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었다. 량이 왜 비명을 지르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점 진흙이 조여오는 동시에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폭포까지 1/3이 남았을 때 미친듯한 격통이 찾아왔고 귓가에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입 벌리지 마라!”
가까스로 입을 열지 않을 수 있었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떻게든 폭포 아래에 도착한 순간.
얼굴부터 시작해 전신을 감싼 진흙이 몸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격통이 시작됐다.
“끄아아아아악!”
절로 튀어나오는 비명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굳어진 진흙은 입을 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피가 모공 하나하나로 다 나오는 느낌이었다. 아니 전신에 있는 모든 피와 내장이 뽑히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알 수도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비명만 지르고 있을 때 귓가를 때리는 거대한 소리.
“카인!”
그러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는 카인이 느껴졌다.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정신을 놓고 싶은데 정신이 너무 또렷해 놓을 수도 없었다. 이제는 신경마저 하나하나 빠져나갔다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몸의 모든 것이 빨려 나가는 기분은 기괴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정신이 고통에 잠식될 무렵 무엇인가 날아와 자신을 낚아챘다.
“잘 서 있어라 조금 아플 거야! 피하지 말고 그대로 서 있어라.”
격통이 줄어들려는 찰나 전신을 가격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
‘여기서 가만히 서 있으라고?’
자신이 버림받았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과 단절을 했던 순간이고 자신이 기피 대상이 되었던 그 순간이었다.
*
“씨발새끼들아. 이따위로 나오려고 한 거냐?”
“기본재능 주제에 살아남는 건 오지게도 잘 한단 말이지.”
“너무 우리끼리만 하면 티가 나서 껴줬을 뿐인데 그것도 모르고 쯧.”
“솔직히 너가 우리랑 어울릴 급은 아니잖아?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라.”
가까스로 피했지만, 이미 왼쪽 팔에는 긴 자상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반 년을 동고동락한 사이었다.
“그래도 기본 재능이라 그런가 독기가 아주 그냥.”
“조금만 뭐라도 있었으면 생각을 다시 했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짐이야. 언제 키우고 앉아있냐. 우리도 돈은 벌어야지.”
눈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성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자신을 선택해준 사람들이었다.
경력으로 인정받아 실버 용병이 된 꽤 이름이 알려진 3인조. 개개인의 실력은 떨어지지만, 전장에서 대처능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팀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그 3명이 전장의 병사들을 이끄는 데에 가장 큰 장점으로 사실 이 부분이 그들을 실버로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다른 용병들, 특히 실력으로 실버가 된 이들은 이 3인조를 무시했다. 어울리지 않는 실력이라면서.
하지만, 우드 용병이었던 자신을 데리고 나와준 은인들이었다. 덕분에 우드에서 벗어나 브론즈 용병이 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던 것 같았다. 항상 욕을 하지만 성심껏 가르쳐주는 토이.
욕을 먹고 돌아오면 자신을 토닥여주던 보. 말은 없지만 언제나 과묵하게 전체를 지탱해주던 흐.
서로의 등을 맡기며 목숨을 살려주기도 하고 구함 받기도 하면서 끈끈함이 생겼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던 것 같다. 자신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했다.
“그래도 저 녀석을 데리고 다닌다는 명목으로 꿀 빨았잖아.”
“맞아. 생각보다 효과가 좋던데?”
“야 그래도 연기하는 게 쉽냐. 맞는 척, 죽을 뻔한 척. 개 귀찮아. 이것도 목돈이 들어오니까 하는 거지. 빨리 정리하고 가자.”
지금에서야 안 사실은 이들이 다른 영주에게서 고용을 받은 스파이였다는 것.
“너희들이 그렇게 하면 용병 사무소에서 가만히 놔둘 줄 알아!”
각 영지전에 참여하는 용병은 절대로 배신할 수 없다. 그것이 주된 서약 내용이기도 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누가 용병을 믿고 자신의 병사로 쓸 수 있을까.
혹여나 투항한 후 입을 놀릴 것을 대비해 침묵의 서약도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어기는 용병은 서약서에도 벌을 받지만, 용병 사무소에서도 반드시 추격하여 가장 잔인하게 죽이곤 했다.
“병신이 지랄을 한다. 그걸 우리라고 모를 줄 아냐.”
“그런 것도 우리 같은 힘 있는 애들이나 쓰는 거지. 너 같은 짐을 달고 다니면 그런 거 안 써도 돼.”
“우드 용병을 짐으로 달고 다니는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 오히려 널 브론즈로 올려준 우리에게 감사하겠지.”
“그래서 그중에서도 제일 병신같은 너를 선택한 거지.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속 얘기나 하고.”
“기본 재능이라서 너무 무시받아요 엉엉. 아카데미에서 쫓겨났어요. 엉엉.”
“진짜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웬만하면 군인으로 쓸려고 강제 퇴학도 안 시키는데.”
“하여간. 이만 정리하고 가자.”
이성이 끊겼다. 생각이라는 것이 더 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명은 죽여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검이 살점을 찢고 들어와도 돌진했다. 방패가 어깨를 부숴도 다시 도를 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의 살점은 찢겨 나갔고, 눈 하나는 베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성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이렇게 개 같은 상태로 죽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었고 사실을 알게 된 용병 사무소의 덕에 주교님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기를 고려해서 모든 사실은 수면 밑으로 묻혔고, 자신은 동료를 벤 쓰레기가 되었다.
나중에 재능이 쓰레기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을 쯤. 그 시기가 자신의 재능이 발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자신의 전생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고통은 그때보다 더 심했다. 살점 하나하나를 파내는 고통.
그런데 웃긴 건 그 고통 속에서 전생의 기억들도 같이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기억들이 날아가면서 개운함이 찾아온다. 미칠듯한 격통 속에서 시원함을 느낀다.
“이런 또라이 새끼가 다 있어. 어떻게 이 상태에서 웃고 있냐.”
“시…원…하기만… 한데…요?”
어떻게든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에 세상이 암전됐다. 어느 순간 쓰러지고 기억이 사라졌다.
겪었던 고통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개운한 느낌이 들면서 눈이 떠졌다.
눈을 뜨니 아직도 기절한 채로 누워있는 량이와 카인이 보였다.
“그래도 마스터라고 확실히 회복이 빠르기는 빠른가 보네. 일어났냐 미친놈.”
바위에 앉아서 양손으로 어깨까지 올라오는 거대한 방패 두 개를 손끝으로 들고 있던 하이님이 자신을 바라본다.
“방패가 두 개였어요?”
그 말에 피식 웃는 하이님이였다.
“너도 어지간하구나. 대모님같이 말도 안 될 때나 두 개를 합쳐서 쓰지 원래는 이렇게 따로 쓰는 거다. 그나저나 몸 상태나 확인해 봐라.”
그러고 보니 본래보다 훨씬 개운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서둘러 앉아서 심결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극기 심결의 가장 신비한 점 중에 하나라면, 마치 내 몸을 제 3자의 시선에 보게 해 준다는 점이었다.
머릿속에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몸이 하나하나 그려지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많이 본 그림이기에 달라진 점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쳤네. 방금 그거 한 번으로 이렇게 변했다고? 말이 안 되는데.’
눈에 띄는 변화는 전혀 아니었다. 근육의 상처가 사라지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하지만, 사이 사이에 근육이 더 커졌다.
거기에 더 해서 척추가 약간이지만 두꺼워졌다. 아주 미세한 차이.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차이.
“진짜 별의별 거를 할 줄 아는 놈이구나 너? 몸이 근질근질하지는 않고?”
완벽한 타이밍에 하이님께서 다가오셔서 말을 하셨다. 자신도 궁금하던 찰나였다.
“죄송하지만, 혹시 맨손으로만 가볍게 해 주실 수 있나요?”
“흠. 좋아! 대신 가기 전에 찐하게 한 번 하자 어때?”
“좋아요!”
카인과 량을 내버려 두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니 생뚱맞은 공터가 나타났다.
“종종 오는 곳인데 몸을 쓸 곳이 영 없어서 하나 만들어 봤지.”
공터의 가장자리에 방패를 내려놓으시고 중앙으로 가는 하이님. 얼굴에는 신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근데 그거 알고 있나 몰라. 내가 방패를 쓰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지 저 방패들이 사실은 내 수갑(手甲)인데 말이야.”
“일전에 봐서 알고는 있었어요, 그래도 적당히 해 주실 것도 알고 있구요.”
“그래그래. 그럼 슬슬 들어와 봐.”
시작은 가벼운 박투로 칸님께서 알려주신 기본적인 박투. 뻗고 내지르는 직선 일변도의 박투였다.
“호? 그래도 박투의 기본은 잡혀 있구나. 나쁘지 않아. 도망가는 데는 딱 좋은 박투구나.”
최고의 칭찬이었다. 무기가 사라졌을 때, 도망가기 위한 직선 일변도의 박투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몸이 많이 달라졌어. 뻗어 나가는 힘이 달라. 척추도 감당 할 수 있는 힘이 다르고.’
몸의 변화를 바라보고 난 후에는 그를 써봐야 진짜 체감할 수 있었다.
“조금만 빠르게 갈게요.”
“얼마든지! 마음껏 받아주마.”
숨을 한껏 들이마신 뒤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주먹과 발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간다.
공터를 계속 돌면서 쉬지 않고 하이님의 몸에 집중하면서 내지른 박투는 단 하나도 유효타를 남기지 못했다.
‘좋아! 이제 무호흡으로 하는 것도 확실하게 늘었어. 근육도 덜 피로하고.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러던 순간 더 참을 수가 없어지는 그 순간에 숨을 내뱉는다. 본래보다 훨씬 피로감이 덜 했다.
“하! 누가 네 박투 스승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제대로 배웠구나. 게다가 괴물 같은 폐활량은 도대체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빛내는 모습이 한시라도 빨리 자신과 싸우고 싶어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거 정체가 뭐에요? 지금 이 한 번으로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바뀐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만큼 네 한계치에 맞지 않게 성장을 못 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네가 네 한계를 너무 낮게 잡고 있었던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근본을 성장시키는 게 가능한 건가요?”
“그야 자세한 이론은 난 모르지. 그저 그런 게 있고 그 은혜를 내가 받았음에 감사하고 누릴 뿐이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하이님의 머리가 정말 부럽습니다.”
“넌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어? 괜찮아?”
몸을 확인하는 도중에 일어났는지 카인과 량이 공터에 나타나면서 말을 가로채 갔다.
“나도 생각하다가 포기했어. 대충 가설을 세웠는데, 그냥 포기하기로 했지.”
“네가? 포기한다고?”
“응. 아직 우리 세상에서는 마나 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야.”
량의 입이 열리자마자 금새 지루한 표정으로 돌아간 하이님이었다.
“그런데 그 마나가 가장 정순한 형태라면, 그래서 모든 것의 근원을 바꾸는 것이라면. 비록 근원은 바꾸지 못하지만, 우리가 가진 근본을 끌어낼 수 있는 거지.”
“응. 모르겠어. 머리 아프다. 그냥 가능하다고 생각할래.”
“그래. 그게 차라리 나을 거야. 여차하면 그냥 바디체인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래도 네가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니까.”
“응. 딱 그 정도가 나한테 알맞은 거 같아. 그나저나 카인 넌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그치? 아마 방향의 차이가 아닐까 싶어. 량이랑 이야기해 봤는데 아까 말한 가장 정순한 마나 있잖아. 그게.”
“아니. 그건 잘 모르겠는데 넌 근육이나 피부가 아니라 다른데 영향이 간거야?”
확실히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량과 자신과 카인 세 사람의 변화가 너무 달랐다.
자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변했다면, 량은 반반인 느낌이었고 카인은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정도였다.
“으이구. 하긴 복잡한 이야기니까. 나는 주로 심장이랑 폐가 그리고 내장들이 변한 것 같아. 신경이랑.”
“흠. 재밌네. 진짜로. 그럼 만약에 우리처럼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이 들어가면?”
우리가 서로 토론을 하려고 시작하는 순간 지루해하시던 하이님께서 입을 여신다.
“그런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다. 오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