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 조건을 맞추고 낮추고 하는데 꽤 걸렸지. 약식(略式)으로 때려 박아 주고 와서 다행이지.’
역시나 첫 제물은 소대원들이었고, 그 활용도와 능력이 생각 이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눈앞의 수하들은, 약식이 아닌 모든 것을 재현해 낼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량이도 열심히 나서서 이들을 찾은 거겠지만.’
적어도 마나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하지만, 군대가 아니라 기사단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면 눈앞에 있는 20명 남짓한 이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그걸 보고 싶어서 빨리 굴리고 싶은데, 할 일이 은근히 많단 말이지.’
거기에 더해 감사하게도 진법의 축을 맡은 인재가 떡하니 자신의 품으로 굴러떨어졌다.
‘마니에르라면, 어쩌면 한 바람의 축의 한해서는 엄청날지도?’
자신의 수하들을 눈에 하나하나 담으면서 다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
‘될 것 같은데. 일단 해봐야 알겠지.’
“좋아! 진체(眞體)를 알려 줄게. 하지만, 하나부터 시작이야.”
그 말에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무척이나 신나 보이는 얼굴들.
‘흠. 자기 스스로 지옥으로 들어가겠다는데, 뭐. 나도 스트레스 풀고 좋지 뭐.’
자신이 배운 바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맞으면서 기억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했다.
‘스승님께 많이도 배웠지.’
고문을 당한 이가 최고의 고문관이 된다고 했던가. 그런 면에서 자신은 사람을 찰지게 굴리는 법에 있어서 최고에게 사사 받았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자신은 따로 2층으로 돌아왔다.
다들 별관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최소한 남색은 달아야. 한 번에 확 퍼질 거라고 했지.”
안 그래도 카인이 열심히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하지만, 큰 임팩트를 위해서는 남색 수실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해 보라고 했는데,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보라 수실. [무의 탑]의 정점이 남색 수실인데 가장 큰 이유는, 업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스터라고 한들, 업적이 없다면 보라 수실을 달 수 없었다.
[무투의 탑]에서 남들이 감히 생각지 못 한 일을 이루고, 생각지 못한 공적을 세운 이들만이 받는 수실.
차원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수실이 바로 그 보라 수실이었다.
“업적도 좀 비슷하게 세운 것 같은데. 불스 님처럼은 못하겠지만.”
보라 수실을 단 사람들은 회랑에 얼굴의 그림과 함께 그 업적이 쓰여 있었다.
“진짜 불스 님다운 업적이지. 매일 전투를 쉬지 않고 170연승이 웬말이야 진짜.”
사실 업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도 가장 쉬운, 이미 이루어진 업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회랑에 있는 이들의 업적은 실로 괴물 같은 것들만 존재했다.
“하긴. 애초에 회랑을 갈 수 있는 사람이 적다고 하는데, 그림의 떡이지.”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 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오늘 숙면을 취하는 것이었다.
“내일이구나…”
참. 달이 지랄 맞게도 밝은 날이었다.
*
“오늘은! [무투의 탑]의 휴일! 단 하나의 대결을 제외하고 아무 경기도 열리지 않는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평소에도 많았지만, 오늘 따라 2층과 3층을 수많은 사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투의 탑]에서 언제 열릴지 모르는 빅 이벤트! 바로 무한투(無限鬪)가 이루어지는 날 입니다!”
환호성이 가득 2-3층을 채운다. 벽면에는 하나의 경기라고 하기에는 다양한 베팅이 올라와 있었다.
그 다양한 베팅이 지금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듯, 숫자가 빠르게 변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환호성과 섞이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울린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거대한 문이 열린다. 그리고 빛이 들어온다. 그때 펼쳐지는 광경.
“와.”
자신의 경기가 항상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오로지 자신의 경기만을 보기 위해서 온 이들. 마치 [무투의 탑]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온 것만 같았다.
환호성과 여러 소리가 섞여서 거대한 소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소음을 뚫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루키 이벤트 전승! 그 후로도 패배란 없다! 거기에 가장 빠른 속도로 남색 수실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이제는 루키라 부를 수 없는 강자!”
한 구절, 한 구절이 끝이 날 때마다 환호성이 들려온다.
“오늘! 무한투의 주인공이자! 도전자! 과연! 이번에도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통과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적어도 10번 이상을 승리해야 한다는 거지.’
무한투. 남색 수실로 향한 발걸음 중 하나.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것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규칙 중 하나였다.
‘가장 먼저 누가 나오려나.’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지속되는 무한투가 막을 열었다.
*
“벌써 12번의 승리를 거둔 도전자! 모든 것이 역대급인 도전자입니다!”
숨을 잠시 고를 시간은 이 시간 뿐이었다. 다음 상대가 올라오기 전까지의 시간.
‘근데, 중간마다 이상한 이들이 있었단 말이지. 카인에게 꼭 말해 줘야겠네.’
순수하게 자신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을 탈락하게 하려 시간을 끄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3명이 존재했다. 마치 그 철가면처럼 뭔가 이상한 이들.
균형이 깨지고 비틀린 존재 같은 이들. 분명 외형상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무언가 달랐다.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려나.’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탑의 특성상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 어려웠다.
대략적으로는 알지만, 확신하지 못하니 그것도 은연히 지쳤다.
“그럼! 다음 도전자는! 실로 놀라운 이들입니다. 이들이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전개!”
‘하. 어떤 새끼들이냐. 진짜 너무한다. 정말.’
자신이 남색 수실을 다는 것을 그리도 못마땅해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처음 알았다.
대전장으로 올라오는 이들이 하나같이 익스퍼트, 또는 익스퍼트가 포함된 팀.
거기에 더해서 자신은 익스퍼트와 마스터의 경계의 무위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바디 체인지로 인해서 좋아진 체력과 힘이 아니었다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익스퍼트인 상태로 진짜 이걸 통과한 사람이 있을까 싶네.’
“3년. 그사이 남색 수실을 달게 된 이들이 급격하게 줄어든 원인!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팀으로 완벽한 호흡을 보여 주는 이들!”
‘하. 역시는 역시군.’
“하나의 조건을 제외하고는, 팀으로 남색 수실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만족한 그 팀! 배당이 엉망인 그 팀! 팀 포디오!”
눈앞에 다가오는 이들이 보인다. 같은 검을 찬 4명으로 이루어진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와. 미쳤네. 뭔. 어?’
경계에 이른 남자. 그리고 익스퍼트인 세 사람. 괜히 사람들이 통과를 못한 것이 아니었다 싶었다.
‘근데. 뭐냐 이건?’
지금껏 대련해 오면서 3명이 이상한 이들이었다면. 이 4명은 모두가 이상했다.
‘하나는 뒤룩뒤룩하고, 하나는 균형이 완전 어긋났고, 하나는 쥐어짜 내고, 마지막 경계에 이른 놈은 터지기 전 같네?’
모두가 균형이 어긋났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못 느낀 거지? 내가 이상한 건가? 저렇게 티가 나는데?’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 기분을 느끼는 것은 오직 자신뿐인 듯 싶었다.
‘진짜. 량이랑 카인이랑 이야기 해 봐야겠는데? 포디오라고 했지.’
말도 없이 자세를 잡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타 다른 말이 없는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무투의 탑]에는 영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지.’
“그렇다면! 대망의 마지막 경기! 포디오와 범! 범과 포디오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여태껏 들려왔던 그 어떤 함성보다 더 커더란 함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사회자의 말만이 귀에 꽂혔다.
‘와! 드디어. 그래도 끝은 나는구나.’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조금 흥이 겨울 찰나에 네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닌 방위를 향해 가는 세 사람. 그리고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는 남자.
‘확실히 다르다 이건가.’
거리를 가늠하고, 다가오는 이에게 달려가려는 찰나. 검이 늘어났다.
“어?”
가까스로 피해 냈다. 조금이라도 느렸다면, 눈이 찔렸을 것이다.
‘아티팩트? 재능? 뭐지?’
머릿속으로는 수없는 생각을 하지만, 몸은 반응한다. 고개를 틀어 피한 그대로 따라 들어간다.
그때, 왼쪽으로 가던 여자가 검을 찌른다. 호쾌하고 간단한 기본에 충실한 찌르기.
‘얘네. 뭐지?’
사정없이 찌르고 베는 곳이 모두 상대를 죽이기 위한 곳. 서슴없이 베고 찔러 들어온다.
생각을 하면서 찔러 들어온 검을 위로 쳐내는 순간, 날아간다. 너무 가볍게.
‘재능도 다들 하나같이 뛰어나고. 이상한데.’
전투가 지속될수록 의문은 더욱 짙어져 같다. 네 사람의 궁합이 말도 안 되게 좋았고 움직임이 유기적이었다.
검이 늘어나는 경계에 든 익스퍼트, 갑자기 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검의 환영이 나타나는 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게가 가벼운 이.
마치 누가 일부러 모은 듯한 재능들과 철저하게 살인을 위해서 훈련받은 움직임.
‘이건, 용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 생각은 전투가 이어질수록 의혹에서 확신이 어 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즐거워 미쳐야 할 상황이었다. 검이 길어지고, 늘어나고, 사라지고, 날아다닌다.
한 명이 당하려 하면 두 명이 빈틈을 찌른다. 셋이 다가왔다가 한 명이 뒤를 친다.
유기적이고 치명적인 움직임. 그 속에서 제한된 상태로 전투를 하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느낌. 그 느낌이, 서늘함이 좋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싫단 말이지. 박멸해야 하는, 너무 보고 싶지 않은 이 느낌이 뭘까.’
전력을 부딪히다 보면 그 부딪힌 사람끼리 유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순수한 호의의던 아니면 미운 정이던.
그런데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쌓이는 것은 오로지 불쾌한 감정. 마치 썩어 버린 시체를 보는 듯한 이 감정.
‘후으. 은근히 어려운데? 이기려면 어디 하나는 포기해야겠네.’
이미 탑은 한계까지 열고 있는 상황. 그런데도 호각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발끝에 힘을 모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지?’
퍼그 님에게 배운 기술. [바람의 탑] 덕분에 따라 할 수 있게 된 기술. 그대로 발을 구른다.
“쿠왕!”
거대한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바람이 뭉쳐 흐른다. 그 바람에 네 사람이 뒤로 물러선다.
자신의 주변으로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 퍼그 님이 참 배 아파 하는 것이 눈에 선했다.
‘바다에서만 쓸 수 있다고 하셨지. 이름도 멋있단 말이지. 용오름이라니.’
수 초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작은 폭풍이 주변을 휘몰아치자 자신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졌다.
‘후. 이건 진짜 싫은데.’
그리고 곧장 달려 나갔다. 경계에 이른 익스퍼트에게 가장 먼저 달려 간다.
‘우선, 저 검 길어지는 놈부터.’
아직 당황해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대로 달려가 다리를 벤다. 그리고 느껴지는 감각.
자신의 등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이 여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피하지 않는다.
‘뭐. 요즘에야 상처가 없는 거지, 빨리 끝내려면 이 수밖에 없지. 량이 나쁜 새끼.’
자신의 물러나지 않는 모습에 당황해 한다. 당연히 피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대로 다리를 베었다.
‘[무투의 탑]에서야 항상 피하거나 되받아쳤겠지. 익숙해진 게 눈에 보인다 이 시키들아.’
그대로 다리가 한쪽이 베어지는 것이 확인되자마자 등에 화끈한 통증이 인다.
무시하고 바로 옆으로 방향을 튼다. 검이 순간, 순간 사라져 자신을 당황하게 만든 놈.
‘저 놈이 제일 쉽지.’
눈에 보이지 않고, 기척이 연해진다고 하지만, 검은 결국 바람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 느낌이 너무 명확하게 자신에게 느껴진다. 순식간에 검이 사라지고 바람결이 베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목을 향해 베어 오는 검을 그대로 튕겨 내며 발로 명치를 가격한다. 그리고 그대로 뒤를 찌른다.
“후. 후.”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진다. 등에서 그리고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뒤를 보니 배가 뚫린 채로 쓰러져 있는 여자가 보인다. 숨을 잠시 고르며 남은 둘을 본다.
‘남은 건 둘. 근데 생각보다 바로 가도 되겠는데?’
이런 적이 전혀 없었던 듯, 놀란 눈으로 쓰러진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이들.
더 시간을 주지 않고, 그대로 달려들어 간다. 그 와중에서 합을 맞추는 이들에게 감탄이 나온다.
‘이 정도면, 진짜 노력도 많이 한 건데, 왜 이렇게 얘네는 싫지?’
옆구리 하나를 내주고 그대로 도를 휘두른다. 옆구리에 박힌 검을 빼지 못한 채로 팔이 잘린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명.
“괴. 괴물이냐! 이게 무슨 전투라고!”
그동안 조용히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소리 지른다. 괴물은 무슨.
“왜? 빨리 끝내고 좋잖아. 어차피 사제님도 계신데. 빨리 끝내자.”
그리고 곧장 겁에 질린,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을 보는 듯한 그 남은 한 명을 깔끔하게 기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