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조금 더 치열하게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그리고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자 계약서를 주고받은 후에 꼼꼼하게 읽는 두 사람.
그리고 서약서가 나왔다. 각자의 조항이 새겨진 서약서. 주(主) 서약서에 종속된 서약서만 해도 세 장.
‘진짜 징하다. 한 번 전투를 하는데도 이렇게 복잡한 건가.’
그리고 각자 서약을 한 후에야 모든 일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대리전뿐이었다.
“흠. 오늘은 각자가 시간을 가지고 내일 전투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배려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 다만, 저희가 본 장소가 있습니다만.”
“그 장소가 어디요?”
“엣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가입니다. 여기.”
지도를 꺼내면서 상세한 위치를 설명하는 센트. 아마 미리 준비해 온 것 같았다.
“흠. 그곳에는 어부들도 그리 다니지 않는 곳이니 나쁘지 않겠군. 꽤 좋은 장소를 물색해 온 것 같군요.”
그러며 고개를 끄덕이는 에펫 님을 보아하니 다른 의도가 있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오늘 내 사람들을 보내서 통제를 하도록 하겠소. 그럼 푹 쉬시오.”
“예. 그럼.”
센트가 나가고 나서, 카인은 또 다른 서약서를 에펫 님에게 내밀었다. 그 서약서를 읽으며 손이 떨리는 에펫 님.
“정말. 고작 이런 조건으로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이 일로 그렇게 큰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짜 쟤는 사기를 쳐도 엄청 거대하게 쳤을 거야.’
그 말에 감동을 하면서 서약서를 작성하고 거듭 우리에게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수색과 통제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도 준비를 하기 위해서 저택에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넌 진짜 사기를 쳐도 엄청 잘 쳤을 거야.”
“아니야. 난 양심적이어서 안 돼. 량이 정도는 되어야지.”
“근데, 전투하는 곳을 그쪽에서 선택하도록 해도 되는 거야?”
“응. 대충 예상한 곳이기도 하고, 아마 다른 수는 안 쓸 거야. 다만 다른 변수가 있기는 한데… 그건 일어나야 할 일이니까.”
“또.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 한다! 뭔데, 또.”
“아니야.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그리고 넌 내일 티거 님을 봉쇄하는 데 중점을 둬. 꼭! 다치지 말고 목숨을 걸지도 마.”
“근데 봉쇄만 한다고 끝일까. 우리 승패에 따라서 아마 결정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다른 방법이 생긴 거 같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네가 온전한 게 제일 중요하니까.”
끝까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카인이 고마웠다. 그리고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차피 알아서 또 해주겠지.’
내가 책임을 모두 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짜 너희가 있으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마스터를 상대하는 게 편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야, 바보야. 네게 제일 힘든 일인데.”
“에이. 눈앞의 상대만 생각하면 되는 게 얼마나 편한 건데!”
‘누가 뒤통수 때릴까 매일 긴장을 하고 사는 삶이랑은 차원이 다르지.’
이번 생에 와서야 자신은 진짜 삶이라는 것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전생(前生)을 떠올리면 왜 그렇게도 살았나 싶었다. 오기와 독기만이 있는 삶이었다.
관계도 없었고 나도 없었다. 그저 강해지면 모든 것이 될 줄 알았던 삶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전쟁에 있었고, 아니면 술만을 마시던 삶이었다.
이생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아카데미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었다.
자신은 치밀하지도 않았고, 생각이 깊지도 않았고, 시야가 넓지도 않았다. 그저 치열하고 치열했다.
그것이 비록 열등감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감사하게도 회귀를 할 수 있는 노력으로 보아주셨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구나.’
괜히 카인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뛰어간다. 뒤에서 뭐라 하면서 달려오는 카인이 느껴진다.
‘진짜 이런 게 삶이지. 감사합니다.’
*
“그들은 저택에 아직도 머물고 있나?”
“네. 그래도 다행히 에펫은 중립은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흐음. 아가씨께서 특별히 부탁해서 왔지만, 역시 아가씨의 안목은 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정말 즐겁기 그지없군.”
“그 청년이 그렇게도 강한 것입니까?”
“그럼! 과연 천재라고 할 만하더군. 마스터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렇게 유연한 기세라니. 정말 기대가 되고 아쉽기도 하군.”
“그렇다면 제3선지자님께서는.”
“나는 그 청년과 놀고 있을 터이니 어서 정리를 하도록 하거라. 세 명을 더 지원해 주는데도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3선지자님께 배운 이들 아닙니까. 그리고 저도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렇지. 알지. 참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걔를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나름 잘 자랐어. 너도 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더 정진을 하거라.”
“예. 하지만, 저도 선지자님들을 뵙지 못했다면 이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나 제3선지자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도 네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니 피장파장이라고 하자꾸나. 변수는?”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변수가 일어나도 저희가 준비한 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뭐 네가 어련히 잘하였으려고. 이 기회에 나도 네가 서품을 받았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반드시 이루어 보이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둘에게는 같은 문양이 새겨진 문신이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해가 떠오르고, 황금 문지기들과 함께 대리전이 이루어질 장소로 함께 했다.
그 장소까지 가는 것도 문지기들과 함께 다른 이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안내받았다.
‘생각 이상으로 철저하게 해주시는 거 같은데?’
그 서약서가 생각 이상으로 에펫 님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았다.
“대장. 괜찮수? 마스터라니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난 대장을 못 보는 게 너무 아쉬운데.”
정반대의 대답이 양쪽에서 들려온다. 마니에르는 정말 마니에르답다.
“왜. 빨리 끝내고 오면 되지. 한 명이 더 많은데 자신 없나 보지?”
“에이. 왜 이러시나! 그럴 리가 있을까!”
“그래도 조심해. 애초에 저렇게 적은 수로 왔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거니까.”
“아마 마스터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거 아닐까요? 솔직히 대장만 아니었으면 우리 다 쓸려나갈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실제로 같이 온 면면들을 보면 과한 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마스터와 익스퍼트 세 명 그리고 후드를 쓴 네 명.
어스퀘이크라고 했으니 마법사와 검사의 조합일 것이다.
‘1번대를 맡고 있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3서클 이상일 거고, 아마 4서클이겠지?’
그렇게 뭉쳐서 온 이들의 화력은 웬만한 영지를 상대로 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
‘만약에 내가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진짜 위험했을 수도 있겠네.’
10명의 익스퍼트가 1명의 마스터를 상대라도 할 수 있다는 전제는 모든 익스퍼트가 그 마스터에게 집중을 할 때를 말했다.
그런데 마스터뿐만 아니라 다른 익스퍼트들도 있는 것으로 생각 이상의 혈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걸 다 생각하는 량이가 진짜 이상한 거지.’
해안가라 그런지 땅이 살짝 물렀다. 그리고 도착하니 에펫 님과 문지기들 그리고 그들이 보였다.
‘검사가 일곱, 마법사가 한 명인가.’
“마니에르. 자신 있지?”
“대장! 저만 믿으라니까요!”
“레핀과 일리야는?”
“거머리 마법사님만 아니면 괜찮수. 정말 마법사라는 족속을 다시 보게 되었다니까요.”
“카인 님과 거머리 마법사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니 괜찮습니다.”
한눈에 티거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가면만을 쓰고 경장갑을 입고 있는 인물에게서 장중한 기세가 흘러나오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대장이나 조심하슈. 진짜 장난 아닌 거 같은데.”
“너희가 빨리 끝내면 되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곧장 그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여전히 철 가면을 쓰고 있는 네 사람과 후드를 깊게 눌러쓴 한 명.
온몸에 긴장감이 도는 것이 느껴지고 설렘이 느껴진다. 결코 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이 작은 마을을 위하여 여기까지 이렇게 오신 분들께 감사를 표하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어떤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카인과 후드를 눌러쓴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곧 대리전이 시작될 무렵.
한껏 기세를 내뿜고 있던 티거가 기세를 갈무리한 뒤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청년은 나와 함께 가지. 어차피 우리는 여기에서 낄 수준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도 달았는지, 온몸에 설렘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순순히 그를 따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조심하고.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잘 버티고 있어!]
카인에게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래도 이왕이면 이기면 좋을 것 아닌가.
‘걱정도. 이길 수도 있지.’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이동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철 가면을 벗는 티거.
“흠. 원래는 항상 쓰고 다니지만, 적어도 마스터에 이른 이에게 숨기는 것은 실례가 되겠지. 티거라고 하네.”
“대검호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확실히 기세가 갈무리된 상태에서인지 그 거부감이 덜했다.
“허. 역시 알고 있었다. 하긴, 이 대검이 좀 잘 보이기는 하지. 그래서 청년은?”
어차피 이미 카인과 량에게 정체를 드러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겠다, 거칠 게 없었다.
“범이라고 합니다. 최근 불스 용병단에 있었다가 자유 섬에 오게 되었습니다.”
“범이라면! 혹시 라니우스 님의 제자라는 아이가 바로 자넨가?”
“저희 스승님을 아십니까?”
“하하하하! 알다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무인이거늘. 단 한 번 멀리서 그분의 칼을 뵌 적이 있었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궤적이었는데, 그 제자를 상대하게 되다니!”
진짜로 기뻐하는 듯, 표정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넘어서 호탕하게 웃으신다.
“실로 영광이다. 내 훗날 반드시 라니우스 님을 만나 뵙고 검을 나누고 싶었는데! 제자를 만나다니!”
자신의 검을 양손으로 잡으면서 슬슬 준비를 하신다.
“대단하시군, 초인이 된 것으로 모자라서 제자도 마스터로 키워내시다니. 꼭. 꼭 만나 뵙고 싶구나.”
그 눈에 존경과 흠모가 담겨 있지만, 순간적으로 위험한 눈빛이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럼. 우리도 우선 가볍게 어울려 볼까? 아마 저들이 끝나도 내 오지 말라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마치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가 거슬렸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나 싶을 정도.
‘그래도 카인이 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자! 그럼 후배님이랑 잠시 어울려 볼까!”
느낀 점은 생각보다 말이 몹시, 몹시 많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다시 확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손목의 움직임만으로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대검.
그 대검을 부드럽게 옆으로 쳐내면서 어깨를 내려치려고 하는 순간.
그 대검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돌아와 도를 막아낸다.
“나쁘지 않구만, 나쁘지 않아. 기본에 확실히 충실한 움직임이야.”
도를 막아내기 무섭게 어느 순간 대검이 머리를 향해 내려쳐진다. 그 대검을 도를 들어 막아내자 생각 이상의 힘이 느껴진다.
입에서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과 반대로 검은 간결하고 무겁게 내리누른다.
“그거 알고 있나? 검술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재밌는 것들이 가능해지지.”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분명 그대로 대고 있는 것 같은데 검이 누르는 압박이 늘어난다.
“이것은 재능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노력의 결정체지.”
결국 견디다 말고 그대로 흘려보낸 뒤에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대로 두지 않는다는 듯 따라잡으며 검을 횡으로 크게 휘두른다.
“가끔 보면 신은 불공평한 것 같지 않나? 재능도 차등을 두지 않나, 한계를 정해 놓지 않나.”
점점 거부감이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은 그저 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존재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