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인넨 님과 판박이의 얼굴. 하지만, 더욱 깊은 눈동자와 세월이 흐른 듯한 얼굴. 미소에서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노년의 사내.
“어서 오시게. 이 마을을 맡아서 운영하고 있는 에펫이라고 하네.”
“안녕하세요. 블라우 구역주를 맡은 순(順)의 무장(武將) 범이라고 합니다.”
처음으로 하는 격식 차린 인사말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게 느껴진다. 괜히 어른인 척하는 느낌이랄까.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무투의 탑]의 초신성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폭풍을 이끌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저 초신성이니, 폭풍이니 하는 것도 자신은 부끄러웠다. 아직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블라우 구역주의 전권대리를 맡고 있는 순의 부총수 카인이라고 합니다. 엣지마을의 영웅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허허. 아직도 그 이름을, 그것도 외부인에게서 들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말이지요.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 하시지요.”
‘엣지마을의 영웅? 그건 또 뭐람.’
그 마음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엣지마을의 영웅은, 그냥 넌 단순하게 생각해. 황금의 길을 만들어서 그렇구나 그런 식으로 알았지?]
분명 뭔가 더 있는데, 설명을 안 해주는 것은 일전의 에펫 님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지 몹시 놀라하셨는데 말이지.’
에펫 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자, 황금 문지기들이 에펫 님의 뒤로 자신들의 옆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의 무위가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우와? 겁나 신기한데? 이게 진짜 실력이다 이거구나. 역시. 량이가 말해 준 대로였어.’
떠나기 전, 한참을 수하들을 굴릴 때 량이 해 준 말이 기억이 난다.
*
다들 기절한 상태로 통에 들어가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곯아떨어진 모습이 꽤 정겹다.
“범아. 신기하지? 내가 이런 걸 뚝딱뚝딱 만들어 낸 거 같아서.”
확실하다. 천재라는 족속들은 독심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놀란 얼굴로 량을 바라보자 악동처럼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독심술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범아. 재인이 보여 준 그 기술이 정말 세상에 처음 나온 기술일까?”
“응?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기술이 있었으면, 당연히 엄청 발전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전쟁의 전술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마법 같은 기술이 있었다면.
하지만, 전생에서도 그 기술은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전쟁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세상은 두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지.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서대륙은 전투에 미쳤다라면, 동대륙은 전쟁에 미쳤다고 하셨어.”
“무슨 소리야 그게? 동대륙은 전쟁이 없는지 꽤 오래된 것 아니었어? 한 제국이 엄청 굳건한 거 아니야?”
그 뒤로 이어진 량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니에르가 다시 보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전하고 발전한 것이 진법(陣法), 아니 발전했다기보다 원형을 따라잡으려 한다는 거지만.”
그러고서도)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엣지마을 때문이야.”
“응? 그 맨 마지막에 가야 한다는 마을?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서.”
“아니. 뭐 대충 윤곽은 나왔는데? 너가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그나저나 에펫 님의 부인이 누군지는 알아?”
“응! 그건 기억하고 있지. 엄청 유명한 무가의 딸이었다면서. 그래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담서.”
“그리고 그 무가에 대대로 전해지는 진법이 존재해. 아마 아직 자식들에게 전한 거 같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조심해. 너가 본래 느끼는 것의 적어도 2배라고 생각하고 판단해. 알았지? 너가 최후의 안전장치니까. 너도 조심하고.”
“오오~ 우리 량이가 이제는 책임도 질 줄 알고. 대단한데? 이 형아가 그렇게 걱정이 되었어요~?”
얼굴이 붉어지는 량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왜 그리도 좋은지 모르겠다. 조금 더 놀리려는 순간.
쐐액!
마나가 서려 있는 채찍이 바람을 찢으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인다.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정말 서러워서 살겠나.”
몸을 살짝 움직여서 채찍을 피하면서 그 당사자에게 소리를 친다.
“흐응. 자기를 놀리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어차피 맞지도 않을 거면서.”
“아 진짜!”
*
‘진짜. 확실히 칼라 님은 무서워…’
결국 상념의 끝은 칼라 님의 채찍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이유를 잊지는 않았다.
‘이 기세에 대충 2배. 아니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지.’
황금 문지기들이 자리를 잡자 기세가 뭉쳐지는 것이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기세가 변화하기만 했다는 것.
‘강해지거나 그런 건 아닌데, 끈적거리게 변했네. 이것도 마스터가 아니면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 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묘하게 에펫 님을 향한 길을 막고 있었다. 거슬리게 만드는 느낌.
앞으로 반보(半步).
기세가 조금 더 끈적이기 시작하면서 미세하게 조여지는 대형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앞으로 반보(半步).
일리야와 레핀이, 마니에르가 움찔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조금 더 노골적이 된 것 같다.
다시 앞으로 반보(半步), 그리고 어깨에 살짝 힘을 주자.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만. 거기까지만 해.]
‘카인은 마법사 주제에, 이런 건 눈치가 비상하다는 말이지.’
그 말에 그만두었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자 에펫 님께서 입을 여신다.
“어떻게? 원하시는 것은 얻으셨습니까?”
뭔 놈에 세상이 괴물만 가득한 것인지.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아니요. 그저 문지기들이 대단하다고, 에펫 님께서 대단하다고만 느꼈을 뿐입니다.”
“허허허. 이것 참. 둘째 녀석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분을 모시고 왔군요.”
그러면서 입으로 마스터라는 소리 없는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에라이. 밑진 것 같은 느낌은 뭐냐. 괜히 나섰어. 이런 건 카인이나 량이 전문인데.’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상한 문답(問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따라 저택의 문 앞으로 오는 길이 매우 길게 느껴지는군요. 들어가시지요.”
거대한 원목으로 만들어진 듯. 두껍고 거대한 나무 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문이 열리면서 드러난 풍경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바닥은 대리석이 아닌 붉은 털들이 길게 솟아난 이상한 재질의 것으로 뒤덮여 있었다.
요소요소에 이국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대륙에서는 보는 것 조차 힘든 것들.
그것들이 서대륙의 물건들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서 간 곳은 식당.
거대한 장소가 비어 있는 채로 있었다. 자리를 안내받아 가는 곳은 의자도 없었다.
다들 그런데도 너무 자연스럽게 바닥에 앉는다. 자신도 그를 따라서 바닥에 앉는다.
다행히 구멍이 뚤려 있는 곳이 있어서 생각보다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곳에 에펫 님과 함께 앉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앉은 느낌은 조금 어색했다.
“허허. 종종 서대륙의 분들은 좌식(坐式)에 익숙치 않아 하시기에 이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정말 대단한 것 같으세요. 이렇게 편하게 좌식으로 앉을 수 있다니!”
‘모르면 닥치고 있어야지. 입 닫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했으니까.’
카인과 에펫 님의 대화에 집중을 하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처음 보는 복색의 옷을 입은 여성들이 들어와서 상을 하나씩 앞에 놓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여성은 자신과 카인 그리고 에펫 님의 상을 직접 차리고 계신 분.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분인 것 같았다. 마치 흐르는 것 같은 듯한 재질의 옷. 그것도 붉은색.
불이 흐르고 있는 듯한 그 옷에 황금색으로 된 수실이 연꽃을 수 놓고 있었다.
‘저게 그 비단이라는 건가?’
서대륙에서는 워낙 귀해서 왕이 아니면 옷으로는 입을 수도 없는 비단.
같은 부피의 두 배가 되는 황금과 거래되는 비단은 자신도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간 자신이 본 비단은 비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여성이 입은 비단이야말로 진짜 비단이었다. 마치 움직임에 따라서 그저 흐르는 듯하는 느낌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안겨 주었다.
그 흐르는 비단에 눈을 떼지 못하자, 그 모습을 본 에펫 님께서 크게 웃으신다.
“하하하하. 비단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인지, 내 내자(內子)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있는 것인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처음으로 보는 비단에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그런데 내자라고 하심은…?”
“허허허. 이리 와서 인사를 하지 않겠소?”
아무리 많이 쳐줘도 40도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여성 분이 공손하게 에펫 님의 앞으로 와서 인사를 한다.
“에펫 님의 내자 되는 라일라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단아할 수 있을까 싶은 몸가짐. 붉은 비단이 마치 그 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그 여성분이 일어나서 마니에르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대뜸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닌 절을 하며 인사를 건넨다.
“감히 고귀한 피를 이은 이를 먼저 알아 뵙지 못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라일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일어나지 않고 절한 채로 있었다. 마니에르의 얼굴에도 당황이 스치는 것도 잠시.
“일어나라.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난 이에게 과한 인사를 받는구나.”
마니에르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잠시 시간이 지나간 뒤에 소리가 날까 두려워하며 일어서는 여인.
“부인?”
그 모습에 놀란 것은 자신뿐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에펫 님께서 더욱 놀라하셨다.
“혹여 사용인들을 물리고, 잠시 문을 닫아도 될까요?”
여성, 아니 라일라 님의 부탁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사용인들을 물리고, 문이 닫힌다.
그러고 나서 에펫 님에게 귀엣말을 전하더니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나 함께 걸어 마니에르 앞으로 섰다.
‘그 설마가 맞아요. 따라와요? 무슨 설마가 맞다는 거지? 뭔데?’
마니에르의 앞에 선 두 사람. 이번에 말을 하는 사람은 에펫 님이었다. 그것도 공손하게.
“고귀한 피를 이으신 분을 뵙습니다. 감히. 무례를 일으킨 점. 송구스럽습니다. 그 은혜 여전히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펫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공손하게 마니에르에게 함께 절을 하고 엎드린 채로 일어서지 않는다.
여기서 무엇인가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카인과 마니에르 뿐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잘못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걱정이 들 무렵.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대충 상정해 둔 것이지만. 이렇게까지 전격적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네.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안심이 된다. 카인이 상정해 두었다는 것은 량이와 대화가 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고귀한 피? 그러면 대충 마니에르가 황자인 거랑 관련 된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동대륙. 그것도 한 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이상 저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어떻게 안 거지? 뭐가 드러난 게 있었나?’
아무리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유섬에 존재하는 창을 쓰는 여느 무사와 다를 바 없었다.
‘얼굴 때문인가? 근데 그걸 알아 볼 수 있다고? 얼굴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복잡한 표정을 보이던 마니에르가 입을 열었다.
“하. 정말. 여기 와서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파란(破卵)이 이렇게 단아하다는 것도 몰랐고 말이지.”
파란이라는 단어에 움찔거리는 라일라 님. 그럼에도 엎드린 자세를 풀지 않았다.
“나도 그저 들었을 뿐인데. 눈으로 보니까 반갑고 신기하군. 둘 모두 일어서지. 지금은 마니에르일 뿐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그렇게 뭔지 모를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 자리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라일라 님의 고집과 에펫 님의 강권으로 자리는 굉장히 묘해졌다.
마니에르와 자신, 카인이 가장 상석에 앉았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에펫 님이 앉아계셨다.
‘와. 진짜 죽을 것 같다.’
남의 집에 와서 상석에 앉은 기분이란,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집주인을 두고.
‘진짜 그냥 나가고 싶다.’
“하하하하. 저도 정말 듣기 전에는 알 수 없었는데, 이리 보니 정말 선친을 빼어 닮으셨군요.”
마니에르와 에펫 님만이 편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