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분명 요리는 신기하고 새로웠다.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 알 수 있었다.
‘체한 거 같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진짜.’
다행이라는 점은 인넨 님도 호크 님도 그 자리에 없었다. 오로진 자신들과 에핏 님 부부뿐이었다.
그리고 안내된 숙소는 별관이었다. 분명 밖에서 잔다고 한 것 같은데 별관으로 숙소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온 직후, 카인이 사일런스 룸을 펼치자마자 온갖 질문이 날아들었다.
“뭐요? 마니에르? 막둥이 너 무슨 대단한 집 아들이었어? 대장은 알고 있었수?”
“저 마니에르 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그 가운데 조용히 마니에르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프라우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입이 열리자 모든 질문이 사그라들었다.
“동대륙에서는 특이하게 옷의 색으로 신분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라일라 님의 옷이 붉은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서대륙의 후작가 이상의 가문일 텐데.”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니에르를 바라보는 이들.
‘다행히,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라우의 말이 이어질수록 마니에르가 후작가, 또는 공작가에 버금가는 집안의 자제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 갔다.
“어때요? 조장? 맞죠? 한 제국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 중 하나! 그것도 연꽃을 보아서는 수련가의 자제인 거죠!”
굉장히 당당하게 말하는 프라우. 그 모습이 웃겼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황자라고 그랬다가 무슨 사달이 일어날 줄 알고.’
그때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마니에르가 태연히 입을 열었다.
“대충 비슷해. 집안에서는 형님이 있으니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니에르로 대해 주세요.”
“오오 출생의 비밀 이런 건가!”
“헐. 마니에르, 조장이 귀족 가문이었다니.”
“역시! 가끔가다 보이는 태도에서 이상하다 싶었다니까요!”
마니에르도 나도 사람들을 얕보았던 것 같다. 오히려 신이 나서 마니에르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는지, 당황해 하는 마니에르를 두고 살짝 옆으로 빠져나왔다.
“카인. 근데 원래 저런 거야? 귀족이라고 하면 좀 움츠러들고 그렇지 않아?”
“아마 자유섬 출신이 대부분이라서 그럴걸? 에펫 님 때문에 저렇게 된 거야.”
“어? 이 사달이랑 에펫 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바로 마니에르를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그걸 제외하고는 알고 있던 일이니까?”
“응? 뭘 알고 있어?”
“너. [어부의 사랑] 들어 본 적 있지?”
“응. 여기에 와서 알게 된 거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냐.”
자유섬에서 필수 같은 느낌의 이야기.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자유섬의 한 어부가 우연치 않게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 사람이 귀족이었다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
그래서 더욱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부가 귀족 여식이랑 결혼을 한다니. 세상에나.
“그거 실화야. 각색이 좀 된 거지만.”
“무어? 뭐 그 사람이 마스터이거나 그런 거야?”
“아니. 그 당시에는 마스터는 아니었지. 나중에는 되었지만. 그리고 그 주인공이 에펫 님.”
“와, 미쳤다. 말도 안 돼. 진짜로?”
설마 싶었는데, 진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서대륙에서는 제아무리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서자가 인정을 받는 것은 있더라도 정통 귀족이라고 불리는, 소위 역사가 있는 가문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의 기회가 평등해 보이고 아카데미도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신분제라는 벽은 언제나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피에 대한 그 자부심이. 이상한, 고결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한 제국은 조금 다른가 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심할걸? 근데 에펫 님이 그만큼 대단하신 거지. 혈혈단신으로 쳐들어갔으니까. 아니 쳐들어갔다기보다. 자살 시도?”
카인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신기했다. 에펫 님이 다르게 보였다,
“근데 어떻게 바로 알아본 거지?”
“흠. 아마, 이건 확실하지 않는데. 라일라 님이 아마 어림군(御臨軍: 황제의 친위부대) 소속이셨던 거 같아.”
한참을 홍역을 앓던 마니에르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이들은 구경을 하러 삼삼오오 나갔다.
‘나도. 구경하러 나가고 싶은데.’
카인이 전투가 있기 전에는 마음껏 구경하라며, 심지어 돈도 넉넉하게 주었다.
‘하. 진짜. 자유섬에 와서 마음 편히 구경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내일이면 하루 정도는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돌아오는 마니에르를 반겨 주었다.
“야.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널 한번에 알아본 거야?”
“헤헤. 대장 미안해요. 카인 님께서 말씀하신대로에요. 저도 상상도 못 했다구요!”
“그 어림군? 그렇다고 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그것도 엄청 예전일 거 아니야.”
“헤헤. 어림군들은 그렇게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에펫도 어림군이더라고요.”
“뭐??”
“뭐. 편히 보내 주는 대가 치고는 굉장히 싸게 먹힌 거죠. 아버지가 엄청 좋게 보셨나 보더라구요. 참 내.”
마니에르의 반응을 보아하니 마니에르도 이제 와 알게 된 사실인 듯 했다.
“하아.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왔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일라 님과 에펫 님이 별관으로 다가오셨다.
‘흠. 사람이 온다는 건 알았는데, 훨씬 세밀하게 안 걸 보면. 뭐가 있기는 있나 보네.’
들어오자마자, 자신과 카인을 보더니 머뭇거리는 두 사람.
“괜찮아.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어.”
마니에르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두 사람이 움직임을 보인다.
“고귀한 혈통의 두 번째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림군 산하 관측대 3대를 맡로 있는 에펫 인사드립니다.”
“라일라 인사드립니다.”
망토 안에는 붉은색 비단으로 만든 무복과 자색(紫色)의 수실로 여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와. 아버지는 왜 말도 안 하셨을까. 진짜 일리야 널 좋게 보셨나 보다. 에펫도 그렇고.”
말을 하는 마니에르의 표정이, 그 태도가 너무나 어울려, 말을 놓았다는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그분의 은혜는 뼈에 새기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치기라고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뭔데? 솔직히 어림군은 그저 명분을 위한 것 뿐인 거 같은데.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어느새 마니에르의 뒤에 온몸을 감싼 여인이 나와서 검을 잡고 있었다.
지금 마니에르는 그 희희낙락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마니에르가 아닌 한 제국의 제2 황자 진나의 모습 그 자체였다.
‘호오. 대단한데? 진짜 황자 같잖아? 아니 진짜 황자니까 그런 건가?’
“사실. 얼마 전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도 30년만에 연락이라 저희도 당황했지만,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연락? 너희에게? 누가? 설마?”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연락을 친히 주셨습니다. 너희의 눈으로 보고 판단해라. 그리고 전해 주어라.”
그러면서 무복의 속에서 한 장의 비단을 꺼내 드는 에펫 님. 자색의 비단에 황금색의 수실로 수가 놓여 있었다.
‘오? 진짜 황금 같이 생겼어!’
한데 이상했다. 그 비단이 나옴과 동시에 라일라 님도 온몸을 감싸고 있던 여인도, 심지어 마니에르마저 무릎을 꿇었다.
카인이 시기적절하게 자신을 끌어내면서 벽으로 붙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제2 황자 진나는 칙령을 받으라!”
마니에르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 에펫 님이 칙령을 전달하는 그 과정. 그 모든 것이 신기했다.
“우와. 엄청 신기하다. 원래 저러는 거야?”
“나도 오늘 처음 보는 거니까. 잘 모르지. 근데 좀 멋있는 거 같아.”
“그치?”
카인과 속닥거리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그사이에 귓가에 들려오는 말이 있었다.
“제2 황자 진나는 이 칙령을 듣는 그 즉시 암행(暗行: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님)하여 성취를 이루어 짐(朕)을 보러 오거라.”
“칙령을 삼가 받듭니다.”
올려진 양손 위에 비단이 조심스럽게 내려진다. 그 비단을 보고 다시 정성스럽게 접어 품에 집어넣는 마니에르.
칙령을 품에 넣자 에펫 님께서 다시금 무릎을 꿇고 자세를 취한다.
“하. 진짜 이제야 인정해 주시는건가. 아버지도 참. 은근히 끈덕지다니까. 이제 둘 모두 일어나.”
“암행(暗行)을 하신다고 하셔도, 이 마을을 원하신다면 드리겠나이다.”
에펫 님의 그 말에 마니에르의 기세가 변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표정과 태도. 싸늘한 말이 나온다.
“지금. 나를 시험하는가? 감히? 어림군 주제에?”
어느새 전신을 감싼 여인이 자색 비단 두 개를 라일라 님과 에펫 님의 목에 두른다.
그러자 순식간에 표정이 변한다. 낭패라는 에펫 님의 표정과, 체념을 한 라일라 님의 표정.
“저 자색 비단이 뭔데? 그냥 얇은 줄 같은 거 아니야?”
“아! 저건 알아. 자색은 황제의 색이야. 오롯이 황제와 계승권을 가진 자식만이 사용할 수 있어.”
카인과 량에게 수업을 들을 당시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제국에서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라고.
“그런 자색 비단이 저렇게 목에 걸쳐 있으면, 그 누구도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더라. 특히 죄를 물을 때 그렇게 한대. 그대로 목을 쳐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지. 아니면 그 죄가 관계가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지어지게 된대.”
“와. 그건 좀 심한 거 아니야?”
“아니. 근데 저 자색 비단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 황제. 또는 황가의 권위를 침범했을 때 나오는데, 아마. 에펫 님이 방금 한 말 때문일 거야.”
“응? 뭐? 엣지마을을 바치겠다는 그 말? 그게 왜? 엄청 대단한 거 아니야? 우리한테도 좋고.”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아.”
카인의 설명이 이어지려는 찰나에, 마니에르의 입이 열린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관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감히. 황제 폐하의 자비를 빌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그를 능멸하려고 한 죄. 씻을 수 없다.”
“죄”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려는 찰나, 어깨에 걸쳐진 비단이 빳빳해지면서 목에 대어지자 입을 다문다.
“또한, 그뿐 아니라 어림군이라는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감히 나를 시험하려 한 그 죄도 감히 씻을 수 없다.”
그때에, 어깨가 베이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품에서 은색 패를 하나 꺼내어 놓고 고개를 땅에 박은 채로 입을 여는 라일라 님.
“감히 청컨대, 이 죄인의 말을 들어주소서.”
“하. 감히. 고작해야 귀패(貴牌)를 가지고? 은패(恩牌)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임을 모르는 것이냐?”
“제발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옵소서.”
흘깃 자신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입을 여는 마니에르.
“운이 좋다 여기어라. 말해 보거라”
“저의 부군께서는 어림군이 되었다 한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깨에 피를 흘리며 머리를 땅에 박고 절절하게 말을 하는 그 모습은 참 안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니에르는 전혀 미동도 없이 싸늘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면죄부가 되지 않사오나. 혹여 자비를 베풀어 긍휼을 베푸사 한 번의 용서를 구하옵니다.”
“하. 이 자리에 그 누구도 없음을 감사히 여기거라. 허나 귀패로는 그 죄를 넘어갈 수 없다.”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여 저의 인생을 바치겠나이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옵소서.”
라일라 님의 말이 이어질수록 에펫 님의 얼굴을 점점 더 썩어 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망과 체념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분노도 섞여 있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마니에르는 일말의 감정이 없는 톤으로 그에게 말을 했다.
“하? 분노? 억울하더냐. 허할테니 입을 열어 변명해 보거라.”
“저 스스로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 어리석은 죄인이 늙고 늙어 생각이 짧아져 이러한 사태를 만들었으니 죽음으로도 이 죄를 갚을 수 없으니.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감히, 분노를 보인 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광경을 보면서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었다. 그리도 중요하고 과한 문제인가 싶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카인의 만류로 꾹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일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앞뒤 안 가리고 뒤집어 엎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 죽여 버렸을 것 같기도 하다.
그놈의 태생이 무엇이라고 그렇게도 사람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마니에르의 공손한 말에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 카인과 함께 나왔다.
“카인. 저게 너의 눈에는 정상으로 보여?”
“헤에. 화났구나?”
“당연하지! 저걸 보고 어떻게 화가 안 나!”
“근데. 범아 음. 한 제국이 서대륙보다 훨씬 자유로워. 만일 저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그만큼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다른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든 단 한 번의 시험이 그렇게 목숨을 거둬 갈 만큼이야?”
“어림군. 그리고 에펫. 잘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