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복수는 무슨. 네가 알아서 해야지."
"와! 진짜 너무하네. 자기는 몰래 막 비밀장소 가서 훈련하고 오고, 우리는 여기에서 굴리고."
"서약서 때문이라고 했냐 안 했냐. 할머니께 대들어 내가 아니라."
그 말에 살짝 할머니를 바라보더니 냉큼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마니에르.
"에이. 비빌 언덕에 비벼야 하는 거죠. 저기는 언덕이 아니라 너무 높은 산이라."
할머니의 등장에 창을 다시 갈무리하고 정중하게 인사하는 두치님이 보인다.
"고생이 많구나. 그래 네가 보기에는 어떻든?"
"나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만 빼고 정진한다면 꽤 재밌을 것 같습니다."
"호오? 그 정도니? 생각 이상인걸? 이번에는 창제가 정말로 나타날 수 있으려나?"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조차 아직 까마득히 멀었습니다."
"진짜. 너도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막 피 토하고 그럴걸?"
"그들과 제가 바라보는 이상이 다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그. 재미없기는, 꼭 대장을 닮아서 저러누."
가만히 듣고 있던 마니에르가 대화가 끝나가 보이지 끼어들었다.
"스승님! 5분 이상 버티면 말씀 해 주신다고 한 건 말씀 안 해주세요?"
"누차 말하지만, 난 네 스승이 아니다 될 생각도 없고. 그리고 네 스승은 창왕이 아니더냐."
순간 마니에르의 말에 식겁할 뻔했지만, 두치님의 이어지는 말에 가라앉았다.
'쟤는 진짜 대책이 없다. 없어.'
"창왕은 스승이 아니라니까요. 제 스승은 두치님밖에 없습니다!"
그 진중하고 과묵해 보이던 두치님도차 머리를 잡을 만큼 곤란하게 만드는 마니에르였다.
"그나저나 꼬맹이. 누가 창을 잘 쓰는지 알려주기로 했다고?"
"네! 제가 5분 이상만 버티면 된다고 하셨어요. 다만, 그 5분 내내 제가 지치지 않아야 하지만요. 오늘 성공했다구요!"
"5분을 버티는 게 힘들어? 네가 공격하는 건데? 뚫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와. 대장. 진짜 재수 없다. 그게 말처럼, 대장처럼 쉬운 줄 알아요? 스승님을 공격하면 그냥 물에 창질하는 것 같다구요! 의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진짜."
"그래. 두치의 창이 조금 그런 면이 있지만, 그건 네가 부족해서 그다음을 못 보아서 그렇단다."
"스승님의 창에 다음이 있어요?"
어느새 눈이 빛나며 할머니께 다가가는 마니에르. 마니에르의 가장 강점이 저런 무대뽀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 두치의 창은 후발제인(後發制人)의 극에 이른 창이니 말이다. 너랑은 정반대구나."
"후발제인. 카운터 같은 건가요. 진짜 열 받네. 한 번도 못 봤는데."
"오히려 너와 같은 아이는 다른 아이란다. 구문이라고 내 딸이지. 두치가 이를 악물고 넘으려는 산이기도 하고."
"어머니가요? 창을 쓰셨어요?"
"그럼. 그 아이가 불로 이루어진 창을 들고 돌진하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하나란다."
"아름다운 게 아니라 지랄 맞은 겁니다. 정말 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타는지 모릅니다."
"참고로 지금까지 아마 379전 379승일 거다."
그 말에 제일 놀란 것은 마니에르였다. 자신이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상대가 두치님이었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럼.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 내일을 준비해야지 않겠니."
"대모님 근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요?"
"글세 누구일까? 나중에 자격이 되면 두치가 알려주지 않을까? 가자 범아."
두치님에게 찡얼거리다가 괜히 한 대 맞는 마니에르를 뒤로하고 할머니의 저택으로 향했다.
"할머니. 근데 마지막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딸 아이가 누구를 가장 닮고 싶어 했을까?"
의뭉스럽게 말하며 웃는 할머니. 머릿속으로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할머니?"
"나중에 부탁 하나를 들어주면 할미가 소소하게 어울려주마."
"어떤 부탁인데요? 말만 해 주시면 뭐든 할게요!"
"뭐. 그건 차후에 일이니. 그럼 약속한 거다?"
"네! 그럼요. 그냥 말씀 해 주셨더라면 했을 텐데."
"에이. 그러면 쓰나. 나이가 들면 부탁을 하기보다 많이 주어야 하는 법이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참 넓어 보였다.
'매번 받기만 하네. 진짜 어떻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네.'
자신도 언젠가는 저렇게 나이가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었다.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야 오랜만에 수호대의 인원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한껏 뿔이 난 녀석들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비밀 훈련을 하고 오니까 좋냐 성화였다.
애초에 할머니를 뵙고 2대대와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이 누구 덕인데라는 말에 격침하고 조용해졌기에 다행이었다.
수호대 인원에게 량을 부탁하고 신신당부를 했다. 내일 무슨 일이 없을 것이긴 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해년회의가 끝나 우리의 마을로 돌아가기 전까지 경계를 유지할 것을 주문하고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벌써 해년회의가 개최되는 날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 말인즉 평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쉽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네."
저택 지붕에 올라가 하늘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수많은 별들이 바다에 비치며 빛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할머니. 진짜 이게 부탁이에요? 다른 건 안 돼요?"
"쓰읍. 남자가 두말하면 안 되지. 왜 그러니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거울에는 차마 눈 뜨고 못 보아줄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긴 천 한 줄로 간신히 하반신을 가리고 그 위에는 가죽으로 만든 치마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위에 입는 조끼가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랄까.
하지만 도저히 이러고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경솔한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자! 그럼 나가볼까? 요즘 애들이 머리가 굵어져서 꼭 이럴 때는 안 보인단 말이지."
"설마 다른 형제들도?"
"아니 어렸을 때는 좋다고 하면서 꼭 나이가 들어서는 도망가기 일쑤고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나라도 도망갔을 것 같은데. 애초에 좋아했을 리가...'
"심지어 자기 사진들을 숨겨 놓지를 않나. 내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보여주마.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사진. 사진? 그림도 아니고 사진? 설마 나도 사진이 찍히는 건가?'
"사진은 근데 마법사가 있어야 찍을 수 있지 않아요?"
현재의 장면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기에,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법사의 실력에 따라서 섬세함이 달랐다.
소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도 그나마 용병대의 마법사에게 부탁했기에 가능했다.
"내가 그게 너무 귀찮아서 부탁했지. 가성비가 쓰레기 같아서 팔지도 못할 거라고 하더라."
손가락 두 개 정도 되는 두께에 원통이 할머니의 품속에서 나왔다.
길이는 자신의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꽤 길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진을 찍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 여기를 열면 내 새끼 손톱만한 마나석이 들어가는 거지. 마나석 하나에 2장 정도 찍을 수 있단다."
'마나석이 같은 무게의 금 같은 가격으로 알고 있는데?'
가성비라는 단어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누가 저런 것을 만들었는지.
"하튼 파울로 그 영감님은 자기가 안 쓴다고 대충 만든단 말이지. 그래도 성능은 진짜 확실하니까."
밝혀졌다. 가성비는 하나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한 번 영상을 저장하면 어떤 크기로도 만들어준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름 명품이지."
나름 명품이 아니라 쓸데없이 고성능의 아티펙트같았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된단다. 나 정도 되면 이런 취미는 가져도 좋으니."
할 말이 없는 대답이기도 했다. 눈앞의 할머니는 금으로 배를 만든다고 해도 될 사람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할머니. 진짜 이러고 회의에 참석해야 해요? 사실 저 갈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그냥 수호대의 장일 뿐인데?"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고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 가는 건 수호대의 장이아니라 내 손주로 가는 거니 괜찮다. 자! 가자 어서!"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따라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을 가는 내내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해년회의가 열리는 거대한 건물. 로즈 아일랜드의 마을 중심에 있는 광장 같은 건물이었다.
"여기도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진짜 쓸데없이도 크게 지었단 말이지. 그치 않니?"
이럴 때는 새삼 할머니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광장의 앞으로는 훌트 누나를 선두로 양옆으로 호위를 서듯 길을 만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말이 누구에게 향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뒤로 모든 대장들과 자식들이 서 있었다.
"엄마는 너무 형식을 싫어해서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또 희생양이야? 이번에 구문 언니의 아들이라는?"
어머니의 뒤로 한 제국의 복식을 입고 있는 청순 그 자체로 보이는 미녀가 입을 열었다.
"우스트 너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치면서 꼭 그렇게 잔소리니."
"오랜만에 보니까 잔소리를 하는 거지! 그나저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전체 참석이라고 한 거야?"
"그건 네가 늦게 왔으니까, 조금 이따가 알면 되겠지?"
"와. 진짜 치사하다. 오랜만에 만난 딸한테 그래도 되는 거야?"
"연락 하나 없던, 손주도 안 데리고 오는 딸은 없다. 그나저나 너는 여기까지 와서도 그렇게 칙칙하게 있을 거니?"
짙은 회색의 긴 로브를 입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안 가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나온 것도 어머니께서 부르셔서 그렇습니다."
'저분이 량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가장 파울로님의 제자에 가까웠다는 분이구나.'
할머니의 자식들은 다들 한 명성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보일님이었다.
량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독보적인 위치로 후일 연금술을 이을 재목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다면서 그럴 일이 없다고 못 박기도 한 분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진짜 다르기는 다르네.'
할머니의 주변은 너무 편했다. 마치 동네 주점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대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경직되어있었다. 할머니께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였다.
'할머니가 이래서 해년회의를 싫어하시는구나. 해적 같지 않아졌다고 실망하시던데.'
한가운데 둘러싸여 광장 같은 건물에 들어가니, 옥좌 하나가 10개 계단 위에 웅장하게 놓여있었다.
각 계단에 대장들과 할머니의 자식들이 차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뒤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온다.
"넌 여기 있으렴."
옥좌의 바로 밑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옥좌가 있는 곳과 그 밑의 계단에는 모두 할머니의 자식들과 최측근인 듯했다.
방정맞게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러더님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확실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자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년 이상의 이들이었다.
'와. 근데 심하다. 진짜 해적이 무섭기는 무섭네. 뭐 이렇게 마스터가 흔하지?'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이들만 10명이 넘어갔다. 황제라는 단어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황제는 다르긴 다르다. 한 제국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이 자리에 들어오자, 소란을 정리하면서 나선 것은 의외로 러더님이었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번년도 해년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복잡다잡한 쓸데없는 걸 하기 전에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지."
할머니의 입이 열리자 정말 사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요즘 해적들 내에서 말이 많단 말이지. 뭐 확장이니 뭐니 개소리를 하는 새끼들도 있고."
그 말에 얼굴이 시뻘개지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그리고 요상한 새끼들이랑 붙어먹는 새끼들도 있고. 아주 개판이야 그치?"
몇몇이 저항을 하듯이 말하려고 하는 찰나에 할머니의 기세가 광장을 뒤덮는다.
자신조차 은근한 압박이 느껴질 정도의 기세. 그리고 그를 넘어서는 범접 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렇게 너희들이 좋다 하는 자유를 줄게. 나 이제 은퇴할 거야."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