은 다 아는, 대놓고 욕심부리는 걸 쟤만 모르고, 죽이자니 너무 좋아해서 문제고, 하. 진짜 머리가 아프다.”
우스트 이모의 남편은 한 제국의 꽤 알아주는 가문의 출신이라고 한다.
그것도 바다에서, 해양 무역으로 한 손에 꼽는 가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문의 다섯 형제 중에 셋째라는 것. 실력 중심의 가풍에서 다섯째에게도 밀릴 만큼의 실력이어서 완전히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생긴 건 또 멀쩡한 것을 넘어서 미남, 선이 고운 미남이었다.
동도에 놀러 나왔을 무렵, 그는 우스트 이모의 눈에 들어왔고 이모는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이 남자가 우스트 이모의 정체를 알고 헛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편의 가문에서는 조심한다. 우스트 이모의 심기를 거스를까, 혹시라도 이상하게 비추어질까 조심 또 조심한다.
문제는 그 남편. 우스트 이모의 힘, 할머니의 힘을 통해 시시때때로 가주가 되려고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린다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니, 너무 뻔히 보이고 어이가 없어 처리도 못 한다.
골칫거리가 이어지게 된 이유는 우스트 이모가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하는 점. 그리고 자식이었다.
대충 이야기를 들으니 이런 문제를 아주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량이면 엄청 깔끔하게 정리할 텐데?”
생각지도 않게 나온 혼잣말에 할머니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서 강하게 돌아선다.
“진짜?”
할머니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와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네. 이런 문제는, 량이 기가 막히게 풀어내거든요. 보는 시야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엄마! 진짜 이러기야? 다른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소소하게 동도에서만 바라는 것도 안 돼?”
“진짜. 하아. 머리가 너무 아프구나. 내가 만나러 가마.”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시면서 나가는 할머니의 어깨는 사뭇 가라앉아있었다.
“언니! 언니도 내가 너무 과한 걸 바란다고 생각해?”
“응. 난 네가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하! 언니는 3대대를 가져갔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나도. 내 몫이!”
순식간에 생긴 기다란 화염의 창이 우스트 이모의 목 앞에 먹이를 기다리듯 나타났다.
“너. 뒤질래?”
어머니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본다. 자신이나 도둑놈에게는 화를 낸 것이 아니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머니, 그에 반해 모든 것을 태울 것 같은 창.
서로 정반대의 간극이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와. 진짜 할머니가 괜히 어머니에게 후계를 물려주고 싶으셨던 게 아니구나.’
그 가운데서 태연하게 말을 하는 보일님. 그 역시도 태도가 싸늘했다.
“진짜 둘째 누나는 변하는 게 없구나. 내가 누나 때문에 여길 오는 게 싫어. 마지막이야.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야.”
말을 이어 옆에 서 있던 사람들도 말을 이었다. 다들 냉랭한 태도였다.
“넌 해적이 아니구나. 아니, 해적이었던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만하자.”
“왜! 왜 다들 나한테만 그러는 건데? 자기들은 한자리하고 있다 이거지?”
분위기가 얼음보다 더 차가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냥 닥치고 있지. 왜? 아 진짜 답답하다.’
지금까지 본 할머니의 자식들 중 이렇게 답답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 기지배가 진짜 미쳤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맞아야 정신차리지?”
우스트 이모가 목 앞에 있던 창을 빼며 한 바퀴 돌리자 두께가 조금 두꺼워진 봉이 되었다.
‘뭐지?’
봉의 모양으로 변한 불꽃을 보고 방 전체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 진짜 저건.”
“언제봐도 싫다. 진짜 조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내가 싫다.”
그렇게 역정 아닌 역정을 내면서 소리를 지르던 우스트 이모마저 얌전해졌다.
“언, 언니?”
“다들 다 크고 나서는 내가 너무 얌전히 있었지? 다들 오랜만에 한 번 정신 차려야지?”
“아. 아니야. 괜찮은 거 같아.”
“다들 한꺼번에 혼나는 것도 오랜만이네? 가족의 잘못은?”
“아니. 누나 가족의 책임이긴 한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나보다 많아?”
“조카도 있고.”
“범이는 잠시 나가보지 않으련? 엄마가 잠깐 동생들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나.”
언제와 같은 상냥한 목소리. 하지만, 들고 있는 봉과 눈빛은 반드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안 그래도 카인이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은데, 조금 이따 봬요. 삼촌, 이모들.”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서 나왔다. 그리고 나온 즉시에 곡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진짜. 엄마 한 성격 하는구나. 근데 다들 말 엄청 잘 듣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지위가 지위이니만큼 거부하고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눈치 볼 뿐이었다.
“할머니가 서열을 잘 잡아주신 건가?”
“그게 아니지. 내가 잘 잡아주었다고 한들, 저렇게 만든 것은 딸의 역량이지.”
“할머니? 량이? 갑자기 여기로는 왜?”
“어쩌기는 네 말대로 량이에게 상담을 구하러 갔지.”
“구실삼아 도망치신 거 아니었어요?”
손가락으로 딱밤을 때리는 할머니. 머쓱하게 웃는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재밌는 이야기를 하더구나. 아니 가설이지. 절대 맞으면 안 되는 가설.”
“그런 것 치고는 장모님도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너를 데리고 왔지. 안 그래도 이상타 생각했으니. 본래 그런 아이는 아니었는데.”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니요?”
“둘 다 그랬단다. 좀 멍청하지만, 그래도 한눈팔 놈팽이는 아니었고 내 딸은 순수할 따름이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어요? 변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사람은 변하지. 하지만, 그 본질이 변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란다.”
“그런데 그 본질이 변했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만, 애초에 그 권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권력에 미치게 되는 건 계기가 있어야 한단다.”
“그 계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감히?”
오연하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보니 인정이 되었다. 뒷배가 할머니면 누가 감히 권력으로, 힘으로 누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보지 못한 우스트 이모의 남편도 잘나가는 가문의 직계였다.
우스트 이모와의 결혼으로 오히려 가문에서 더 조심하고 귀하게 대우했을 테니 더욱 그랬다.
“근데 그 가설이라는 게?”
“글쎄. 너도 같이 가자꾸나. 한 번 봐야 나도 알 것 같구나.”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굳은 표정으로 있는 량을 보니 꽤나 심각한 일인 듯했다.
할머니, 량이와 함께 문을 여니 모두 엎드려 뻗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엄마?”
“역시. 내 첫째는 첫째구나. 다들 일어서렴.”
미동도 안하고 있던 이들이 할머니의 말에 순식간에 일어선다. 그리고 뭔가 서로 말을 하려는 순간.
“잠시 다들 가만히 있거라. 그리고 이 아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고.”
“엄마? 무슨 일이야?”
“글쎄 나도 봐야 알 것 같구나. 자. 네 마음대로 해 보렴.”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고 앞으로 나서는 량이. 그리고 보일님은 그 약병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형. 그 약은?”
“조용히. 가만히 있어.”
진녹빛 빛나는 약병을 보고 놀란 보일을 진정시키며 입을 여는 량.
“제 앞으로 일렬로 줄을 서 주시겠어요? 간격을 조금 많이 벌려서요. 그리고 우스트님은 맨 마지막에 서 주시고요.”
모두 량이 말한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제일 앞에 선 어머니를 조금 더 가까이 부르는 량.
“이걸 맡아보시면 돼요. 그리고 어떤 냄새가 나는지 절대 말하지 마시고 그냥 할머니 곁으로 가시면 돼요.”
량의 설명 그대로 어머니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차례차례 실행하기 시작했다.
‘향이 엄청 시원하고 상쾌한가 보네? 표정들이 엄청 좋은데?’
유일하게 수심 깊이 서려 있는 것은 보일 삼촌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우스트 이모의 차례가 되었다.
“내가 엄마 때문에 별의별. 으웩. 진짜 토나 와. 다들 어떻게 이걸 참은 거야?”
그리고 그 반응에 순식간에 보일 삼촌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셋째는 저게 무슨 의민지 알고 있나 보구나. 나도 들어서야 알았는데 말이지.”
모든 사람이 상쾌하고 시원하게 느끼는 향을 홀로 역겹다고 표현한 우스트 이모.
할머니의 말과 우스트 이모의 표정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이 개같은 새끼들이 내 자식한테도 손을 댄단 말이지?”
대지가 울린다. 아니, 파도가 미친 듯이 휘몰아쳐서 대지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바다의 신이 분노한다면 일어날 것만 같은 파도가 저택 앞으로 오지만, 저택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이게 초인의 힘이구나. 진짜 괴물인데? 마스터는 새 발의 피야.’
“장모님.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장모님은 나설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하… 이런 개같은 일이 있나. 은퇴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엎을까 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고, 잡아주세요.”
할머니께서 한숨을 쉬는 동시에 대지가 조용해졌다. 그리곤 우스트 이모의 뒤에 서서 양팔을 잡았다.
“엄마? 엄마? 뭐 하는 거야? 왜 그래? 내가 조금 떼썼다고 그러는 거야?”
“구문아. 우스트 입 좀 벌리렴. 닫지 못하게 활짝.”
어머니는 할머니의 말에 바로 따르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얼마나 자식들에게 신뢰받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우스트 이모에게 량이 서서히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앞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