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기절시킨 이들을 모두 정리하고 난 후, 로사와 함께 수하들에게 포로를 정리하라고 시키고 나서 자신은 카인과 량을 만나러 왔다.
“야.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아니. 뭐 그래도 잘 했으면서, 왜. 할 줄 알았어.”
량에게 한소리 더 하려고 하는 찰나, 너무 반갑게 해후를 맞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저씨들! 진짜 오랜만이에요! 여기에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오메! 도련님. 우리를 기억한다요? 쪼꼬말 때 뵈었는 거 같은디. 머리도 좋으셔라.”
“오랜만입니다. 카인 도련님. 장성하셨군요.”
카인이 저렇게 반가워하는 것은 유모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설마. 저 두 사람이 그 무적의 형제였냐? 그게 실존하는 사람이었다고?’
아카데미에 갓 입학했을 무렵, 카인이 노래를 부르던 두 사람이 있었다.
‘뭐였지? 워~어! 무적의 형제 워~어! 무적의 형제! 이런 거였는데. 혹시 저 두 사람은 알려나?’
새삼 자신이 어린아이로 돌아왔음을 알려 주던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그 노래였다.
“카인. 혹시 저 두 사람이 그 노래”
“아! 범아 인사해! 비븐 아저씨랑, 레조난 아저씨야!”
얼굴이 시뻘게진 것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엣헴 쾅! 엣헴 쉿! 뭐 이런 거였는데.’
“안녕하세요. 카인의 친구 범입니다.”
“백석(百席)에 위치 한 두 분을 직접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카인의 친구 량입니다.”
“도련님의 친구라서 그런 건지, 도련님이 운이 좋으신 것인지 모르지만, 두 분 모두 범상치 않은 분들이시군요.”
백석이라는 말에 카인도 비븐도, 레조난도 표정에 놀람이 떠오른다. 자신만 멍하니 있었다.
“백석이 뭐야? 난 왜 처음 듣는 거 같지?”
전생을 분명 살다 온 것은 자신인데, 한 번 더 사는 것은 자신인데, 자신이 가장 모르는 것이 많았다.
“세상에 다 너 같은 괴물만 있는건 아닌 거 알지?”
“괴물 아닌.”
“하여간. 익스퍼트가 대부분인 이 세계에서 사람들이 줄 세우기를 하겠어 안 하겠어?”
말을 끊고 이어 나가는 량이 조금 섭섭했다.
“하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모두 루머 아니었던가. 용병 사무소에서조차 등급이 나뉘는데 강함은 상대적이었다.
“서대륙에서 초인들과 신전의 평가를 통해서 만들어 낸 각 경지별 강함이 있어.”
“그런 게 있어? 왜 난 한 번도 못 들어 봤지?”
“권력을 쥔 사람들, 지위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알고 있는 정보일 뿐이니까?”
‘그렇담, 모르는 게 당연하네. 전생에선 지위는 무슨 밑바닥 인생이었으니.’
“그런데, 그 백석이라는 사람들은 자랑하고 다니지 않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한데, 백석이라는 표적이 되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대부분 소속이 있기도 하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나라면 겁나 자랑할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꼭 칭찬만은 아니니까. 자랑스럽기 만한 이름이 아니니까.”
“어째서? 수많은 익스퍼트 중에서도 100위에 들었다는 거 아니야?”
“백석에 들려면 10년, 아니 최소한 5년은 필요해. 그 사람이 익스퍼트에 오르고 나서.”
“근데?”
“그 사람들 중에서 마스터에 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백석에 있다는 뜻은 익스퍼트 중에서도 최 상위라는 건데 언제까지 백석에 있을 수 있는 걸까.”
“아!”
“그래서 오히려 백석에서 50위 밑에 있는 이들이 더 높게 평가받기도 해. 그리고 눈앞에 계신 두 분은 79위(位)와 65위(位).”
“하. 몇 위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저도. 뒷배가 꽤 괜찮아서요.”
듣고 있자니 괜히 배알이 꼴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
“있는 놈만 더 있게 되는 더러운 세상.”
“너도 있는 놈이다? 라니우스 님께서 말씀 안 해 주신 이유는, 넌 도저히 포함이 안 되는 거니까 그런 거지.”
량이의 말이 뼈를 때린다. 가문을, 재능을 타고난 이들처럼 자신은 회귀라는 것을 뒷배로 두었다.
‘사람이 있다가 없으면 그제야 안다고 하더니, 있을 때는 진짜 모르기는 하나 보네. 나도 그럴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여전히 남은 찌꺼기가 있었다. 열등감이라는. 넘어섰다고 하지만, 모두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나 보다.
‘량이나 카인 같은 애가 회귀를 하면 진짜. 와. 아닌가? 별론가?’
자신이야 독고다이로, 혈혈단신이었기에 회귀에 반동이 그리 없었지만, 인연이 많았던 이들이라면 삶 내내 반동이 심할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것도 복잡하겠네.’
“하튼. 이제 일하자. 카인 너도 따라와. 두 분도 함께 와 주시겠어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빛과 바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량을 따라 모두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어? 뭔데. 그새 나서기로 한 거야?”
상회의 총수 자리에 앉은 것은 카인이 아닌 량이었다. 카인과 이야기가 이미 된 듯했다.
‘량이?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고?’
언제나 전면에 서기를 거부하는 것이 량이었다. 마치 체스판에서 체스 말을 두는 사람처럼.
절대로 체스판에 등장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처럼 움직였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밋이 아니었다면, 재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이가 바로 량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판도를 바꾸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흐름을 주도하던 량.
그가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했다.
‘내가 할 일이 엄청 줄어들고 속도감이 있어지려나?’
“아. 좀. 짜증 나게 하는 것들이 많네. 나도 본거지 하나 있으면 좋기도 하고. 언제고 에밋네 있을 수도 없을 것 같고.”
‘설마 전생에서도 의도한 거였나? 그게?’
시디야 왕국 점령전이 발발되고 1년이 될 무렵 은밀히 돌던 소문이 생겼다.
‘연금의 탑에 천재가 있다.’
‘그가 원하는 데로 판이 움직인다.’
‘전쟁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하나의 손이 있다.’
‘블레어 군에는 세 머리가 있으니 하나는 로사 장군이요 하나는 재인 왕후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저 소문으로 취급했다. 모든 이들이 그랬다. 믿기에는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 존재가 량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 덕일까, 절묘한 정치적인 균형이 잡혔다. 에밋을 필두로 한 귀족의 세력. 재인과 스콜라스의 중심인 왕가의 세력 그리고 군을 잡은 로사.
‘생각해 보니까 또 소름이네. 진짜 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웬일로 골방 밖으로 튀어나올 생각을 했대? 인간들이 너무 금붕어로 보여서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다며.”
실제로 량이 아카데미에서 했던 말이었다. 너무 멍청해 보여서 말을 섞을 수가 없다나?
“뭐.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애들도 많더라고. 내가 너무 자만했지. 너네 덕이라고 치자.”
‘솔직하지 못하기는, 얼굴은 시뻘개져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퍽이나.’
“됐고! 지금 문제가 되는 게 두 마을의 지배자를 그대로 둘까 말까야. 너무 재고 있어.”
‘왜 문제가 되는 거지? 그냥 치웠을 텐데?’
장기짝을 귀하게 다루는 사람은 없다. 희생시키고 버린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이 전생에서 량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였다.
“카인.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안고 가야 할 것 같아?”
심지어 카인에게 물어보기까지 하는 모습이 의아스럽기만 하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었는지가 느껴진다.
‘진짜 량이도 많이 변했네.’
“한 명은 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데, 남은 한 명은 거의 돌아선 것 같아.”
“그럼 정리하는 건 로사에게 맡기자, 어차피 갈 길도 있으니. 설득하는 건 너가 해.”
몇 마디 서로 나누더니 카인은 해맑게 빠르게 올 것이라며 두 사람과 함께 나갔다.
“응? 로사는 어딜 가?”
어쩐지 일전에 표정이 그리 좋지만도 않더니 어딜 가서 그랬던 듯 하다.
지금은 프라우와 해후를 나누고 있었는데, 금세 또 떨어져야 해서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이제 로사도 슬슬 세력을 일구어야지. 그래야 편해.”
“여기서? 그럼 난? 왜 부른 거야.”
“어. 넌 나랑 갈 곳이 있어. 지금 수하들에게 가르친 게 그거지?”
“아? 응. 아직 많이 어설프지?”
“아니! 개판이야! 다들 너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면 어떻게!”
“아니. 개판이라고 할 것까지는”
“개판이지! 하나는 망둥이처럼 다니고 하나는 소심하고 하나는 지가 다 배운 줄 알고 하나는 얼타고 있고!”
“그걸 다 봤어?”
“당연하지! 내 새끼가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게 말이 돼? 절대! 용납할 수 없어. 특훈이야.”
“하아.”
“넌 몸으로 때워. 그게 제일 잘 하는 거니까.”
“어떻게 할 건데?”
“따라와.”
한참을 잔소리를 늘어놓던 량이 자신과 수하들을 데리고 간 곳은 강변이었다.
*
“대장. 좀 살려 주쇼. 살살하면 안되나유?”
눈앞에서 레핀이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이 보인다. 문제는 저것이 진심이라는 것.
“많이 약해졌네? 진짜 힘든가 보다?”
“대장이 몰라서 그렇수. 반병신으로 뻗어 있는데, 계속해서 따박따박 틀린 점을 듣고 이론을 듣고 진짜 귀에서 피가 나는 게 뭔지 알겠다니까유.”
“그럼. 잘 피해!”
“이 썅! 진짜 대장이고 나발이고!”
오러가 서린다. 레핀 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4명 모두의 무기에 오러가 서려 있다.
자신만이 몽둥이를 들고 있을 뿐, 모든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진심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진짜 량이가 있으니까 편하긴 편하네.’
자신은 그저 약한 부위를 찌르고 때리기만 하면 된다. 무자비하게, 구석구석을.
‘량이가 분명 잘근잘근 모든 부위를 골고루 때리는 게 더 좋다고 했지? 하! 수하를 이렇게 사랑하는 나라니.’
눈앞에서 들리는 곡소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강해지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1분 더 버텼네. 수고했어.”
모두가 여기저기 부러진 상태. 한 손에 한 명씩 들고 옆에 있는 통에 담궈 주었다.
“량아! 진짜 빠르게 느는 거 같은데? 대단하다!”
“몸과 머리로 동시에 배우니까.”
량의 손에는 곰방대가 들려 있었다. 오즈안 님이 들고 계시던 곰방대랑 몹시 비슷해서 물어보았더니.
“스승님이 만들어 주신 거야. 오즈안 님 것도 이것도 다.”
어쩌면 뒷배가 가장 강한 아이가 량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한 대답이었다.
옆을 둘러보니 모두 통에 머리만 나온 채로 담겨져 있었다. 참 보기 좋은 광경.
“근데, 네 말대로 진짜 효과가 빠른 거 같다. 자연 치유랬나?”
잘근잘근 섬세하게 모든 부위를 때리고 부러트리면 량이 만든 통 안으로 집어넣는다.
듣기로는 부러진 후에 붙으면 더 강하고 질겨진다고 했다. 통에는 자연 치유를 돕는 약초가 배합된 포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응. 그때 씰 사건이 있었을 때 한 번 연구해 봤지.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더라고. 약으로 팔 생각이야. 희석해서.”
“진짜 쟤네는 복도 한 바가지로 들이 부어서 받았네. 네 약에, 우리가 만든 비기에. 이걸 어디가서 경험하고 배울 수 있겠어.”
“그럼. 하나하나 내가 고르고 고른 사람들인데. 너 가고 나면 내가 먹을 거야.”
“그래. 너가 잘 먹고 잘 챙겨줘라.”
자신을 배려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전혀 밉게 들리지 않았다.
“대장. 살려줘요. 죽을 것 같아요. 여긴 지옥인가요.”
“프라우? 왜? 강해지는 게 느껴져서 좋다며. 완전히 변한 것 같던데. 슬슬 다 나아간다?”
“아니에요! 아직 뼈가 덜 붙은 것 같아요!”
“어? 그럼 아직 시간이 있나 보다. 범아 나 다녀올게!”
통이 각 조별로 모여 있었다. 모두가 통에 잠긴 채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량이 본 그대로의 약점, 고쳐야 할 점을 듣고 듣고 또 듣는다. 이론을 또 듣고 듣고 또 듣는다.
멍해지는 것 같으면 벼락같이 알아차리고 량이의 곰방대가 날아든다.
사지가 부러져서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맞는 수밖에는 없었다.
‘맞으면 전신이 찌릿하다고 했지? 오즈안 님한테 배운 건가?’
사지가 부러진 상태, 힘줄이 끊어진 상태에서 전신이 찌릿하면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범아! 얘네 다 나았어! 데리고가!”
“응! 프라우 빨리 와! 오래 버티면 되는 거야!”
죽일 듯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달려오는 프라우의 조가 기특하기 그지 없었다.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