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카인을 인질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건가요? 해적 내에서?”
“그렇다고 하더구나. 참. 내가 아무리 가만히 있다고 하더라고 넋이 빠진 거지. 아니지, 스스로 사신의 아가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건가?”
티거와의 대결에서 카인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듯했다. 그만큼 무력은 떨어져 보였고.
“그런데 티거의 제자들인가? 수하들? 그 사람들도 카인을 그렇게 낮춰 본대요?”
카인의 전투 장면을 못 보았더라면 이해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지원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하더구나. 카인을 머리로 생각하는 게 확실한 거 같고.”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량은 칼라의 기둥서방 정도로, 배경을 믿고 까부는 어린놈. 자신은 어린 나이에 마스터에 올라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힘 쎈 바보.
그리고 카인이 우리 둘 뒤에 숨어 있는 실질적인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결론을 바탕으로 5대대는 이번 해년회의에서 카인을 납치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할머니. 근데 로즈 아일랜드에서 그래도 되는 거예요?”
로즈 아일랜드는 할머니의 성역과도 같았다. 그 누구도 깽판을 치지도 죄인을 잡지도 못했다.
무력이든 암투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상대를 해하거나 곤란에 빠지게 하는 것 자체로 할머니에 대한 불경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해적이 그런 불경을 저지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리 로즈 아일랜드를 벗어난다고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지.”
할머니께서 진짜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고요하기 그지없는 표정에 소름이 돋는다.
“에휴. 아니다. 은퇴는 은퇴지. 나머지는 뒤에 나올 아이들이 잘 정리해 주겠지.”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묘한 눈길. 가끔 초인이라는 생물들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뒤에 올 아이들이라. 나는 아닌 거 같은데 왜 나를 그렇게 보시는 거지?’
“그나저나. 확실히 많이 변했구나. 지금 이 정도라면 끝나고 티거는 어떻게 잡을 수는 있겠어.”
“네? 그 정도인가요?”
“너는 가끔 너 자신을 너무 낮추어 생각할 때가 있단다. 자신감을 가지렴.”
할머니와의 대화가 끝난 이후 3주는 금세 흘러갔다. 4일은 할머니에게, 3일은 연못에서.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훈련. 그렇지만 지옥이 따로 없는 훈련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인은 점점 차만가의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첫 만남의 날카로움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 장소가 이제는 조금 그리워질 것 같았다. 신비하게 수증기가 올라오는 강.
더 이상 연못을 갈 필요가 없었지만, 마지막 남은 일도 있고 차만가의 가주인 샤아니님께서 송별회를 해 준다고 하셨다.
이제는 끓어오르는 강의 입구까지 우리를 마중 오신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는 길이 달랐다.
“은퓨어님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카인의 삼촌이기도 해서 그런지 괜한 친숙한 느낌이 들어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곳으로 간단다. 아마 그곳의 주인공은 범이 너일지 모르겠구나. 사실 외부인이 이곳에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말이다.”
궁금증이 점점 더 피어오르는 말이었다. 꽤 자주 왔지만, 자신이 아는 곳은 샤아니님이 계시는 곳과 연못뿐이었다.
다른 곳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가라면 못 갈 것도 없지만 받은 게 있으니 얌전히 있었다.
“어? 여기에 지류(支流)가 있어요?”
끓어오르는 강에서 지류를 한 번도 보지 못 했는데, 웬걸 지류가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지류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비슷하단다. 우리는 축복이라 부르지.”
은퓨어님을 따라서 조금 더 걸어가니 거대한 원형의 땅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깊게 파인 곳에 흘러들어온 지류가 잘박하고 얕게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웅덩이에 온 것을 환영한다.”
처음에 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이, 노인 등 수많은 사람이 웅덩이 주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도착한 동시에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마치 환영하는 듯한 그 음율이 자신을 반기는 게 신기했다.
“여기는 성인식을 하거나 도전을 하는 장소래! 나도 보기만 했어!”
옆에 카인이 자신보다 더 흥분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이겐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왔냐! 내가 네 덕에 웅덩이도 와 보고 진짜 네가 복덩이구나! 누구랑 다르게 말이다!”
반바지에 온몸에 진흙으로 여러 가지 문양을 그린 하이님이 반바지를 입고, 온몸에 진흙으로 여러 문양을 그린 하이님이 우리를 반겨주신다.
눈에는 설렘이 가득 담긴 채, 온몸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범님이시죠? 따라오세요. 저희가 잘해드릴게요!”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복장의 여인들이 다가와서 자신을 끌고 간다.
속절없이 끌려가서 옷이 갈아 입혀지고 온몸에 하이님처럼 진흙으로 문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신은 바지만 입고 하이님과 같이 전신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헐! 범아 너 지금 보면 그냥 람포수쿠스의 일원인 것 같아!”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카인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이겐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니 고소했다.
“왔냐.”
“넌 왜 이렇게 힘이 빠졌어? 무슨 일이야?”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일은 참 슬픈 일이야.”
아련한 눈빛으로 서 있는 량이도 하이님과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에 진흙으로 만든 문양이 덮여 있었다.
“어? 근데 너 등에.”
“진짜. 개 아파. 미친 듯이 아파. 하. 죽을 뻔했다.”
“거의 은퓨어님이랑 크기가 비슷한데?”
등 한가운데 보지 못 했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아니 문신이라고 하기에는, 무엇을 새겼다기보다 무엇이 올라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너 덕에 신기한 구경 다 한다. 외부인이 그것도 두 사람 모두가 외부인인 경우는 이게 처음이라고 하더라.”
“아니. 웅덩이가 뭐 하는 곳인데?”
“성인식 장소. 도전의 장소. 자신의 성장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장소라고나 할까.”
“그게 뭐야. 저기서 뭘 하는데?”
“싸워. 대련장이야. 우리가 맞은 물보다는 아니지만, 꽤나 뜨겁더라. 성질도 조금 다른 것 같고.”
“그런 장소에서 싸운다고?”
“응. 두 사람이. 포기하거나 전투를 못 하게 될 때까지.”
다시 시선이 웅덩이로 향했다.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심상치가 않았다.
“설마. 아까 하이님께서 흥분해 있는 게.”
“응. 너랑 하이님이랑 싸우는 거야. 신나지?”
얄밉게 이죽거리는 량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 찰나에 할머니께서 다가오셨다.
“왔니? 오늘은 셋이서만 오게 해서 미안하구나.”
할머니의 복장도 평소와 달랐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도 조금 달랐다.
휘장과도 같이 온몸에 둘러싼 천. 그리고 머리 위에는 나무와 꽃으로 만든 화한.
할머니의 모습에서 아름다움보다도 위엄이 넘친다. 마치 진짜 황제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지. 할머니도 황제가 맞지. 근데 저렇게 입으신 걸 보니까 진짜 엄청나다.’
항상 편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할머니. 옷 위에 그저 망토만 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풍겼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아카데미 시절에 보았던 국왕과는 달랐다. 국왕도 분명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그저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할머니. 진짜 황제 같으세요. 엄청 멋있으신데요?”
“그래 봐야 오늘의 주인공은 너란다. 오늘을 위해서 이 할미가 힘 좀 썼지.”
장난스럽게 말하는데도 위엄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부드럽게 마음을 잡아낸다.
“은퇴는 무슨, 지금 당장 이렇게 나가셔도 다 알아서 꿇을 것 같구만.”
“딱!”
“이 녀석아. 할 만큼 했고, 이제는 그만해도 될 때란다.”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량의 이마를 치고 간다. 그리고 주저앉은 량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러니까 왜.”
“넌 나한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었잖니?”
“에라이.”
툴툴거리는 량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중에 카인과 오이겐이 돌아왔다.
“오이겐!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데? 근데 카인 넌.”
이게 차별인가 싶을 정도로 자신들과는 다른 옷과 다른 문양을 그리고 온 카인.
바지는 그나마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 위에 처음 보는 동물의 가죽을 코트처럼 둘렀다.
거기에 문양마저 섬세함이 달랐다. 한 문양 한 문양 정성스럽게 그린 것처럼 뚜렷하고 깔끔했다.
“샤아니가 꽤 마음에 걸렸나 보구나. 저렇게 입혀 놓은 것을 보니.”
“그게.”
질문하려는 순간,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장대한 소리와 함께 다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샤아니님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카인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한 손에는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오고 계셨다.
“설마. 저게?”
북소리 중에서도 가장 장대하고 울림이 거대한 그 소리가, 샤아니님이 지팡이로 땅을 찍을 때마다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웅덩이에서 각자의 무(武)를 나누려는 두 사람이 있다!”
그 모든 소리를 뚫고 나오는 샤아니님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리자 하아님이 움직이셨다.
웅덩이의 한 편에 가서 서 있는 하이님을 보아하니 그 반대편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비록 우리의 핏줄은 아니지만, 웅덩이에서 겨루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
모든 이들이 노래하면서 자신과 하이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무의 극에 달해서 이제는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는 이들의 대결이니만큼 그 어떤 때보다 격렬하고 신성할 것이니.”
그 말과 함께 물들이 떠오르더니 자신과 하이님만을 포함해 반구 형태로 웅덩이를 감싸 안았다.
“대모께서 도와주시니 이런 대결을 눈앞에서 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니!”
따로 계단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꽤 깊이가 있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 게다가 웅덩이라니! 이 복덩이 같으니라고.”
양팔을 길게 감싸고 있는 방패를 서로 부딪치면서 송곳니를 보일 정도로 웃는 하이님.
“저도 전력으로 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손에 잡히는 풍아의 느낌이 너무 좋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휘둘러 달라고 보채는 것 같다.
그런데 발에 올라오는 열기가 꽤 상당했다. 살이 닿으면 익을 것 같은 정도.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은 이상하게도 발에는 전혀 무리가 가지 않았다.
“괜히 발에 그 신발을 신겨주는 게 아니라고.”
하아님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시는데 그 말의 속도가 빠르다.
“이 문양이 다 떨어져도 지는 거로 된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러자마자 물을 튀기면서 자신에게 짓쳐드는 하이님. 거대한 몸과 다르게 하이님의 무투는 섬세했다.
‘진짜 필요한 힘을 필요한 곳에 정확하게 주는 느낌이었단 말이지.’
저렇게 무식하게 돌진하는 것과 전혀 다른 주먹이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퍼그님이 새삼 고마워지는데?’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바람의 탑을 개방해서 바로 용권풍을 만들어 앞으로 뿜어낸다.
그저 바람만 있던 용권풍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물과 함께였다.
서둘러서 양팔을 가로막으면서 방패를 만들어 물을 막는 하이님.
그대로 사각으로 들어가 도를 올려 벤다. 자연스럽게 양팔로 자신의 도를 내려치는 하이님.
“이런 요망한 기술은 퍼그님 건데?”
“뭐. 여기저기서 주워 배웠죠.”
“하하하! 재밌어 재밌어. 역시 넌 복덩이가 맞는 것 같다.”
그 말과 동시에 양팔의 방패들에 오러가 선명하게 맺힌다. 도를 내려친 자세에서 바로 방패가 둘로 나뉘어 자신에게 찔러 들어온다.
“그거 알고 있으려나? 사람마다 중심이 되는 곳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지.”
뒤로 살짝 물러났음에도 거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도를 치는 방패에 힘의 낭비가 전혀 없다.
“그리고 너랑 대련하면서 네 중심을 알아놨다는 거지. 그 중심만 알면, 이런 게 가능하단 것도.”
그리고 내려처지는 도를 놓칠 뻔했다. 그 직후 세상이 반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