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이제는 호감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은 닫히지를 않았다.
“신을 미친 듯이 원망을 했지. 한계만 없어도 내가 초인이 못 될 일은 없었는데 말이지.”
뭐라고 말하든지 신경을 쓰지 않고 횡으로 오는 검을 강하게 쳐낸다.
그리고 탑을 전부 일깨운다. 폭풍을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이 폭풍이 되는 것.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으니까. 빨리 끝내자.’
“허허. 급한 것은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지. 그런데 신이 잘 못 한 것이 아니라 신전이, 그리고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더군.”
여전히 여유가 넘쳐 보이는 그 모습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자신이 어떻게 공격을 할지 모두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이런 것은 어떤가?”
갑자기 그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앞에 나타나 검을 올려친다.
가까스로 검을 막아냈지만, 그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야 했다.
“마스터의 육체에 대해서 아마 나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있을까 싶네.”
마치 감옥에 갇힌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잘라낼 것 같은 재능도 통하지 않았다.
“재능이 꽤 특이하구만, 아니 잘 쓰는 건가? 바람을 압축해서 절삭력을 높이는 방법은 좋지만.”
분명 속도는 자신이 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갈 길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대처.
“제대로 자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몰랐나 보구만.”
거대한 대검이 마치 롱소드가 움직이는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인다. 자신을 향해서.
“그래도 기본에 충실한 것을 보니 빠르게 성장하겠어. 아쉽구만.”
농락당하는 느낌이었다. 그 어떤 순간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
“그냥 마스터들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아마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런 마스터가 아니다 보니.”
그 어떠한 바람도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작은 방에 감옥처럼 갇혀서 어디도 갈 곳이 없는 느낌.
“답답함을 느끼나? 이번에 새롭게 만든 검일세. 어떤가?”
그 말 하나하나가 너무 재수 없게 들리지만, 그를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에 빠진 것과 같은 기분.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약했나 하는 기분.
그렇게 점점 자신에 대한 의심에 힘이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흐음. 역시 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이리 차이가 나는 법인가.”
말과는 다르게 종아리가 살짝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엎어져 있기에 보인 틈.
‘그러고 보니까 왜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하는 거지? 은근히 급한 것 같았는데 말이지.’
거부감과 이어지는 말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확연하게 처음과는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좋아.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거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더 할 수 있겠어.’
구르던 그 힘으로 그대로 일어나서 다시 달려든다. 귀를 닫고 오로지 베는 것에만 집중한다.
단순한 베기. 도를 잡는 누구나가 처음에 배우는 사선베기. 그리고 에펫님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우직하게 하나만을 바라고 돌진하던 그 모습. 하나의 목표를 향해 똑바르게 나아가는 그 모습.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나한테는 나만의 방법이 있지.’
승리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아닌 팔 하나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귀를 닫고 모든 신경을 팔에만 신경을 쓰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몸은 폭풍과 같이 몰아치듯이 움직였지만, 모든 베기가 팔을 베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사선 베기에서, 올려치고 내려치고 옆으로 휘두르고. 스승님께 배운 팔방 베기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오히려 하나만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아가니 공격이 다양해진다. 점점 움직임이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상대하고 있는 티거였다. 말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는다.
‘벴어!’
견갑이 살짝 베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때.
“하! 맹랑한 후배님이군. 이 상황에서도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건가. 역시 젊음은 무서워. 암암. 그럼 나도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겠지.”
기세가 변하고 역함이 올라온다. 역함이 올라오는 동시에 머리에 경종이 울린다.
‘뭔지 모르지만 위험해.’
본능이 온 사방에서 경고하고 있다. 위험하다고.
눈앞에 있던 티거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즉시 뒤에 나타난다. 마치 일전의 그 움직임처럼.
문제는 그 움직임이 한 번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움직임.
갑옷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치명상을 몇 번이고 입었을 순간들이었다.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야. 그러면.’
거세게 오러를 온몸에, 도에 휘감는다. 탑들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시련의 던전에서 보았던 안드로니쿠스님의 검무를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한다.
‘안드로니쿠스님께서는 세 개의 탑도 필요 없었어. 그저 단 하나의 탑만으로 폭풍을 일으키셨어.’
하지만, 자신은 아직 그렇게 깊은 이해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탑으로 대체하면 될 일.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아니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뿐이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려나간다. 중간 중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티거의 검을 최대한 피하고 아니면 그냥 맞았다.
생각보다 자신의 갑옷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제는 한 부위를 노리며 들어온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10번째 도를 내리쳤을 때, 주변의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재밌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가 후배님? 하지만.”
바람이 모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 강하게 내려처지는 대검. 그 대검에 순간 휘청이고 말았다.
‘아직. 아직이야.’
순간 흩어지는 바람들을 겨우 이었디. 하지만 결코 그 바람이 이어지도록 만들지 않는 티거
끊임없이 다가오는 연격. 그런데 그 연격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이 날아오니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니. 후배는 좀 위험한 것 같아. 그러니까 본래 계획이랑은 좀 다르게 가야겠어.”
여유가 넘치고 후배를 생각해주던 것 같은 태도가 변한다, 점점 검격들이 치명상을 입히는 곳으로 다가온다.
몇 번만을 더 이으면 바람이 변할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끊기는 그 순간들.
시간을 조금 더 벌기 위해서 뒤를 물러났다. 그런데 그것이 패착이 되어 돌아왔다.
몇 번을 검을 섞으면서 재었던 그 거리감과 다르게 순식간에 다가와서 자신에게 대검을 내리찍는다.
겨우 막았지만, 연이어 펼쳐진 올려치는 것에 결국 모든 바람은 끊기고 자신은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렇게 또 끝나는 건가.’
분명 티거의 말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다시는 도를 잡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잠깐! 센트의 목숨을 살리고 싶지 않나요!”
카인의 목소리. 미친 듯이 달려오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카인.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목 옆으로 대검이 내려찍어진다. 분명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움직이면 바로 벤다. 마나를 사용해도 벤다. 가만히 있어라.”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살벌한 모습. 그리고 진심으로 일어나는 살기가 자신을 짓누른다.
서서히 다가오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 때쯤. 카인이 돌연 멈추었다.
마법진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더니 카인의 목소리가 해안가 전체를 울린다.
“센트와 함께 모든 이를 포박한 상태입니다. 마나 구속구로 차고 있는 상태. 사실 확인을 위해서 한 명 보내드리도록 하죠.”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인물이 걸어온다. 철가면을 쓰고 있던 롱소드를 사용하는 무인.
그가 점점 다가왔고 이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죄송합니다. 전부 포박당했습니다.”
그 인물을 그대로 걷어차 버리고 싶어 하는 의지가 전해져 온다. 그리고 대검이 내려와 목에 상처를 낸다.
“그만! 그 이상 하신다면 저희도 더는 협상의 의지가 없다고 판단. 모든 이들을 처형하겠습니다.”
카인의 말에 대검이 멈추고 티거의 입이 열린다. 살의가 번들거리는 외침이 해안가를 가득 채운다.
“하! 지금 마스터인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 좋다 다 죽여라. 그리고 너희도 다 같이 죽여주지.”
카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자신이 인질이 된 상황이 되자 너무 어려웠다.
‘내가… 내가 너무 약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도대체.’
자괴감이 엄습한다. 마스터가 되어서 세상을 오시하기는커녕 인질이 된 신세로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티거님이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둘라님의 후계자를 죽게 만든 것이 티거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하하! 내가 둘라 그자를 감당하지 못 할 거 같으냐! 그리고 너희가 다 죽으면 그것이 어떻게 알려질 것 같나.”
“제가 그 정도의 대비도 하지 않고 이곳에 온 것 같습니까? 그리고 둘라님과 반목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도, 절친한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으니 그가 내쉬는 한숨이 바로 들려온다. 그리고 그 한숨은 자신이 내뱉는 한숨과도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죄송하지만, 저희는 마스터이신 티거님을 감당할 수 없으니 그자가 끼고 있는 마나 구속구를 차시고 모두 함께 물러나는 것입니다.”
“웃기는 소리! 내가 무엇을 믿고 마나구속구를 찬다는 것이냐! 막말로 내가 마나 구속구를 찬다면, 너희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것 아니더냐!”
“그렇다면 티거님께서는 무엇을 바라십니까.”
“이 전투를 우리가 이겼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두를 풀어주어라. 그렇다면 살려 보내도록 하지.”
“불가합니다. 솔직하게 그렇다 생각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마스터간의 전투가 내 승리로 끝났으니 당연히 전투를 승리한 것도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
“지금 다시 전투를 한다고 하셔도 저희가 이길 것입니다. 비록 사상자가 나온다고 해도 진행할 의지가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 위해서 잠시 말이 없던 티거.
“그렇다 해도 여기서 마스터가 한 명 죽어가는 것은 손해일 텐데? 게다가 보통 사이로 보이지도 않았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저희 손에 센트님과 티거님의 수제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 진영의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카인을 죽이려고 거리를 재는 티거가 눈에 들어온다.
‘말해 줘야 하는데, 나는 왜 천재가 아닌 거지.’
량이의 기준표가 있었다. 범재와 수재 그리고 천재에 대한. 범재는 하나를 배우면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하나가 빛을 발한다.
수재는 하나를 배우면 둘을 알아 이해를 하고 습득하고 응용한다.
천재는 발상이 떠오르면 그대로 현실화시킨다.
자신은 범재였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갈고 닦아야 했다. 그래도 그것이 빛이 나면 천재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억울하고 너무 미안했다.
카인이 조금씩 다가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대검이 목을 누르고 있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를 아무리 치려고 해 보아도 그르륵거리는 피 끓는 소리만 날 뿐이다.
“좋다. 우선 조금 더 가까이 오도록. 나도 다른 이들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겠으니.”
“마스터이신 티거님의 신체로 지금이면 충분히 파악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면밀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협상은 없다.”
“그렇다면, 우선 다른 분들을 보내도록 하지요.”
다행히 카인이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몇몇 조원들이 어스퀘이크의 일원이었던 이들과 다른 롱소드를 차고 있던 철가면을 지고 온다.
그리고 그 중간에 살며시 그들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간다.
“그 정도의 거리면 괜찮다고 여겨집니다. 마스터이신 티거님이시기에 이런 점 양해해 주시죠.”
“이래서 혓바닥이 놀리는 것들은. 쯧. 자신의 강함도 없이.”
“약자는 약자 나름의 살아가는 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카인을 최대한 긁어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자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보인다.
“되었다! 어디 한 번 다 같이 죽어보자꾸나!”
한계가 왔는지 대검을 다시 내려치려고 하는 그때.
“부우우웅!”
이상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