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점점 생각이 사라진다. 흔들리고 방황하던 마음도 가라앉는다. 분노도 짜증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박투가 이다지도 즐거운 것인지 몰랐다. 온 힘을 쥐어짜고 내지르고 내던진다.
주먹에도 발에도, 가리지 않고 온 몸에 재능이 둘러진다. 바람이 찢겨 나간다.
눈앞의 퍼그 님은 여전히 굳세다. 그것이 너무도 즐겁다. 날아가도 즐겁고 맞고 튕겨져 나가도 즐겁다.
모든 힘을 다 해서 내지르는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내 손이, 발이, 전신이 폭풍이 되어 간다.
툭툭 무너지는 무게중심도, 순간순간 튀어나오고 날아오는 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있으면 부수고 아니면 돌아가고 튀어나오면 뛰어오른다. 진짜 바람이 된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이른 아침부터 나온 것 같은데 어느새 해가 지려고 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온 힘이 빠져 탈력감이 찾아온다. 이제는 서 있는 것이 고작.
결국,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 아프다.”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고 까슬한 대지의 표면이 엉덩이에 느껴진다.
“이제 좀 괜찮아졌냐. 뭔 놈의 긍병(掯病)이 10시간이 넘어가냐.”
“긍병이요? 저 병에 걸렸었어요?”
“뭐. 정식 명칭은 아니다만, 그렇게 부르고 있지. 마스터가 되면 걸리는 병.”
“네? 저 평소랑 다른 게 하나도 없는 데요? 아픈 부분도 없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병이 아니다. 그저 참고 참는 것이 생활이 되다 보니 인지하지 못하고 걸리는 병이지. 지금 어떻냐.”
어떻냐니. 지금? 자신이 무슨 병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질문이 이상했다.
‘지금? 개운하고, 맑고, 뚜렷. 어? 왜 개운하고 맑고 한 거지? 힘든 게 아니라?’
“개운하지? 정신도 또렷해진 것 같고. 시원하지?”
“네. 무언가 막힌 게 확 뚫린, 눌린 게 확 사라진 기분이에요. 막혔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서 그렇단다. 마스터의 육체로 일상생활을 하고, 대련을 하고, 항상 억누르기 바빴으니.”
그 이야기를 들으니 처음부터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육체에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네 스승님이라도 어쩔 방법이 없으셨을 것이다. 터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
털썩 누워서 바라본 하늘은 참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해가 지려고 하는지 붉게 물든 하늘이 다르게 보였다.
“죄송해요. 또 수고를 끼쳐 드려서.”
무엇인가 쑥 내려간 기분이 드니, 자신이 또 방황하고 흔들렸다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도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순식간에 휘둘리고 흔들리는 자신이 인정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일로 흔들리지 말라. 올라가는 거야.’
“뭔 소리냐. 이제 시작인데. 어서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그렇게 등을 돌려 돌아가는 퍼그 님의 등은 한없이 넓어만 보였다.
“아빠!”
그런데 그 등을 순식간에 달아나게 하는 존재가 있었다.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들어! 나보다 더 바쁜 거 아니야?”
퍼그 님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할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
어머니와 분위기가 몹시 흡사한, 같이 서 있으면 자매라고 말할 것 같은 건강미의 소유자.
‘저 분이, 훌트누나인가.’
퍼그 님과 인사를 마치고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님. 그러더니 한 손으로 자신을 들어올렸다.
“흐음. 가만 보면 엄마는 얼굴을 따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만나서 반갑다. 막내!”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바로 막내로 받아들여 주는 것도, 웃어 주는 것도 신기했다.
“뭐야. 뭐 이리 어벙벙하고 있어.”
“안. 안녕하세요. 범이라고 합니다. 누. 님”
“싹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벌써 긍병에 걸린 거야?”
자신을 보자마자, 아니 이 상황을 보자마자 뭐가 진행 되었는지 바로 알아낸다.
‘엄청 묘하네, 경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너보다 더한 괴물이 여기 또 있는 게지. 너만 해도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머? 아빠! 딸한테 괴물이 뭐예요! 괴물이!”
“사랑스러운 딸이기도 하지만, 괴물인 건 맞지! 진짜. 마누라 자식들은 하나같이 무서워 가지고.”
“그나저나 아빠? 아빠도 닿았어? 뭔가 묘하게 달라졌는데?”
“봐라! 말도 안했는데 한 번에 알아보는게 괴물이지 아니냐!”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대화 내용이었다. 뭐가 뭔지를 하나도 갈피를 못 잡았다.
“넌 뭔가 묘해졌다?”
“흥! 관심도 없는 아빠, 막내야 가자!”
대뜸 자신의 손을 잡고 끌고 가는 큰누나의 손길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묻고 싶은 게 많나 본데? 마음 껏 물어봐.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역시 엄마가 눈 하나는 기가 차단 말이지.”
“제가 동생인 게 한 번에 괜찮으신가요?”
“뭐 엄마 눈을 믿는 것도 있고, 직접 보니까 꽤 괜찮은 거 같고. 생각보다 오래 지켜봤다고?”
그렇게 큰누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는 길은 꽤 즐거웠다.
“그런데, 누나는 마스터이신 거예요?”
“아니. 난 기형아야. 아직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어. 넌 벌써 마스터라며? 진짜 부럽다.”
그런데 이상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서는 그저 경계에 있는 사람 같지만은 않았다.
“기형아요?”
“응. 마스터의 경지는 요원한데, 재능은 깨어났다고 해야 하나? 반대로 된 경우지. 드물긴 한데 있기는 있었다고 하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 치고는 내용이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네? 재능이 먼저 깨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초인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약간 달라. 내가 워낙 특이한 경우기도 하고. 그리고 깨어났다고 했지, 넘어섰다고는 안 했다.”
“뭔가. 진짜 복잡하네요. 어렵고.”
“그럼? 초인이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자기는 마스터다 이거지?”
“아니요. 그게 아니라.”
큰누나랑 이야기하는 시간은 정말 재미 있고 편했다. 마치 원래부터 알던 사람처럼.
*
“아따. 진짜 징한 새끼.”
“그건 퍼그 님이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요, 어떻게 한 번을 안 져주십니까?”
3일째가 되어서야 이제 진짜 육체에 익숙해졌다. 힘을 쏟는 것도 빼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뭔 놈의 바디 체인지를 한 건지 모르겠다만, 네 재능이 특출나긴 한갑다.”
“뭡니까.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기본재능한테 할 소리랍니까?”
그 말에 피식 웃는 퍼그 님이셨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고 와서 입을 여셨다.
“너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본 재능으로 태어나 정점에 이른 이를 알고 있냐.”
“네! 성하(聖下)님 아니신가요?”
“호오? 너도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하지만 그렇지 않단다. 비밀이긴 하지만 넌 알아도 되겠지.”
남이 내 얼굴을 보면서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퍼그 님의 말을 들을 때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였다.
“뭐 그래도 선장님을 보는 게 쉽지는 않지. 자식과 결혼하건, 1대대이거나 대대장이거나.”
“또 다른 방법은 없나요?”
“뭐. 전쟁을 선포한다? 이 정도려나. 아! 동전이 있으면 되기는 하는데 그게 아마 더 어려울 걸?”
그 말에 문득 생각나는 동전이 있었다. 자신이 자유섬으로 올 때 탔던 배의 선장님이 주신 동전.
“혹시, 이건가요?”
10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동전. 오래되어서 색이 바랄대로 바라고, 녹이 슨 동전.
혹시나 싶어서 가지고 있었다. 사실 믿지도 않았지만, 단장님의 이름을 말씀하시니 버리기도 뭐했다.
“야! 너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거냐? 도대체!”
“네? 섬에 올 때 선장님이 던져 주셨는데요? 이게 그렇게 귀한 건가요?”
“하. 참. 진짜 되는 놈은 엎어져도 금가락지를 얻는다더니. 참 내. 그냥 그거 들고, 1대대 지역으로 가서 보여 주면 알아서 해 줄 거다.”
심통이 난 표정이셨다. 그러면서 계속 내가 선장을 보려고 라고 하시며 구시렁거리셨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순간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부러워서 그런다 이 새끼야! 그 동전은 마누라한테 가서 들어라. 에라이. 간다!”
그러면서 툴툴거리며 사라지는 퍼그 님. 그를 보면서 손 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럼. 엄청 대단한 거고 말고. 세상에 세 개밖에 없는 거니까. 대단하지.”
“어. 어머니?”
항상 이렇듯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셨다를 잘 하시는 어머니였다. 자신조차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엄마라고 하라니까 참 말 안듣는구나.”
“어.엄마.”
“그래. 그래. 그나저나 그 동전, 어떤 선장님이 주셨다고 하셨지?”
“아. 네. 그 자유섬에 올 때 탔던.”
“아무래도 네 단장님이 부탁했나보구나. 참. 의외로 오지랖이란 말이지.”
“단장님이요?”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동전은 우리는 남은 자의 동전이라고 부른단다.”
“남은 자의 동전이요?”
“그래. 나중에 들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너도.”
그 말씀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복잡했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표정이 드러났다.
“나중에, 무엇인가 막히는 일이 있다면 그걸 들고 1대대의 권역으로 가 보렴.”
“네!”
“그럼 어서 들어가자.”
어머니의 등 뒤를 따르면서 만져지는 동전. 새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남은 자의 동전이라. 그 선장님은 그럼 도대체 누구였던 거지?’
“막내야! 빨리 와야지.”
“네!”
순간 든 의문을 잠시 접어 둔 채로,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오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엄마?”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보니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곧 가야하지 않니. 마지막 날이니 좀 솜씨 좀 부려 보았지.”
“엄마가 아니라!”
“도둑놈이! 엄마는 회만 떴자나!”
“그래서 나가고 싶다고?”
“아니. 엄마가 다 했지.”
“그럼. 엄마가 최고지!”
그러게 만담을 들으며 식탁에 앉자 집이 꽉 차는 분위기였다. 8명의 식구(食口)가 함께하는 저녁.
첫술을 뜨면서 생각했다. 이 시간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근데 근데. 막내야.”
“맞아. 너 남은 자의 동전 있다며.”
그 말에 반응하는 것은 역시나 카인이었다.
“남은 자의 동전? 그런 것도 있었어? 근데 그게 뭐야?”
“우리도 전설인 줄 알았어.”
“맞아.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프리 패스.”
“바다의 황제님을 만날 수 있다고? 거의 만나는 게 성하(聖下)보다 어렵다고 하는 분을?”
“그 분을 만나는 게 그렇게 어려워?”
“범이 너 할머니 앞에서 그랬다가.”
“겁나 혼나고 겁나 맞는다. 무조건 할머니라고 불러야 해”
린과 럼니의 말보다 카인의 설명이 더 귀에 꽂혔다.
“너는 진짜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어. 아니 너무 쉽게 초인을 만나서 그런가?”
초인인 아버지를 둔 주제에 저런 말을 하는 카인이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초인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내가 이상하게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건가?’
초인은 알려지기로 이 세계에 20명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중에서 벌써 7명이나 만났다.
그래서일까? 초인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이 되지 않았다.
“하튼! 그런 초인들 중에서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분이 골드 로즈 님이셔.”
이어지는 설명은 무슨 전설이나 신화를 말하는 내용이었다. 실제로도 전설처럼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 골드 로즈 님이시지. 얼마나 신비로우시면 살아서 전설이 되셨겠어!”
“그런 할머니를 너는!”
“프리 패스로 만날 수 있다는 거지.”
“근데, 엄마 아들이면 만날 수 있는거 아니에요?”
“아니야!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
“우리도 1년에 2번만 뵐 수 있어.”
“응? 그렇게 뵙기 힘들어?”
“실제로 자식들이나 대대장이 아니면 어렵지.”
“1대대에 있어도 뵙기 힘든 분이신걸? 돌아다니는 걸 좋아라 하셔서.”
“와. 범이는 그런 분을 언제든지 뵐 수 있는 거야? 그 동전이 엄청난 거 아니야?”
그 때 끼어든 것은 얌전히 밥을 먹고 있던 퍼그 님이었다.
“구런 선장을 맘돼로 보올수 있는”
“여보! 다 먹고 말 하라고 했죠!”
눈치를 보다가 다 삼키고 나서 다시 입을 여는 퍼그 님.
‘그때 봤던 넓은 등은, 내 환상이 아니었을까?’
“그런 선장님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내 마누라다 이거지!”
그러면서 크게 웃는 퍼그 님이 정말 얄미워 보였다.
‘내 엄만데, 부럽다.’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동전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밀려났다.
식사가 끝난 후에 어머니와 함께 나온 길. 어머니께서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막내야. 되도록 동전이 있다는 사실은 숨기고 다니거라.”
“네? 왜요?”
“은근히 노리는 사람이 많거든. 밖에도 안에도.”
그러면서 조금이지만 씁쓸하게 미소를 짓는 어머니.
“그러니 혼자만 알고 있거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친구들에게도 따로 말을 해 놓고.”
“네. 알겠어요. 엄마.”
“호호호. 엄청 어색한 거 아니? 정말. 이리 오렴.”
그러면서 안아 주는 어머니, 아니 엄마. 참 언제 안겨도 따스하기 그지없다.
“잘 다녀오렴. 다치지 말고. 그리고.”
엄마가 해 주시는 말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지금 품에 안긴 그 순간이 더 중요했다.
*
“잘 가!”
“막내 빨리 다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