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런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다. 오로지 차만가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뿐이지.”
“아이를? 어린아이를 저기에 넣는다는 건가요?”
“설마.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지 않는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차만가문의 이들만이 받는 것이 있다더군.”
“하아. 그거 진짜 부러운데요.”
“너는 그런 축복을 받은 이의 아들이다. 그러니 그렇게 아프지만도 않았을 거다.”
“이게 별로 안 아픈 거라구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신가요?”
“그야 모르지. 나는 내가 아픈 것만 아니까.”
발광하려는 카인을 진정시킨 뒤에 하이님이 준비해 놓으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섬세하신데요?”
“아니야. 속지 마. 이거 그냥 주변에 있는 과일들이야. 다만 영양소가 뛰어날 뿐이지.”
“그래도! 이렇게 준비해 주셨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너 이걸 우리한테 왜 먹이는지 알면 나처럼 싫어질걸?”
상큼하고 달달한 과일들, 그새 허기가 졌는지 미친 듯이 먹었다.
신나게 먹고 즐기고 있었는데 카인과 량의 대화가 몹시도 불길하게 들렸다.
“에이.”
“그 에이가 맞아. 우리 몸이 급격하게 변화하는데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거지.”
“아니야.”
“아니긴. 먹고 나서 조금 훈련하고 바로 또 들어가야 해. 그래서 아직도 감사하냐?”
갑자기 손이 멈춘다. 천상의 맛으로 느껴졌던 과일이 갑자기 맛이 없어진다.
“먹어야 하는 거지?”
“안 먹어도 돼. 근데 내가 입맛 없다고 조금 먹고 들어갔다가 뒤질 뻔했다는 것만 말해 줄게.”
짧은 시간에 량의 성격이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몇 번이야?”
“알고 지옥에 들어갈래? 아니면 그냥 지옥에 들어갈래?”
“…알고 가야지.”
“그래도 오늘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한두 번 들어가려나? 4번이 최대인 것 같더라.”
“얼마나 해야 할까?”
“글쎄다. 사람마다 다르지 싶은데, 아마도 나는 5번 안쪽인 것 같아. 너도 하다 보면 알걸. 괜히 알았나 싶을지도?”
“하아.”
“씨발.”
억지로 입에 넣었다. 량은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진짜 죽을 뻔했기에 말하는 것이다.
“남자 새끼들이 패기는 없어가지고! 너희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알죠. 아는데.”
카인이 말하고, 그 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지옥은 지옥인 거니까요.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큭큭. 사실 맞는 말이기는 하지. 나도 죽는 줄 알았으니까.”
“하이님은 어쩌다가 하게 되신 거예요?”
“아? 모르나? 하긴. 이제는 가지게 된 녀석도 별로 없기도 하지. 전쟁도 없고. 자신의 금패를 가지면 선택할 수 있지.”
“금패가 설마 그 화패 중에서 금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그거 맞아.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왜 화패가 이전부터 존재했고 과연 누가 발행하는 걸까?”
“당연히 할머니가.”
“아니지. 대모님 이전에도 화패는 존재했는걸? 자유섬의 모든 문제는 화패로 귀결된다. 이 구절은 생각 이상으로 오래됐다?”
“하지만 화패에는 장미가.”
“그것도 최근의 화패만 그렇지, 본래는 그렇지 않았어. 각자의 화패가 있었지.”
카인과 량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일까. 그럼에도 쫑긋거리는 귀는 나름 집중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금패를 꺼내 보여주는 하이님. 금패에는 상어가 새겨져 있었다.
“근데 누구나 막 만들 수 있으면 화패가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요?”
“소용이 없겠지. 하지만, 화패의 뒤에 뭐가 새겨져 있을까?”
“아! 그, 그,”
항상 화패를 달고 다녀도 장미 문양이 있는 부분을 달고 다니다 보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너는 단 한 방울의 물일 뿐이니.”
“맞아! 그거야! 역시!”
량이 조용히 읊조리자 바로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하이님의 설명은 신기했다.
“해적들이 이 섬을 발견하고 아니면, 또 다른 섬을 발견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화패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지. 최소한의 자격이랄까.”
“여기가 말고 또 있어요!?”
“그럼. 여기가 다가 아니지, 바다는 넓단다. 정말로.”
그 말을 하는 하이님의 눈빛은 미증유의 열망과 설렘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하여간, 그곳을 처음 찾은 선장이 소소한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자신의 금패를 받게 된단다. 비로소 진짜 해적 중의 해적으로 인정받는 느낌이랄까나. 그리고 선택을 하게 되는 거고.”
“선택이요? 선택할 게 있나요?”
무인, 마법사, 아니 그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혜택이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건 아니거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고.”
뭔가 파도 파도 계속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이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아니, 왜?”
자신이 머리가 썩 좋지 않다지만, 이것은 특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 이유가 있었다.
“뭐 나야 그 이유를 알겠냐. 다만 대모님께서 특별히 셋을 봐준 거는 맞지. 자식들도 쟁취하고 선택에 맡기셨으니까.”
‘카인은 피가 반이 섞였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나랑 량이는 왜. 음. 내가 아닌가.’
이유가 없는 호의는 없다지만, 카인이나 량이 가만히 있는 거로 보아서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 것 같기는 했다.
‘사실 나는 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단 말이지. 덤치고 받는 게 너무 큰 게 문제라 그렇지.’
생각을 조금 더 깊게 이어가려는 찰나에 듣기 싫은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제 슬슬 다시 들어가야지. 쉴 만큼 쉬었잖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옥을 알고 스스로 기어들어 가는 것은 정말 별로였다.
*
첫날은 그대로 뻗어서 잠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둘째 날도 다르지 않았다. 먹고 자는 것 외에 간단한 대련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카인은 종종 할머니와 밤에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표정이 좋아지는 것을 보니 다행이었다.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이 이렇게 기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듯 량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어차피 또 며칠 지나면 다시 오는 거로 알고 있는데? 너도 카인도 아직 남았어.”
량은 자신의 말대로 둘째 날이 되어서 3번을 더 들어가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다.
과정이 끝나서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모두 겪어낸 후의 량이의 변화는 파격적이었다.
내부는 보이지 않아서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외견만 하더라도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키는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보일 정도로 커졌다. 거기에 어깨와 골반도 살짝 변했다.
본래 호리호리하고 여리다는 느낌을 줬다면, 지금은 마르지만 탄탄한 느낌이었다.
“빨리 끝내. 진짜 천국이 여기 있다 싶은 곳이 나타나니까. 아니, 너희는 다음 주에도 다시 와야 하지?”
약올리는 량이 정말 얄미웠다. 하지만 과정을 끝낸 것은 량이었고 카인과 자신은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감사한 사실은 자신도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다는 점과 하루에 5번은 버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 왜 익숙해 지지가 않지? 항상 새롭게 아프단 말이지.’
세 번째 날, 똑같이 지옥 같은 일과를 끝내고 할머니를 뵐 수 있었다. 카인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동안 잘도 버틴다 했다. 안 쓰러지는 게 다행이지. 그쵸 할머니?”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억지로 깨어있던 카인이었다. 자신조차 피곤함을 느끼는데, 카인은 정신력으로만 버틴 것이었다.
“그렇게나 말이다. 손주가 할미랑 놀아주지를 않으니, 조카가 고생하는구나.”
솔직히 찔리는 것도 사살이었다. 할머니가 오시고 나서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연못에 들어갔다 나와 몸을 점검하고, 가볍게 하이님과 대련으로 풀고.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 일상을 다섯 번 반복하고 나면 육체는 잠이 극도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자신은 그대로 잠들었다.
훈련하는 동안은 할머니도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보러오시지 않으셨다. 카인 또한 훈련이 끝나고 나서야 이야기했다.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카인의 정신력이 말도 안 되는 것이긴 했다.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괜찮단다. 나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저 아이가 무리를 한 것이긴 하지.”
“이야기는 잘하셨나요?”
“글쎄다. 물꼬를 튼 것 같기는 하다만, 앞으로의 일은 저 아이와 다른 이들의 몫이지.”
“할머니는 차만가의 편은 아니신가 봐요?”
편을 들려면 얼마든지 유리하게 이야기하실 수 있으실 텐데, 방금의 뉘앙스를 보니 그러지 않으신 듯했다.
“곧이곧대로 지키는 그런 성격이 안 돼서 말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어야지. 물론, 나도 잘 못하기는 한다만.”
짧은 회한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개운한 미소가 걸린다.
“이제 더는 그러지 않으려고 한단다. 조금 많이 늦었지만, 뭐 앞으로 내 인생이 짧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이제껏 보아온 할머니의 표정 중 가장 개운하고 가장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너희가 잘 해 주어야 한단다. 그런데 몸은 좀 어떠니. 어떻게 변했는지 감이 오니?”
황급하게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담아 허리를 숙인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카인도, 량도 자신에 비하면 아직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으리라 단언한다.
극기심결로 알게 된 몸의 변화와 가벼운 대련으로 확인한 변화, 그리고 탑의 변화.
하나만 변화해도 인생을 걸만한 기연인데, 전체가 변화하는 말도 안 되는 기연.
“하이님께서 금패, 그것도 자신의 금패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선택도 해야 하고.”
“참. 그 아이도 은근히 말이 많은 아이란 말이지.”
“심지어 자식들에게도 미리 알려주시지도 않으신다고, 오로지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게 당연한 거란다. 해적으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지. 그도 못 하는 주제에 해적이라고 하는 꼴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던지, 할머니의 아미가 찌푸려진다.
“근데 왜 저희에게는.”
그 말에 악동같이 웃으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표정이 다양해서 좋았다.
“이제는 나도 지킬 만큼 지켰으니, 은퇴 전에 꼼수란 꼼수는 다 부리고 가야지. 그저 이 할미의 선물이라 생각하렴.”
분명 무언가 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카인도 량도 아니기에 이런 부분은 참 약했다.
‘예전에 칸님께서 가르쳐주신다고 할 때가 생각나는데? 그때는 진짜 웃겼어.’
무얼 바라는 게 있을 것이라는 의심에 경계하였는데, 자신은 그저 고아 꼬맹이였을 뿐이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인 듯해서 괜히 미소가 나왔다. 세상에는 따듯한 사람이 아직 많다.
‘거기다가. 이제는 웬만한 건 그냥 먹어도 탈이 안 나. 소화제도 둘이나 있고.’
할머니가 존경스럽고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따질 걸 안 따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선물이라고 하셨으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선물을 줄 수 있는 할머니는 할머니뿐일 거예요!”
“호호호호호호. 누군가 너에게 해적을 권유한 적 없니?”
“아! 린과 럼니가. 그리고 또.”
“그래. 날로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주 그냥 해적을 하기에 타고난 것 같아서 말해 본 거란다.”
“선물인걸요? 날로 먹은 게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은 거죠!”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할머니의 본론이 나왔다. 이 자리까지 따라온 이유.
“이번 해년회의에서 네가 카인을 좀 잘 보고 있으렴.”
“네?”
“이래저래 복잡하고 혼란한 해년회의가 될 텐데, 카인을 노리는 이들이 꽤 있을 것으로 보이는구나.”
“갑자기요? 아니 근데 카인을요?”
“그게, 조금 복잡하긴 한데 말이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하신 이야기는 조금 황당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