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다행히 카인이 버티는 것을 중점으로 두라고 해서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한 것이지, 이기라고 하면 글쎄라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무겁고 무거운 기세였다.
“하하!! 좋다. 좋다! 정말 세상이 넓다는 것을 또 한 번 더 느끼게 되는군. 아무리 보아도 후배 같으니 말을 편히 해도 되겠나?”
여전히 기세를 거두지 않으며 하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도 대답하기 싫은지 모르겠다.
“예. 괜찮습니다.”
“허허.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같은 길을 걷는 이들끼리 이렇게 만나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딱딱한 자신의 모습이 여전히 긴장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건네는 티거였다.
“내 사정이 있어 이리 철 가면을 쓰고 다니지만, 자네라면 정말 얼굴을 벗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그래. 누가 그 아이를 폐인으로 만들었나 싶더니 자네였구만.”
“설마. 혹시 그 [무투의 탑]에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관계가 깊은 듯했다.
“반푼이에 허세만 가득해서 마음에 차지 않았으나, 몇 수 가르침은 주었지. 마음이 꺾인 것을 보고 뭔가 했더니. 그 아이의 성정에 후배를 만났다면 충분히 꺾일 만했겠군.”
본능적인 거부감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지려는 무렵에 감사하게도 끼어든 인물이 있었다.
“어찌하여 적과 그리 대화를 하는 것입니까!”
자신만 무시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튀어나오는 호크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이마를 짚는 에펫 님.
“후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 온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일별한 티거가 코웃음을 친다.
“하! 우물 안 개구리라더니.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치 못하는구나. 어찌 저런 범에게서. 쯧.”
얼굴이 붉어지면서 무엇이라 말하려는 찰나, 숨이 막히는지 숨을 급하게 들이켠다.
에펫 님이 자리를 조금 움직이고 나서야 숨을 고르게 쉬면서 조용히 물러난다.
티거의 기세가 뿜어지고 에펫 님이 그 기세를 흩는 그 시간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인가.’
아무리 못났어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해도 무려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잠시간에 기세로 주먹이 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쯧. 갑자기 텄군. 이상한 놈이 끼어들어서. 고생이 많으시겠군. 그럼 먼저 들어가도록 해보지. 나야 뭐 칼로 온 것이니.”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리고 죄송하오.”
꼭 누군가가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조금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나중에 말씀드려 볼까. 갱생에 도가 튼 양반이 하나 있다고.’
뒤돌아 나가는 티거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티거가 나가자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에펫 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스퀘이크 1부대를 맡고 있는 센트라고 합니다.”
“크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려. 들어가세나.”
후드를 걷은 남성의 뒤로 후드를 여전히 착용한 세 사람과 함께 저택에 들어섰다.
*
“이곳에 와서 이런 동대륙의 식사를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영광입니다.”
“아니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상석에 앉은 에펫 님, 그리고 왼편에 그 후드들과 그 반대로 자신과 카인이 앉아 있었다.
에펫 님의 곁에는 호크 님과 인넨 님이 다소곳하게 앉아계셨다. 여전히 다 떨쳐내지 못한 듯한 호크 님.
“서로 간의 계약은 확실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만, 이토록 손해를 보며 예를 갖추는 계약도 없음을 상기해 주시지요.”
“허허. 홀로 왔다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생각 이상으로 탐이 나는지 다른 곳도 왔구려.”
그러시면서 힐끔 이쪽을 바라보시는 에펫 님. 이 싸움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이번 계약에 전권을 가지고 있는 카인이라고 합니다. 센트 님.”
“흐음. 대체적으로 어린 친구들이 많군요. 그쪽에는. 비엔토도 그런 것 같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경험을 나타내 주기도 하지요. 대리전 후 양측에 불가침 5년이라는 조약, 에펫 님의 통치하에 있을 때는 무력에 대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해도 강요할 수 없다. 너무 일방적인 계약 아닙니까? 처음에는 누가 이런 계약을 들이미는 멍청인가 했습니다만.”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하셨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으셨겠지요. 저희도, 둘라 님도 엣지 마을이 상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치열한 설전이 펼쳐진다. 도대체 그때 그때 어떻게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지, 속도가 너무 빨랐다.
‘미리 다 생각해 오는 것도 아니고, 저게 자동으로 계산이 되는 생각들인가?’
웃긴 것은 정작 당사자인 호크와 인넨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설전이 계속될수록 에펫 님의 표정은 점점 안도감을 찾아갔다.
그리고 유심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중, 이야기가 고조되는 그 순간.
“허허. 저의 아들들이 미욱하여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모두 이처럼 뛰어나신 분들이라 마음이 놓입니다.”
아쉬워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무엇인가 일어난 거 같은데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차와 다과를 들지 않으시겠습니까? 시녀가 안내를 해드릴 것입니다.”
각 시녀의 안내에 따라서 각각 양옆으로 떨어진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거기서?”
솔직히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이런 걸 볼 때면 전생(前生)이 편하기는 했다.
칼이 되어서 가라면 갔고 베라면 베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되었던 단순한 시절.
“흐음. 확실히 에펫 님도 만만치는 않으시단 말이지. 묘한 타이밍에 대화를 끊으시고.”
“뭐가 묘한 타이밍이었다는 건데? 싸우는 줄 알았는데?”
“아니, 뭐 그러면서 은근히 조항을 몇 개 건드리려고 했는데, 그걸 막으신 거지. 아마 지금은 저쪽이랑 이야기하시다가 이리로 오실걸?”
무언가 자신은 알 수 없는 세계에 있다가 온 느낌이었다. 그냥 싸우고 이기면 땡, 이런 것이 아니었다.
“너를 보면서 은근히 흡족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뭐야?”
“아! 마니에르도 있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수습은 힘들겠지만, 아마 걱정이 되셨겠지. 그게 조금 해소가 된 부분이 있을 거고.”
“뭐가 걱정이 되고 뭐가 해소가 된다는 거야?”
그렇게 물어보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웃으며 입을 다시 여는 카인.
“아무리 네가 마스터라고 해도, 아직 우리는 신생이란 말이지. 그럼 행정이 되겠어? 지배력이 공고하겠어? 이런 고민을 하는 거지.”
“뭐 지배력은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문제가 없잖아?”
그래서 카인도 량이도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을 다루는 것마저 잘한다.
실수가 생겨도 그 실수가 실수가 아닌 의도처럼 만드는 임기응변, 전체의 판을 읽는 말도 안 되는 능력.
정말, 이것이 자신과 동갑이고 처음으로 사람을 관리하고 구역을 지배하는 이들인지 경이로울 정도,
“근데 그걸 에펫 님이 아시냐는거지. 거기에 아셔도 얼마 안 돼서 그렇다고 여기실 거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둘을 알기에 자신이 확신을 한 거지, 아마 아니었다면 코웃음 쳤을 것이다.
“그런데 아까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그림은 아니었단 말이지. 그러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구나 여기셔서 그런 거겠지.”
“아까 밀렸어? 그 사람이 그렇게 똑똑한 거야?”
그 말에 피식 웃는 카인이다. 그러면서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연다.
“에이. 나를 그렇게 몰라?”
“아니. 아니까 놀라서 그런 거지. 그 센트인가 하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서.”
“적어도 콜베르 님은 데리고 와야 일방적으로 밀리지. 지금은, 잘난 걸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어. 그쪽에도 에펫 님에게도.”
“진짜 세상 복잡하게 산다.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
“네가 너무 단순하게 살아가는 거지. 약자에게는 약자의 방법이 있는 거야!”
카인의 입에서 약자라는 소리가 나오니까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네가 무슨 약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쿡쿡. 약자지. 진짜 강자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구.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절대자고. 그러니 나는 약자인 거지.”
그렇게 말하는 카인은 웃는 중에 진지하고 괜히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같이 해서 절대자가 되어야 하는 수밖에는 없겠네, 진짜 자신이 없다.’
그리고 카인의 말대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에펫 님이 방에 들어오셨다.
“허허. 한창 과열이 된 것 같아서 잠시 시간을 가지고자 했네. 조금 생각은 정리가 되었는가?”
“그럼요. 정말 잘 정리가 되었죠. 그러니 마니에르를 봐서 최대한 봐드릴 테니 그저 말씀해 주시죠?”
“허허허허. 참. 나도 모르게 어리다고 너무 얕보았나 보군. 아니, 범상치 않은 이 옆에 있는 이를 내가 몰라보았나 보군.”
‘저 말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고 의도가 있다는 거잖아. 진짜 피곤하게 산다. 그나저나 마니에르를 봐서라.’
“흠. 그럼 우선 호크에 대한 안전을 확실하게 지켜주기를 바라네. 자네들에게서도 둘라 님의 세력에서도.”
그 말에 카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해 보였다. 물론, 계획이 어련히 있겠지만 우선 말하고 보았다.
“에펫 님, 혹시 호크 님께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말하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을 보니 뭔가 써먹을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친구를 써먹으면 되지. 머리 좋은 놈이 둘이나 있는데.’
그리고 그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에펫 님의 표정이 격정적으로 변하셨다.
“그것이 정말인가? 아니, 안전뿐이 아니라는 것인가? 나도 별의별 수를 다 써보았네만. 이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길 바라네.”
“흠. 호트 님을 아시는지요?”
“아… 내 그분의 소식은 언제나 듣고 있다네. 참….”
“그분의 아들을 정신을 차리게 한 이력이 있습니다만, 제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이걸 가지고 어떻게 할지는 온전히 카인에게 달렸다.
그리고 얼굴에 지어진 미소를 보아하니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여는 카인.
“물론 저희도 해드리고 싶지만, 그것이 수호 용병, 그리고 그중에서도 수호 용병단의 단장이신 부발 님께 부탁을 드려야 해서.”
“부발? 그 부발을 말하는 것인가? 블레어 수호성 불스 용병단의?”
“그렇습니다. 호트 님의 아들분도 부발 님의 교육을 통해서 자리를 찾아가고 계십니다. 또한 블레어 수호성에서 불스 용병단의 식구에게 감히 해를 끼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엄청 어려운 것을 자신만 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 카인은, 가끔 있다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사기꾼과 같아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가 있지. 진짜 대단하다.’
근데 더 웃긴 건 그 말에 에펫 님이 홀랑 넘어가셨다는 점. 그리고 너무 간절해지셨다는 점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가 다른 조건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수락하겠소. 아니 무력의 지원도 하는 조건으로도 진행해도 좋소.”
아무래도 아픈 손가락이었던 듯 가장 포기하지 않으시던 것마저 포기하는 모습. 사실 그 애달픈 부정(父情)에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건만.
“저도 정말 그렇고 싶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인지라. 그렇다면 조건부로 계약을 하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저도 헛된 약속을 가지고 이득을 취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내가 무엇인들 못 하겠소. 정말 고맙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상상이 가지도 않는구려.”
“아닙니다. 마니에르도 있고, 에펫 님의 부정에 저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한 뒤에 잠시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서는 에펫 님.
그리고 모든 것이 생각 한 대로 되었다는 미소를 만면에 띤 카인이 입을 열었다.
“예스!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인데! 진짜 잘했어, 범아. 역시 너도 한 방이 있다니까!”
“흐응. 좀 잔인하다. 진짜 그러면 좋냐?”
“웅? 이런 걸 생각하고 그런 거 아니었어?”
“아니. 뭐 어느 정도 이득은 취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저런 반응에 네가 그렇게 쓸 줄은 몰랐지.”
“에이. 이 정도면 진짜 약과지. 엄청 양심 있게 한 거라구. 그리고 네가 있고 량이가 있어서 쉬운 거지 솔직히 부발 님에게 망나니를 맡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호오. 그래서 그렇게 하셨어요오? 아주 냉혈하기 그지없구만! 막 들어보니까 엄청 어려운 일처럼 말하더만.”
“원래 그런 거야. 진짜 이 정도면 양심적인 거라니까? 사실 두고두고 뽑아 먹을 수 있는데, 마니에르를 봐서 좀 봐줬지. 뭐 량이가 알아서 마니에르한테 뽑아 먹겠지, 뭐.”
진짜 카인도 량이도 괴랄하기 그지없는 괴물들. 도대체 머릿속에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인지 상상도 안 된다.
‘그걸 나한테 안 써먹어서 진짜 다행이지. 얘네랑 친구인 게 이렇게 다행일 줄이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의 안내로 다시 중앙의 거실로 모였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