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했다. 싸늘함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순식간에 달라지는 마니에르의 분위기. 빛이 나는 붉은 눈동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과도 같았다.
“그런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수호 용병단 출신이니.”
“그러니 이해가 안 가는 거다! 아무리 썅년이라고 하더라도 수호 용병단을 건드는 미친 짓을 하지는 못할 터인데.”
마니에르의 말을 들으니 실소가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통일된 제국을 이루고 있는 동대륙 한 제국의 황자조차 수호 용병단을 저리 존중하는데.’
그도 없이 수호용병단을 무시하고 있던 서대륙의 귀족들이 생각이 난다.
“뭐가 웃기는 것이냐!”
“아니, 의외로 정확하게 보고 있다 싶어서요.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는 부분이 뭔가요?”
“내가 황자라는 사실을 누구에게 들은 것이냐! 무슨 의도로 그것을 밝힌 것이지?”
‘생각보다 훨씬 상황 판단도 빠르고. 역시 괜히 황자가 아니라는 것인가.’
“버려진 황자. 아니 스스로를 버린 황자. 세기의 무재를 타고났지만 이름의 그대로 걷잡을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을 타고난 자.”
말이 이어질수록 마니에르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보인다.
“천성적인 정복 군주. 타고난 전쟁의 왕. 철혈의 이명을 이을 것이라 기대받은 황자. 그렇기에 형을 위해 그림자로 사라진 황자.”
말이 이어질수록 당황하고 흥분한 얼굴이 점차 옅어져 가고 경악이 그 자리를 채운다.
“참. 왠만한 귀족 가문만 되어도 형제의 난은 당연한데, 솔직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정체가! 정체가 뭐냐. [마타 하리]냐 [암]이냐!”
‘와. 진짜 왜 그렇게 기대가 많았는지도 알 것 같은데, 참 대단하네.’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현 상황을 파악하고, 돌파하려는 것이 신기했다.
“흠. 그보다 이걸 밝힌 이유를 말 해드려야겠지요? 저는 마니에르 뿐만 아니라 진나도 포함한 그대로의 사람을 원해서 밝히는 거예요.”
의아한 표정이 지어진다. 순간적으로 몇 번이나 변화하는 표정인지 모르겠다.
점차 붉은빛이 넘실거리던 눈이 차차 차분해지며 다시금 차분한 눈빛 그대로로 변한다.
“하. 진짜 대단하네. 설마 했는데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상황 판단이 빠른 건가. 모르겠네.’
갑자기 자신을 처음 보러 온 마니에르가 알게 된 상황이 조금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 정도까지 알아볼 정도였으면, 욕심나지 않으셨어요? 이래 보여도 황자인데.”
“응? 뭐가 욕심이 나야 하는데?”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돈, 권력, 여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그보다 우선인 것이 있을 뿐이었고 그를 말해 주고 싶었다.
“하! 대단하시네요, 역시, 역시!”
다시 위험한 빛이 눈동자에 감돌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왜 내 주변에는 하나같이 나사가 하나씩 풀린 인간들만 모이는 거지?’
그중 자신이 가장 이상한 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범이었다.
“그래서. 범 님은 지금 뭘 꾸미고 계신 건데요?”
“음. 소소하게 서도(西島) 정복? 점령?”
“헤에~ 위험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래 봐야 뭐, 평생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지배권을 인정받는 거일 뿐인데 문제가 있을까요?”
“그런 의미가 아닌 거 같은데, 흠 재밌을 것 같은데.”
“황자님.”
줄곧 마니에르의 옆에 서 있던, 붕대를 칭칭 감은 듯한 모자를 쓰고 얼굴도 가리고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왜?”
‘와. 저게 황자로서의 마니에르의 모습인가.’
웃으며 반문하지만, 오롯이 자신이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한 강한 의지가 서린 눈.
그것을 보고 아마 동대륙의 많은 이들이 기대를, 그리고 그만큼의 걱정을 했을 것이다.
동대륙에서 철혈(鐵血)이라는 이명은 특별하게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이가 밝혀진 것은 전생에 로사가 철혈의 장군이라는 이명을 받은 것이 서대륙에 알려지게 되었다.
갑자기 동대륙에서 사절단 같은 무사단이 찾아온 것이었다.
‘감히 철혈의 이명을 짊어질 수 있는가 시험하러 왔다고 했던가. 그리고 그때 왔다는 이가. 설마?’
그때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천년 왕국이 무너지던 당시 동대륙에서도 이를 보고 반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란을 일소(一掃 : 모조리 쓸어버림)하고 다시는 반란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지도 못하게 만든 대제가 나타났다.
그 대제의 이명이 바로 철혈의 대제. 그리하여 철혈이라는 이명은 동대륙에서는 가장 빛나는 이명으로 여기어졌다.
‘분명, 전생에서 그 무사단의 수장이 로사를 향해서 평하기를 ‘대제가 살아서 보았다면 거울을 보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였기 때문.’
그렇기에 지금 마니에르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평화로운 시기. 전쟁이 아닌 통치가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성장할수록 철혈의 대제의 그림자를 짙게 보여 주는 황자가 바로 마니에르였다.
2황자였음에도, 수 많은 무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앞다투어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연 자취를 감추어 사라졌다고 했는데,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겠지.’
15세가 되어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하는 그 황자. 그 황자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형을 끔찍하게도 생각한다고 하는데, 진짜 상상이 안 간다. 안 가.’
“범 님! 그럼 저를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근데. 진짜 수하로 들어올 수 있겠어요? 황자님이신데?”
“에이.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범 님에게 배울 수 있다면 뭐든!”
‘은근 여우 같은 황자님이시네, 나쁘지는 않지만.’
바보 같은 것보다야 여우가 훨씬 낫다. 그리고 그 여우를 통제할 수 있다면 더욱이나.
무려 황자다. 아무리 숨어들었다고 해도 그 능력이 어딜 가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서 조사를 충분히 했을 것이고 자신의 꿈이 이 세계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리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량이의 판단이었다.
“황자라고 해도 특별 대우나 존칭도,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지금까지 황도(皇都)에서 나온 뒤에 단 한 번도 황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그림자들이.”
“아. 이들은 형과의 연락 수단이자, 황자로서 당연한 감시랄까요?”
그 말에 황급히 무릎을 꿇는 이들이 보였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감히 황송스러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시하는 이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정도란 말이지.’
“그래도 별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는 절대 안 될 거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는 마니에르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한가득 서려 있다.
“흠.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하나밖에 안 남았네요.”
위치가 적혀 있는 종이와 함께 말을 이어 간다.
“제 수하들이 있는 곳이에요. 거기서 인정을 받으세요.”
“여긴. 설마?”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뭐. 마니에르 님이 원하는 1대대는.”
“3대대! 퍼그 님의! 그리고 로즈 님의 첫 번째 따님이 계신 그곳!”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하는 마니에르. 그 눈빛에 이게 정말이냐는 의미와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같이 서린다.
“구문 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훈련까지! 같이 생활을 할 수 있다니!”
방금 보았던 여우같은 모습과 카리스마가 넘치던 모습의 황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로즈 님의 첫째 따님으로, 홀로 배 한 척을 몰고 나가 시디야왕국의 함대를 수장시킨 전설!”
구문 님의 일대기가 눈앞에서 펼처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다움의 사랑 고백으로 퍼그 님의 곁에 서기까지 단연 해적들의 꽃!”
‘해적을 저리도 동경하는 걸까.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는 영락없이 해적을 좋아하는 이의 모습이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좋아요! 언제 출발하죠? 아니, 지금 갈게요!”
음. 그냥 영락없는 팬일지도 모르겠다.
폭풍 같이 신나하던 마니에르를 보내고 나서야 평온한 정적이 흐른다.
“하. 진짜 정신이 없네. 그러면 이제 해야 할 일이.”
마니에르를 보내고 나서 카인과 량에게 받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다시 되새기기 시작했다.
*
“와. 이런 배는 우리 제국에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말이지. 군(軍)이 아니고서야.”
심지어 배는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운전하는 것처럼.
“황자님.”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그림자는 제 모습을 드러냈다.
“왜?”
범의 앞에서 보이던 그 서글서글하던 이는 사라졌다.
“너무 숙이고 들어가시는 것이 아닌지. 감히 제가 물어도 될런지요.”
“진짜. 그림자라고 자기가 진짜 그림자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왜 그래. 서운해지려고 한다.”
그 말에 얼굴을 두르고 있던 천을 걷어 내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이네, 맨날 두건이나 두르고 있고. 그러지 말라니까.”
검은색 머리의 검은색 눈동자. 고요하기 그지없는 그 눈동자에 감정이 깃들어 있다.
긴 머리에 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온 세상이 고요해지는 그런 기분이 든다. 너무 평안한 그런 세상이다.
“아직. 아직은 아닙니다.”
그 말에 얼굴로 향하던 마니에르의 손이 멈춘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쉰다.
“진짜 그 썅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팔과 다리를 자르고 혀를 자른 뒤에 그저 두면 될까.”
그 말을 하는 마니에르의 눈이 번들거리는 것이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태자께서 총애를 거두시지 않은 이상, 황자님께서 안 그러실 것 아닙니까.”
“그도 맞지. 참 우리 형도 너무 마음이 물러서 그래.”
“그나저나. 범이라는 소년에게 너무 숙이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자님께서.”
“헤. 고마워. 역시 날 순수히 생각 해 주는 건 아직 익바밖에 없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말에 제 빛을 찾는다. 다시금 가라앉는다.
“흠. 범이라는 소년. 이제는 대장이 되는 건가?”
마치 자기는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한 태도.
“평번한 인물이 아니란 걸. 너도 알잖아?”
“그렇다 한들 감히 황자님 앞에서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너도 지내다 보면 알 거야. 생각 이상으로 괴물일지도?”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싣고 배는 목적지를 향해서 천천히 나아갔다.
*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카인인가? 귀가 간지럽네”
서류를 마저 다 읽을 때 쯤, 귀가 간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툭툭 털고 자리를 일어선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
“혜성같이 등장한 루키! 10연승을 이루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드디어 오늘! 남색 수실에 도전합니다!”
2주. 남색 수실에 도전하는 자격을 갖추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길었다.
‘최단 기간이니 하지만, 결국 생각보다 오래 걸렸단 말이지. 그래도 다행이다.’
루키 이벤트에서 10연 전승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바로 파란 수실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남색 수실에 도전하는 첫 관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하들도 보고 있는데, 깔끔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수하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색 머리의 마니에르는 당당하게, 누구보다 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짜 특이한 놈이라니까. 들어보니까 구문 님이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하던데.’
우선 상념을 지우고 지금 상대해야 할 상대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 해 본다.
남색 수실은 [무투의 탑]의 정점 중 하나라는 것을 뜻하기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첫 과제부터가 괴랄했는데, 파란 수실이 되어 이긴 모든 상대와의 결전이 그것이었다.
‘진짜 다행이지. 연전으로 이겨 와서 그나마 상대해야 하는 수가 적다는 것이.’
비록 사제의 치유와 축복을 매 경기가 끝나고 받는다지만, 정신적인 압박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야 비로소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남색 수실이었다.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서 베팅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