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어?”
육성으로 튀어나오는 의아한 목소리.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눈앞에 에펫 님이 계셨다.
“허허. 이런 자리에서 뵐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만, 저도 입장이 있으니.”
‘마니에르가! 이 자식. 이런 이쁜 짓을!’
“저는 그래도 중립입니다만, 저도 마스터이신 범 님과의 대련은 꼭 하고 싶었던지라. 감사한 명령이었죠.”
자신도 감사하기는 그지없었다. 새로운 도(刀)에 익숙해지는 데 대련만 한 것이 없었다.
거기에 그저 익스퍼트도 아닌 마스터. 자신과 경지가 같은, 그리고 더 완숙한 사람과의 대결.
프라우도, 레핀도 일리야도 그렇게 극찬을 하던 사람이라 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양손에 못 보던 장갑을 끼고 있으신 에펫 님. 에펫 님에게도 나에게도 호승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새로운 도에 익숙해지신다고 하시는데. 처음은 가볍게 갈까요?”
그 말이 끝나고 양 주먹을 가볍게 부딪친 뒤에 자신에게 달려오는 에펫 님.
빠르고 호쾌한 움직임. 일직선으로 마치 모든 것을 부술듯한 그 움직임은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곧게 뻗어져 나오는 주먹은 발에서 시작해서 허리로 그리고 그 모든 힘을 주먹 끝에 담은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
두 개의 탑을 동시에 활성화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거리. 무투가에게는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온몸으로 다가오는 풍압이, 그 힘이 상상 이상임을 알게 해준다.
“확실히 민첩하시군요. 그럼 조금 더 빠르게 갈까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먼저 튀어 나간다. 탈해 님께서 주신 도는 가볍다.
‘풍아에 비하면 훨씬 가볍단 말이지. 가볍고 유연하다고 해야 하나.’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대로 휘두르며 들어간다. 확실히 마스터라고 무기를 통달한 것은 아니다.
속도가 어긋나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도를 바꾼 것치고는 굉장히 능숙하신데요? 그럼.”
어색한 칭찬. 하지만, 칭찬이 아니다.
‘전생에는 항상 도를 바꿔가면서 썼는데, 진짜 얼마나 되었다고.’
애병(愛兵)은 사치였다. 항상 이가 나가고 심지어 부러지기도 했다. 검을 들고 도처럼 휘두른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몸은 풍아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서서히 감각이 올라온다.
‘확실히. 마스터의 신체는 다르긴 달라.’
도(刀)가 약간 변화한 것으로 자신의 몸짓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무게감은 떨어지지만, 훨씬 더 빠르고 날카로운 도격(刀格)이 손에서 나온다.
하지만, 가볍게 주먹으로 하나하나의 도격을 쳐내는 에펫 님의 모습은 마치 신기와도 같았다.
‘아무리 서로 가볍게 한다지만, 저렇게 가볍게 쳐내신다고?’
“듣기로 대검호와 싸우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경험이 쌓여 이 정도라지만, 대검호와는 감히 비교도 안 될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려졌던 눈이 현실을 직시한다.
‘나는 그동안 오로지 힘뿐이었어. 그걸 잊고 있었어.’
[바람의 탑] 그리고 마스터라는 경지가 자신을 무인이라는 착각 속에 살게 했다.
자신의 무위가 빠르게 상승하고 보다 빠르게 바람의 탑의 형식을 익혔기에, 무(武) 그 자체가 성장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나는 실전 경험이 많은 용병이었을 뿐이야.’
살검(殺劍)과 예검(禮劍)에 대한 의견은 언제나 분분히 논쟁하는 거리 중의 하나였다.
실전으로 다져진 살검과 오로지 형과 식으로만 이루어진 예검. 자신은 당연히 살검의 편이었다.
하지만, 이 인생에서 다시 살아 보니 왜 정작 마스터에 이른 이들은, 무(武)에서 경지를 개척한 이들은 그런 소리를 안 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검도 예검도 무를 지지하는 하나의 축에 불과했다.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면 무는 기울어 바로 서지 못한다.
자신은 그것이 모두 온전히 바로 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쪽 모두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지금 극명히 느낀다.
‘재능 덕분이었구나. 진짜로. 그리고 여러 기연들 덕분이고.’
지금 나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명확하게 보인다. 평생을 무투에 바친 남자가 자신을 상대하는 모습에 자신이 비친다.
‘퍼그 님과의 대련도 퍼그 님이 정말로 많이 봐주신 거구나.’
순수한 무와 무의 대결. 찬연하게 빛나는 오러 스레드도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도 없다.
기기묘묘한 재능도 없다. 그저 부딪히는 것은 도 한 자루와 두 주먹뿐.
그 가운데 자신의 얕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바닥이 단단함이 안정감을 준다.
‘스승님께서 왜 그렇게 기본 도식에 집중을 하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화려하고 폭풍 같은 자신의 도가 점점 단순해진다. 베고 또 베고 또 베어 간다.
단순한 행동. 하지만, 그 행동이 주는 단호한 명쾌함에 힘이 실린다.
“허어, 무슨 이런 괴물 같은!”
감탄이 들리는 것 같지만, 귓가를 스치고 흩어진다. 오로지 베는 것에 집중한다.
손에 쥔 도를 느낀다. 마치 도를 처음 잡은 사람처럼. 그리고 도파(刀把: 도의 손잡이)를 지나 도신(刀身) 그리고 도첨(刀尖)까지 감각이 확장된다.
마치 도가 아닌 손처럼 느껴진다. 내려쳐지는 도신에 부딪히는 에펫 님의 주먹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도 전체가 마치 손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자 내려치는 도가 의도를 갖기 시작한다.
내려치다가 옆으로 꺾어지고, 다리를 노리다가 다시 꺾이며 팔을 노리고.
“하하하하하! 신명이 나는군요!”
점점 빨라지고 점점 투박해진다. 하지만, 그 투박함에 아름다움이 서린다.
복잡하게 얽히는 두 사람. 가장 투박하게 싸우는 두 사람. 그런데 그것이 알아보기 힘든 속도가 되어간다.
“이런, 이런. 이렇게 박투를 즐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만.”
흥겨움이 올라온다. 어느새 찬연하게 서로의 오러 스레드가 손과 도에 어려 있었다.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직선과 직선의 만남. 직관적인 그 전투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펼쳐진다.
“그럼. 이제 슬슬 저의 무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직선과 직선의 부딪침이 잦아든다. 조금씩 자신이 밀려난다. 아니 밀려나게 된다.
‘뭐지? 저게 가능한 건가.’
아직 재능은 일깨우지 않은 상태라지만, 자신의 도에는 오러 스레드가 맺혀 있다.
알맞게 휘두른다면 사람의 몸은 손쉽게 두 동강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도격을 하나하나 맞으면서도 아무 상처 없이 굳세게 한 발 한 발 다가온다.
쳐낼 건 쳐내면서도 몇 도격은 그대로 몸으로 맞으며 들어온다. 점점 간격이 줄어들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재능인가? 어떻게 몸에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수 있지?’
그 걸음이 천천히 옮기기 시작하더니, 빨라지기 시작한다. 돌진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돌진하는 속도가 힘이 되어서 일격 일격이 더 무겁게 들어온다.
“쾅!”
도를 때린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일격에서 그대로 몸이 떠오른다. 떠오른 채로 벽에 닿고 마는 등.
만일 이것이 목숨을 걸고 하는 전투였다면, 자신은 몸이 뜬 순간 죽은 목숨이었다.
“후우, 정말 대단하시네요.”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땀이 증기가 되어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적당히 몸을 풀었으니. 이제 제대로 해볼까요?”
그러면서 수련장 한쪽으로 가서 바닥을 들어 올린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상급 포션들.
“상처에 대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이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수입이 꽤 모이더군요.”
‘하긴. 황금의 길이 있는 마을을 30년을 운영하셨으면.’
엣지 마을은 기본적인 세금은 매우 싼 편이지만, 보호세의 개념으로 걷는 상인들에 대한 세금이 따로 있었다.
‘와. 상상도 못 할 정도네. 그러니까 저렇게 상급 포션이 많은 거겠지만.’
최상급 포션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포션은 상급 포션.
상급 포션만 되어도 웬만한 상처는 모두 치료가 가능하다. 절단된 신체도 신체에도 부으면 붙는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아무리 마니에르의 부탁이 있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저도 그저 가벼운 대련으로 그치려 했지만, 오랜만에 피가 끓어 올라서 말입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같은 미소가 맺힌다. 그리고 수련장의 중심으로 돌아온 둘이 이내 부딪히려는 순간.
“쿵! 쿵! 쿵!”
밖에서 수련장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맥이 빠진 얼굴로 문에 다가가 문을 연 에펫 님.
“도련님?!”
그 자리에 마니에르와 프라우 그리고 조원들이 서 있었다.
“대장! 우리가 이겼어! 우린 익스퍼트 셋을 상대하는 거니까 이 대련을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뻔뻔하게도 나오는 마니에르였다.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카인이 잘도 보내줬다?”
“에이. 카인 님도 가라고 하셨는걸? 따로 지시할 것도 있어서 자신이 잘 못 봐주신다고.”
분명 그게 아니라 감언이설로 어떻게든 여기 오려고 했을 것이다.
‘나한테 넘긴다 이거지. 두고 보자, 카인.’
“에펫 님은 괜찮아?”
에펫 님께 여쭈어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넘어간 얼굴이었다. 분명 무언가 오고 갔다.
“에휴.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 대신 알아서 몸 지켜. 그럴 정신 없으니까.”
“에이. 걱정하지 마, 대장! 우리도 나름 익스퍼트라고!”
태연히 대답하는 마니에르와 다르게 긴장을 하며 검을 뽑는 프라우가 눈에 들어온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마니에르의 등장으로 순간 맥이 끊기긴 했지만, 다시 중앙에 서니 다시금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처음이라 조금 투박할지도 몰라요.”
“허허. 늙어서 그런지 힘 조절이 생각대로 안 되더군요.”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니에르와 일행들은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서 거의 숨듯이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이내 에펫 님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
“진짜 조심하셔야 해요.”
“에이. 뭐 얼마나 심하다고.”
“조장님은 마스터를 뵌 적이 있어요?”
“그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을걸?”
“그럼 그 마스터가 온 힘을 다하는 장면은 본 적 있으세요?”
“음… 대련은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온 힘인 줄은 모르겠네.”
“전 본 적이 있어요. 단 한 번이지만, 그리고 정말 상상 이상이에요.”
“왜? 어느 정….”
말을 이으려고 하는 사이에 두 사람이 맞부딪혔다. 첫 부딪힘인데 공기가 울린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창을 앞으로 꺼내는 마니에르였다.
“말했죠?”
“와. 미쳤네. 진짜 조심해야겠네. 이게 마스터라는 건가….”
대다수의 오러 유저의 경우 푸른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걸 보고 ‘마나는 푸른색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
그런 어디서나 볼 법한 오러가 전신을 감싸고 있는 모습은, 가히 전투의 천사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냥 마스터라기에 별생각이 없었지만, 생각 이상인데?”
전신에 찬연한 오러가 감돌고 있고 두 주먹에는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감싸져 있었다.
그를 상대하는 범의 도에는 투명해서 시려 보이는 녹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었다.
익스퍼트인 자신임에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재능을 사용해야만 모든 과정이 명확하게 보일 정도.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서려 있는 도를 온몸으로 튕겨내는 에펫이 보인다.
두 사람의 격돌에 작은 돌들이 마치 암기처럼 쏘아져 오는 것도 문제였다.
“무슨 놈의 대련이 저따위야!”
자신들은 심각한데, 격돌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 있었다.
간혹가다 격돌하는 파공성 사이로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이 들려온다.
“하.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멀었구나.”
두 사람의 대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부가 되고 있었다. 마스터가 몸을 쓰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대장이 조금 변한 거 같은데?”
“조장도 그렇게 봤어요? 뭔가 간결해진 것 같죠?”
“설마. 그사이에 뭐가 변했다고? 진짜 괴물들끼리 노는 것도 아니고, 이거 서러워서 살겠나.”
철혈이라는 이명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단지 성정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무재(武才)였다. 그렇기에 익스퍼트라는 경지에 쉽게 올랐지만,
범, 카인, 량 이 세 사람은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듯했다.
“조장, 포기하면 편해요. 저 사람들은 별세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하아….”
진귀한 장면, 엄청난 대련을 보지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