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베팅의 배당이 알려 주듯이, 수월하게 이겨 나갈 수 있었다. 고작해야 5명이지만, 모두가 익스퍼트.
그럼에도 오히려 10연전의 그 순간보다 수월했고 더욱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그리 많지도 않았던 게 컸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내일의 경기였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리가 보인다.
“여! 대장. 장난 아닌데? 무서워서 함부로도 못하겠어.”
갑자기 구수한 섬의 말투가 사라지고 정중한, 마치 귀족들이 사용하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는 이.
놀랍게도 그 사람이 레핀이었다. 가장 시끄럽고 사투리가 심한 레핀이 변했다.
“누구?”
자신의 놀란 표정에 주변 단원들이 모두 웃는다. 레핀을 제외하고. 그리고 입을 여는 이는 다름 아닌 마니에르였다.
“퍼그 님에게 뒤지게 맞고 정신을 차렸어요! 퍼그 님께서 적어도 자기 눈에 차기 전에는 사투리 쓰지 말라고 하셔서요!”
그 말에 단원들이 모두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다. 그 짧은 시간에 완벽히도 녹아든 마니에르였다.
‘와. 저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이라나. 훈련이 빡셌나?’
그런 것 치고도 너무 한 몸처럼 녹아든 마니에르의 모습이 놀라우면서도 보기기 좋다.
“아따! 어차피 여기서는 퍼그 님도 없는디.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겄네.”
그렇게 구수한 사투리가 나오는 순간 휘둘러지는 손길이 있었다.
“아! 뭐시라요!”
화를 내며 뒤돌아 보는 레핀에게 묘하게 웃는 듯한 무표정의 일리야가 보인다.
“구문 님이 말씀하셨다. 때리라고.”
유독 일리야에게 약한 레핀이었다. 그를 또 어찌 알고 구문 님께서 말씀하셨나 보다.
‘하긴, 구문 님께서라면 일리야 레핀 저항을 알고 계시겠네. 그들이 저 둘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과거 이야기, 아니 처절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둘이었다.
자신의 수하들은 각자의 이유로 강해지고 싶어서 찾아온 이들이었다.
‘그걸 나를 통해서 이루라고 설득한 량이 대단한 거지만, 그걸 찾아낸 카인도.’
그중에서도 가장 열망이 강한 이를 뽑으라면 저 둘이었다. 레핀과 일리야.
항구 마을에서 자라난 두 사람은 꽤 재능이 있다고 마을에서 소문이 날 정도.
하지만, 그 때문인지 마을의 숨겨진 미인이던 레핀의 어머니는 그 마을의 지배자 눈에 띄었고 삶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레핀은 그 마을의 지배자 아들의 열등감을 촉발했다는 죄로 삶이 비참해지기 시작했고.
작은 항구 마을. 그렇기에 누구도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 그 마을의 황제로 군림하던 지배자였다.
해적들에게는 절대 소문이 나지 못 하도록 통제했으며, 그들 앞에서는 넙죽 엎드린 자세를 유지.
전형적인 강약약강(强弱弱强)의 모습이지만, 언제나 치밀했다.
그렇게 그 작고 소박했던 마을은 점차 조금씩 지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가장 처절하다고 했던가,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은 소리 없는 지옥이 되었다.
그 비참한 삶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서 도망을 친 두 사람은 5년 후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여전히 마을은 평화로웠고 조용했지만, 그 지옥이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더한 지옥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장성한 청년이 된 그 마을의 지배자인 이의 아들은 지배자보다 더 악랄했고 탐욕스러웠다.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만든 항구 마을. 그런 지옥의 장소를 반란으로 뒤집어엎은 것이 두 사람이었다.
결국, 그 지역을 관리하던 해적들도 목이 날아갔고 그 마을의 일은 서섬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피의 복수라는 이름으로 말이지. 두 사람의 이름은 빠지고.’
해적으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당시의 그들에게는 별로 원하지 않던 바였기에 떠돌았다고 한다.
‘그게 고작해야 반년도 안된 이야기지. 여전히 떠들썩하기도 하고.’
지금은 투닥대면서, 일리야도 점차 웃음을 찾아가고 레핀도 안정되어 가고 있지만, 아직 상처가 다 아문 것은 아니었다.
“대장. 대장! 약속이요. 약속!”
뿌듯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던 차에, 옆에서 솟아나는 머리 통이 보인다.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니에르.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단원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그중 대표로 나선 것은 역시나 레핀이었다. 마치 엄청난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을 보는 듯이.
“대장! 치사하게 설마. 막내한테만 알려 주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이게 배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다 필요한 만큼만 알면 되는데, 이미 알려 줬잖아?”
“진체(眞體)를 배우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죠!”
“아니, 너희한테 맞춰서 가르쳐 줬다니까? 마니에르도 그렇게 가르쳐줄 건데?”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마니에르였다. 마치 배신당한 여자의 표정.
“대장! 약속이 다르잖아요!”
“응? 아니. 분명히 약속했잖아. 변화를 가르쳐 주겠다고, 난 내 무예를 가르쳐 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이노무 시키들이 날로 먹으려고’
[바람의 탑]에 형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틀은 있었다. 그리고 그 틀을 개량한 것이 수하들에게 알려준 것들.
진체를 모두 가르쳐 준 것은 오로지 로사뿐이었다. 그걸 이해한 것도 로사뿐이었다.
“그리고 알려 준다고 다 배워 갈 자신은 있고?”
못 가르쳐 줄 것만도 아니었다. 다들 자신의 수하들이기도 했고, 그래서 애초에 가르쳐 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체를 모두 배운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에게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에 안 가르쳐 준 것이다.
‘사실, 다 가르쳐 줄 수도 없지. 어떻게 모든 바람을 다루겠어. 하나도 될까 말까 한데.’
자신은 [바람의 탑]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로사조차 두 개의 바람을 다루는 것이 한계였다.
‘그것도 그나마 오러 서킷이 바람을 중심으로 만든 거라 가능한 거지.’
그럼에도 그들에게 가르쳐 준 이유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량이는 해냈단 말이지.’
자신은 잊고 있던 부탁을 량이 보여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진정한 괴물은 여기 있다 싶었다.
*
큰 사건이 있고 난 뒤에, 훈련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되었다. 슬슬 마르쿠스를 준비시키기도 했고.
“오늘은 여기서 끝! 다들 들어가요. 저는 오늘 량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소대원들과 훈련을 하고 돌아온 날. 자신을 부른다는 량이의 전갈을 받았다.
“또 뭔가 시킬 게 있나?”
자연스럽게 향하는 방향은, 불스 용병단의 연구소. 그 지하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참. 어떻게 알아듣는 건지, 이래저래 신기하다니까.”
몬스터와 마수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연구소. 그곳에 량이는 살다시피 했다.
분명 말을 하는 것을 못 보았는데 어떻게 의사소통이 되는지, 금세 친해진 두 사람이 보인다.
“범아! 소장님. 전 그럼 오늘은 나갈게요. 내일 뵈어요!”
해맑게 손을 흔들고 나오는 량이의 모습을 보니, 소장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에 보였다.
‘마치 파울로 님께 하는 것 같단 말이지.’
“따라와! 보여 줄게 있어. 물어볼 것도 있고. 역시 난 천잰가 봐!”
“오늘 따라 엄청 기분이 좋아 보이네? 무슨 일이야?”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한데, 거의 다 완성한 거 같아! 네 도움이 필요해!”
자신을 데리고 간 곳은 저택이 아니었다. 저택의 조금 떨어진 곳의 별관.
“응? 너가 왜 여기에 살아? 여긴 손님들 오시면 내어주는 별관 중 하나잖아?”
“응?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에서 왜 살아. 내 방은 당연히 저택에 있지!”
“근데?”
“아. 데마르 님이 연구소를 하나 지어 주셨어. 내가 소장님께 매일 가는 걸 보고 나도 하나 필요하냐고 하시면서.”
‘하. 데마르 님. 진짜 열성적이시구나. 량이를 아직도 포기를 못 하셨네.’
살짝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은 소대장인데도 이런 연구소는 따로 없었다.
‘뭐. 있어도 쓸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투덜거림과 함께 별관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단 한순간에 탄성이 나오게 만드는 방의 광경.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지저분하지? 최근에 좀 돌파구를 찾아서 연구한다고 신경을 못 썻어.”
“조금? 이게 조금이라고?”
도대체 카인과 어떻게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각 크기와 종류에 맞추어서 자리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가 더러운 건데? 그 조금이라는 건?”
지금 당장 햐얀 천을 가지고 와서 주변을 닦아 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풍경이 더럽다니.
“하튼. 그런 게 있어. 일루 와서 이것 좀 봐 봐.”
몇몇 선을 건드리자 한쪽 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양옆으로 펼쳐진다.
벽에는 여러 가지 그림과 함께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동선과 방향이 그려져 있었다.
‘어? 뭐지?’
처음 보는 그림인데 익숙함이 확 다가온다. 옆의 량이가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
‘이거 설마? 와. 씨. 미쳤는데? 저게 저런 의미였나?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어느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 잊혀졌다.
벽의 그림이 눈에 화인처럼 박힌다. 머릿 속에서는 그 움직임이 재생된다.
자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 시각,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아!”
정신을 차리니, [바람의 탑]이 변화한 것이 느껴진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자유롭게.
“깨달음은 좋으셨나.”
등골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차가운 말투. 고개를 돌려 보니 얼음장 같은 표정의 량이 보인다.
“량아! 넌 대단해! 천재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량이의 표정이 살벌했다. 눈을 따라가 보니 각이 잡혀있던 것들이 여기저기 떨어지고 헤집어져 있었다.
“미. 미안?”
“치워.”
“응!”
그리고 이내 치우려고 물건을 하나하나 들었다.
“아니야! 거기 아니야! 그건 아니고! 아! 진짜! 가만히 있어!”
결국 량이가 다 치웠다. 입을 움직여서 자신도 움직이긴 했지만, 올려 두어도 그 위치를 조금씩 손보는 건 결국 량이가 다했다.
“후. 진짜. 카인한테 부탁해야 하나.”
“다 했어!”
“응. 다 했지. 내가. 너가 아니라.”
“아니. 너가 너무 천재라서 그래. 어떻게 저렇게 해석을 할 수 있는 거야?”
“뭐. 네 설명도 나쁘지 않았던 덕이라고 하자. 그리고 진짜 천재는 안드로니쿠스 님이지.”
화난 가운데서도 광대가 씰룩거리는 량이의 모습이 귀엽다. 유독 내 칭찬에 약한 량이.
“그래서 어땠는데? 무슨 생각을 해서 그런 거야?”
량이에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벽에 열심히 수정을 했고 그렇게 이야기가 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해가 진 듯, 햇빛이 더는 들어오지 않는다.
“역시! 살짝 미비한 점이 있는 것 같더라니. 직접 해 봐야 알겠지만, 우선은 된 것 같아.”
그림을 여기저기 손보던 량이 이내 손을 내려놓고 말을 한다.
단순히 움직인다기엔, 그 움직임이 너무 복잡했다. 용병단에 와서 배운 어떤 진형보다 복잡한 움직임.
‘과연 저걸 다 숙지할 수 있으려나? 머리로 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근데, 무슨 그림이야? 움직이는 걸로 봐서 무슨 진형 같기는 한데, 좀 특이한데.”
“그. 예전에 내가 했던 부탁 기억나?”
그 말에 웃음이 나온다. 세상에 그렇게 조심스러운 량이는 처음 보았다.
“[바람의 탑]을 연구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거? 그런 부탁을 어떻게 잊냐!”
그래도 량에게 받은 것도 많고, 애초에 스승님께 허락도 받아서 기탄없이 알려 주었다.
“내가 계속해 보려고 하다 안 된건데. 이번에 너가 가져온 진법(陣法)의 축이 되던 마정석 알지?”
“응. 진짜 괴랄했지.”
“그걸 이래저래 좀 연구해 보니까.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더라고. 그래서 바꿨더니. 왈라!”
“왈라가 뭔 왈란데! 좀 평범한 사람도 알아듣게 해주면 안되냐.”
“아직은, 하나뿐이긴 한데. [바람의 탑]에서 노투스를 진법으로 만들었어! 좀 조건이 까다롭긴 한데, 가능하지 싶어.”
“뭐?!”
량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었고 알아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신비였다.
그럼 그 신비를 다르게 해석해서 재현한 저 앞에 아이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러니까. 여길 보면…”
그렇게 강의가 시작되었고. 해가 지고 달이 떠도 그 강의는 끝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