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자신에게 달려오는 갈색 머리를 한 미소년. 다름 아닌 마니에르였다.
‘얜 내가 있는 곳은 또 어떻게 알았… 설마?’
[무투의 탑]에는 온갖 것을 판매하는데, 소소한 정보들도 판매의 대상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렇게 바로 고개를 숙이니 미워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뭔가 열망 어린 눈동자를 이미 보아 버려서 더욱 그러했다.
‘어쩌면. 더 잘된 걸 수도. 량이한테 부탁을 안 해도 되겠는걸?’
“흠. 잠시 따라오시겠어요? 이리로 오세요.”
외부인이 만나러 올 때를 대비해서, 자신들을 위해서 언제나 별관 하나를 비워 놓는다. 마니에르를 그리로 안내한다.
‘친구 잘 둬서 진짜 여러모로 편하기는 하네.’
“별관이라니! 역시 범 님께서는 범상치 않은 분이셨군요!”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자 들어오세요.”
간단한 과일이 준비되어 있는 별관의 응접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를 끓여서 들여온다. 그리고 사용인이 나가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하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인가요?”
잠시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이, 일전의 그 미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달려들던 모습과는 상반된다.
‘진짜 잘생기긴, 잘생겼.’
“저를 수하로 받아 주세요!”
“네?”
‘아니. 생각하고 있었긴 한데, 저쪽에서 먼저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사실 마니에르 정도면 어느 곳이든지 원하는 인재였다. 누가 봐도 재능이 특별하고, 경지 또한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명 사회자가 해적 1대대가 아니라면 안 들어가겠다고 하던 것 같은데.’
“갑자기 이렇게 말씀입니까? 1대대가 아니라면 안 들어가신다고 들었는데요.”
월척이 알아서 미끼를 물고 잡아달라고 하는 것이었지만, 한 템포 쉬어 가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덥석 물었을 테지만.’
전생과 다르게 주변에 좋은 인연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생각을 그만하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해왔다.
전생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도 실패가 너무 많았는데, 이번 생은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와주는 손길이 많았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사실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서 그렇지.’
거기에 빠르게 성장하는 무위 덕에 종국에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미친 거였어.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쯧.’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형을 발견했습니다!!”
소름이 돋는다. 사랑에 빠진 눈이 확실했다. 비록 자신이 이번 생에 여자를 멀리한다고 해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네?”
하지만, 자신의 놀란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다른 무언가를 보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범 님의 변화막측한 도의 움직임. 유려한 몸놀림. 제가 정말 이상으로 삼고 있는 목표입니다. 익스퍼트라고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과 대응. 반했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순식간에 쏟아 낸 말. 다행히 자신에게 반한 것은 아닌 듯 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조금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인 듯 싶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굳었다가 이내 풀어진다.
“네!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신뢰가 갑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무투에 탑에 머물고 있습니다!”
정말 어지간히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허리가 부러질 듯 숙이고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도 나섰다.
다시 본관의 2층으로 향한다. 어차피 연락을 할 것이었지만, 이제는 필히 해야 할 이유가 늘었다.
2층에 있는 2층 침대를 조작하자 익숙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공간 중앙에 있는 수정을 조작한다.
그러자 몇 번 점멸(點滅)하더니 카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범이야!!”
‘얘는 맨날 이 수정 앞에만 앉았나. 무슨 부르기만 하면 바로 받냐.’
“넌. 부르기만 하면 바로 받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무투의 탑]은 어땠어?! 듣자 하니 전승했다며!! 역시 역시 대단해”
전승을 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아니 채 2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 너가 더 대단한 것 같은데.’
“생각 이상으로 힘들더라. 그리고 또 알게 된 점도 있고.”
“안 돼! 너무 빨리 초인이 되어서 좋을 게 없다구우!!”
“하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였음 좋았겠더라만.”
카인이 이내 쉼 없이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입을 연다.
“다른 게 아니고 부탁할 게 있어서.”
마니에르와의 자초지종을 설명을 해 주자, 당당한 표정의 카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기! 2시 방향에 원통을 열어봐!”
“응?”
의아했지만, 카인이 시킨 대로 가서 원통을 열자 돌돌 말린 서류가 눈에 들어온다.
“이게 뭐야?”
“펼쳐 봐 봐!”
설마하는 생각과 함께 서류를 열어보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게 뭐야.”
말 그대로 마니에르의 일생이 적혀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까지도 적힌 세세한 자료였다.
“너가 대련한 사람은 다 알아 봤지! 직접 가서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쉬울 뿐인걸.”
“카인. 진짜 내가 여자였으면 너랑 결혼했을 거야! 고마워!! 또 연락할게! 량이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야! 야!! 범아아아!!! 나 혼자라 심심해애애애!”
그대로 도망쳐서 나왔다. 카인의 비명 어린 외침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하튼, 또 어떻게 여기서는 못 끄도록 만들어 놔 가지고. 쯧.’
그것도 모르고 처음에는 카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서류를 들고 그대로 올라가 침대에 걸터앉아서 한 장, 한 장 읽어가기 시작했다.
서류가 팔락이는 소리가 끝나가고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량이한테도 연락해 봐야겠네.”
‘이제는 끄고 돌아갔겠지?’
조심스럽게 다시 숨겨진 방으로 향했지만, 이내 한숨이 흘러나온다.
“야! 야!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
카인은 아직도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
결국, 카인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량이도 포함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흠. 확실히 애매하기는 한데, 오히려 잘하면 더 좋을 수도 있는데?”
량이의 판단으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근데, 순수한 열망으로, 그렇게 나한테 온 사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량이의 입이 열리는 것이 보이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아. 순진한 생각이라는 거. 근데 그렇게 급하지는 않자나.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고.”
“하. 진짜. 내가 너 때문에 돌아간다, 돌아가.”
그러면서 잠시 고심에 빠지자 카인이 재빨리 입을 연다.
“그런데 범이 너는 진짜 신기하다. 꼬여도 엄청난 애들만 꼬이네.”
“그게 좋은 거냐! 머리만 아프구만. 넌 잘 진행하고 있어? 노는 거 아니고? 량이가 없다고 신나서 말이야!”
“아니거든! 나도. 나도 가고 싶었다고! 나만 두고, 촌장님도 가고! 진짜!”
아마도 마틴과 카인 그리고 스승님 앞에서는 계속 어린 모습으로 살지 않을까 싶었다.
‘저렇게 찌르면 바로, 바로 반응하는 게 진짜 재밌단 말이지.’
“로사는 어떻게 하고 있어? 그래서.”
“오오~ 이제 관심이 조금 생기셨나 본데!”
마을을 정복했다고 하나, 자신은 무명(武名)을 쌓기 위해 프리 존으로 왔고, 자신의 수하들은 3대대에게 부탁을 해 놓은 상태.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마을에 대한 무력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정한 것도 진짜 생각이 없는 거기는 하다.’
한 마을의 지배자가 생기게 되면 본래 있던 지배자들에게 공표가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것이 정보전. 만일 공백이 생긴다면 사정없이 들어와서 정복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새로운 마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는 것보다, 본래 있던 지배자를 치우고 마을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빨랐다.
‘그나마 카인이 중간에 정보를 느리게 전달되게 하고, 로사가 있기에 다행이었지. 난 무슨 생각이었을까.’
자신이 일을 벌이고, 량이에게 말을 할 때마다 바로 대처를 하지만, 한숨을 쉬던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의 무력에 대한 공백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로사였다. 로사와 그 휘하의 기사단.
‘카시스 가문이 뿌리가 깊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지. 역시, 역사가 있는 가문은 쉽게 볼 게 아니야.’
하나의 가문을 몰살시켰다지만, 그것은 오롯이 자신의 힘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한 것은 거의 없었다. 수호 용병단의 힘이 그만큼 강했을 뿐이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어. 정신 차려야지.’
로사를 따르는 이들 중에는 익스퍼트가 3명이나 있었다. 과연 전쟁의 가문이라고 할 만했다.
‘로사를 따르는 이라고 해도, 결국 모두 카시스 후작의 방관에 의한 것일 뿐이겠지.’
철저히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카시스 후작의 모습이었다. 모든 이들이 로사가 신전을 떠날 때 무슨 압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 했지만, 량과 카인은 달랐다.
‘카시스 후작은 아마 그대로 내비둘 거야. 가주라는 직위에 있어서는 적자생존(適者生存), 강자독식(强者獨食)을 누구보다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로사에게 지원을 해주었다. 카인이 아니었다면 모를 은밀한 지원을.
‘지금 로사의 휘하에 있는 익스퍼트 중 하나는 카시스 후작의 보이지 않는 검 중 하나야. 아마 판단하고 보고하는 역할이겠지.’
참 삭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자식에게 철저하다. 언제나 시험받는 자식들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카인의 말에 도리어 대단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전쟁의 가문. 카시스 가문이 지금껏 천년 왕국 시절부터 살아 남은 비결이니까. 아마 로사도 알고, 대공자도 알고 있을걸?’
역사가 있는 가문은 그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는 것이었다.
10년, 100년을 가는 가문이 아니라 그 역사가 1,000년이 되어가는 가문이란.
그 위대함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로사는 전생에 그런 가문을 그대로 집어삼킨 거였지.’
어떻게 로사가 왕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지 새로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이어지고 있던 상념이 카인의 말에 끊어졌다.
“로사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던데? 사람들 위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
‘그렇겠지. 전생에서 일국의 전군(全軍)을 이끌었던 카리스마가 어딜 가겠어.’
“아마 장악은 대부분 끝난 거 같아. 심지어 그 검조차도 기사단장으로 인정한 것 같더라.”
“와. 진짜 대단한데?”
“로사가 고맙다고 전해 달라더라.”
“아냐. 당연히 할 수 있는 데로 다 해야지.”
“그래도 3대대에게 훈련을, 그것도 수전과 해전을 배우는 경험은 누구도 못할 일이니까.”
“그래서. 진행 중인 건?”
“거의 다 준비되었어. 아마 3개월이면 될 것 같은데? 넌 되겠어?”
그 말에 그저 미소를 보여줄 뿐이었다. 3개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때 입을 열지 않던 량이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잘 들어…”
량의 설명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집어넣기 시작했다.
별채로 다시 마니에르를 불러내었다. 기다리고 있다는 듯 찾아온 마니에르.
처음에는 흥분하고 기대되는 표정으로 왔지만, 이어지는 말에 표정이 달라진다.
“마니에르. 아니, 진나 황자라고 불러야 하나요.”
마니에르의 표정이 굳는다. 순간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간 듯한 착각이 든다.
“나오시죠. 거기에서 분위기만 잡지 말고.”
그 말에 마니에르의 그림자가 늘어나더니 어느새 사람이 되어 옆에 섰다.
순식간에 휘둘러지는 도. 자신의 뒤에서 튀어나오던 한 사람이 튕겨져 나간다.
“적당히 하시죠. 저도 이번에는 사정을 고려해서 죽이지는 않았으니.”
“넌. 누구지? 형은 아니겠고, 설마 그 썅년이 보낸 사람이냐?”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했다. 싸늘함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