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듣다 결국 자신마저 할머니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량이를 써먹으려 했더니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뻗어있는 것을 보고 포기.
그리고 시작된 대작은, 수많은 전사자를 만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자신이라 편했는지 할머니의 속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회한이 많으셨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보려고 하시는 것도 멋있었다.
세상의 가장 강한 이 중 한 명인 할머니가 그렇게 회한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으어어."
'일단은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젊은 것이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하려고 그러누."
자신보다 몇 배는 마셨을 할머니께서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손에 무언갈 들고 오셨다.
"쯧. 손자가 허약하니 할미가 고생이구나. 우선 먹거라."
손가락보다 더 큰 모양의 하얀 공을 입에 넣고 씹었다. 시원하면서 달콤한 것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눈이 절로 커지는 그런 맛. 전신에 힘이 없었는데, 조금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알어미 이에 무에요?"
"다 먹고 이야기하려무나. 이곳에서도 꽤 귀한 취급을 받는 꿀이니, 흘리지 말고."
그냥 꿀이라기에는 달면서도 새콤하고 거기에 시원했다, 신기한 맛이고 넘기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와. 할머니. 이게 뭐예요? 신세계인데요?"
"그치? 나도 처음 먹었을 때 그렇게 놀랐지. 무와 석청을 갈아서 만든 거란다."
마지막으로 시원한 물까지 마시자, 이제는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준비하는 건가요?"
"그렇지. 준비해야지. 이제 내일이란다. 최근 해년회의 중에서 가장 기대되는구나."
해맑게 웃는 할머니. 그로 인한 후폭풍은 결코 저렇게 해맑지 않을 것이다.
'뭐. 량이랑 카인이 알아서 하겠지.'
"다른 아이들은요?"
"흠. 다들 너무 허약하기 그지없더구나. 일어난 게 너뿐이란다. 은퇴하고 나면 소소하게 좀 가르쳐야 할 것 같아."
자고있는 량이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 말이 아니었을까. 속으로 명복을 빌어주었다.
"감사해요. 정말로 이 모든 게."
"되었다. 뭘 그렇게 낯간지럽게. 그냥 주지 못 한 것을 준다 생각하거라. 그나저나 연해를 베었더구나?"
"제가요?"
"그래. 그때 하이랑 대련하던 중에 몇 번이고 베었단다. 굉장히 수월하게 말이다. 아마 점심(漸深 : 점차 깊어짐.)까지는 무난하지 싶구나."
할머니와의 대련 중에서는 꽤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저히 자신이 심해를 가른 것이 상상이 안 되었다.
"연해, 점심, 심해, 해구라고 하셨죠?"
"그렇지. 그런데 그래 봐야 심해가 최고지. 해구는 나도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제가 심해를 갈랐다는 게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난 벌써 네가 의지로 점심을 자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참 사기적인 재능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할머니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렴. 지금에야 뭔가 있어 보이는 거지, 처음에는 정말 별거 아니었대두."
"그래도 지금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죠. 근데, 다른 초인들도 다 그렇게 괴물 같아요?"
"뭐. 상대적인 거지. 그중에서 나보다 더한 인물은 두 명 정도? 아니 세 명이겠구나. 그 정도뿐이란다."
"그럼 티거는 어느 정도일까요?"
"호호호호. 아직도 신경 쓰고 있구나. 티거는 이제 갓 오른 초인 정도에 불과하단다. 조금만 자기를 갈무리한 초인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고."
새삼 초인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하게 되면서도, 전생의 자신에게는 마스터가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마스터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오산이고 망상이었다. 괜히 각 왕국에서도 귀한 취급을 받는 마스터가 자처하여 변방에 가는 것이 아니다.
'수도에 자기를 초라하게 만들 초인이 그렇게 있는데, 누가 있고 싶겠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슬슬 아이들을 깨우자꾸나."
대충 둘러봐도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 생각을 담고 바라보자.
"정 뭣하면 강에 담그면 알아서 일어나지 않겠니?"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다른 이들을 향해 가는 할머니. 빠르게 할머니를 따라잡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희는 진짜 내가 한 번 살렸다.'
*
"종종 오십시오. 덕분에 저도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웠습니다."
"호호. 나이가 드니 꼬장했던 샤아니님도 이제는 조금 유해지는 건가요?"
"패기무쌍했던 대모님조차 빗겨가지 못한 세월을 저라고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유해질 수 있어 감사할 뿐이지요."
"지혜로워진 것 같아 보기는 좋은데, 영 예전만한 재미는 없는 거 같네요."
"하하하. 예전의 재미를 찾기에는 저도 삭신이 쑤시는 나이가 된 지라 봐주시지요."
할머니와 샤이니님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자신은 카인과 량, 그리고 오이겐의 짐을 전부 들고 있었다.
여전히 시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카인과 량, 그리고 정말 죽을 것 같아 보이는 오이겐이었다.
"좀 정신 차려. 왜 그렇게 다들 힘이 없는 거야?"
"너가 이상한 거야..."
"범이 괴물..."
"아니 오이겐은 이해가 간다고 치자. 너희는 뭔데?"
카인과 량은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었지만, 오이겐은 지킬 수 없었다.
결국, 강물행이었다. 뜨듯한 강물에 강제로 입수한 오이겐은 진짜 죽을 뻔했다.
"대모님이, 아니 장모님이 벌이라면서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혼자 먼저 일어나니까 좋냐. 배신자아."
냉정하고 단호했던 량의 목소리도, 청아하고 발랄했던 카인의 목소리도 술은 이기지 못했던 듯, 한껏 변해있었다.
"그럼 사뿐하게 달려볼까? 배가 아니라 달려서 갈 거니까 잘 따라오렴?"
"이모오."
"장모님."
두 사람의 간절한 목소리도 할머니에게는 닿지 않았다. 오이겐은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너무 늦어지면 딱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잘 따라오렴."
망설임 없이 출발하셨다. 짧게 인사를 한 뒤에 할머니를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따스한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감싸 안았다. 왜 이 좋은 것을 이제야 알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달리지 못해, 열심히 속에 있는 여러 가지를 게워내는 세 사람이었다.
마침내 빈 속이 되었을 때야 세 사람의 힘겨운 영역표시는 끝이 났다.
"으이구. 다들 허약해서는. 쯧. 따라오렴."
조금 걸어가니 바로 강가가 나왔다. 나무가 무성해서 보이지 않았을 뿐 강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만이 아니었다. 하이님께서 배를 천천히 몰며 오고 계셨다.
"쯧. 돌아가서 다시 훈련시켜야 겠어 하이. 애들이 너무 연약하잖아."
"하하. 대모님께 술로 덤빌 수 있는 인간이 있기나 할까요...?"
"어머? 이렇게 늙은 노파 하나 감당하지 못하면 인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인생은 바다처럼 고요히, 흘러가는 대로 담담히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으면 인기가 없어. 그래서 네가 혼자인 거란다?"
하이님이 바로 격침당했다. 조용한 가운데 바람을 맞으면서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진짜 좋다.'
어느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하는 느낌이었고,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
"진짜 천상 바닷사람을 할 상인데 말이야."
눈을 뜨니 자신을 보면서 말씀하시는 할머니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에이. 그냥 잠든 건데요?"
"저길 보렴."
배멀미를 한 것인지, 시체 같던 이들의 얼굴이 이제는 핏기가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나마 게워내서 저 정도인 거란다. 그런데 널 보렴. 잠들다니. 배가, 바다가 얼마나 편안하면 그렇니."
할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또 그렇기는 한 것 같았다. 처음 배를 탈 때부터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3대대에서는 오히려 바다 위에서 있었던 시간이 훨씬 많았다.
"쯧. 그래도 적응시키면 되겠지. 슬슬 준비하자꾸나."
배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해안가가 나타났다. 동시에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함께 커지기 시작했다.
"꽤 좋은 타이밍에 도착했나 보구나?"
"마니에르인 것 같은데, 다른 분은 두치님인가요?"
"그런 것 같구나. 생각 이상으로 재능이 있는 아이구나. 벌써 두치에게 장창을 꺼내게 한 것을 보면. 그리고 너랑 좀 비슷하구나? 아니, 단편적인 너라고 해야 하나?"
소름이 돋을 만큼의 눈썰미였다. 저 전투 장면을 보고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어떤 무기를 사용하시는 거지?'
해양의 지배자. 해전(海戰)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다는 절대자. 하지만, 할머니가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할머니?"
"호오? 재밌구나. 너도 조금 집중해서 보렴."
아쉬움을 삼키며 둘의 대련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신속한 마니에르, 아니 더 빨라졌다.
'확실히 군더더기가 많이 사라졌어.'
그에 반해서 두치님은 양상만 놓고 본다면 밀리고 계셨다. 마니에르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듯 보일 수 있었다.
'근데 엄청 여유롭구나. 오히려 급한 건 마니에르야. 간격을 아예 침범조차 못 하고 있어.'
모든 무술, 심지어는 마법까지 간격이 가장 중요했다. 나와 무기의 사이, 나와 적의 사이, 나와 적의 무기와의 사이.
전투에서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간격. 그 간격을 두치님은 완전히 지배하고 계셨다.
그것도 단순히 팔과 손목만으로 자신의 영역을 만드는 신기였다.
"저게 가능한 건가요? 아니, 저런 사람이 왜?"
오히려 하이님보다 강해 보였다. 아니, 두치라는 이름에 너무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만큼 네가 강해진 거란다. 그리고 그만큼 재능이 발전한 거고. 애초에 그 간격이 보이잖니? 전투를 이해하고 있지 않니?"
머리가 멍해지는 말씀이었다. 어느새 자신이 이렇게까지 강해졌나 실감나지 않았다.
"게다가 두치는 너와 정반대의 아이니 더욱 공부가 될 거란다."
멍해진 머리에도, 두 눈을 그 전투에 눈을 떼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저랑 정 반대요?"
"그럼. 정반대지. 너는 본능형이라면, 두치 저 아이는 완전히 이론형이라고나 할까?"
량에게 이어서 다시 한번 듣는 말이었다. 다행히 더 이야기를 해 주시는 할머니.
"아마 너도 모르게 네 재능이 너를 본능형으로 이끌었던 듯싶구나. 전투할 때 생각을 하면서 하지 않잖니?"
"그래도 그게 본능형이라는 건가요? 그건 천재들이나 그런 것 아닌가요?"
자신이 썩 괜찮은 무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천재들처럼 하나를 배우면 백을 아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건 오히려 량이나 카인 아니면 로사정도랄까?'
"너도 충분히 천재란다. 방향이 달라서 그렇지. 너처럼 생각하지 않고도 그렇게 정답을 찾아가는 게 쉬울 것 같니? 그게 쉬우면 왜 생각을 하겠니. 오히려 너 같은 본능형이 더욱 까다롭고 어이가 없단다."
'량이도 나한테 안 돌아가는 머리 굴리지 말고 그냥 느낌대로 하라고 했는데.'
할머니의 말씀과 량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설명해 주셨을 뿐.
"그리고 세간에서 그렇게 정답을 찾아가는 인간들을 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간들을 보고 천재라고 하는 거란다."
천재라니. 무게감이 다르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머니의 평가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네 열화판 같은 천재가 저기 하나 더 있잖니? 새삼 뒷 파도가 더 높이 솟기는 하는구나."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영역을 끊임없이 찌르고 들어가려는 마니에르가 눈에 들어왔다.
'마니에르도 진짜 천재기는 한데, 내 열화판이라니.'
새삼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차오른다. 나쁘진 않은 재능이 아니라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재능.
'본능을 움직이게 해 주는 거니까. 내가 성장할수록 더 많은 게 보이겠지.'
"그럼 할머니는 어떤 유형의 천재이신 거예요?"
"나? 글쎄 천재는 모르겠지만, 난 말이다."
할머니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창대에 목이 눌린 채로 대련이 끝이 났다.
"대장! 복수 해줘요!"
'저런 놈을 내가 천재라고 생각한 건가.'
모랫바닥에 처박혀서 해맑게 웃고 있는 마니에르가 정말 멍청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